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납적인 자세 | |
받아들임 |
증명이 아님 |
수용 |
묵인이 아님 |
질문 |
요구가 아님 |
고개를 끄덕임 |
강요가 아님 |
동정적임 |
타협이 아님 |
협동적임 |
억압이 아님 |
용감함 |
갈등이 아님 |
대화 |
받아쓰기가 아님 |
격려함 |
무례함이 아님 |
부드러움 |
딱딱함이 아님 |
질문 |
주장이 아님 |
조사 |
부과가 아님 |
포함됨 |
회피함이 아님 |
관계함 |
관계를 끊음이 아님 |
귀납적인 접근은 “과연 그것이 참으로 그러한가?”라는 탐구의식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지적인 정보를 먼저 제시할 때 그것은 연역적이고 따라서 폐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조적인 어떤 내용을 탐구하는 것은 귀납적이다. 신앙을 변호하는 것은 연역적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연역이지만, 그러나 “당신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면서 그의 상황에 참여하는 것은 귀납적이다. 하나의 진술을 통해서 또다른 진술을 만들어 내고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면서 논리를 사용하는 것은 연역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연역적인 논리적 구조는 폐쇄적일 수밖에 없고 그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러나 귀납적인 접근은 모험적이다. 어떤 일정한 영역에서부터 모험을 가지고 벗어나려고 하는 접근이 바로 귀납적이다. 연역적인 사고방식은 예외적인 상황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 귀납적인 사고는 어떤 구체적인 정황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정황을 근거로 해서 모험적으로 예외를 인정하려 한다. 또한 연역적인 사고방식은 항상 진술과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귀납적인 사유는 대화를 통해서 해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연역적인 사유는 이미 자신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진술을 하려고 한다. 따라서 연역적인 사고는 대화를 거부하는 편이고 자신의 설명이나 진술로서 종결을 지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귀납적 설교 구조는 청중 중심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크래독(Fred B. Craddock)은 결정 미정의 설교( open-ended serm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의 비교
연역적 방법 |
귀납적 방법 |
교리를 증명해 주는 방법 |
만들어 가는 기쁨이 있다. |
주어진 진리를 증명한다. |
발전적으로 진리를 찾아간다. |
논리적이다.(이성에 호소) |
영감적이다.(감성에 호소) |
권위적이다. |
비권위적이다. |
반드시 ....을 해야한다고 결론내린다. |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한다. |
말하는 자신은 감추어진다. |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 동반되어 진다. |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다. |
구체적이고 특별하다. |
연역적 설교와 귀납적 설교의 구조 비교
연역적법적 방법 |
귀납적 방법 |
Ⅰ. 도입 Ⅱ. 주제 대지A 통계 예화 대지B 실례 실례 예화 대지C 소지1 예화 소지2 Ⅲ. 결론 |
Illustration(예화) 통계 Main head(대지) A illustration(예화) instance(실례) instance Main head(대지) B 인용 instance 소지1 예화 소지2 Main head(대지) C 주제(Central Idea) |
3.귀납적인 설교가 생기게 된 과정
귀납적인 성경연구라는 용어는 한국 교회에 많이 소개가 되었지만, “귀납적인 강해설교”라고 하는 용어는 아주 최근에 극히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어진 방법이다. 이러한 내용은 비록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것이 하나의 학설로서 제시되어 지고 연구되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토마스 롱에 따르면 이러한 귀납적인, 결정 미정의 설교(inductive, open-ended sermon)라는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대변한 최초의 설교자를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으로 꼽는다. 크래독은 1971년 ?권위없는 자로서?(As One Without Authority, Enid, Oklahoma; Phillips University Press)를 출판하게 되는데 이 책이 미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설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크래독이 이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왜 선량하고 책임감 있고 부지런한 설교자가 그처럼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설교를 만드는 경우가 그렇게 많은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설교자에게서 형편없는 설교가 나올 때는 신기할 게 없다. 그러나 창의력이 아주 풍부한 설교자에게서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설교가 종종 나온다는 사실은 수수께끼이다. 이러한 개념을 소개한 뒤 많은 설교학 사상가들에게 자극을 주어 갖가지 유형의 청중 중심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설교를 위한 제안이 쏟아졌다.
