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유용원군사세계
6.25 동란 개전 당일 북한군을 패주시키고 추격까지 했던 유일한 부대인 6사단 7연대 1 대대와 단지 포병 화력만으로 적 연대의 공격을 좌절시킨 6사단 직할 16포병 대대의 전공은 국방부 블로그에 수차 포스팅했었다.
이들의 전투는 춘천 전투로만 두루뭉실하게 알려졌지만 춘천 전투는 4개의 전투로 이루어졌다.
7연대 장병들 49년 군장 검사때의 모습
1950년 6월 25일, 16 포병 대대소속 3명의 포병 중대장 중 2명이 서울로 교육 출장을 가 자리를 비운 와중에 김 성 대대장과 중대 부관들이 단결하여 적 연대 병력을 화력만으로 받아쳐 저지 시킨 사농동의 포병 전투가 첫 번째이고,
그 다음날인 6월 26일, 7 보병 연대 1대대가 1.5 킬로미터의 기습 돌격으로 적을 붕괴 시키고 추격까지 한 옥산포 전투가 두 번째이고,
그 다음 날인 27일, 역시 7 보병 연대 1대대가 소양강의 내다리 여울을 도강하던 적 7사단의 중대 병력을 57mm 포와 기관총, 그리고 포병 포들의 장거리 사격으로 궤멸시킨 소양강 전투가 그 세 번째고,
28일 춘천 남방에서 적과 지연전을 치루고 철수한 원창 고개 전투가 네 번째 전투이다 .
춘천시 164 고지. 푸른선이 긴 참호가 파있는 능선이다. 오른쪽에 옥산포가 보인다.
춘천 전투의 특징은 민간인들의 참여가 아주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첫날 사농동 포병 전투와 둘째 날 옥산포 돌격전은 민간 학생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둘째 날 1.5 킬로미터의 기습 돌격을 가해 적을 붕괴 패주 시킨 옥산포 동쪽에는 소양강변에서 북쪽 신동 초등학교까지 평균 높이 100여미터의 능선이 놓여있다.
164 고지 산록에서 촬영한 옥산포 방면- 1대대 용사들은 앞에 보이는 상금 솔밭을 통과하여 돌격했었다.
당시는 키작은 솔밭이었는데 지금은 대단히 크게 자라 보호 받은 솔숲이 되었다.
이 능선은 높은 언덕의 이름을 따서 164고지 능선으로 부른다. 옥산포 전투 때 164고지에는 포병 김 용배 대대장과 16포병 대대 관측 장교가 있었다.
나는 참전 중대장 이 대용 장군과 현재 6사단 7연대장 박 상국 대령, 송 동섭 대위, 그리고 황 한석 춘천 대첩 선양회 회장들과 함께 이 현장을 방문했었다.
길다란 산능선을 따라 참호와 교통호가 구축되어 있었는데 현장에 가보니 60여 년 전에 팠는데도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긴 참호와 교통호가 있었기에 병렬한 1 대대가 광정면에서 불시에 뛰쳐나가 적을 패닉 상태로 몰아 넣어 패주 시킬 수가 있었다.
6.25 동란 당시 언덕형태의 이 산맥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어서 긴 능선에서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와 돌격하는 1 개 대대 병력은 실제보다 열배쯤 많은 사단병력의 기습으로 오해 했을 것이다.
북한군은 5량의 자주포까지 버리고 소양강을 따라 북으로 도주했다. 별다른 저항도 없었다.
[ 이 옥산포 전투를 크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손자병법 구변 편에 배구물역[背丘勿逆]이라는 구절이 있다. 언덕에서 내리치고 공격해오는 적은 그 기세가 강하니 피하라는 말이다. 삼국지에서나 통할 것같은 이 구절이 현대전에서 있었으니 국사 교과서에 특기 할 일이다. 후방 강 건너 봉의산에서 7연대 2대대 부대대장 허 영후 소령이 전투를 끝까지 지켜보았는데 1 대대 장병들이 언덕에서 몰아치는 돌격의 기세가 정말 무서웠다고 했었다.]
항공 촬영한 봉의산 산너머에 소양교와 옥산포 전투장이 보인다.왼쪽에서 흘러내리는 강은 북한강이다.
