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30. 일요일 - 날씨 좋은 날
오늘 날씨가 참 좋다.
동생이랑 약속을 하고 아침에 출발했다.
양지부근서 Traffic Jam이 걸려서 시간이 지체된 탓에 3시간이 걸려서 도착했다.
옛 광부들이 갱도에서 나와 목에 낀 연탄먼지를 씻어내기 위해서 먹었다는 돼지고기. 두부.버섯을 넣어서 얼큰하게 끓여내는 '족살찌게'는 얼큰하면서도 시원해서 소주를 부르지만 내가 어릴때 늘 먹고 자랐던 시골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도회생활로 매운걸 못먹는 탓에 너무 매워서 입술까지 얼얼하게 만든다.
이 족살찌게의 달인이라는 1호점에서 족살찌게로 간단히 점심을 한 후 동생이 남겨두었다는 구광 심자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찾아간 탓에 이미 선객이 다녀갔는데 數 많은 채심자리의 상태로 보아선 어제 비오기 1주 전쯤에 다녀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物各有主라고 物은 각자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라 심메자리에 들자마자 모나미 볼펜만한 굵기의 싹대가 바로 반긴다.
이어서 동생도 그 윗쪽에서 4구를 찾았는데, 뇌두가 밟혀서 세번이나 갈이한 나이배기다.
이곳은 더덕이 지천이라서 눈길 가는데마다 더덕이다.
120여 수를 얻었드니 더덕고추장박이를 하고도 남아서 갈덕주로 여러병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농갈라주었드니 다들 좋아라 한다.
그러고 보니 바야흐로 갈덕주의 계절이 돌아왔다.
末茶보다도 더 진하고 보기 좋은 갈덕주는 몸에도 좋지만 맛도 좋아서 술술 잘도 들어간다.
뿐만아니라 머위와 질 좋은 봉삼 및 오가피와 참취, 연화삼, 당귀가 무리지어 있어서 금년 말까지 묵나물로 먹을수 있겠다.
이곳은 여러상태로 봐서 옛날 화전민들이 들어와 살았던 자리로 이들 화전민들은 병원이 없는 탓에 비상상비약으로 각종 약초들을 심어 길렸던 곳인데, 그들이 비상약으로 사용하고자 씨를 뿌렸던 약초들이 제2차경제개발5개년 계획 시행 후 산림녹화사업과 北傀共匪들의 侵奪 棲息地化를 根絶시키고자 1967년부터 시작된 '화전민정리정책' 이후에도 自生的으로 대를 이어서 싹이 트고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1, 60년 전에는 전 인구 1.58%를 차지했었던 火田民!
화전민(火田民)이란 산에 불을 놓아서 나무를 태우고 남은 땅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문자 그대로 불로 밭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의 '산림녹화 - 화전정리사업' 항목에 따르면, 화전민을 산에서 끌어내리는 화전정리사업이 시작될 무렵인 1965년 말에 화전민은 4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해의 한국 인구가 2,650만 명이었으니, 화전민은 전체 인구에서 1.58%라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인구 100명당 1.5명 이상이 화전민이었던 것이다.
화전민은 평야의 농민이나 도시민과는 전혀 다른 생존 방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직후인 1962년 겨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당시 노태우 대위(후일 대통령이 됨)에게 전국을 암행할 것을 명했다. 지방에 보릿고개가 없어졌는지 직접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노태우 대위는 이때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그는 설악산 미시령 근처 화전민 부락에서 '인간도 冬眠한다'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부족한 식량을 아끼려고 한 사람이 하루에 삶은 감자 한두 개만 먹고는 누워서 잠만 자는 거예요. 그래서 에너지 소모를 줄였는지 의외로 건강하더군요."(1999년 5월 12일 조선일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433쪽')
화전민이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생체 리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 후 자신의 '현실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고 훗날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그 당시를 회고했다. 5·18 민주화 운동 등에 대한 노태우의 전향적인 태도도, 어쩌면 그가 설악산에서 화전민들을 만나면서 농업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복합적·다층적으로 바라보게 된 영향일지 모르겠다.