크래독은 유능한 목회자가 무미건조한 설교를 하게 되는 원인을 설교 이론에 생긴 틈에서 찾았다. 즉 서재에서 이루어지는 사고방식과 서재에서 만들어진 그 설교가 요구하는 사고 방식의 차이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심증을 굳혔다. 설교자는 서재에서 먼저 백지를 옆에 두고 그 본문의 뜻이나 설교의 주제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 본문을 살핀다. 그런 후에 설교자는 탐정처럼 귀납적으로 활동하며 실마리를 모아다가 사건을 구성한다. 처음에는 이런 길로 가다가 나중에는 저런 길로 가고, 이런 예감에 따라 행동하다가 다음에는 저런 예감에 따라 행동한다. 이 모든 발견의 과정을 거치다가 그는 마침내 갑자기 뭔가를 발견하고 흥분한다. “아, 내가 이 본문으로 설교할 게 이거구나!”
하지만 문제는 흥미진진한 탐구의 절정으로 설교의 주제를 발견했던 그 설교자가 설교 할 때는 전체 발견과정을 뒤집어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크래독의 주장에 따르면, 설교 구상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은 창조적인 발견과정이 끝날 즈음에 발견한 설교의 중요한 통찰을 설교의 ‘주제’로 바꾸도록 설교자에게 권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설교자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 ‘주제’를 발표하고 그것을 세 가지 이상의 교훈적 ‘요점’으로 풀어내면서 발견의 긴장감을 줄여버린다. 그 결과 설교는 따분해 진다. 회중은 처음부터 설교가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모험의 정신이 떡잎부터 말라버린다. 설교를 준비할 때는 귀납논리로 시작하여 결말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지만, 막상 설교할 때는 연역적이고 결말이 이미 결정나 있으므로 회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석의는 가르침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인데, 설교는 너무 지루한 교훈을 주려는 생각에 기쁨을 달아나게 만드는 경우가 빈번하다.
크래독은 설교자가 설교를 교훈의 족쇄에서 풀어내어 설교가 만들어질 때의 자유로운 흐름에 어울리도록 만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설교를 귀납적으로 만들어서 설교자가 서재에서 따랐던 발견의 길을 따라가게 하면 청중은 연역적 접근법으로 불가능한 방식으로 설교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Ⅲ. 귀납적 설교의 필요성(요청)
전술한 바와 같이 오늘날 교회현장의 연역적 설교의 우위 풍토와 시각화 시대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귀납적 설교의 필요는 절실하게 되었다. 귀납적 설교의 필요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귀납적 설교는 성경적이며 히브리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성경의 진술방법이 연역적이지 않고 귀납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이 조직신학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서 “첫째로 전능하시다, 둘째로 전지하시다”라는 식의 전개방법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을 하시는가를 실제로 보여주시며 설명보다는 경험하게 하신다. 예를들어 “들의 백합화를 보라”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이것은 귀납적이다. 성경은 창조의 기사, 타락의 기사, 노아의 기사, 바벨탑의 기사 등은 어떤 구체적인 정황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구체적인 상황을 어떤 교훈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폐쇄적이 아니라 개방적으로 제시하며 증명하기 보다 경험하게 한다.
예수님은 설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주 문제를 가지고 걱정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먼저 결론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시작을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시작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설명할 때에 이웃의 정의는 “첫째로,... 둘째로...”라고 하면서 접근을 하지 않으셨다. “어느날 강도를 만나 쓰러진 한 사람이 여리고에 있었는데”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작하여 말슴을 전개하신다. 예수님의 귀납적인 설교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자세히 살피려 한다.
우리가 연역적 구조라고 보기 쉬운 전도서를 살펴보자. 초반부에 “인생은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기록한다. 여기서만 본다면 연역적인 구조이며 전도서의 메세지는 절망적이다. 그러나 이어서 “인생이란 얼마나 헛된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계속해서 귀납적인 접근을 한다. 12장 까지 끌고가서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의 결국을 들었으니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마지막 결론을 위해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면서 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만일 전도서를 첫 부분이나 중간 부분까지만 읽는다면 그 결론은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민스러운 상황을 계속해서 마지막 까지 끌고 나가면 마지막에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귀납적이란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많이 있는 것이다.
