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모냐 증오냐.
나라냐 정인이냐.
이성이냐 감정이냐.
그 답을 택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죽었느냐.
환 향 녀 (還 鄕 女)
<037>
달빛이 감싸 안는 층층 기와. 잉어들이 잠들어 있는 파장 없는 연못의 고아한 자태.
짙은 어둠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꽃들은 꾸벅꾸벅 졸며 꽃잎을 떨군다.
여름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고막 안에 흔들리고 높다라한 담장 너머 고개를 돌리자면
월궁항아가 쉬어갈 만큼 쾌적한 태강전이 그렇게 어두둑한 밤을 맞이했다.
강단진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대문엔 튼실한 흑마(黑馬)가 기둥에 묶여져 있었다.
태강전의 내부는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환했다.
안에서 소근소근 말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지만 엿듣는 이는 없었다.
시각이 시각인지라 황궁 전체가 고요한 잠에 빠져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독이 빛나는 건 갈치 비늘처럼 번득이는 병사들의 눈동자 뿐.
주변의 긴장감조차 밤만의 대기(大氣) 속으로 사라졌다.
[딸그락-]
태강전 안에서 찻잔이 소리나게 놓여지는 효과음이 울려퍼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
장군은 고개를 수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건과를 뉘우쳤다.
월운은 읽기 힘든 표정으로 내려놓은 찻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 월운의 반응이 더욱 마음에 걸리는 듯 장군이 말을 이었다.
“소인의 불충입니다. 용서하소서.”
「한 명은 국경을 넘었으나, 한 명은 화살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황태자비가 포상금을 걸어 병사들이 하도 극성이라 제 힘으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이 무희의 수급을 증거로 황태자비에게 바치려던 것은 막았습니다만,
보는 눈이 많은지라 거두진 못했고…….
국경에 버리고 왔습니다. 송구합니다.」
……어쩔 수 없지. 생사(生死)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 되는 게 아니니까.
모든 것이 천신(天神)의 뜻이니까.
하지만……
월운의 두 눈이 감겼다. 손가락이 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니다. 한 명이라도 산 게 다행이지.”
그는 옷고운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되도록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군을 얼굴 닳도록 응시했다.
월운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그제서야 든 장군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이 일은 비밀로 하거라. 특히 답응에겐.”
그녀가 알아선 안돼.
무뚝뚝한 월운의 얼굴은 보는 이를 움츠러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거룩한 제위(帝威).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한 시퍄 장군에게 늘씬한 호를 그렸다.
그러나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웃음기가 싹 가셨다.
월운은 다시 씁쓸한 웃음을 피식 흘렸다.
찻잔 안의 따뜻한 차 안에 고스란히 비친 자신의 고독이 보였다.
독한 술이 마시고 싶다.
그가 집게손가락으로 찻잔을 툭 건들이고 내뱉었다.
“답응에겐 둘 다 살아남아 국경을 넘었다고 전할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실담하지 말아줬음하군.”
“……명심하겠습니다. 송구합니다, 태자 마마.”
죄책감 업은 채 장군이 착잡히 읊조렸다.
비랑 일에 이어 그녀에게 숨겨야 하는 비밀이 생겼다는 괴로움에 월운은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눈을 깜빡였다.
슬픔의 열기 때문에 자욱한 안개 낀 듯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아무리 침착해지려 용을 써봐도 헛수고였다.
그의 안타까운 노력을 깨달은 장군은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섰다.
월운은 필수 예를 갖추고 돌아서는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세한 곡선이 자리잡았다.
“식솔들의 보안을 위해 장군 집에 호위무사들을 배치시켜두었다.
장군이 얼굴을 내비치면 알아서들 물러갈 것이니 개념치 말거라.”
“………마마……”
“약조는 약조다.
필요하다면 호위무사들을 다시 보내줄태니 답응에게 비밀을 지켜다오.
이건 부탁이다. 사내 대 사내로써.”
장군이 월운을 뒤돌아보았다.
짐짓 붉어진 눈시울을 고개를 돌림으로써 감춘 월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숨을 내쉰 시퍄 장군이 나가자 월운은 시녀를 불러들였다.
겸손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시녀를 쳐다도 안 본체 그가 차갑게 입을 떼었다.
“술을 가져오너라. 독할 수록 좋다.”
은비가 살아있을 무렵엔 월운이 어쩔 수 없는 술고래였었기에 시녀는 전혀
놀라움 없이 방을 나갔다.
월운은 비우지 않은 찻잔을 탁자 모서리로 치웠다.
하녀는 능숙하게 고급스러운 금호(金壺)와 정갈한 안주상을 내왔다.
제법 낯이 익은 하녀가 다기주전자와 찻잔을 가지고 처소를 나가자 월운은
주저없이 마개를 뽑아 술병 통째로 들이켰다.
미치도록 취해버리고 싶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감칠맛 나는 술. 금새 궁굽어진 술병을 내던지려던 월운은 그만 두었다.
거칠게 앞머리에서부터 턱까지 미간을 쓸어내렸다.