1대대 돌격을 지휘한 김 용배 대대장은 한국전 중 가장 걸출한 대대장 중의 한 명이었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던 분이었는데 다음 해 1951년 7사단 연대장 재직시 적 포격에 전사했다.
김 용배 장군
지금도 남아 있는 이 긴 진지들은 춘천 시내 각 고등학교(춘천 고, 춘천 사범, 춘천 농고, 춘천 여고, 각 학도 호국단) 학생들이 적침 2 개월 전에 판 것이다.
이 능선의 진지들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진지를 판 학생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여 춘천농고 출신이며 춘천 대첩 선양회장 황 헌석 씨에게 알아 봐 줄 것을 부탁했다.
3월 16일 마침 심한 감기로 한 달 간이나 앓다가 일어난 옥산포 전투 중대장 이 대용 장군과 바람이나 쐬러 오라는 황 회장의 초대로 이 장군을 모시고 춘천으로 향했다.
진지 공사를 했던 인사는 아직 찾지 못했으나 알만한 분들이 서넛 있으니 와서 만나 보라는 말이었다.
황 현석 회장의 아들이 운영하는 삼거리 막국수집의 회동에서 나는 옥산포 능선의 진지 구축 경험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만큼 가치가 있는 분을 뵙게 되었다.
북한 포탄이 난비하는 중에 어린 학생의 몸으로 포탄들을 소양강 이남으로 비상 운반했던 이 윤수 학생이었다. 대한민국 건국회 강원지부 본부장직을 맡고 있다.
춘천 보훈 회관앞에서
왼쪽부터 춘천 대첩 애국 선양회 성 길수 부회장, 황 한석 회장. 이 대용 장군, 맨 오른쪽이 이 윤수 회장
그 분은 1950년 6월 25일 아침부터 침공해오는 북한군을 상대로 포병만으로 전투를 하여 이를 격퇴했던 16 포병 대대의 승리의 바탕에 민간인들이 분투한 수훈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당시 16 포병대대는 사단 직할로서 각 연대에 한 개 중대씩 독립 배치되어 분산되어 있었다.
춘천 방향의 7연대, 양구 방면의 2연대, 원주의 19연대에 배속되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5천발에 가까운 대대 보유 105mm 탄을 저장 할 수 있는 곳은 춘천 봉의산 건너 우두동[사농동 남쪽]에 있는 전 일본인 소유의 제사(製絲) 공장 뿐이었다. 공장은 휴업 중이라 문을 닫아 놓고 있었다.
그 창고와 공장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으니 포병은 후방에 있었고 포탄 창고만 전방에 있는 묘한 상황이 된 것이지만 연대에 무전기 한 대 없었던 가난한 사단 형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포병 대대의 포 사격 훈련 때는 각 대대에 배속 된 3개 포병 중대가 포탄 창고 부근의 사농동에 집결하여 훈련을 할 수밖에 없었다.
6사단이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공교롭게도 6.25 며칠전부터 사단 포병대대는 포탄 창고가 있던 우두동 인근에 집결하여 대대장 김 성 소령의 지휘 하에 훈련 중이어서 적의 침공과 함께 재빠르게 전선에 배치될 수가 있었다.
3개 중대 중에 1 개 중대는 164고지 능선 샘밭 쪽에 배치되었었고 2 개 중대가 164고지 서쪽 사농동에 배치되었는데 2개 중대 10문의 포 중 3문이 고장이 나서 사격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포대라는 명칭보다도 포병 중대라 칭했다.
나중에 샘밭 쪽에 배치 된 중대의 포가 사농동 쪽으로 이동해서 증강되었지만 7문의 포가 중부 전선에 있는 국군의 운명을 모두 짊어지고 분전했던 것이다.
국군이 당시 보유한 105mm 포는 사거리가 7,000야드가 조금 넘는 단거리 포로, 원래 공수용으로 만든 경량 포였다.
M3 105mm 포
그러나 춘천 북방에 배치된 북한군은 사거리가 12,000야드나 되는 122mm포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국군 포 진지를 관측할 최 북단인 신동 초등학교 뒷산에는 이 대용 대위가 방어하는 대대 최전방 고지가 있었는데, 이 고지의 가치를 알아보고 북한군이 두 번의 공격을 가했었지만 모두 격퇴하였다.
