聊齋《畫皮》中的艷麗女鬼
山東長島發現神秘的西洋面具,它將揭開怎樣的秘密?一支史前部落的最後消失,將帶給我們什麼驚人的真相?「我是誰?我從哪裡來?我將到哪裡去?」中華民族的兼容並蓄,給我們帶來怎樣的深度思考?
장도박물관(長島博物館)의 고조선 유물들 글:九山 張 東 均 실증 고조선본토기 저자 카나다 출신 고고학자 존 카터 코벨 박사는 “인류의 기원은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인이다”라고 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장광직교수는 장도 대흑산 북장1기 유적과 청동기문화의 시원을 환발해권인 고조선이라고 하였다.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왜 그들의 관심밖에 있었던 것일까.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박사와 그녀의 아들 앨런 카터 코벨(Alan Carter Covell) 박사가 지난 1978~86년에 걸쳐 쓴 책과 논문의 내용은 단군의 실존 이야기가 담겼다. 아울러 일본의 모든 문화 뿌리는 한국의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여러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를 인정하고 인류의 기원을 한국인이라 말하고 있다. 즉,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인이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는 요동성 근방 만주지역에서 대량의 탄미(炭米)를 발견한데서 시작한다. 이 탄미에 대한 DNA 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닌 교배종이란 것이 판명돼 농사 기술이 대단히 앞섰던 것으로 판명됐다. 이 탄미(炭米)는 군량미로 추정된다.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대단한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그 추정 연도는 무려 1만7000년전이다. 당시 사람의 DNA 검사 결과 평균 수명 1000세에 달한다고 하고 있기도 하다. 아울러 고조선 이전의 환국, 배달국 등 왕국을 인정했다. 이는 노예제도가 없었던 유일한 환국의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인간사상’(人間思想)을 엿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민사상’(天民思想)을 가진 한(韓)민족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 수가 없는 사상이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뒤집어엎으며 왜곡하고 있으나 중국의 시조라는 삼황오제나 일본 천황혈통의 기원은 모두 한국인이다. 중국 문자(文字)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낙빈기 학자도 필생의 대작인 ‘금문신고’에서 ‘동이족이 동양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웠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문명 또한 한국의 문명에서 비롯됐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다. 중국 삼황오제의 역사도 우리 역사이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황실의 경우 고고학, 어법분석기술과 일본고서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일본천황 혈통의 기원은 한국이다. 이는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의 시조(始祖)는 서기전 660년이 아니라 서기 369년으로 천년이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일본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코벨 박사 모자는 이를 잘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문화를 일본 것으로 기만해 왔다는 사실도 폭로하며 오래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알렸다. 일본미술사 연구로 컬럼비아 대에서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한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한국에 까지 와서 깊이 있는 연구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오늘까지 역사왜곡이 문제임을 적시했다. 한국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고대 중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이었다. 일본의 경우는 3세기까지만 해도 석기시대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선진문물을 전수시켰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자기들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이유다. 앞서 칼럼에서 전술했지만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모셔져 있는 36신위(神位)는 모두 다 한국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순수한 일본 고유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궁내에서 소노가미(園神=가야 신라포함의 조상신1위)와 가라가미(韓神=백제조상신 2위)에게 제사를 드렸다. 소노가미(園神), 가라가미(韓神)가 모두 한국인이 아닌가. 그리고 제사 후 대궐사람들 중 누가 한국 춤을 더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까지 한 그들이다.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조일전쟁(임진왜란·壬辰倭亂)시 패전하고 돌아가면서 그들은 단군신상도 자기 조상이라고 일본에 가져갔다. 그들은 지금의 미야마(美山)에 있는 단군사당 교구산구(玉山宮)에 단군신상을 모시고 제사도 한국어로 했다. 해마다 음력 8월 15일이면 단군제(檀君祭)를 지내왔는데, 이때 불리던 축가와 제문 그리고 교구산구(玉山宮) 유래기가 심수관(沈수관)댁의 가보로 전해 오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한이 없다. 일본의 역사는 2600년이 아니고 1600년밖에 안 된다. 현재 일본의 대 신사(大 神社)에 모셔져 있는 600여개의 신주(神主)가 한국인 신주(神主)이기도 하다. ※코벨박사의 이론이 담긴 책 =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저자: Dr. Jon Carter Covell & Alan Covell)
바퀴살 30개로 만든 고조선 수레 장도박물관 (3000여년전)
바퀴살이 30개되는 수레가 그들의 주장대로 서주시대에 만들어진 동이의 제품이라면 당시 동이의 거대세력은 고조선 뿐이다. 발굴된 장소가 장도의 남장산 왕구촌(王勾村)이라고 하였다.그렇다면 장도는 고조선 왕이 살았던 지역임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이 제품은 원형의 크기를 1/2로 축소하여 재현한 모조품이다. 이같은 바퀴살이 30개 되는 수레는 진시황의 수레가 있으나 시대가 진시황 시대보다 거의 1000년을 앞선다.
