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일제의 침탈 속에서도 복음전파와 함께 교육과 계몽활동을 벌여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앞장서 왔다.또 일부 기독 독립투사들은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과감하게 총칼을 들기도 했다.
`메이지 39년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면서…이토오는 한국 상하(上下)의 희망에 따라 조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습니다.이는 일본 천황을 속이고 한국의 상하를 기만한 일입니다.2천만 한국민은 모두 이토오를 원수로 알고 있습니다'(안중근선생 공판기 중 우덕순의 거사이유 변론).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고종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상설과 이준을 밀사로 보냈다.이상설과 이준은 공식경로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두 사람의 활동으로 일제는 궁지에 몰렸다.그러던 7월 이준이 급서했다.그는 조국을 위해 이역만리에서 활동하다가 순국했다.이준은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고 출소 후에는 연동교회에 출석했다.연동교회에서 그는 김정식 이상재 이원긍 등과 교분을 쌓았고,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했다.상동청년회 전덕기목사와도 친분이 있어 구국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상설 이준의 노력은 강대국의 논리에 밀려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1908년 3월21일 일본통감부 외교고문이었던 미국 외교관 스티븐슨은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황실과 정부는 부패했고,한국인은 우매해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재미 한인단체 대표들이 스티븐슨을 찾아가 기자회견 내용의 철회를 요구했다.그러나 스티븐슨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전명운은 3월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을 향해 떠나려는 스티븐슨에게 총을 발사했다.그러나 불발됐다.두 사람은 서로 엉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전명운과 함께 있던 장인환이 스티븐슨을 사살했다.이 사건은 즉시 세계 언론에 보도됐다.평양출신의 감리교인 장인환은 종신형을 언도받았다가 1924년 석방됐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열사의 묘.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 북만주 하르빈역.네 발의 총성과 함께 “코레아 후라”(대한제국 만세)라는 러시아말이 들려 왔다.열차에서 내린 이토오 히로부미는 절명했다.그리고 서른살의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얼마후 하르빈 남쪽 채가구(蔡家溝)역에서 우덕순이 체포됐다.몸에 육혈포를 지니고 있었고 실탄도 아홉발을 가지고 있었다.육혈포에 장전된 실탄 약실 위엔 십자가 표시가 있었다.천주교인 안중근의 이토오 저격사건 공범으로 예수교인 우덕순도 함께 체포됐다.
우덕순은 독립협회와 상동청년회를 통해 민족운동에 참여했다가 을사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안중근과는 1907년 시베리아의 의병훈련소에서 만났다.
우덕순은 1909년 10월 중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오의 방중(訪中)소식을 들었다.그는 안중근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렀다.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두 사람은 곧바로 하르빈을 향해 떠나기로 결정했다.하르빈의 경비는 삼엄했다.둘은 거사 장소를 채가구 역으로 바꿨다.채가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토오를 놓칠 것에 대비해 따로 떨어져 이토오를 기다리기로 했다.처음엔 우덕순이 하르빈에 가기로 했다.그러나 안중근의 고집으로 우덕순이 채가구에 남았다.그런데 이토오가 채가구역을 지날 무렵 역의 모든 문을 폐쇄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우덕순은 기차가 잠시 섰다 가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체포된 후 안중근은 사형을,우덕순은 살인방조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이에 따라 우덕순은 여순형무소에서 서울로 이송되던 중 그전에 의병활동으로 체포됐다 탈출한 사실이 알려져 다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912년 다이쇼 천황의 즉위 특사령으로 감형돼 1915년 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기독 독립투사들은 어두운 민족현실에 빛을 비추고자 노력했다.그 과정에서 독립투사들은 무력사용도 서슴지 않았다.윤경로교수(한성대)는 “대체로 기독교 항일 무장투쟁운동은 조직적이라기보다 개별적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윤교수는 또 이들이 교회를 통해 근대문명에 눈을 떴고 기독교정신을 통해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사상을 알게 된 점도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무장투쟁을 한 것은 이들 뿐만 아니었다.이토오가 죽은 후인 1909년 12월23일 이완용암살미수사건이 벌어졌다.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은 칼을 든 군밤장수로부터 공격을 받아 어깨와 허리에 부상을 입었다.범인은 이재명이었다.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1910년 9월 찬송가 444장의 `예수가 거느리시니'를 부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는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한 후 안창호의 도움으로 도미(渡美)했다가 귀국,신민회 활동을 했다.당시 국민들은 수도 서울에서 결사(決死)의 행동을 보여준 그의 용맹을 높이 평가했다.
그후에도 1919년 9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강우규는 신임 총독 사이토에게,1921년 김익상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은 일경과의 격투 끝에 자결했다. /전재우 jwjeon@kukmin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