본래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라고 전제를 내리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논리를 전개하면서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전개방식은 희랍적인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아리스토렐레스의 논리학에서부터 그 연원을 가지고 있으며, 수사법과 웅변술에서 발전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히브리적인 전통에서는 매우 생소한 것이다. 히브리적인 사고는 상당히 귀납적이다. 우리는 그러한 희랍적인 전통에 이끌려 왔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의 영향하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설교가 감격과 흥분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2. 교육적인 효과 때문이다.
교육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람들의 배움의 정도가 인지의 방법에 따라 크게 좌우됨을 알 수 있다. 아래의 도표 는 그것을 잘 설명하는 것이다.
단순히 진술식 설명으로는 청중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할수 없다. 매 주일 같은 시간 설교를 듣는 사람이라도 단조롭고 지루한 연역적 설교와 청중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일으키게 하고 직접적인 경험의 장으로 인도하는 귀납적인 설교의 결과는 다르다.
3. 일상적 삶 자체가 연역보다는 귀납으로 되어있다.
크래독은 우리 일상적 삶 자체가 연역보다는 귀납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와같이 청중들도 이론적인 내용을 알기보다 먼저 체험을 하게 되며 따라서 보편적인 내용을 듣기보다 특별한 경험을 듣길 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체험과 접촉 가운데 삶을 영유하기 때문에 연역보다는 귀납이 사람들의 삶에 쉽게 연관이 되고 호감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도 이러한 청중의 생리에 따라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4. 심리학적(생리학적)인 요청이다.
두뇌의 기능에 대해서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사람은 오른쪽 두뇌와 왼쪽 두뇌를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 우리는 왼쪽 두뇌에 의거해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왼쪽 두뇌의 기능은 비판적인 사고, 수평적 논리, 분석적인 사고 등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대부분 왼쪽뇌의 기능적인 면만 중요시 하여왔다. 반면에 우리의 오른쪽 두뇌는 환상, 상상력, 창조력, 감성적인 것, 느끼는 것 등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능들이 귀납적인 성격인 것이다. 그래서 귀납적인 설교가 중요한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왼쪽 두뇌의 활동을 가리켜서 소위 L모드라고 하며, 오른쪽 두뇌의 활동을 가리켜서 R모드라고 한다.
랄프 루이스 교수는 야쪽 두뇌의 차이점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왼쪽 뇌는 주제와 그림을 구성 성분으로 나누고 분석하여 이해한다. 그리고 신속하게 분류할 수 있도록 “동물”이나 “자동차” 같은 일반적인 명칭에 항목을 붙여 주어 정보를 분리하고 꼬리표를 달아 기억해 둔다. 속도는 왼쪽 뇌의 특성 가운데 하나다. 이에비해 오른쪽 뇌는 정보를 더 알기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오른쪽 뇌는 감각과 더 긴밀히 접촉하는 대신 상(像)과 같은 추상적인 것은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는다. 또 어떤 것이 나타내는 것이나 상징하는 것보다는 그것의 색, 맛, 결 , 크기 등에 더 관심을 둔다. 왼쪽 뇌는 이해를 위해 모든 것을 나누고 조각내고 분석하는데 반하여, 오른쪽 뇌는 이해를 위해 파편들을 모아 연결하고 종합한다. 문법과 어휘와 언어는 왼쪽 뇌의 활동이다. 하지만 시(詩)를 “감상하고” 이해하고, 우리가 가락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선율의 완벽한 형태를 듣고 연결하는 것은 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오른쪽 뇌다. 왼쪽 뇌는 사실을 더 많이 다루고, 오른쪽 뇌는 감정을 더 많이 다룬다. 왼쪽 뇌는 이성적인 것을 다루고, 오른쪽 뇌는 상관적인 것을 다룬다. 수학이나 법률 같은 지적인 과목은 왼쪽 뇌에 많이 의존하고, 예술과 음악은 오른쪽 뇌에 더 많이 호소한다. 왼쪽 뇌는 더 논리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고 오른쪽 뇌는 더 직관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좌뇌의 활동은 주로 연역적인 활동에 도움을 주는 반면 우뇌의 활동은 귀납적인 것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좌뇌가 논리적인 활동을 하며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고 이성적인 작용을 한다면 그것은 연역적인 활동을 말하며, 우뇌가 예술과 직관과 연관되어 있고 경험적이며 상상과 감각적인 작용을 한다면 그것은 귀납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뇌의 구분이 정당하고 근거가 있고 우뇌가 귀납적인 활동을 한다면 우리는 우뇌의 역할을 중시해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거나 설교할 때 우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아이디어를 창출시키고 설교에 영감을 불어넣고 합성, 상상, 기억, 시각적인 것, 그리고 상관적인 것에 대한 오른쪽 뇌 강조로 준비시키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자. 