고조선군의 전쟁도 추정 장도박물관에 전시중인 기병전도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그런데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서 <낙랑대윤장>이란 이름으로 된 봉니가 나타난것이다.관직명이 바뀌었다면 ‘낙선대윤장’이라고 해야 옳지않은가? 따라서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것이다. 이처럼 평양 일대의 유적유물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위조품일것으로 북한 당국자들에 의해서 발표되고 있다.
이중에 색다른 주장하나를 소개드리려고 한다.그것은 중국 본토에서 대만을 거쳐 하바드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중국고고학계의 거두 장광직 교수의 주장이다.장교수는《중국의선사고고학》을 통해서 중국의 청동기문화는 산동반도의 북부 발해만의 고조선으로 부터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고 인정한 사실이다.(상세한 내용은 후술)
한국의 사학자 박준형은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의 문화교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산동지역) 남장산도의 장도현 왕구촌 유적에서 선형동부 1개와 용범 3개가 발견되었으며 용구시 귀성유적에서는 선형동부 1개가 각각 수습되었다. 이들은 요동지역 전기 비파형동검문화의 전형적인 선형동부와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대체로 기원전 8-6세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산동지역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석관묘는 요동지역 쌍방유형의 묘제였다. 이처럼 청동기와 묘제를 통해서 볼때 산동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요소는 바로 요동지역 쌍방유형의 비파형동검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쌍방유형의 문화 주체는 사서상에 보이는 예맥으로 볼 수 있다
산동 장도북장유적1기 6000~3500년 1978년 발굴
삼족조기(三足鳥器)문화의 발상지 북장1기유적(北莊1期遺跡)
산동 장도북장유적1기 6000~3500년 1978년 발굴 북장1기유적 출토 홍갈도 삼족조규 6000년~3500년(신시~고조선) 북장유적출토 홍도규 장도박물관
●국립박물관에 있어야 할 고조선실은 장도박물관에 있었다. ●장도박물관에는 많은 시원문화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신석기시대~고조선시기까지의 유물들은 주목을 받지못한체 개방이 제한되어 있었다.(6000~3500년 전의 유물들) <공중에서 본 장도항> 장도박물관이 있는 장도항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여 2009년 11월 국제도(國際島)란 이름으로 개방하였다.
장도박물관의 전시품들은 모두가 동이문화(東夷文化)와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원류였던 고조선 유물들이다.벽에는 조선이란 이름 대신 동이와 용산문화라고 계시하고 있다.고조선의 유물을 소장하고있는 장도박물관이다.시원문명의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박물관이지만 시설물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그렇지만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고조선의 유물들이 소장되어있으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것이다.근래에 들어 규모가 축소되어가는 느낌을 받는것은 필자만의 기우일까.묘도에 있는 항해박물관도 근래(2006)에 문이 닫겨있었다. 모닥불을 피어놓고 축제를 여는 장면은 그 복장이 인디언들과 흡사하다.이 장면은 해맞이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해를 광명신으로 믿었던것이다.따라서 빗살무늬 즉 햇살무늬는 광명신의 상징이다.이러한 자료는 산동성박물관에도 없었다.
단군왕검은 14세에 웅심국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배달나라의 거불단한웅이자 단국의 홍제의 태자로 들어가 단국을 인수하면서, 웅심국과 단국을 통합하여 조선이라고 하였다.(행촌 이암의 <단군세기>와 이고선의 <조선기> 종합) 조선이라는 명칭은 전욱고양의 동생 대계의 아들 중여곤이 백부 전욱고양의 장자로 들어가면서 탄생되는 이름이다.(중국의 낙빈기와 한국의 김재섭 두 분의 공동 해석) 사당에서 해와 달에게 제사지낸다는 뜻, 즉 오늘날도 무당들이 하고 있는 ‘일월마지’를 나타내는 문자가 조선이라는 문자이다.
