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전도서 9:11~18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벌써 5월이 되었습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어 농가에서는 매우 바쁜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중기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관예맥(觀刈麥)’에서 5월의 바쁜 농촌 생활을 잘 묘사하였습니다.
田家少閑月 五月人倍忙(전가소한월 오월인배망)
농가에 한가한 달은 드물지만, 오월에는 사람들이 곱절이나 바쁘다.
농사일이 아닌 현대의 삶도 5월은 바쁘게 지나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달이라 이리저리 챙길 것이 많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아울러 우리 교단에서는 신학교 주일로 지키기도 하는 날입니다. 다음 세대를 잘 가르치고 세우는 것이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라는 취지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후세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거창고등학교는 경남 거창에 있는 명문 사립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학교의 주인은 교사도 학생도 동문도 아닌 ‘설립 이념’이라고 말하는 학교입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이 학교는 설립 이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유신 시대, 서슬 퍼렇던 5공화국 시기에 이 학교는 정부로부터 이런저런 압력에 시달릴 때, 설립 이념을 훼손해야 한다면 차라리 학교 문을 닫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는 비장하게 대처했습니다. 이 학교가 내세우는 교육 목표는 이것입니다.
-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고귀한 인격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 인간의 존재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
- 이 세상에는 ‘나’만큼 귀한 ‘너’가 살고 있다.
- ‘너’라는 존재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나의 소중한 이웃이다.
-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생명을 중시하는 신앙 교육, 인간 교육, 지식 교육을 교육 목표로 삼는다.
뭔가 다르지요? 필요 이상으로 이 학교를 칭찬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교육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한 요인이 되고 있는 시기에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한 번쯤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다 피곤합니다. 밤늦은 시간, 학원버스들이 줄지어 주차하여 도로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오는 학생들은 무척 지쳐 있고, 버스를 탄 학생들이 멍하니 창문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슬프게도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또 참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은 이제 다양한 생각이나 관점을 갖도록 돕기보다는 정답을 찾아내는 방법에 치우쳐 있고, 그 결과 학생들의 인성과 공동체성은 파괴되기 쉽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성적이 좋지 못한 학생들은 스스로 무능력자로 인식하게 되고, 이런 일을 막아줄 묘책으로 사람들은 사교육 시장에 더욱 매달리고 있습니다. 사실 공교육은 이미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교육체제에서 12년간 교육을 받고 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면 암담해집니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학업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고 대신에 봉사활동을 하거나 특기나 적성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면 한 개인의 인격 형성이나 창의성 발달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청소년기의 학생들은 인문학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인문’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무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을 ‘文史哲’이라고 하지요?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 공부는 당연히 평생 해야 하는 것이지만, 특히나 감수성이 많은 청소년기에는 더욱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삶의 질을 보다 넓게 그리고 보다 깊게 살기 위해서 인문학 공부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금 학생들은 그럴 형편이 못 되니 안타깝습니다.
서울에 사는 성인들 가운데 28%는 지난 일 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안 읽었다고 통계는 말합니다. 자꾸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지향해야 할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지혜(sophia)입니다. 지혜란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삶을 실천해내기 위해 자기의 행위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교육은 어떤 기능인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참다운 사람을 키우기 위한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은 이런 길에서 너무 일탈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남보다 앞서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늘 바쁩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일합니다. 일의 보람이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느긋하게 지내는 법을 잊은 사람, 해야 할 일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고, 그들의 깊은 요구에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응답할 줄 모른다는 것, 누군가의 속 깊은 신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하는 것, 바로 이것이 타락의 징조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것들이 우리 삶에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좋은 학교를 다녔다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다 행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것을 다 손에 넣고도 얼굴에 독살이 박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수줍은 듯이 웃고 있는 페루와 티베트 소년들,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시골 농부의 사진을 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울울할 때마다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하늘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평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늘은 그처럼 천진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나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느낄 수 있을까? 과연 나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이 평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과연 나의 표정 속에서 사람들이 저 푸른 하늘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을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말합니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11~12)
이것은 물론 우리의 상식을 비튼 말입니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늘’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빠름과 용기와 지혜와 총명과 학식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삶에 유용한 것들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손에 넣어야 할 것들이기도 합니다. 전도자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유한성이라는 지평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일 겁니다. 차를 타고 시속 100km로 질주하는 사람은 빠릅니다. 그러나 차로 5분이면 갈 거리를 한나절 내내 오체투지로 나아가는 이들은 느림보도 그런 느림보가 없습니다. 빠르기로 비교한다면야 온몸을 달아오른 아스팔트 바닥에 대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참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더 느린 것일까요? 그들이 한심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에 그것은 단순하게 비교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동양의 옛 현인은 “크게 곧음은 굽은 것 같고, 크게 교묘함은 서툰 것 같고, 크게 말 잘함은 말더듬이 같다”(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老子, 45章)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기독교적으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대직약굴-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5:14)
대교약졸-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고전3:18)
대변약눌-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문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적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높아지기 위한 공부, 남보다 앞서기 위한 공부에는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마음을 맑고 건강하게 하는 공부에는 시간도 물질도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척박한 삶의 내력입니다. 유대인 랍비이자 철학자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희랍인들은 이해하기 위하여 배웠다. 히브리인들은 공경하기 위하여 배웠다. 현대인들은 사용하기 위하여 배운다”(『누가 사람인가』, 종로서적, 201쪽)고 말합니다. 우리가 써먹기 위한 배움에 집중할 때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헤셀은 말합니다.