그가 무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기억, 경험, 감정, 비언어적인 것, 그리고 상상적인 것에 호소하셨다. 그리고 비유에서, 이야기에서, 풍부한 비교와 대조에서 오른쪽 뇌의 심상을 사용하셨다. 또한 비슷한 경험으로 삶을 묘사하고 발견하고 탐구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신조보다는 실례를 들어 정의를 내리셨다. 예수님의 설교는 훈계보다는 경험을, 단조로운 주장보다는 발견을, 제안보다는 질문을, 논리보다는 감정을 더 많이 이용했다. 예수님은 이런 방법으로 설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5.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다감각적인 시대이다. 한 자리에 앉아서 강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만 하는 권위적인 교육을 싫어한다. 20세기를 돌아보는 사회학자들은 지난 세기 동안에 일어난 크나큰 변화는 권위로 부터 이탈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은 우리 문화는 귀납적 접근 방법 쪽으로 치우치고 그 방법을 존중하며 기대하고 때로는 요구하기도 한다. 현장학습이 강조되고 권위자로서 선생이기 이전에 섬기는 자로서 참된 교사를 요구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따라 우리는 변화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크래독은 연역적 설교를 했을 때는 청중들이 듣지 않았는데 귀납적으로 했더니 잘 듣더라고 했다.
Ⅳ.성경에 나타난 귀납적 설교
A.구약의 설교
구약성경에서의 설교는 귀납적인 설교의 유형인 이야기, 질문, 개인의 체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들 율법서, 예언서, 시편, 잠언 등은 귀납적이 아니고 연역적이라고 보기 쉽다. 실제로 예언서나 시편, 잠언에서 연역적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이다. 그 말씀이 설교로 나타날 경우에는 연역적으로 나타나서는 효과가 없다. 그래서 구약성경 안의 설교를 보면 귀납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들어 모세오경에서 모세의 설교를 보자.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다(신1:1). 여기에서 모세 설교의 주 내용은 광야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회고와 순종에 대한 권유이다. 모세는 이 말씀을 전달하며 주로 과거의 사간을 이야기로 진술한다. 신명기에 있는 모세의 설교는 본질적으로 광야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에도 족장들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수24장). 사무엘의 고별설교에서도 연역적인 진술은 나중에 기록되어 있고(삼상12:20-25) 설교의 초반부에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얘기, 족장들과 광야시대에 대한 얘기 등을 먼저 하고 있다.
예언자들의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기원전 8세기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모스, 호세아와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 예언자들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설교사역이었다. 예언자들의 설교사역에 유대 백성들은 구름떼처럼 모였고, 이들이 외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온 백성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예언자들의 설교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며,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이야기 형태의 설교였다는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구약의 설교를 살펴보면 연역적이 아니라 귀납적이었다. 귀납적인 방법은 히브리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귀납적인 설교를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강환근은 구약의 율법서, 예언서, 시편, 잠언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학적 쟝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더 큰 구조를 귀납적 설교 유형의 하나인 이야기(narratives)라고 했다.
B. 예수님의 설교
성경에서 귀납적 설교의 형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설교는 예수님의 설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 귀납적인 설교의 모범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연역적이나 조직신학적으로 무엇을 증명하기위해 “첫째로, 둘째로....” 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은 생활의 예를들어 쉽게 설명하였다. “얘들아! 저 농부를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농부가 씨들을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고....” 라고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였다.
