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서 / 허 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지
사실 이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한 시절 자주 웃었고
가끔 강변에 앉아 있었다는 것뿐
그사이 파산과 횡재와
저주와 찬사 같은 게 왔다 갔고
만국기처럼 별의별 일들이 펄럭였지만
우리는 그저 자주 웃었고
아주 가끔 절규했지
철로가 있었고
노란 루드베키아가 있었고
발가락이 뭉개진 비둘기들이 있었고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많았지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단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 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우리는 할 일을 다한 거 같았고
강변에서 일어나기로 했지
기뻐서 했던 말들이
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기
산31번지 / 허 연
숨이 턱에 차오르게 파란 대문집 앞에 서면 채송화 핀 담벼락에 가끔 덜 여문 연사 같은 게 적혀 있곤 했습니다 부끄럽게 부끄럽게 늦게 핀 능소화 한 송이가 맨발로 소나기를 맞고 서 있는 오후 비가 그치면 성치 않은 비둘기들 모여 있는 슈퍼 앞 흙탕물에는 비틀린 무지개가 선물처럼 떠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공사장 크레인이 얼마 남지 않는 골목의 날들을 알려주지만 올해도 아이들은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였습니다 무명의 날들은 그렇게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기억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불콰한 실직자들 낙과처럼 떠도는 산 31번지 그래도 가끔은 공놀이하는 아이들 얼굴에 천사들이 왔다 가곤 했습니다
생은 가엾다 / 허 연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5·18 나던 해 광주로 전학 간
점집에 살았던
아이는 지금도 노래를 잘할까
소풍날 흑백사진은
지금도 웃는데
병 때문에 하루 걸러 학교에 못 왔던
그 아이는 지금 살아 있을까
살아서
그 소풍을 기억할까
꼬리연 잘 만들던 전쟁고아 아랑
파편에 맞아
흉 진 얼굴에 다리 불편했던 아랑
키워주던 어른 죽고
앵벌이에게 끌려갔다는
그는 어떻게 됐을까
사랑도 미움도 없이 성자처럼 죽어갔을까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패배 / 허 연
학창 시절 나와의 주먹질에서 패배했던 친구가
차에 치여 죽었을 때
난 알았다 내가 진 것이었다
상갓집에서 육개장을 앞에 놓고
맥없이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눌러도 고개를 드는 오래된 죄책감에 대해
누구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혼자 미안해하다
다시 영정 사진을 올려다봤다
속엣말로 미안하다고
사실은 내가 졌다고
독한 척했던 내가 사실은 더 겁쟁이였다고
아직 앳된 상주의 어깨를 다독이며
상갓집을 걸어 나오다
원했던 원치 않았든
절대적으로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 그 친구의 얼굴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득의양양한 나를 올려다보던
그 영양의 눈빛
그날 나는 사악했다
상갓집을 나와 걷는 길
등 뒤에서 찬바람이 오고
기억들이 폐지처럼 몰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느 사랑의 역사 / 허연
장마철에는 생각도 따라 젖는다.
제방 너머, 그대는 이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찍 나온 별이 그대가 걸어간 점선을 알려주지만. 부질없고 가엾다 우린. 앞질러 고해를 해버린 그대도, 언제나 죽어가는 꿈만 꾸었던 나도.
반쯤 눈 감은 저녁이 오고 강은 여기쯤에서 숨을 고른다. 뺨에 난 흉터가 붉다. 잡목 숲 그늘에서 부끄럽게 모자를 벗는 누대의 의식, 혹은 후회.
굵은 강물이 루오의 그림처럼
내 눈썹 위를 흘러
북해로 가고 있었다.
지녔던 모든 것이 북해로 가고 있었다.
[ 허 연 시인의 약력 ]
- 1966년 서울 출생.
- 연세대학교 석사, 추계예술대학교 박사 .
-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1995), 『나쁜 소년이 서 있다』(2008), 『내가 원하는 천사』(2012), 『오십 미터』(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2020) 가 있음.
- 현대문학상(2014), 시작작품상(2013) , 한국출판평론상(2008) 수상.
-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연구소 연구원 .
- 매일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