장도박물관에 소장중인 청동기와 도철문의 설명에는 예.악.징벌이라는 주기가 있다.제사시 음식을 차려놓고 종(징)소리를 울리는것은 잡귀를 징벌하기 위한것이라고 하였다.따라서 제례악과 청동기의 도철문의 시원은 고조선(장도)으로부터 기원된것이다.제례악이나 아악에서 편종을 사용하는 풍습은 이곳으로 부터 전해진것이다.
진열된 고대유물의 전시배경에는 동이문화 유물임을 계시하고있다.즉 고조선문화라는 설명이다. 박물관장의 상패를 진열전시하고 있다.이 상패들은 장도에서 산출되는 수석들을 각종 수석전시에 출품하여
원시취락지 가옥. 상기와 아주 흡사하며 안에 불을 두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신석시대의 마제석기 춘추전국시대의 동기(銅器) 약 2500여년전 출토지:남장산 왕구(골)촌
중산국의 출토품과 유사한 청동기들이다. 예기와 투호용으로 쓰던 동기투호(銅器投壺). 현재까지 전래되어온 투호놀이는 발원지가 고조선의 장도다. 선사시대 동이족의 유물인 합과 삼족토기 북장1기(北莊一期)로부터 규(鬹: 세발솥)가 나오기 시작했다. 원시유물인 마제석기 원시시대의 삼족정(세발솥)과 햇살무늬 토기 칼을차고 상투를 한 인물상과 석기유물들 동이족은 문자를 발명한 민족답게 죽간을 남겼다.청동제기들의 섬세한 형태는 은나라 출토 청동기들과 구분할수 없을정도로 흡사하다.죽간문자의 형체는 한자(漢字)가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장도의 중요시설 위치도 ♣장도박물관(남장산도).♣장도항해박물관(묘도).♣천후궁(묘도) ♣북장 원시사회촌락유지(대흑산도).♣조류전시관(봉산공원).♣왕구(골)유적지(남장산도).♣수미산 보탑초.(소흑산도)이외 남장산과 북장산에 연성(連城)으로 부르는 성터의 유적이 남아있다.
■ 중국 고고학계가 대문구문화를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유형으로 공식 인정한 것 은 1974년이다.
아래글은 중국의 원로 고고학자였던 장광직(張光直)교수의 유고중의 일부다.원제 《論 "中國文明的起源"》<중국문명의 기원을 논함>이다. 이 유고는 그의 부인 이훼(李卉)여사가 발견하고 진성찬이 정리한 글중에서 장도부분을 발체 하였다.지금까지 고조선의 기원지로 추정되고있는 장도(사문도)는 고고학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놓여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것이다.
요하 중 상류의 홍산과 요동반도 남쪽의 묘도열도를 경유하여 산동반도까지가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 중에 장도의 북장산유적이 있다.장광직은 은허유적을 발굴한 학자였고, 대만으로 건너가 본토에서 옮겨온 유물들을 연구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대학 인류고고학과 교수를 거쳤다.그는 본토에서 학술연구활동중 의견충돌이 심하여 외국으로 전전하지 않았는가 하는 징조들이 보인다.
『요하 중상류와 대능하 계곡의 홍산과 요동반도 남단의 소주산(小珠山)은 의심할 것 없이 동일한 운항괘도 내에 속하고 모두 세석기(細石器)와 빗살무늬 평저형 도기의 북방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소주산과 대문구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묘도열도를 경유해서 서로 상접해 있는데 산동 봉래 이북에 있는 장도현 북장유적(北莊遺跡) 고고학적 유물이 나타낸것과 같다.----여기서 빗살무늬 도기와 대문구 유형이 동반 출현했다.홍산과 앙소는 하북북부및 북경지역에서 이들간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다.
