집자 성교서는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 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 끝에 집대성한 것이다. [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변이나 방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 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獎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唐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 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워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이라 구분해 부른다.
王羲之(303—361) ◈ 唐代 僧 懷仁(회인) 集字. 三藏 聖敎序.
王羲之集字聖敎序 (왕의지 집자성교서)
大唐三 藏聖敎 대당삼 장성교
序太宗 文皇帝 서태종 문황제
製弘福 寺沙門 제홍복 사사문
懷仁集 晉右將 회인집 진우장
軍王羲 之書 군왕희 지서
蓋聞二 儀有像 개문이 의유상
顯覆載 以含生 현복재 이함생
四時無 形潛寒 사시무 형잠한
暑以化 物是以 서이화 물시이
窺天鑑 地庸愚 규천감 지용우
皆識其 端明陰 개식기 단명음
洞陽賢 哲罕窮 동양현 철한궁
其數然 而天地 기수연 이천지
苞乎陰 陽而易 포호음 양이역
識者以 其有像 식자이 기유상
也陰陽 處乎天 야음양 처호천
地而難 窮者以 지이난 궁자이
其無形 也故知 기무형 야고지
像顯可 徵雖愚 상현가 징수우
不惑形 潛莫覩 불혹형 담막도
在智猶 迷況乎 재지유 미황호
佛道崇 虛乘幽 불도숭 허승유
控寂弘 濟萬品 공적홍 제만품
典御十 方擧威 전어십 방거위
靈而無 上抑神 령이무 상억신
力而無 下大之 력이무 하대지
則彌於 宇宙細 칙미어 우주세
之則攝 於豪釐 지칙섭 어호리
無滅無 生歷天 무멸무 생력천
劫而不 古若隱 겁이불 고약은
若顯運 白福而 약현운 백복이
長今妙 道凝玄 장금묘 도응현
遵之莫 知其際 준지막 지기제
法流湛 寂읍之 법류담 적읍지
莫測其 源故知 막측기 원고지
蠢蠢凡 愚區區 준준범 우구구
庸鄙投 其旨趣 용비투 기지취
能無疑 或者哉 능무의 혹자재
然則大 敎之興 연칙대 교지흥
基乎西 土騰漢 기호서 토등한
庭而皎 夢照東 정이교 몽조동
域而流 慈昔者 역이류 자석자
分形分 跡之時 분형분 적지시
言未馳 而成化 언미치 이성화
當常現 常之世 당상현 상지세
民仰德 而知遵 민앙덕 이지준
及乎晦 影歸眞 급호회 영귀진
遷儀越 世金容 천의월 세금용
掩色不 鏡三千 엄색불 경삼천
之光麗 象開圖 지광려 상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