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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부 다이어리 - 백두대간 자동차여행 上] 10년만의 차박 대간 여행기… 차박하고 산행하고 고개 기점 당일산행
월간산 2021.06.21
34세 그때와 44세 지금… 배낭은 그대론데 마음은 무거워졌다
10년 전 홀로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삼마골재에서 야영했다. 다음날 아침 멋진 운해를 만났다.
2011년 34세, 혼자 백두대간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매주 야영배낭을 메고 백두대간으로 향했다. 5월에 시작한 길은 10월에서야 끝났고, 17구간에 걸쳐 5개월 반이 걸렸다.
10년이 지난 2021년 44세, 다시 백두대간을 찾았다. 이번엔 자동차였다. 백두대간 자동차 여행은 간단했다. 차박을 하면서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를 넘는 것이다. 차로 넘을 수 있는 백두대간 고개를 찾아보니 모두 46곳. 백두대간 사이에 낀 고개까지 하면 60곳쯤 된다. 길을 확장해서 멀리 돌면 80곳까지 나온다. 내가 넘은 고개는 총 52개다. 폐쇄된 세 군데는 넘지 못했고, 두 군데는 깜빡하고 가지 않았다.
그해 여름 소백산에서 고치령 가는 길의 필자.
위협적으로 변한 지리산
누군가 자전거로 백두대간 고개를 넘나드는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솔깃했다. 왠지 자동차로 백두대간 고개 여행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 계획은 일단 백두대간 주요 고개를 자동차로 넘고, 산행은 하루에 하나, 기본 차박에 어쩌다 숙박하는 것. 간단하면서도 비대면 여행으로 손색없었다.
코로나로 칩거만 하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비가 그친 하늘은 놀랍도록 눈부셨다. 천은사 방향으로 향하는데 노고단과 종석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뻗은 차일봉 능선을 보고 얼른 차를 세웠다. 익숙한 산이 주는 감동에 꾸벅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제가 다시 왔습니다.’
성삼재는 바람이 찼다. 4월이면 따뜻하다 못해 더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아직은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어서 찬바람에 손이 시렸다. 24세 때부터 이 산을 참 뻔질나게 다녔다. 나는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이면 산에 빠졌고, 그 산이 지리산이었다. 20대 중반의 나에게 산은 종교 이상이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산은 그대로지만 그 산을 좋아하던 나는 변했다. 오랜만에 찾은 지리산은 낯설었다. 친근했던 산은 각종 금지로 가득했다. 내게는 그 모든 금지가 위협으로 보였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고 지켜야 할 게 있다는 걸 안다. 한쪽에서는 산을 보호하겠다며 산객들을 잡고, 한쪽에서는 지역 경제를 위해서라며 케이블카를 서두른다. 그런 모순을 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답답하다.
한창 지리산을 다닐 땐 굳이 노고단 정상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여기밖에 올 곳이 없다. 노고단 정상에선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왕시루봉과 차일봉 능선, 고리봉과 만복대, 서북능선과 바래봉. 반야봉은 알겠는데, 저 뒤의 작은 산은 어디일까. 촛대봉과 천왕봉? 당황스러웠다.
척하면 척, 하고 알아봤어야 할 산인데 그러지 못했다. 저 노리끼리한 산이 히말라야의 고산마을과 비슷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 천왕봉인 줄 몰랐다. 그래놓고는 천왕봉이 어디에 있는지 엉뚱한 산만 더듬고 있었다.
10년 전 당시 25㎏쯤 되는 배낭을 메고 중산리부터 백두대간을 시작했다. 34세,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특별한 생일을 맞고 싶었기에 여름휴가를 모두 털었다. 지리산부터 덕유산까지 1구간으로 끊고, 보람찬 10박11일간의 여정을 이어갔다.
보름간의 차박 여행 중 나의 잠자리. 나의 차박은 간소하다.
화려하지 않은 나만의 차박
나의 차박은 요즘 SNS에 등장하는 사진들처럼 화려하지 않다. 낭만과는 거리가 있다. 차 안에서 물티슈로 세수를 하고, 간단한 음식을 먹었다. 야영용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 속에서 잤다. 짐은 산행에 필요한 것과 갈아입을 옷, 간소한 취사도구와 약간의 인스턴트 음식 정도였다. 텐트에서 자동차로 바뀌었을 뿐, 불편한 여행인 건 마찬가지였다.
여행 첫날인데도 아침에 너무 여유를 부렸나보다. 생각보다 노고단까지 오래 걸렸고, 정령치를 넘고도 여원재를 빼먹고 말았다. 저녁을 편의점 음식으로 해결한 것도 그랬다. 첫날이라 실수투성이 하루였지만 괜찮다. 여행이 완벽할 필요는 없으니까.