“직장도 있고 성공할 기회도 있고 위안도 있고 안정도 있다. 그러나 고양(高揚)이 없고 자기 몸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에 대한 감각이 없고 끊임없는 통찰이 없고 동경(憧憬)의 경험이 없고 가장 귀중한 것과의 만남이 없다.”(같은 책, 203쪽)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교육의 현주소입니다. 그래도 그게 현실 아니냐며 체념하며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충북 단양에서 예수살이 공동체인 <산 위의 마을>을 이끌고 있는 박기호 신부님의 글을 읽으며 참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기억이 있습니다. 산 위의 마을에는 4명의 중고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연초에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심각한 제안을 했습니다.
“금 년에는 휴학하고 집에서 농사짓자. 공부 안 해도 된다. 놀면서 부모님들 일손을 돕자. 1년씩 놀게 되면 남보다 뒤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라. 대학 가려고 재수 삼수도 기꺼이 하지. 2~3년 백수로 사는 건 흔하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1년은 엄청 소중해. 금 년 한 해는 너희들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소중한 시기일 수도 있다. ‘부모님은 무슨 생각에서 도시 생활을 버리고 공동체를 선택하셨나?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이런 산촌 오지까지 데려왔을까?’ 그 이유를 묻고 깨치거라. 학교는 다시 가면 된다.”
그 제안에 따라 아이들은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오전에는 책 읽고 오후에는 어른들 곁에서 일을 하는데 그 모양새가 가관이었습니다. 좀 쉬운 일을 찾느라 뺀질대고, 손에 흙이 묻을세라 장갑은 두 개씩 겹쳐 끼고, 옷에 묻은 흙 털어내는 데 한 시간, 물 가지러 간다 한 시간, 심부름 보내면 한 시간, 분명히 손에 들고 나갔던 농기구는 어디다 두었는지 돌아올 땐 빈손이기 일쑤였습니다. 그 광경이 눈에 잡힐 듯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은 20kg짜리 퇴비 포대를 어깨에 메고 밭고랑 사이로 걷기도 잘하고, 무엇보다 예의염치가 생겼습니다. 어른이 무거운 걸 들고 오면 달려가 받을 줄도 알고, 새참 때면 감자 한 알, 물 한 컵이라도 어른 먼저 드시게 합니다. 동생들도 챙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말합니다. “농사는 엉성해도 자식 농사는 풍작이었다.” 결국 교육이란 삶의 본질적인 가치와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남보다 총명하고, 모두가 남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고 하는 세상에서 이런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이 어쩌면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일 수 있음을 짐작해 봅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 뒤에 오는 세대에게 이런 교육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제대로 사람답게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런 우리의 낭만적 태도를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겪는 일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민이 많지 않은 성읍이 힘센 왕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포위된 성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 어느 누구도 성을 구할 방도를 찾지 못하던 그때,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한 사람이 나서서 성을 구했습니다. 전투를 통해서인지, 협상을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가난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외경인 집회서는 이런 현실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부자가 헛발을 디디면 친구들에게 부축을 받지만 궁핍한 이가 넘어지면 친구들에게 걷어차인다. 부자가 휘청거리면 많은 사람들이 도우려 하고 그가 허튼소리를 하는 데도 그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궁핍한 이가 휘청거리면 그를 꾸짖고 지각 있는 말을 해도 그에게 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집회서13:21~22)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습이 아닙니까? 위급한 순간이 아니면 가난한 사람의 지혜는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학벌이 좋지 않은 사람의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현실을 알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부자가 되려 하고, 명문 학교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전도자는 “어리석은 통치자의 고함치는 명령보다는 차라리 지혜로운 사람의 조용한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경고도 잊지 않습니다.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다.” 세상 참 요지경입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선한 것들을 어리석은 죄인 하나가 순식간에 망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선한 일을 포기해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위험이 있음에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이들의 조용한 말이 경청 되는 세상입니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도 소중하지만,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더 존중받는 세상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목표가 있다면 평화와 공존을 자기 생의 길로 삼는 사람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경쟁에서는 다소 밀리더라도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데는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조기 교육에 대한 광풍이 불고 있는 세상에서 이런 우리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귀에 거의 들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기울인 노력을 헛것으로 돌리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헛수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선한 일들은 무효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이 매우 열악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갈 시대는 더욱 암담하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시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