북한군은 지도만 보고 122mm 포와 76mm포를 맹목 사격하여 포탄은 옥산포나 사농동은 물론 소양강 건너 춘천 시내에도 낙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 윤수 학생은 당시 춘천 농대 1 학년으로 춘천 시내 고등학교 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된 대한 애국 청년단 소속이었다.
그 분은 6.25가 발발하고 대원들이 비상 소집되어 집합한 것은 상당히 늦은 그날 아침 열 시경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그 것은 늦은 것이 아니었다. 군인이던 이 대용 중대장조차 정복에 장화를 신고 시립 도서관으로 가던 아침 9시경 비상소집을 통보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대용 장군- 1952년 대대장 당시
아침 일찍 하숙집에서 일어났을 때 부터 포탄 소리가 나서 “아하-! 포병들이 열심히 훈련하고 있구나.” 했다는 것이다.
이 대용 대위는 바로 부대로 갔고 그 후 하숙집은 석달 뒤 수복 후에야 찾아 가 볼 수가 있었는데 하숙집은 폭격으로 다 날아가고 황량한 빈 터만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대한 애국 청년단 소속 이 윤수 학생은 비상 집합한 자리에서 경찰의 지시를 받았다. 그 무렵 춘천 농업 고등학교 학생들의 반공의식은 대단히 강했다.
북한 간첩들이 춘천 북방 38선을 침투하여 여러 건의 테러를 저질렀었고 급기야는 사농동 춘농고 건물에 불을 질러 학교 건물 여러 동을 태웠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무척 높았던 것이다. [이 윤수 학생은 춘농고 출신이다.]
경찰은 이들에게 일제 99식 소총 한 정씩을 지급하고 군에 배속되어 싸우라고 지시하고 징발 트럭으로 이동시켰다.
경찰이 지시한대로 군 부대에 찾아 가보니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포병대였다. 학생들은 배치를 원했으나 지휘관은 전투에 나갈 일은 없고 포병들의 지원 업무만 하라고 말했다.
포병들은 연속해서 포탄을 발사했다. 부정확한 적의 포탄도 여기저기 터지고 있었다.
옥산포에서 바라본 164고지
포 사격이 이어지던 중 옆 164고지에 있던 관측 장교가 비명을 지르며 통보해왔다.
“ 전방에 전차 5량 출현!”
“ 뭐 전차?”
승리의 기분에 사기가 충천해서 포 사격을 계속하던 포병들의 사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164 고지 능선 최전방 언덕에 배치되었던 이 대용 중대가 전차를 최초로 발견하였다. 이 대용 중대는 적이 침공 한 직후 25일 오전 트럭으로 이동하여 이 진지에 투입되어 있었다.
배치된지 불과 반시간도 안 되어 북한군의 공격이 있었는데 북한군은 소대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이나 이 대용 중대가 위치한 능선의 전방에 있는 언덕을 점령하려고 시도했었다. 능선의 최전방 언덕은 한 도선 중위[육사 8기]가 지휘하는 1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한 도선 중위는 북한에서 혈혈 단신 월남하여 군에 입문한 장교로서 대단히 용맹하여 나중에 원주 남방 가리파 고개에서 적 장갑차 다섯대를 파괴하는 큰 전공을 세웠으나 옥녀봉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 언젠가는 이 숨겨진 영웅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다.]
이 대용 장군의 CP 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수미터 후방에 무속인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비가 서있다.
이제는 흔적만 남아있는 이 대용 장군의 호를 찾기 위한 랜드마크가 될 수 있어 소개한다
내가 직접 가서 보니 지금은 비록 나무에 가려서 잘 안보이지만 이곳은 사농동에 위치했던 국군의 포진지를 한 눈에 관측할 수 있는 자리였다. 만약 북한군이 이 언덕을 점령했다면 북한군의 반 포대 사격으로 16 포병대대의 활약은 기대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이 대용 장군의 CP 참호 옆 호. 나무가 자라났지만 호의 흔적이 완연하다.
이 대용 장군의 말에 의하면 하사와 사병 한 명의 통신 연락조가 EE8 전화기를 가지고 바로 옆의 호에서 전방 소대와 후방 대대와의 통신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들이 있었던 호로 판단된다.