그는 하녀에게 술병을 한 병 더 갖고오라 소리치려다 앙그러진 안주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접시 옆에 가지런히 놓인 젓가락을 매만졌다.
그녀와의 첫날 밤, 그녀가 자신을 부추기며 충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안주도 곁들어 드셔야 보체 상하시지 않습니다.」
“……하하…………”
그는 짭조름한 나물을 접시에서 건져 입에 넣었다.
쫄깃쫄깃한 소득밤 연과와 깨고소한 강정도 한번씩 먹어 보았다.
마치 그녀가 직접 자신의 입에 안주를 넣어주는 것같은 다정한 맛.
거추없게 시작된 그의 웃음은 결국 이유를 알 수 없는 광적인 절소(絶笑)로 번졌다.
그는 주책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젓가락을 내쳤다.
짐작할 수 없는 쓸쓸함과 고통이 합쳐진 광기.
호걸웃고 있는 입과 달리 억지로 휘어져버린 눈가는 맛문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꽈악-]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월운의 주먹이 붉은 자라수포(紫羅繡袍) 식탁보를 꽈악 움켜쥐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하하……하하……………하……”
사지가 멀쩡하면 뭣해. 내 마음이 아프다 이리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곰팡이 슬고 썩을대로 썩어버려서 구멍이 나버렸는데.
겉만 멀쩡하면 뭣해! 네가 날 온전히 돌아봐줘?
……날 온전히 받아들여줘?!
웃음을 억제한 월운이 내관을 크게 불렀다.
후다닥 달려온 내관이 굽실거리듯 고개를 숙였다.
신물 나도록 질리는 대접. 월운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명만을 기다리는 내관을 주시하는 눈빛은 서릿발이 뻗친 듯 냉랭했다.
“답응에게 가겠다. 채비하거라.”
“예, 마마.”
월운은 그녀가 한때 앉았던 마주편 방문객용 의자 등받이를 쓰다듬었다.
그가 처소 문을 나서자 횃불을 든 상거가 자연스레 행차에 동행했다.
생각없이 터덜터덜 걷던 그는 어렴풋이 시야에 밟히는 월영전을 올려다보았다.
달무리가 담긴 연못 중심으로 지어진 월영전은 이름대로 달의 그림자가 밤새 쉬어가는 전(殿)이었다.
그는 고리타분하지 않은 아기자기한 단청과 처소의 자태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입가에서 매끄럽게 흘러렸다.
그의 당도를 고하려는 내관을 제지한 월운은 직접 계단을 올랐다.
처소 앞을 지키고 있던 옹이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떨리는 음성을 내려 옹이가 입을 열려고 하자 월운은 강인한 입술을 열어 선수를 가로챘다.
옹이는 허리를 조아리고 미닫이문을 향하고 있는 월운을 주시했다.
부엉부엉 우는 휴르새의 짙은 눈썹이 까딱였다.
“들어가도 되겠나.”
“……태, 태자 마마………”
시집을 읽으며 감상에 젖어있던 화영이 고개를 들었다.
바깥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필시 월운과 옹이임이라.
그녀는 시집을 탁 닫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낭랑한 목소리엔 고민이 휩싸여 있었다.
“옹아, 뫼시거라.”
“………들어가시지요.”
화영의 순응적인 허락에 옹이는 엎쳐뵈며 길을 터주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간 월운은 일어서 그를 맞이하는 화영의 헬쓱한 미간에
실미적지근하게 허희했다.
그녀가 권하는 의자에 앉자 그녀는 옹이에게 다과를 시켰다.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젓는 월운에 화영은 주춤거리다 명을 거두었다.
월운은 풀로 붙인 듯 입을 옴팡지게 다물고 있었다.
화영은 비보를 듣는다 하여도 식겁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릴 준비를 했다.
멀찌감치 앉은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둡기만 한 월운의 표정에 심장이 발꿈치까지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혹… 예진이와 희아의 행방을 찾으신 겁니까?”
“…………………”
말을 삼가하는 월운에 화영이 얼굴이 초조해졌다.
애마른 그녀의 눈길에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말. 허나 해야만 하는 말.
만약 칼이 사람을 한 번 죽일 수 있다면, 사람의 말은 사람을 두 번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국경을 무사히 넘었다. 둘 다.
둘 다… 무사히 조선으로 귀국했다.”
영혼의 천도를 부르는 초상집 유가족 같던 화영이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월운은 화영이 차를 시키는 것을 내버려 둘걸 하고 후회했다.
누군가가 목에 화로를 지핀 것처럼 후중이 홧홧했다.
그녀가 싱끗벙끗 웃으며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예진이와 희아가 무사히 국경을 통과했습니까?”
“좋아하니 다행이군.”
동문서답하곤 그녀의 눈을 기피하는 월운에게 그녀가 활짝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화영에 그는 안심했다.
그러다 석연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의 무하지증(無何之症)이 재발한듯 심장이 두 배는 빨리 뛰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화영의 명모(明眸)가 무한으로 증폭했다.