4월의 밤이 이렇게 추운지 몰랐다. 산에 다닐 때는 당연히 동계 침낭을 챙겼는데, 차박이라고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은 장수를 거쳐 무룡고개로 안내했다. 번암면에 도착해서야 복성이재를 넘지 않은 게 생각났다. 방향을 틀어 인월 아영면으로 향했더니 공사 중이다. 내비게이션이 먼 길을 돌아오게 한 이유가 있었다(아영면에서는 복성이재를 넘어 마을로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무룡고개에서 만난 지인은 몇 년 만에 보는데도 엊그제 본 것처럼 편했다. 나는 스물한 살 때부터 산에 다녔고, 산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희한하게도 아직까지 좋은 인연으로 남은 사람은 어릴 때 만난 분들이다. 지리산에서 만난 이들도, 백두대간에서 만난 이들도 끝났다. 자주 몰려다니며 산행하던 이들도 모두 끝났는데 그들만 여전했다.
자동차 여행 중 백두대간 비조령에서.
백두대간은 영취산이지만 산불방지기간이라 장안산으로 향했다. 능선에 도착하자 낯익은 산이 보였다. 왼쪽 천왕봉부터 오른쪽 반야봉까지, 한 줄기로 보이는 지리산 주능선. 그제야 생각났다. 장안산에서 지리산이 보인다는 사실을. 뒤돌아보니 덕유산도 보였다. 백두대간 줄기는 백운산을 지나 남덕유로 이어졌다. 그걸 알아볼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산행 시에도 마스크가 필수다. 혼자 걸을 때는 마스크를 벗었다가도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재빨리 마스크부터 썼다. 마스크를 쓰고 산행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여름이 되어도 마스크를 쓰고 산행해야 할 텐데, 세상이 요지경이다.
걸어서 할 때는 몰랐던 길을 자동차로 달려보니 달랐다. 마을과 마을을 지나고, 산 밖에서 산을 보는 것도 좋았다. 10년 전 육십령을 지날 때가 백두대간 8일째였다. 3일 동안 비를 맞고 걷는 바람에 육십령식당에서 민박을 했다. 그때 한 지인이 육십령까지 통닭과 맥주를 사다 주었다. 문득 내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고마웠다.
빼재(신풍령)는 양방향 모두 공사 중이라 길이 막혀 있었다. 차박할 곳을 찾다가 일단 무주읍으로 향했다. 작년에 무주로 귀촌한 지인이 있었다. 하지만 봄밤은 생각보다 추웠고, 바깥에 오래 있기 힘들었다. 지인이 핫팩을 잔뜩 챙겨줬지만 이번 차박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봉화에서 민들레 비빔밥에 달래 된장국을 만들었다.
맥주 한 캔의 행복
무주에서 아침을 먹고 곧장 소사고개로 왔다. 10년 전 나는 지리산부터 덕유산까지 걷고, 소사고개에서 1구간을 끝냈다. 하루 더 갈 수 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 없었다. 무주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어찌나 심란하던지. 이 길을 끝까지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덕산재 가는 길에 보이는 산은 초점산과 대덕산이었다. 산 아래서 보니 더 근사했다. 덕산재 휴게소는 폐쇄되어 을씨년스러웠다. 길이 이어지는 곳마다 매달린 노란색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해 5월, 1구간을 끝낸 지 보름 만에 결국 다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소사고개부터 추풍령까지 3일간 걸었다.
하늘은 파랗고, 봄은 부드러웠다. 해인리에서 시작한 길은 가파르게 올라갔다. 3.2km를 주야장천 올라가기만 했다. 삼마골재에 도착해서야 잠시 숨을 골랐다. 백두대간을 걸을 땐 백수리산 가는 길이 공포였다. 안개 자욱한 산길. 점점 가까워지는 괴상한 소리. 갑자기 튀어나온 너구리 2마리 때문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고라니 소리라는 걸 알았을 때의 허탈감이란. 그날 소사고개에서 시작한 길은, 바로 여기 삼마골재에서 끝났다. 텐트 치고, 저녁 겸 아침으로 밥을 짓고, 그 밥을 아껴 먹느라 혼났다. 종일 걸은 뒤에 먹는 밥은 달고 맛났다.
오도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박했다. 평일의 백두대간 고갯길은 차도 사람도 드물다.
삼도봉에서는 백수리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보였다. 민주지산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산악회를 떠나 산행독립을 하겠다며 처음 찾은 곳이 민주지산이었다. 한겨울 혼자 눈 속에서 야영하며 낭만을 즐겼던 곳. 이제는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우두령과 괘방령을 지나 추풍령으로 왔다. 3일에 한 번은 숙박업소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카리브모텔은 대간꾼들에게 휴식처이자 이정표가 되는 곳이었다. 뜨거운 물에 빨래를 하고,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가볍게 맥주도 한 캔 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여행 중에 느끼는 행복은 매번 이렇게 사소했다.