이 장군의 호는 그 위로 능선 등산길이 통과하여 거의 매몰 되었지만 네 귀퉁이는 아직도 그 흔적을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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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윤수 회장에게서 164고지의 진지 구축에 대해 참 귀중한 추가 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동안 164 고지 능선의 진지는 사단장 김 종오 장군이 민간인들까지 동원해서 팠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침공 전에 육본의 작전국에서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으니 진지를 구축하라고 내려 온 지시에 따라 4-5월 사이에 국군 병사들과 학도 호국단의 학생들이 구축한 것이다.
덧붙여 이 회장의 말씀에 의하면 그 전해인 1949년부터 춘천 학생들이 38선 인근 참호 구축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6 사단이 배치 되기 전의 일이다.]
장병들이 참호를 팠고 학생들 교통호를 팠다는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옥산포 훨씬 북방 춘천호반의 진지들도 방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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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양호한 고지의 진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이 대용 중대는 공격해 오는 북한군을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으로 퇴치해버렸다.
이 대용 중대장이 한숨 돌리고 있는데 점심을 추진하러 왔던 중대 인사계 이 한직 상사[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보고해왔다.
“ 중대장님! 전차 나왔습니다!”
정말로 전방 역골 쪽에서 북한강을 따라 풍뎅이 같은 전차들이 꾸물꾸물대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차가 아니라 북한군 SU-76 자주포였다. 3명 승차의 이 자주포는 옥산포 전투장에 5량이 얼굴을 내밀었다.
76mm SU-76 자주포 3 명이 탑승한다.
이 대용 중대장은 대전차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저 속만 태우고 지켜보다가 박격포와 기관총만으로 후속하는 적병들을 타격하였다.
포병들은 적의 자주포[역시 전차로 오인]가 나타난 이상 우물쭈물대고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즉시 비상이 걸렸고, 제사 공장에 집적되어있는 포탄들을 빨리 옮기는 작업이 최우선 임무가 되었다.
포병들은 물론 학생들도 포탄 운반 작업에 달라 붙었다. 제사 공장에 보관하고 있던 5,000발의 포탄 중에 포격전에서 사용할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소양강 남쪽으로 재빨리 이동시켜야 했다.
16 포병대대의 보급장교로 참전했었던 김 운환 장군은 이 다급했었던 포탄 운반 작업이 릴레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회고했다. 아래는 그 분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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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포전에 필요한 포탄을 제외한 나머지 포탄들은 긴급히 후방으로 철수시켜야 했다. 후방이란 춘천 남방 사범학교를 말한다.
농업학교 호국단, 공장 직공, 우두 국민학교 교사 및 동네 구장들로 구성된 시민 협조대가 손을 걷어 부치고 나섰고, 춘천 농고 농장의 손수레와 생사공장에서 사용하는 손수레 각 10여대가 동원됐다.
시민 봉사대는 3개 조로 조직되었는데 1조가 창고에서 5번 도로까지, 2조가 소양교 북방 500미터 29번 도로 교차점까지, 3조가 다리 건너 소양강 이남까지 릴레이 식으로 운반했다.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마자 38선 바로 접경 지역의 주민들부터 짐을 챙겨서 소양강 건너 춘천 시내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옥산포 일대 주민들에게도 피난 명령이 떨어졌고 대단히 많은 피난민들이 소양교를 향해 밀려 내려왔다.
거리에는 벌써 피난민들의 남행이 시작되고 있었고, 포병들은 주민들에게 사정도 하고 애걸도 하고 때로는 강요도하며 제발 포탄을 소양강 이남까지만 가져 달라고 부탁해가며 부지런히 포탄을 운반했다.
지게는 1-2발, 손수레는 3-4 발, 우마차는 4-5 발, 자동차는 8-10발을 싣고 소양교 건너로 운반해와 소양로에 집적했다.
소양강 남쪽에서는 춘천 사범학교의 학생들이 동원되어 운반해온 포탄을 학교로 날랐으며 징발된 민간 차량들도 함께 이 포탄들을 춘천 사범학교로 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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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포탄 운반에 참여했던 이 윤수 회장의 기억은 위와 조금 다르다. 소양교를 넘어 오는 피난민들은 자신들도 짐을 가득 싣고 있어서 포탄을 운반해 줄 처지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적의 자주포 부대는 국군 포병의 포사격이 심해서 전진을 멈추고 옥산포 민가로 숨어들었다.