홍산문화에서 최초로 발견된 중국 고고학적 조기단계에서 흑채(黑彩)가 된 홍도(紅陶)가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자는 이곳을 앙소문화의 북방분파(分支)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렸었다. 현재 우리는 이 문화 자체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깊은데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홍산문화는 요하계곡을 본체로 발전했고, 또 신락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해 나왔을 것이되 그 발전 과정중에 앙소문화를 포함한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예를 들어 홍정완식(紅頂碗式)도발(陶鉢) 은 앙소문화의 후강유형(後崗類形) 도발(陶鉢)과 서로 닮았고,차도중에서 평행선문(平行線紋).평행사선(平行斜線)조성 삼각형문(三角形紋)같은 종류의 후강유형 채도와 서로 닮았다.불룩형 장식에 있는 원복관(圓腹罐)도 반파유적의 불룩형 장식 첨저관(尖底罐)과 유사하다.』
다음은 고조선의 소도였던 묘도의 천후궁을 찾았던 답사기다. 2008년 04월 04일 장도를 다시 찾았다. 여명을 뚫고 여덟시에 봉래항에 도착하니 청명절 날씨답게 쾌청하다. 이해부터 중국은 청명절을 공식 휴일로 지정했다. 북송시대 장택단의 풍속화 청명상하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예부터 청명절은 이들 고유의 민속놀이 풍속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많은 단체관광객들이 봉래항에 북적거리고 있었다. 봉래와 장도를 잇는 선박은 30분 간격으로 운항하고 있다. 장도에 도착하여 , 모터보드로 묘도의 마조묘(馬祖廟)를 찾았다.지금의 마조묘란 옛날 천후궁이 있었던 마고묘(麻姑廟)란 말이다.
봉래항에 대기하고 있는 모터보드다.묘도나 흑산도는 선박 항해일정이 뚜렷하지 않으며,꼭 들려야 될 경우 어선이나 이와 같은 모터보드를 전세로 이용해야 한다
용봉산 현응궁(龍鳳山 顯應宮) 항해박물관과 마조묘가 있는 현응궁 입구다.보이는 것과 같이 휴일임에도 폐가처럼 썰렁하다.우람한 건축물로 봐서 이렇게 방치할 내용이 아님에도 부실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은 분명,노출시키기 껄끄러운 숨은 사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이 현응궁은 2000년도 초까지 서있던 천후궁(天后宮)앞을 가리고 세운 새로운 궁이다.필자는 이미 2000년초 답사시 촬영해둔 천후궁 사진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하마트면 고조선의 소도였던 천후궁의 흔적이 사라질뻔 하였든 사건이다.
백곡왕(百谷王)이란 무슨뜻일까.2001년까지도 이곳은 천후궁(天后宮)이라고 불렀다.
묘도 천후궁및 사문새 성지 (서기 2000년 촬영)(이 건물은 앞을 가리기위한 새건물을 새우고 다시 현응궁(顯應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묘도천후궁및 사문새고성지」란 동판도 철거되었다. 천후성모(天后聖母)상의 좌우에는 세가지의 동물이 시립하고 있는데 첫째가 봉황,두번째가 용, 세번째가 학이다. 전체를 담아본 사진인데 닷집에 용이 그려진걸 볼 수 있다.이 건물은 후대에 재건축된것이다. 현응궁(顯應宮=전 천후궁) 맨 마지막에 있는 마조(마고)상이다.이 청동으로 제작된 마조(마고)상은 문화대혁명 당시 코 부분에 약간의 손상을 입어 보완수리를 거친 후 금분을 입혀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천후궁에서 원상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는 것은 이 마조상(麻姑像) 하나 뿐이다.그들은 근래 천후궁을 현응궁으로,마고묘(麻姑廟)를 마조(馬祖廟)로 명칭을 바꾸었다.그렇게 보면 현응궁은 마치 환웅궁이 변한것이 아닐까.이러한 행위들은 모두가 역사적 흔적을 지우기 위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중국 하남 박물원에 소개된 “동이”
-> 하남성 개봉시에 위치함(1927년 개원)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东夷人是中华民族先民的主干部分 동이인(東夷人)은 중화민족 조상의 주요한 줄기부분(主幹)이다. 张发颖在《凤图腾东夷人及其文化贡献》〈《社会科学辑刊》2001年第2期〉一文中认为东夷文化范围的遗存遍布燕山南北,包括辽宁阜新查海文化,沈阳新乐文化,山东大汶口文化,河姆渡文化以及其后的赵宝沟、兴隆洼、牛河梁及殷商文化,东夷文化以凤为图腾,不是统一的文化体系,而是对有记载以来生活在这地区先民的泛称,以凤为祖图腾,繁衍为以各种鸟为子图腾的北方凤图腾的东夷先民,都是在燕山山脉东夷文化圈中发展起来的。从伏羲到夏商二代,起主导作用的也是东夷文化。东夷族人发明了带羽毛弓箭,创造了文字,制作青铜器与冶铁,制造舟、车,发展农业与治水。为中华民族文化的发展和推进,起到了关键和决定性作用,华夏文明是龙凤后裔融合而后共同创造的。 [번역] 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시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문화의 유적분포는 - 연산(燕山)의 남북과 - 료녕(遼寧)의 부신사해문화(阜新查海文化)를 포함해서 - 심양(沈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 - 산동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하무도문화(河姆渡文化)와 그 후의 - 조보구(趙寶溝), 흥륭와(興隆洼), 우하량(牛河梁) 및 - 은상문화(殷商文化)까지 동이문화는 봉황(鳳凰)을 토템으로 하였다.통일된 문화체계는 아니지만 문헌에 기록된 이후의 생활은 이 지구(地區)의 조상들의 범칭(광범위한 동이문화)이다.