어느날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어왔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다. 마지막 까지 자신이 대답하지 않고 청중이 답하도록 청중들에게 물었다. 이러한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설교에서 귀납적인 요소들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1. 비유(Parables)
우리는 예수님을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라 해야할 것이다. 그는 이야기 없이 설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중의 대부분은 비유(parables)들이다. 신약성경에는 우리의 정의에 따라서 33개에서 77개까지의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흥미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청중들이 쉽게 깨닫게 하며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의 짧은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개념(ideas)들이 포함되어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사랑의 개념을, 탕자의 비유에서 용서의 개념를, 달란트 비유에서 개인의 책임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님은 땅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겨자씨와 누룩, 씨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등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에 근거한 이 비유들은 1세기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기꺼이 귀기울여 들으려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는 일을 말씀하셨고 그들이 전에는 진부한 것만을 보았던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는 단순한 얘기들을 하였다.
이러한 비유는 귀납적인 것이다. 예를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불평했을 때 예수님은 잃은 양과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였다. 예수님은 아무도 논쟁할 수 없는 간단하고 상식적인 진리를 말씀하심으로 비난하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만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지 않고 연역적으로 사실 자체만 진술하셨다면 멸시와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2. 대화(Dialogue)
예수님은 대화로써 중요한 메세지들을 전달하였다. 복음서의 요지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토론에서 가장 분명히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물가의 여인과 나눈 대화는 예수님의 매우 심오한 신학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대화는 귀납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청중들에게 설교의 주제를 잡게 하고, 설교에 참여하도록 격려했으며 청중들에게 감화력 있는 설교가 되게 한 것이다. 대화는 청중들의 귀를 통하여 들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들의 눈을 통하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3. 질문(Questions)
예수님은 항상 질문을 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이 정확하게 153번 기록되어 있다. 악의를 가지고 질문하는 자들을 잠잠케 하려고 하면서 예수님은 교리적이면서 철통같은 방어로 잠잠케 한 것이 아니라 자주 질문을 하심으로 잠잠케 하였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다윗은 무엇을 하였느냐?” “모세는 뭐라 말하였느냐?” “누가 네 이웃이냐?” 예수님은 질문으로 사람들을 참여시켰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질문을 사용하여 진리와 헌신을 촉구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러한 질문의 방식은 귀납적인 것이다. 질문은 청중들을 자극하여 탐구하고 찾아보게 한다. 또 사람들을 설교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혹은 삶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4. 비교와 대조(Comparison and Contrast)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유사점과 차이점들을 말하였다. 예를들어 산상설교에만 해도 예수님은 142가지의 비교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은유(metaphor), 상징(figure), 유비(likeness)는 청중들의 생각과 기억속에 뿌리박혀 있게 되었다.
“이것과 같고 저것과 같으니라.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라” 예수님의 설교는 계속 비교하거나 대조함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경험, 생활, 생각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그는 빛과 소금,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 목자와 양, 주인과 종, 고용주와 고용인,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양과 염소, 빛과 어두움, 넓은 길과 좁은 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등 이렇게 많은 대조와 유추들로써 비슷한 이미지를 비교하고 대조하였다.
5. 보통 사람들의 경험(Common Experience)
예수님은 설교할 때 마다 먼저 접촉점을 전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경험에서 끌어낸 친숙한 어떤 것에 호소함으로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셨다. 예수님의 설교는 이지적이고 학구적이거나 단순한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었다. 그는 삶을 파고들었고 사람들의 감정들을 캐내었다. 그의 설교를 살펴보면 일상생활에서의 삶과 경험들이 그의 설교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삶의 경험들이었다. 그의 설교의 주제들은 간통, 분노, 근심, 탐심, 죽음, 빚, 의심, 영생, 믿음, 금식, 다른 사람의 허물을 발견하는 것, 주는 것(giving), 탐욕, 정직, 외식, 기쁨, 친절, 지식, 율법, 율법주의, 결혼, 돈, 진노, 기도, 존경, 책임감, 댓가, 통치자, 성, 비방, 말, 세금, 종의 도, 선, 지혜, 열심 등 그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다.