[국방부 전사에는 북한군 자주포가 포병 연대장 안 빈과 이 청송 사단장을 싣고 북으로 도주했다고 되어있지만 고지에서 내려다 본 이 대용 장군은 적 자주포 부대가 후퇴하지 않고 옥산포 민가 사이에서 밤을 새웠다는 것이다.]
이날 밤에 김 용배 장군의 지휘로 여러개의 특공조가 조직되어 심야에 북한군의 후방에 은밀히 근접해서 총격을 가하는 기습 특공이 밤새 진행되었다
사거리 11,800미터를 자랑하는 소련제 122mm 포, 국군 포보다 사거리가 두배가 길다.
제사 공장은 북새통이었다. 모든 포차와 전쟁 발발과 동시에 춘천 시내 업체들에게서 징발한 트럭들까지 포탄을 싣고 일부는 전방으로 일부는 춘천 남쪽 춘천 사범 쪽으로 급행하고 있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트럭과 군인들만으로 포탄을 모두 운반해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포탄 운반의 지시를 받은 이 윤수 학생은 바로 인근에 있는 춘천 농고의 리어카가 생각났다.
트럭 중앙에 태극기를 들고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이 이 윤수 학생
사진 하단에 "애국청년단원들은 총들고 의용봉공의 길을 떠났었다"는 글이 써있다.
실습용 퇴비를 운반하기 위해서 약 50개의 리어카를 비치해 둔 것이었는데 그는 즉시 대원들과 일부 군인들을 데리고 춘천 농고로 달려가서 그 중 40대의 리어카를 끌고 나와 포탄들을 싣고 소양교를 넘었다.
북한의 포탄은 계속해서 여기 저기 낙하해서 폭발하고 있었다.
소양교 - 폭격에 손상 된 두 교각간 상판을 수리한 외에 6.25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남쪽에서 옥산포 쪽으로 가며 찍은 사진. 민군 협력의 역사적 상징물임에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포탄이 낙하하는 소양교는 피난민으로 아주 붐볐다. 그러나 젊은 농고생들은 모두 리어카를 끌고 소양교를 건너는데 성공했다.
포탄은 급한대로 소양교 남쪽 100미터 파출소에 내려놓고 다시 제사 공장으로 달려가서 포탄을 적재하고 소양교를 건넜다.
소양교 건너 포탄을 내렸던 파출소가 있던 곳
이렇게 해서 아슬아슬하게 건져낸 포탄만 3,800발이나 되었다. 이 포탄들은 6사단이 낙동강 전선까지 철수하면서 북한군들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주는 사단의 화력이 되었다.
북한군은 다음 날 다시 공격을 시도하여 옥산포로 내려왔다. 하지만 국군 포병의 맹사격과 측면 164고지 능선에서 갑자기 가해진 1 대대의 급습에 놀란 북한군 자주포 승무원들은 모두 자주포를 버리고 도주해 버렸다.
5량 중 단지 한 량의 차장만이 76mm 포탄을 쌓아 놓고 긁어 모은 나무에 불을 지른 후 도망치다가 국군에게 사살당했다. 그 자가 가지고 있던 토카레프 권총은 이 대용 장군이 낙동강 전투와 북진할 때까지 아주 잘 썼다고 한다.
소양교 건너 북쪽에 강변 아파트 단지가 있고 그 뒤에 옛 포탄들이 저장되어 있던 제사 공장이 있었다.
지금은 제사 공장 터에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아슬아슬하게 포탄을 운반해가고 있는 가운데 소양교 다리 교각에 공병들이 폭파 장치를 한다고 분주히 오갔다. 잠시 후 폭약 설치가 완벽하게 다 끝났지만 김 종오 사단장은 포병 대대장 김 성 소령의 건의대로 반격에 대비하여 폭파를 취소하였다.
이 윤수 회장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군은 다리를 폭파하는 대신 다리 위에 폐차 등 여러 장애물을 가져다가 적 전차의 전진을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28일 적 T-34 전차들은 별다르게 제지를 당하지 않고 다리를 돌파해 버렸다.
