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산조
대금으로 연주하도록 짜여진 산조. 산조는 판소리에 쓰이는 장단(長短)과 선율로 짜되 느린장단에서 빠른 장단순으로 4∼6개의 악장(樂章)을 구성하는 음악형식이다.
산조대금으로 시나위를 연주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도(珍島) 출신의 젓대명인 박종기(朴鍾基)가 대금산조를 처음 짰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대금산조가 나온 지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 뒤로 남원(南原) 출신의 젓대명인 강백천(姜白川)도 대금산조를 짰다.
박종기 대금산조는 한주환(韓周煥)에게 이어졌으나 이를 이은 명인은 없으며,
강백천이 살았을 때 그의 대금산조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강백천 대금산조는 느린 장단인 진양, 보통 빠른 장단인 중모리, 좀 빠른 중중모리, 빠른 장단인 자진모리로 악장이 구성되어 있다.
각 악장은 화평정대(和平正大)한 느낌을 주는 우조(羽調)와 슬픈 느낌을 주는 계면조(界面調)로 되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는 크게 `소리더늠 산조'와 `시나위더늠 산조'로 나눈다.
오늘날 산조의 유파(流派)는 한주환류, 강백천류, 한범수류, 편재준류, 이생강류, 서용석류가 있다. 그중 자주 연주되는 곡은 한범수류, 강백천류, 이생강류, 서용석류, 원장현류 등이다.
대금산조의 시조로 꼽히는 박종기는 대금으로 새소리를 내어 산 속의 새들을 불러 들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고 대금산조의 중시조 한주환은 대금 한 곡조로 만좌중을 울리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것처럼 대금은 슬프고 화려하고 장쾌한 음색으로 만인을 사로잡는 악기이다.
대금산조는 박종기의 산조를 이어받은 한주환이 있고 이외에 김용선, 강백천, 편재준, 김광식, 한범수류의 산조가 연주되고있다.
이생강 서용석 원장현, 세 명인의 연배와 공력은 엇비슷하지만 성음은 아주 다르다.
헛김 하나 새지 않는 맑은 소리와 몰아가는 듯한 빠른 주법이 이생강의 장기라면
서용석의 소리는 정통 남도음악다운 깊이와 호소력이 일품이고,
무대에 따라 신선하고도 창조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원장현의 소리 역시 높이를 견주기 어려운 국보급 보물이다.
한주환(韓周煥) (1904~1966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1966년 별세
한일섭의 부인인 남해성(南海星)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주환은 한일섭의 조카뻘 되는 가까운 친척이며 중년에 여러 해 동안은 협율사 단체를 같이 수행하였는데 그 때에 작곡 능력이 뛰어난 한일섭은 기묘한 가락이 떠오르면 한주환에게 구음으로 일러주었고 한주환은 이것을 그의 대금산조에 얹어 불었다는 것이 다 <문화재연구소 [판소리 유파] 남연화 조>.
어쨌든 한주환은 그의 음악적 역량을 발휘하여 한주환 류 대금산조를 완성했고, 그것이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대금산조들의 모체가 되고 있어 음악사에 길이 공적이 남겠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기량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갖지도 못하고 저승으로 가버린 것이다.
박종기의 화려한 역사의 그늘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명인 한주환.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대금산조가 한주환 바디이거나 한주환 바디의 영향 아래 짜여진 것이라는 것, 그리고 한주환이 박종기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고 전해지지만, 한주환이 남긴 자료에 나타난 한주환 대금산조 바디와 유성기 음반에 담기어 있는 박종기 대금산조 바디를 견주어 볼 때 한주환 대금산조의 개성적 특성이 의외로 대단하다는 것, 한주환이 남긴 몇몇 자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대단한 연주기량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두고 따져보면 이는 자명하다 할 것이다.
해방 후에 오아시스 유성기 음반에 그의 대금산조가 취입되어 발매되지만 박주환
한주환의 대금산조가 담긴 음반은 또 있다.
한면에는 그의 대금산조를 담고 다른 면에는 그의 대금과 방태진(方泰振) 호적과 합주로 시나위가 담긴 것인데 성음 제작소에서 장시간 음반(LP)으로 나오게 되지만
1971년에야 발매된 것이니 미리 녹음해둔 것임에 틀림없다.
근래에 그의 대금산조가 녹음된 수종의 자료가 발견되어 일제 때 취입된 박종기 대금산조와 비교하게 되고 이로써 새삼 한주환의 뛰어난 기량과 그의 개성적인 음악성을 발견하게 된다.
한주환의 대금산조가 박종기 대금산조에 기틀을 두고 있지만 그의 산조에는 또 박종기 산조에서 볼 수 없는 개성적인 특성이 있다.