중국에서 단독 조류박물관도 이곳 장도에 있다 이곳에는 박제되어 진열된 조류가 약 230여점 소장되어있다.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외에도 중국본토에서 대만을 거쳐 하바드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중국고고학계의 거두 장광규 원로교수는 《중국의선사고고학》을 통해서 중국의 청동기문화는 산동반도의 북부 발해만의 고조선으로 부터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고 인정한바 있다.
다음은 묘도에 있는 항해박물관의 전시품을 소개한다. 항해박물관에는 천문도가 전시되고있다.
항해박물관에는 고조선인들의 야간 항해시 북두칠성을 관측하는 그림이있다.
묘도 항해박물관소장 도제 선박(陶製船舶) bc108년 이후) 한나라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로 만든 배의 모조품이다.다만 시대만 한나라였지 역시 배의 발명은 고조선이었다.한나라가 바다로 진출한것은 위만조선 이후였다.(bc108년 이후) 항해박물관에 전시된 항해의 시원에 대한 설명서이다.항해는 깊은 물속의 자원을 채굴하고,어업등.교통로로 이용하였다.이때 비로소 인류는 바다의 주인이 된것이다.동쪽 18000여km에 태평양이 있고,발해,황해,동해와 남해가 어울려있다.지남침의 발명으로 인류가 항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장도는 인류항해 선주지로서 누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발해해협의 장산열도(장도)는 우리나라 항해의 발원지다 또한 옛 등주항(봉래)의 외항이다.이 항해는 중국고대의 남쪽으로는 남양과 통하고 북쪽으로는 조선과 일본등 상호 왕래하던 항로였다. <항해박물관의 해시 성시도>.발달된 수로를 통하여 모여든 선박들이 성시를 이루고있다.이곳을 《산해경》에서는 해중에 대인들의 저자가 있다고 하였다.더불어 이곳은 신시의 발원지이고 하늘에 천제를 올리던 마고의 사당인 소도가 있었다.일명 천후궁(天后宮)궁이라고 부른다 灰褐陶鬹 2008年01月22日(火)更新
新石器時代 大汶口文化晩期 北荘一期
보탑조에서 보는 일출광경
연무에 휩싸인 장도의 남장산 장도역사박물관 북장유적출토 홍도인물상 6000년~3500년전(신시~고조선) 新石器時代 大汶口文化 北荘一期
秦時長島,屬齊郡,漢時屬東萊郡,唐神龍三年(703)始屬登州蓬萊縣,1929年之後,長島多次被劃為“長山島特區”。1956年5月成立長島縣,後又與蓬萊、黃縣三縣合一併稱蓬萊。1963年恢復長島縣建置,隸屬煙臺市至今。
昌意降處若水,生韓流。韓流擢首、謹耳、人面、豕喙、麟身、渠股、豚止,取淖子曰阿女,生帝顓頊。——《山海經.大荒經》
路 史 ) , 迄 不 能 明 。 然 據 繹 史 卷 七引 帝 王 世 紀 云 : 「 顓 頊 生 十 年 而 佐 少 昊 , 二 十 而 登 帝 位。 」 則 郝 疏 所 謂 「 少 皞 即 顓 頊 之 世 父 , 顓 頊 是 其 猶 子 」, 大 致 可 信 矣 。 經 文 「 孺 帝 顓 頊 」 之 「 孺 」 , 郝 釋 為 「孺 養 」 , 當 無 問 題 也 圖文]6000年前人皮面具 千年女屍重演畫皮
聊齋《畫皮》中的艷麗女鬼 山東長島發現神秘的西洋面具,它將揭開怎樣的秘密?一支史前部落的最後消失,將帶給我們什麼驚人的真相?「我是誰?我從哪裡來?我將到哪裡去?」中華民族的兼容並蓄,給我們帶來怎樣的深度思考? 발해연안문명은 고대 동방문명의 중심, 이것은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사의 비밀>의 저자 이형구교수의 주장이다. 1) 한국 민족·문화의 원류 최근, 중국에서는 만주 지방의 고대 문화를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표현하는데, 필자는 일찍이 발해(渤海)를 중심으로 중국 산동반도.요동반도.한반도를 포함한 발해연안(渤海沿岸)의 고대문화를 ‘발해연안문명(渤海沿岸文明)’이라 명명하였다. 유럽에서는 지중해(地中海)를 중심으로 서양문명이 탄생한 것처럼 동양문명의 중심은 발해연안으로 탄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문명 즉, 이집트문명、그리스문명、로마문명이 일어나 서양문명의 요람이 되었듯이 동양에서는 발해를 중심으로 발해연안의 산동、요동、한반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예전에 동양문명의 중심을 황하(黃河)문명으로 보았는데, 황하도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발해를 ‘동양의 지중해’의 개념으로 보았다. 여기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山東)반도、서부의 하북(河北)성 일대、북부의 요녕(遼寧)성 지방、북동부의 요동(遼東)반도와 동부의 길림(吉林)성 중남부 그리고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l 발해연안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와 적석총은 시베리아보다 1000년 이상 빠르며 한반도 발굴 유적·유물들과 형태면에서 일치한다.