예수님은 자연, 관습, 가족, 동물, 농업, 인간, 복자, 종, 주인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친숙하고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하였다. 예수님은 믿음에 대한 교훈으로 흔한 백합을 사용하였다. 희생적인 봉사의 개념은 물 한잔으로 표현하셨다.
이러한 경험중심적인 것은 귀납적 설교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설교의 결론을 내릴 때까지 경험 중심적인 청중들의 관심을 계속끌려면,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메시지의 모든 부분을 청중의 삶의 경험에 긴밀하게 연결시켜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의 이러한 공통된 특징들, 이를 테면 이야기, 비유, 단순성, 대화, 질문, 비교와 대조, 유추, 그리고 공통 경험에 대한 언급은 모두 귀납적 과정에 적합하고 그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예수님의 귀납적 설교는 “논제나 전제로 시작하는 대신에, 연역적 설교가 시작할 때 처음에 말하는 바로 그 결론을 향해 가고 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귀납적인 과정을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탐구하게 하고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개념들을 인지하게 한다. 귀납적인 설교는 정해진 교리 이상의 어떤 것이 된다. 회중들은 그것을 확신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적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통적이고 연역적이었다. 그들과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독재자도 아니셨고 거들먹거리는 두목도 아니셨으며 자신의 결론을 거만하게 외치는 자도 아니셨으며 조용히 겸험으로써 증거하는 일 없이 개인적인 법령을 거만하게 선포하는 분도 아니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신뢰하셨고 또한 경험으로부터 배우며 일반 생활을 강조하고 청중을 존중하며 인도자와 친구와 동료의 역할을 떠맡는 귀납적 방법을 신뢰하셨다. 청중들이 준비도 되기 전에 자기가 말한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인도하고 지도하며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다.
Ⅴ. 귀납적 성경연구
귀납적 성경연구는 귀납적 설교의 기초가 된다. 케이 아더는 귀납적 성경연구에 대해 정의하길 “성경에 관하여 진술한 서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로부터 시작하는 성경 연구방법이다. 그러므로 성경 그 자체를 먼저 철저히 고찰한 이후에야 비로소 성경에 관해서 쓰여진 책들을 참고하는 것이 허용된다.”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귀납적 연구의 기본적인 틀은 관찰, 해석, 적용이다. 관찰은 저자가 말하고 있는 바를 발견하는 것을 말하며, 해석은 저자가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는 것이고, 적용은 발견한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귀납적 성경연구는 본문을 자세하게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본문 스스로가 해석을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성경을 읽어 감으로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들려 주려고 하는 말씀 자체를 가감 없이 그대로 들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성경을 교리나 조직신학의 테두리에서 해방되며 점진적이고 발전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해석해 감으로 목표를 향하여 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연역적인 접근을 배제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연역적인 성경 연구를 통하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는 귀중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원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귀납적인 연구 부분과 연역적인 연구 부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설교자로서, 성경해석자로서 성경연구를 시작할 때에 한 문장이나 단어나 문법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문단을 보게 되고, 문단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장을 읽게 되고, 그 장보다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이해하기 위해 책을 공부하게 되며, 그 책을 같은 저자가 쓴 다른 책과도 비교하고자 성경개요를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주경신학의 작업인데 이러한 작업은 다른 외부적인 학문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귀납적인 작업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알고 단어나 문맥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바깥으로 가야 한다. 즉 연역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 단어, 문장, 문법에서 배경연구로 나아갈 때 연역적이 되는 것이다.
위의 도표를 통해 주경신학의 틀이 어디까지임을 알 수 있고 귀납적인 연구와 연역적인 연구의 범위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귀납적인 접근과 연역적인 접근 둘을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 만일 개인의 신학적인 입장이나 조직신학 혹은 역사신학 등의 틀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려 할 때 그것은 연역적인 입장이 되며 또한 성경의 원래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것이다. 또한 지나치게 귀납적인 접근에 억매여 역사성이나 조직성을 배제한다면 객관성을 상실한 지나친 편협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설교를위한 성경연구에 있어 출발이나 정신에 있어 귀납적인 방법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것은 이상적이라고 본다.