이는 한주환이 박종기에게 학습하기 이전에 이미 한숙구, 한수동 등 여러 명인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임춘앵 단체 등 여러 단체를 수행할 때 여러 명인 명창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며 음악적 영역을 넓혀 나갔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특히 한일섭과의 교류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 한주환(대금산조) (13분 14초)
이생강 류
이생강류 대금산조야말로 산조가 갖는 본래적인 놀음의 미학인 가락놀음, 시름놀음, 장단놀음, 성음놀음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산조이다. 특히 대금이라는 악기와 산조라는 음악양식의 연주 궁합은 절세의 화합이다. 이생강류는 대금이 갖는 독특한 악기주법과 음색의 특징, 산조가 갖는 고도의 놀음성을 양식적으로 극대화 하였으며 다양한 장단과 가락을 활용하여 변화로운 길을 창출해 내는 산조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한숙구-한수동, 박종기-한주환-이생강 선생에게 이어지는 동안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선생의 뛰어난 연주법과 새로운 작곡으로 2시간 짜리 산조가 완성되었는데, 오늘 연주될 곡은 이러한 이생강 류 산조를 15분 정도로 응축시킨 곡이다.
이생강 명인은 한주환선생이 작고한 63년까지 15년 동안 대금산조의 오묘한 정법을 전수받았고 스승들이 연주하던 18분(박종기).32분 (한주환) 연주를 1백 20분까지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범수 류
박종기 [朴鍾基 1880∼1947]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대금산조의 명인. 전라남도 진도(珍島) 출신. 대금산조를 맨 먼저 지었다고 전한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젓대 시나위를 배운 뒤, 신접한 경지까지 이르렀다. 서울에 올라와 당시 민속악의 명인·명창들과 극장 공연을 많이 하였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하는 등 많은 연주활동을 하였다. 후배 강백천(姜白川)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대금산조를 짰는데, 음악적으로 보아 다른 분야의 어떤 산조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산조는 한주환(韓周煥)에게 이어졌으며, 일제강점기에 그의 대금산조를 담은 음반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방 공연 중에 죽어 그의 소원대로 진도의 길가 언덕에 묻혔다.
원장현 류
한일섭에게 구음으로 산조의 기틀을 전수 받은 원장현은 삶의 무게가 베어있는 특유의 더능을 첨가하여 산조를 만들었습니다.
원장현 산조의 특징은 계산되지 않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꿋꿋하고힘이 넘쳐 질서가 있고 조화롭습니다.
그의 산조는 강렬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고, 신을 부르는 신명의 소리입니다.
원장현류 대금산조의 음악적 특징
1. 본청이 다른 두종류의 우조와 네종류의 계면조 및 두 종류의 호걸제 등이 나타나 음계 변화가 다채로우며 곡의 느낌은 화려하다.
2. 저음부, 중음부, 고음부 등 전 음역에 선율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3. 계면조 사이에 짧은 우조 선율이 삽입되어 있어 곡의 분위기가 변화된다.
초등학교를 담양에서 마친 그는 광주로 나와 김용기 선생에게 대금의 기초를 배우고 오진석 선생에게 향제풍류(鄕制風流), 곧 지방에서 연주되던 정악(正樂)을 익히게 된다. 70년대에 들어서 김동진 선생과 한일섭(1927-1973) 선생에게 사사하는 인연을 맺게 되고 후에는
한일섭 선생의 계보를 잇게 된다.
그가 오늘날 연주하는 대금산조에는 한일섭 선생이 구음(口音)으로 가르쳐준 가락이 많다고 한다.
그는 1985년 국립극장에서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공식으로 발표했다.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였다. 대개의 경우 ‘류(流)’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은 고인이 된 분을 추모하거나 원로를 존경해서 그 제자나 후배들이 붙여주는 것이 거의 관례이다시피 했다. 그런데 스스로가 감히 원장현’류’를 붙였고 다행히 국악계와 대중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그 이후 산조에 누구누구 ‘류’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의 음악은 장단이라는 틀 속에 들어있는 산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박자 형태로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꾸밈이 없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꿋꿋하고 힘이 넘치고 강렬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고들 한다.
한일섭 선생에게 구음으로 전수받은 산조의 기틀은 그가 자신 특유의 더늠을 조화시켜 새로운 대금산조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삼십대의 젊은 나이라고는 하나 그동안의 그의 노력은 곱하기를 해야 할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대금을 하겠다고 객지생활을 하면서의 가난과 고난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대금을 시작한 그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자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모가 느껴져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서용석류 대금산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