심한한 숨소리가 그토록 크게 들릴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화영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월운의 오똑한 콧날에 눈을 내리감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춤을 휘감았다.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피부가 희뿌연 광택을 발했다.
월운은 잠시 그녀의 입술에서 입을 떼고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화영은 왠지 모르게 측은한 그의 음성에 눈을 떴다.
그의 근육 잡힌 등을 끌어안는 그녀의 손길.
그녀의 목에 고개를 묻은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하군………”
‘넌 알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도 한번쯤은 겪었을까?’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 그는 입술을 포갰다.
숨 돌릴 새도 없이 격렬히 퍼부어오는 그에 그녀의 눈이 도로 감겼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당기자 그들이 밀착되었다.
촛불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그는 그녀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그의 속눈썹에 맺힌 눈물의 진주방울 같은 입맞춤을.
“………사랑해………”
「할 말이 있어!」
이틀 전 꿨던 꿈에서 자신이 애타게 부르짖었던 마디가 뇌리를 뒤집어놓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화영은 숨을 가다듬었다.
너무 빨리 뛰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멈출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숨긴 일들을 알게 되더라도……
날…… 용서해줄 수 있을까…?…………’
……용서해줄 수 있을까?
……용서해도…… 되는… 것일까……
***
<눈물과의 다과 타임>
안녕하세요! 눈물냥입니다. 월운과 화영의 로맨스를 위해 쓰는데 오래 걸린 37편. 으윽… (괴로운)
어젯밤 경성스캔들 마지막회를 봤습니다. 해피라서 어찌나 기쁘던지.
왜 시청률이 낮은지 모르겠습니다. 마왕도, 경성스캔들도 너무나 훌륭하고 너무나 재밌고 완벽한 드라마인데
시청률이 지조 있게 거의 한자리수라니 (경성은 마지막 두 회는 10%를 넘었더군요! 아싸~!!!)
-_- 도대체 왜입니까, 왜!!!!!!
한국에 와서 참 행복하답니다. 이것저것 한국 책도 많이 사고 읽을 수 있고... 역시 글실력을 쌓고 하기엔
책을 많이 읽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경성스캔들에 빠져 원작인 경성애사를 읽었는데... 아하핫; 19금이라서 접었습니다-_-;
저번편에 꼬릿말을 달아주신 에치, Sarah♡ 님들. 너무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만약에 환향녀가 완결이 난다면, 완결후기 같은 걸 만들어서 꼬릿말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릴 생각이에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항상 큰 힘을 주시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꾸벅)
그럼 허접작가 눈물냥은 이만 물러가구요,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모두 부디 아주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족하고 미흡한 제 소설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허리 굽혀 감사드립니다 (_ _) )
첫댓글 역시나 재밌어요 ~~ ㅜㅜ 왠지 슬픈 .. 저두 경성스캔들 완전 좋아하는데!! 내일 아침쯤에 스패셜방송 한다던데 시간이 된다면 꼭 챙겨봐야겠죠 ?? ㅎㅎㅎ 정말 지환님과 눈물님 말씀대로 왜 시청률은 지조있게 한자릿수인지 .. 그래도 제 마음속에선 이미 일등이라죠 ~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오, 스폐셜 방송 합니까? 이런, 놓쳤다! (아아아아아악~!) 꼭 다운 받아서 봐야겠네요. 저도 마왕과 경성은 제게 동시에 1등 드라마랍니다^^ 꼬릿말 또다시 감사드리구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반희님!
왜 부족하다 생각하세요~~ ㅋㅋ 정말 재미있어요. 경성 스캔들!! 저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는데 정말 왜!!! 대체 왜!! 한 자리 수인지 정말~!!! 환향녀 빨리 완결보고 싶어요~ ㅋㅋㅋ
정말 재밌다니 ㅠㅠ 정말 감사드립니다. 완결까지 한번 이 악물고 오기로 달려봐야죠!! 저도 경성 폐인 되버렸답니다 ㅠ 아아, 송주 죽었을 땐 정말 눈물바다 ㅠㅠ 송주야, 흑흑... 꼬릿말 진심으로 감사드리구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라님!
휴ㅋㅋ1편부터3시간동안내내읽엇더니눈이뽑힐꺼같은고통이느껴지네요 ㅠㅠㅋㅋ 눈물님두 경성스캔들보시구나ㅜㅜ..애들다 지금은끝낫지만 쩐의전쟁본다고안보던 경성스캔들 ㅠㅠ 아무튼 잘읽구갑니다 ㅠㅠ........
앗 ㅠㅠ 제 소설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ㅠㅠ 제가 엔터를 좀 안 치는 편이라 죄송해요 ㅠㅠ 그러게요. 쩐의 전쟁 때문에 밀린 경성-,- 전 경성이 더 재밌었는데.. 쩐의 전쟁도 재밌긴 재밌었지만(박신양 님의 연기 대단했죠;) 완결이 너무 허무했어요. 꼬릿말 감사드리구요, 애교쟝이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제 전생 편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건가? 후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