2, 울창한 산림의 뒷면, 한반도 화전문명의 소멸
한때 화전민은 한국 사회에서 친숙한 존재였다. 최인호가 1984년에 출간한 베스트셀러 소설 '겨울 나그네'의 당시 광고에는 "밀림에 불을 놓고 타 버린 터밭에 곡식을 심는 화전민처럼 메마른 우리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르는 방화범 최인호"라는 선전문구가 보인다.
화전민이라는 존재가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중소설 광고에서도 화전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1982년에 개봉된 영화 '산딸기',
주병선의 1989년 히트송 '칠갑산' 등도 모두 화전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뿐인가, 천도교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그 자신이 화전민 출신이었다.
현재 한국인들이 건강식으로 즐겨 먹고 있는 냉면과 막국수, 옥수수차도 알고보면 화전민들이 먹었던 음식드로, 이 음식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화전민'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고, 들어본 분들도 막연하게 화전민을 '산에서 농사 짓는 농민'이라는 정도로만 파악하고 계신 경우가 많을 터이다.
그러나 평야의 농민과 산속의 화전민은 살아가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기에 그들의 삶과 생존방식 및 哲學, 그리고 文明이 다르다.
(1) 유목민과 유사했던 화전민의 삶
농민이 한곳에 정착해서 농경에 종사한다면, 화전민은 기본적으로 옮겨다니는 유랑민들이었다.
숲을 불태워 만들어진 땅은 地力 즉 땅의 힘이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에, 화전민은 몇 년에 한 번씩 밭의 위치를 바꾸어야 했다.
동중국해 주변 지역의 농업이 벼를 기르는 논농사를 숭앙한 데 반해, 화전민은 당연히 밭농사를 지었다.
또한 화전민들은 나무를 태워 농사를 지을 뿐 아니라 숯을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산속을 유랑하며 약초·산삼 등을 캐서 팔기도 했다. 즉 이들은 농업 이전의 채집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동시에, 채집하거나 나무를 태워 만든 숯을 판매하는 상업적 활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정부에서 벌인 화전정리 사업에 따라 이 같은 산골 주민 중 많은 이가 생계 수단을 바꾸어야 했다.
"밤새 눈물로 쌌을 '전 재산'을 머리에 인 '어미'와 고개를 숙였으나 눈물 밖에 남길 것이 없을 '아비'의 모습 그리고 그 아비의 허리에도 닿지 않는 어린 아들의 우는 모습이 이별을 서러워하는 고향 사람들과 더불어 한 시대의 사회 모습을 그리게 해준다."- '한국의 발견 강원도편(1983)'
이처럼 화전민은 농민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삶의 방식을 유지했다. 화전민의 삶의 방식은, 초원을 옮겨다니며 소, 말, 양, 염소, 낙타를 길러 판매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삶과 비교 가능하다.
이처럼 화전민의 유랑하는 삶은 농업적 세계관에 기반한 조선총독부 및 한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지 않았다.
미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국가처럼 보기 -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 (전상인 옮김, 에코리브르, 2010)'에서 주장하듯이, '인구와 산출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근대 국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였기 때문이다.
화전민은, 넓은 의미에서 山民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산민'은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가 중요시한 개념이다.
그는 전근대 시기에 피지배층을 모두 농민이었다고 간주하는 기존의 역사관에 반대했다. 모든 피지배층을 농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농업 중심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그는 바다와 강에서 어업 및 河運·海運과 같은 상업 활동으로 삶을 꾸린 海民, 그리고 산간 지역에서 농민과는 구분되는 삶을 영위한 山民의 존재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문서 반납여행(글항아리, 2018)'에는, 아미노 요시히코가 "피지배층이 곧 농민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본 구석구석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찾아간 과정이 잘 담겨 있다.