이동원은 귀납적 성경연구를 위해서 주경신학적 틀을 강조하고 있다. 즉 성경연구자가 본문을 대하며 늘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첫째, 누가(who), 왜(why)를 말한다. 이것은 기자의 개인적 배경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언제(when), 어디서(where)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역사, 사회, 문화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세째는 어떻게(how), 무엇을(what)을 말한다. 이것은 본문 자체의 내용이며 메세지를 말한다.
이러한 틀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본문의 석의를 위한 작업이다.
Ⅵ. 귀납적 설교 작성지침
1. 귀납적 설교는 서론에서 결정된다.
오늘날 갈수록 설교에 있어 서론이 강조되고 있다. 서론에서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청중의 시선을 압도하지 못한다면 그 설교는 실패하기 때문에 서론의 강조는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귀납적 설교는 서론이 독특하다. 연역적인 설교가 주장, 결정, 명제, 일반화된 원리들로 시작함에 비해 귀납적 설교는 예화, 경험, 본보기 등의 특별한 사건들로 시작된다.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귀납적 설교가 오늘에 강점이 많은 것이다.
귀납적인 설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서론이 다른 장류의 설교보다 길다는 것이다. 귀납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에 공감의 자리 확보를 위하여 서론을 길게 해서 청중과의 교감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설교학 이론에서는 서론을 짧게 하라고 하지만, 이점에서 귀납적인 강해설교의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서론의 길이를 20% 또는 30%까지도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론이 길어지는 이유는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처음부터 청중이 귀를 막아버리면 소용이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공감의 자리를 마련하여 마음을 열고, 문제의식을 갖게 하고, 말씀에 대해서 준비를 갖게 한 이후에 가서 본문을 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시작하는 것은 연역적인 접근이다. 이에 비해 “12월 21일 267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비행기가 영국의 런던 공항을 떠나서 뉴욕을 향개 하다가 상공에서 기체는 한 순간에 공중 분해되고 말았습니다.”라고 시작한다면 귀납적인 접근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출발할 때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야고보서의 “너희의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는 본문으로 나아가면 훌륭한 귀납적인 접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서론을 시작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 ‘최근에 당신은 인생을 원망하면서 살고 있지 않으십니까?’등의 질문, 어떤 구체적인 체험, 대화적인 접근, 뉴스의 인용, 상상력의 전개 등이 있다. 그러나 서론에서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나 둘 정도를 사용해서 일단 청중과의 접촉점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공감의 자리를 만들라.
설교에서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성경 본문의 진리를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 진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확정된 진리를 처음부터 청중들에게 제시한다면 청중들은 생소해 하고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의 내용을 얘기하기에 앞서 공감의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귀납적 설교는 공감의 자리에서 시작하여 본문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며, 그후에 본문을 설명하고 이 본문을 통해서 삶속에 적용하도록 결론을 맺는 것이다.
이렇게 함에 있어 어떻게 상황과 본문을 연결시키는가가 문제이다. 설교자는 청중이 고민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서로 공감의 자리를 마련하고 바로 그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공감의 자리에서 서론을 마련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성경이라고 하는 처방을 가지고 도달해야 한다. 결론에 이르기 전에 성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귀납적인 설교는 삶의 정황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원리로 나아간다. 우리가 설교를 시작할 때 “구약의 여호수아 1장 8절”의 본문에서 바로 시작하면, 청중의 공감대 형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즉 청중들의 삶의 정황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그들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가지 다른 상황들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삶의 정황에서부터 시작할 때 청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감의 자리가 확보되어진 이후에 자연스럽게 본문의 자리로 나아가서 그들을 본문의 상황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3. 현재의 상황에서 시작하라.
현재의 상황에서부터 시작하여 영원한 보편적인 진리로 나아가야 된다. 현재의 상황에 설교자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사람들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이 삶속에서 목말라 하고 갈구하는 것을 알 수 없고 접촉도 할 수 없다. 이러한 필요에서부터 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납적인 접근은 삶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하여 원리로 나아가는 것이며, 사람들간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고민이나 갈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또 상식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논리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는 문제에서 시작하여 해답으로 가는 것이다. 예를들어 “당신은 최근에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었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이 가지고 있는 상황은 많은 사람들의 상황이다. 바로 이러한 현재의 상황에서 시작하는 것이 귀납적인 접근의 시초이다.
