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불교명상수행에서 고통의 치유
3.선(禪)수행
선(禪)은 범어로는 드야나(dhyana)인데, 여기서 음역인 선나(禪那)에서 나를 빼서, '고요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인도에서의 선은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지만, 중국에서의 선은 본질에 대한 깨우침을 뜻한다. 선(禪)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써 문자를 통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르켜서 자성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선의 기원과 선의 특징을 붓다와 마하가섭의 염화미소 일화를 통해서 통찰할 수 있다.
"어느 날, 석가모니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주위엔 꽃들이 어지러이 피어 있었다. 설법을 끝내면서 석가는 문득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려 보였다. 거기에 모인 천이백 명의 제자들은 뜻밖의 행동에 놀라서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러나 이때 마하가섭만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여기서 붓다는 "궁극의 진리로 들어가는 비법을 알고 있는데, 이것은 말로 전할 수도, 경전 말고 따로 전할 수밖에 없다"라 하면서 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선은 주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본래 불성이 있는데, 이 불성을 봄으로써 부처가 되는 견성성불을 선의 특성으로 보고, 이 과정을 스승과 함께한다.
선(禪)수행에는 간화선, 묵조선, 염불선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간화선(看話禪)은 한국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화두'와 '공안'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고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김방룡은 그의 논문에서 간화선이란 스승이 화두를 매개로 하여서 제자를 의심에 빠지도록 하고, 제자는 '의심'에 몰입하고 분별작용을 타파하여서 자신의 본래 성품인 불성을 자각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스승은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할 뿐, 결국 스스로가 참구하고 본성을 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진하고 정진해야 한다. 화두를 드는 것은 화두를 그대로 간파하여서 어떠한 의심도 없을 정도로 자신이 화두 그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화두참구를 하기 위해서는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의 자세를 가지고 믿고, 끊임없이 의심을 해야 한다.
'화두'의 예시로 선사들과의 선문답속에서 그 화두를 살펴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공안에는 대략 1700여개가 있는데 몇 가지 예시중에 하나는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에 대해서 "마른 똥 막대기이다!"라고 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문이 들어서 계속해서 "왜 부처가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된다. 또다른 예로는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조주선사는 "없다"라고 답한다. 그렇게 되면 붓다는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어째서 개에서는 불성이 없다 하였는가?"라는 의심을 가지고 정진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날뛰고, 세상의 고통 속에 빠져있을 때, 화두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우리의 삿된 견해들 즉, 분별하고 평가하는 마음속에서 벗어나게 한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전통적인 화두 참구의 방법이 현대의 흐름과는 맞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송영숙은 현대의 바쁘고 물질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가지고 계속 화두를 드는 것은 힘들다고 하였다. 따라서 보다 현대인들의 일상속에서 도움이 되고, 화두를 통해서 마음의 안정 그리고 고통을 덜 수 있는 맞는 화두를 찾아야 한다고 여겨서 사람들이 고통받거나, 삶에 있어서 필요한 질문으로 서광스님의 저서인 『치유하는 유식읽기』에서 제시한 질문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지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가? ', "이것이 최선의 방법인가?"와 같은 질문이 있다.
인경스님은 불교에서 핵심 가르침인 삼법인(三法印)을 통해서 화두를 끌어내었다. 먼저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되어있다. 제행무상은 모든 것은 무상하여서 환경과 조건에 따라 변화할 뿐, 고정된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제법무아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고정되고 절대적인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에 대해서 설명하고 열반적정은 결국 주체와 대상을 떠난 그 자체의 성품인 깨달음, 해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삼법인에서부터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인 화두를 끌어낼 수 있는데, "모든 것이 변화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변화속에서 '나'라고 불리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데, 지금 말하고, 옷 입고, 움직이는 자는 누구인가?", "무엇이 불성인가?"와 같은 화두를 볼 수 있다.
우리 안에 욕심과 집착이 있으면 공성에 대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는 끊임없이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간화선을 통해서 일상생활속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외부세계와 생각에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또한 화두는 일상의 습관화 되어있는 우리의 고정된 관념들을 깬다. 물론 계속해서 화두를 들다 보면 어느 순간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우리의 익숙하고 편안한 생각과 행동을 무너뜨려준다.
성승연과 박성현의 「간화선 집중수행 체험의 질적 분석」이라는 연구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러 온 사람들을 바탕으로 사전과 사후의 변화에 대해서 조사했다. 간화선을 하고 난 후에 신체적으로 몸도 가벼워지고 잠을 잘 자기도 하였으며, 정신적으로는 안정감이 생기고 삶에 대한 수용과 인식의 변화가 생기면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고 한다.
참가자들에게 화두를 드는 것은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3가지 답변이 나왔다 하였다. 첫 번째는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을 해주었고, 그 다음에는 의심과 갑갑함을 증폭시켜주어서 최대치가 지나게 되어서 이 갑갑함이 풀리면서 엄청난 환희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마음의 분별심을 끊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가 아직은 낯설고 시간도 오래 걸리며 어렵지만 정신적 뿐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준다는 점에 주목하면 좋을 듯하다.
이처럼 간화선수행은 끊임없는 번뇌와 망상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는 우리들이 인습적이고 암묵적으로 지니고 있는 온갖 사념과 사고방식을 단칼에 쳐내어 한 생각 이전으로 이끌어가는 수행법이다.
<불교수행에서 고통의 의미 및 치유에 관한 고찰/ 이혜인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