아미노 요시히코가 山民과 海民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전까지 일본 시민들은 전근대 사회를 거의 전적으로 農民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상상했다.
이와 마찬가지의 선입견은 한국 사회에서도 널리 확인된다. 한국과 일본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착각은, 농촌과 도시가 존재하는 하류 지역에서 홍수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류의 산림 자원을 보존한다는 산림녹화정책에 의해,
화전민으로 대표되는 山民들이 소멸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2) 일제 수탈, 역대 정권 산림녹화사업과 빨치산·무장공비의 활동 거점 제거정책으로 '산' 잃은 火田民들
오늘날 한반도의 남부는 숲이 울창한 반면, 북부는 주로 민둥산이다. 이러한 민둥산은 조선시대 후기에도 전국에서 확인되었으며, 이는 온돌을 때고 숯을 굽기 위해 숲을 파괴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상류 지역의 토양이 침식되어 중·하류에 퇴적되다 보니, 조선시대 후기에는 남한강을 비롯한 주요 수로가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에서는 나무를 베고 화전을 만드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조선 정부의 다른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실효성은 없었다.(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이영훈 '한국경제사 1')"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조선총독부가 화전민정책과 산림보호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는 "일제가 나무를 베어갔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지만, 이는 문제의 단면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근대의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산림보호정책을 펼쳤으나,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물자가 부족해지자 日本 내의 巨木들을 베어 나무로 군함을 만드는 등의 말도 안되는 무모한 정책을 전개했다.
현재 일본 곳곳에 남아있는 거목은, 일본 정부의 이러한 벌목정책에 맞서서 지역 주민들이 처절하게 투쟁한 끝에 살아남은 것이다. 이러한 실상은 일본의 산림학자 세타 가쓰야(瀬田勝哉)의 최근 저서 '전쟁이 거목을 베었다 - 태평양전쟁과 공목운동·목조선 (平凡社, 2021)'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식민지 시기 한반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연출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부족한 油類를 충당시키기 위하여 소나무에 흠집을 내어서 송진을 채취해갔는데, 지금도 그 아픈 흔적들이 백두대간 곳곳의 아름드리 赤松林 여기저기에 흉악한 생채기로 남아있다.
이처럼 근대 한반도에서는 산림보호정책과 벌목정책이 아울러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이래의 황폐해진 산림이 채 되살아나지 못한 채 맞이한 광복의 결과 모든 물자가 부족하게 되었고, 특히 연료부족이 심각해지자 나무를 베어서 연료로 하는 소위 火木난방으로 인해서 산전체가 황폐화되었다.
특히 한반도 북부에서는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연료난이 심각해진 결과, 오늘날 보듯이 민둥산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한반도의 남부에는 울창한 산림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가지는 박정희 정부의 산림녹화정책이다. 또 한 가지는, 산간 지역에 흩어져 있던 화전민들을 집단화시키고 나아가 평야로 끌어내려 농민으로 만듦으로써 빨치산·무장공비의 활동 거점을 제거한다는 한국 정부의 안보정책이었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의 4·3사건 때 좌익 계열의 거점을 제거하기 위해 중산간 지역의 주민들을 해안 지역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화전이 사라졌다(2017년 4월 24일 제이누리 '화전, 제주근대사 연구의 시작').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중산간의 '화전동'이라는 지명이, 이제는 사라진 제주도의 화전민들의 존재를 증언할 뿐이다.