4. 컨텍스트(Context)와 텍스트(Text)의 대화를 시도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상황과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본문의 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다윗이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렇게 출발을 하면 청중들의 반응은 “다 알아, 다 안다니까. 주일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야.” 하면서 귀를 막아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삶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을 제시한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고 그 설교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위기를 직면했던 2500여년 전의 다윗의 상황과 비교해서 그 당시 다윗이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보여주면서 우리의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면 청중들의 삶이라고 하는 상황(context)과 성경이라고 하는 본문(text)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필요에 민감하여 그들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같이 동참하면서 설교를 시작해야 한다.
위의 도표에서 상황과 본문은 쉼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상황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그 상황을 통해서 성경의 본문에 질문을 던진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특정한 본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그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상황과 사건을 가지고 오늘 우리의 상황을 다시 관찰한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본문을 묵상한다. 본문을 향한 우리의 묵상을 가지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질문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라는 통찰력이 생기며 그것을 오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Ⅶ. 귀납적 설교의 단점
신학적인 측면에서 귀납적 설교는 본문의 맥락-정경, 신학, 교회 역사-에서 유리될 수 있다. 만일 이렇게 되면 성경본문의 역사적 차원을 무시하는 해석이 될 수 있고, 공동체의 복음 체험을 원자화시키게 된다. 결국 성경의 본문을 단순히 예술적 끝맺음으로 처리해 버리는 심미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귀납적 설교는 청중의 흥미를 끌 수 있고 청중의 참여를 촉진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청중이 설교의 전체적인 흐름에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고 어느 한 부분에만 집중하게 될 때 이야기의 피상적인 행동만을 듣고 그것만 기억하게 되는 단점이 야기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귀납적 설교의 처음에는 주제가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청중의 마음에 혼란을 가져올 우려도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귀납적 설교의 많은 장점에 비하면 옥에 티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귀납적 설교를 지지한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설교를 작성하며 연역법이나 귀납법 중의 한 가지만 가지고 일관되게 작성할 수 없다. 어떤 설교라도 그 내용을 분해하면 귀납적인 요소와 연역적인 요소가 모두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로빈슨은 설교 전개의 형태를 연역적인 것과 귀납적인 것, 그리고 그 둘을 결합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본 논문의 Ⅴ장 귀납적 성경연구에서 전술하였듯이 우리의 설교에서도 귀납적인 접근법과 아울러 연역적인 것도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성경연구에서 본문의 역사성과 조직성 등의 파악을 위해서 연역적인 연구가 필요하였듯이 설교의 전달에서도 내용의 조직성과 주제의 선명성, 메세지의 강조 등을 위해서 연역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하겠다.
뿐만아니라 본문의 성격에 따라서 전달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예를들어 복음서의 이야기나 비유를 설교할 때는 귀납적인 방법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서신서의 연역적인 본문을 설교할 때는 기존의 연역적인 전달방법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Ⅷ. 한국 강단에의 적용
A. 한국 교회에서의 설교 유형
한국 교회는 100주년을 넘기면서 전체 국민의 1/4인 25%를 복음화시키는 급성장을 하였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급성장은 세계 교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분명히 한국의 개신교는 말씀과 함께 살고 죽을 수 있는 깊은 뿌리를 전달받아 온갖 시련속에서도 그 뿌리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지탱했을 뿐 아니라 괄목할만한 부흥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말씀이 한국 강단에서 이렇게 중시됨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살펴본 효과적이고 성경적인 설교인 귀납적인 설교에 대한 이해는 아직 극소수이다.
그 말씀 94년 8월호의 설문조사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유형을 말하고 있다. 이것에 따르면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형식은 평소의 경우 제목설교11.69%, 본문설교42.71%, 강해설교32.90%, 주제설교8.80%, 교리설교1.15%, 기타1.73%, 무응답1.10%로 응답했다. 또한 주일 낮 예배의 설교유형에 대한 조사에서, 제목설교15.44%, 본문설교39.74%, 강해설교24.96%, 주제설교6.08%, 교리설교0.49%, 기타1.64%, 무응답11.66%라고 보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