소양교를 건너 남쪽으로 본 소양강 남안 - 소양강 전투를 전개한 7연대 1 대대가 배치 되었던 강안으로 짐작된다.
57mm 포- 6.25 동란 중 57mm 포가 가장 큰 활약을 한 전투는 6.27 내다리 여울을 도강하려던 북한군 정예 7사단 전위 중대를섬멸한 소양강 전투다. 두 문의 57mm 포가 각 100여발 가까이 발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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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중에 6사단 7연대의 간부들처럼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한 간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평에 배치된 3연대 중대장 중에 6.25 당일 야간에 부하들을 내동댕이치고 마누라와 같이 쌀 60가마를 싣고 부산으로 내뺀 H모 중대장이 있었다. [한국공식 전사에 이 탈영 장교의 실명이 그대로 소개되어 있다.]
임 부택 연대장이 헌병을 보내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 억지 맹장 수술을 하고 피해 있다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서 살아 남았었다.
그는 요행히 살아남아 나중에 대령까지 되었지만 장군 진급 심사 때 전선 이탈 범죄가 불거지는 바람에 예편했었다. 국군 공식 전사에도 그 실명이 그대로 나오는 이 도망 장교의 이야기를 아래 '아!6.25 블로그'에 소개 했었다.
http://koreanwar60.tistory.com/370
이 회장도 잘 알고 지냈다는 그 사람은 대령 때 춘천의 모 공병 여단장을 했었다는데 공병으로 전과했으니 자신의 비겁한 과거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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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단이 비록 육본의 지시에 의해서 철수하기는 했지만 동락리 전투나 낙동강 전투 그리고 영천 회전 등에서 계속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사단의 전투력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이렇게 전투 자산을 모두 챙겨서 질서 있게 퇴각 했었기 때문이었다.
7연대 장병들은 무기뿐만 아니라 쌀과 휘발유까지도 모두 확보하는 치밀한 철수 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했던 낙동강 전선까지 배고파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서부 전선 수도 방어 전투에 투입되었던 국군 사단들이 북한군에게 궤멸당한 것은 잘못된 사수 집착의 작전 지휘와 한강 철교 폭파로 대부분의 장비를 한강 이북에 유기하고 철수했었기 때문이다.
주공 방향에서 최대의 피해를 입은 7사단은 단지 기관총 4문만 가지고 한강을 건너야 했었다.
만약 이들 국군 사단들이 6사단처럼 장비를 제대로 챙기고 후퇴했었더라면 북한군은 국군의 어느 부대에게든 간에, 서울 대전 사이 어디에서든지 춘천과 같은 대패를 한 번쯤을 맛보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춘천은 국가와 민족의 호국 역사에서 고려 때부터 유독 뛰어난 민군 일치의 전투력을 보여 왔었다.
몽골의 고려 침공때 안찰사 박 학기와 문 학이 지휘하는 성의 군민은 물이 떨어지자 마소를 죽여 그 피를 마셔가며 저항했고, 식량과 시석(矢石 ; 화석과 돌)이 떨어지자 남은 600명의 병력으로 최후의 돌격을 시도하여 남김없이 전멸했다. 이들을 섬멸하고 성에 난입한 몽골군은 남은 민간인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렸다.
그 전통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번에 춘천 대첩 선양회 어르신들을 뵌 자리에서 춘천에도 작은 전쟁 기념관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는 분이 있었다. 정말 내가 춘천을 오가며 생각하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 하와이에 가보니 와이키키 해변에도 그곳에 오래 동안 주둔했었던 한 공병대대의 기념관이 있었다. 작은 박물관이지만 전시물들이 아주 알찼었다.
대몽 항쟁의 성지 봉의산[춘주성]의 유적지와 학생들이 공들여 판 164고지 능선의 진지들, 그리고 소양교와 내다리 여울 등 많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지역이니 만큼 춘천에 작은 전쟁 기념관 정도는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끝.//
첫댓글 큰감동을 느끼네요.대룡산자락의 거두리에 처가집이 있어서 춘천지구 전투는 관심있게 접했지만 이런실화는 참으로 대단한 기록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