제주도의 화전민을 소멸시킨 4·3사건만큼이나 비극적인 사건이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었다. 북한 괴뢰정부가 파견한 무장공비들은 한국 내의 활동 거점을 만들기 위해 산간 지역의 화전민 마을들에 주목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다"라고 말했다가 살해된 강원도 평창의 이승복 및 그 일가족도 화전민이었다. 이때 이승복의 집뿐 아니라 여러 화전민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 이후 한국 정부는 화전민들을 한데 모으고, 나아가 이들을 농업, 광업, 어업 등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산에서 화전민을 없애려는 정책인 화전정리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결국, 한국에서 화전민이 사라진 것은 농업 중심적 세계관과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한 것이다
'강원도 오대산의 화전민 주택에는 당시 정부가 화전민의 집에 세운 '화전금지'라는 표지석이 남아있다. - 오대산 국립공원 화전민터 지표조사 보고서'
1970년대에 한국 정부가 추진한 화전정리사업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의 산간 지역에서 화전 농업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한국의 산은 역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울창한 산림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화전민이 버리고 간 집·밭·숯가마터는 등산 코스의 이정표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현재도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 인근에는 '화전금지'라는 비석이 세워진 화전민의 집터가 남아있다. 화전민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당시의 화전정리사업 담당자들은 "화전민들의 집집마다 이런 표지석을 박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산에서 강제로 끌려내려온 화전민들은 정부가 마련한 집단 주택에 정착해서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들에게 제공된 주택 가운데 원형을 잘 남긴 건물이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한 채 남아있다. 강원도 지역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 이 주택이 알려졌다.(2020년 4월 13일 강원도민일보 '철원서 키와니스 구호가옥 발견')
마을회관에는 '키와니스촌(Kiwanis Village) 일동'
이 미국 키와니스클럽 대표, 강원도지사, 한미재단 단장에게 바친 1967년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원형을 남기고 있는 키와니스 주택의 정문에는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 1966'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 주택의 주변에 있는 건물들도, 비록 외형은 바뀌었지만 1966년 당시의 위치 그대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키와니스 클럽은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 본부를 둔 자선단체고, 한미재단은 1952년에 한국과 미국의 유지들이 공동설립한 한국 원조 기관이었다.
조선총독부와 한국 정부가 실시한 산림녹화사업과 화전민 정리정책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오늘날 한국 국민들의 상당수는 '화전민'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어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재 양식 가운데 하나로서의 화전민의 삶, 그리고 250년이나 내려왔던 山民이 이루어낸 하나의 독자적인 文明의 형태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도시민과 농민의 갈등이라는 지난 백 년간의 대립 구도와 그 그늘에서 농민과 海民의 갈등, 그리고 농민과 山民의 갈등은 조용히 농민의 승리로 끝나면서 '火田民'과 '화전민'이라는 단어는 조용히 이땅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비상약용으로 뿌리고 가꾸었던 蔘, 도라지, 더덕, 當歸, 잔대, 하수오, 지치 등 각종 藥草들은 生存을 위해서 스스로 代를 거듭하면서 火田 대신에 울울창창하게 우거진 森林 속에서 살아남으면서 현재까지도 후손들에게 좋은 藥材가 되고 있다.
(3) 眞種과 人間이 씨를 부린 人種
위에서 살펴봤듯이, 현재 산에서 나는 약초들은 거개가 다 이들 화전민들이 산으로 들어갈때 비상약용으로 사용코자 산으로 씨를 가지고 들어가서 뿌려서 가꾸었던 약초들이다.
해서 원래부터 산에서 자라고 있던 眞種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한국은 北魁 두목 金日成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動亂이 1950년 부터 1953년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탓에 전국의 모든 산천이 被爆되어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진종은 이때 다 사라지고, 현재 남아있는 약초들은 거개가 다 화전민들이 씨를 뿌리고 가꾸었던 人種의 後孫들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서 약성도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있기에
원래의 眞種과는 약성에서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첫댓글 덕분에 화전민의 역사공부 감사 합니다.
항상 안전산행 풍산행 하세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잘 읽고갑니다.감사합나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화전민에 대한 자세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동생하고 좋은 심산행기 참좋으네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즐감 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축하 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공부했네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축하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축하드립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꾸벅~~~~~~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되세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운밤 되세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운밤 되세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