이상은 장도박물관에 소장중인 북장1기(北莊1期)의 출토품들은 제외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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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산선생님. 구산선생님이 쓰신 책 두권을 읽고 나서 나는 언제 묘도열도와 장도를 가볼 수 있을까,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내용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봉니라는 말은 회원님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봅니다. 봉니(封泥): 공문서를 봉인하기 위하여 이를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점토덩어리를 붙이고 인장을 눌러 찍은 것이다.
그리고 존 카터 코벨 박사는 여자 학자이신데 그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녀라고 해주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투호노리는 투호놀이라고 해주셔야 바른 맞춤법이 됩니다. 다음 글 쓰실 때 참고하시죠.
매서운 눈으로 지적하신 두가지 문제는 즉시 수정하였습니다.장도답사문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오랫동안 잊쳐졌던 우리민족의 요람은 머지않아 그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습니다.그곳에는 마고사당이 있었고,천제를 올리던곳을 묘도(廟島)라 부르고 있습니다.이곳에는 중국 최초의 항해박물관이 있습니다.
발해 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의 저자 이형구 교수가 추정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 신라의 황금 장식은 스키타이로부터 전래된 것이 아니라 발해 연안에서 발생한 황금 문화가 부여, 고구려를 거쳐 전래된 것이다라는 주장은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시간날 때 신라의 금관과 그 양식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동이족이 남겼다는 죽간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문이 아닌 고대글씨라면 우리의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재야 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구산선생님. 덕분에 조선상고역사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답사대장 장순복
황금문화에 대한 글을 올려주시겠다니 기대가 됩니다.그렇게 많은 금들을 한반도에서 생산하였다면 후대까지 그 기록들이 남아있을법한데 불행하게도 그러한 기록들은 볼수도 들을수도 없습니다.그리고 죽간에 대한 사진이 조금은 애매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게 유감입니다.촬영당시 좀더 심도있게 촬영할걸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아시다 싶이 박물관에서 촬영하기가 좀 어려워야 말이지요.그렇지만 다음 답사시에는 좀더 신경을 쓸것입니다.
서양의 해양신앙은 해상 패권 쟁탈의 海神(해신) 포세이돈으로 시작되고 동양의 해양 신앙은 媽祖(마조)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람이 많은 마을 어귀에는 거대한 사자상을 세워 놓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속칭 風獅爺(풍사야)라 부르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대부분 媽祖廟(마조묘)와 풍사야가 있습니다. 구산선생님께서 장도박물관에서 보셨던 마고여왕을 모신 천후궁이 마조묘의 시원이라면 동이족의 토템신앙이 만들어낸 봉황이야말로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산선생님의 고대사 추적엄지 척입니다. 답사대장 장순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