자동차 여행 중 죽령에 차를 세워 두고 소백산을 올랐다. 죽령에서 연화봉으로 이어진 임도.
10년이 흘렀지만 대간 종주 현실은…
김천에서 상주로 이어지는 구간은 백두대간에서도 가장 낮은 지역이다. 고개와 고개 사이가 가깝고 많기도 했다. 작점고개, 큰재, 개머리재, 지기재, 신의터재, 화령을 차례로 지났다. 나의 백두대간 첫 구간은 힘듦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김천과 상주를 지나면서 의지가 확고해졌다. 완주를 의심하지 않았고 당연한 것처럼 매주 산으로 향했다.
비조령을 지나 화북으로 향했다. 이번 산행은 속리산 문장대다. 꽤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눈이 즐거우니 혼자여도 지루하지 않았다. 숨이 차서 헉헉거려도 산행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이랄까.
10년 전 하늘재 산장.
문장대가 처음은 아닐진데 처음인 것처럼 생소했다. ‘이런 계단이 있었네’하면서 올라갔다. 정상에선 백두대간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밤치(밤티재)로 이어지는 능선은 비법정 구간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에선 계속 같은 방송이 나왔다. 통제 구간이니까 돌아가라는.
여전히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잇기 위해 도둑산행을 하고 있다. 비법정 구간을 우회하는 이들도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야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무조건 막는 것보다 대체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굳이 야간산행 등을 강행하며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될 텐데.
1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감시카메라 등이 설치되면서 단속만 강화되었다. 나는 백두대간을 잇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비법정 구간을 우회하는 이들을 추켜세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이 아름다운 길이 끊겨 있음이, 백두대간 일부가 불법이 되는 게 아쉬울 뿐이다.
행여 내가 백두대간을 다시 하게 된다면, 되도록 야영을 하고 싶지 않다. 비법정 구간은 돌아서 가고 싶다. 가슴 졸이며 하는 산행은 한 번이면 족하다. 이제 백두대간을 완벽하게 잇는 것에 미련이 없기도 하다.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유유자적 한량 스타일로 다니고 싶다.
늘재와 버리미재의 출입통제 안내판을 씁쓸하게 보다가 대야산주차장으로 왔다. 오후 5시가 되면 어디든 멈췄다. 화장실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워 놓고 차박 준비를 했다. 그 사이 주차장에 있던 차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넓은 주차장에 혼자인데다가, 바람까지 불어서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산에선 혼자여도 불편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차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피아골로 올라 대야산 정상에 섰다. 대야산이 이렇게 멋졌었나. 백두대간을 할 때는 좋은 줄 모르겠더니, 이제야 좋은 게 보인다. 대야산에서 버리미재로 이어지는 길 역시 통제구간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악착같이 백두대간을 잇고 있다. 아무리 감시를 해도 여간해선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감시하는 자도, 감시를 피하려는 자도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를 바란다.
하늘재 산장이 있던 곳은 지금 공터가 되었다.
밤새도록 들리는 이상한 소리
문경 가는 길에 이화령에 들렀다. 10년 전, 한여름에 희양산을 넘어 배너미평전에서 야영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와중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었다. 평소엔 꿀맛 같던 밥이 그날따라 모래알 같았다. 종일 너무 힘들게 걸었나 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계곡 쪽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자꾸 들렸다. 돌멩이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크게 틀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아침까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결국 조령산까지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이화령에서 돌아갔다. 백두대간이 끝난 후, 그 지역 사람에게 6·25 때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배너미평전은 아픈 곳이었다.
문경에서 며칠 쉴 생각이었는데 이틀간 비 소식이 있었다. 날 좋을 때 조금이라도 이동하는 게 좋겠다 싶어 하늘재로 향했다. 지난 가을에 본 하늘재 산장은 그 사이 철거되었다. 이제는 공터가 되어 벤치 2개만 덩그러니 있었다. 왠지 아쉽고 허전해서 벤치에 앉아 그대로 있었다.
자동차 여행이라고 해서 모든 길을 한 줄로 이을 생각은 없었다. 가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적당한 길로 고개를 찾는 것도 괜찮았다. 길은 내비게이션이 알려 줄 테고, 나는 어떤 길로 갈지 선택만 하면 된다.
벌재를 지나 경북과 충북의 경계 저수령에 왔다. 언제부터인가 백두대간 안내판을 만날 때마다 반가웠다. 고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고 보면 산림청은 백두대간 정비를 위해 애를 많이 쓴다. 세계적인 트레일로도 손색이 없는 백두대간. 머지않아 당당하게 걸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비가 오는 동안 단양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냈다. 코로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행동에도 제약을 주었다. 하지만 빨래를 하고 따뜻한 방에서 지낸 건 잘한 일이었다.
단양에서 죽령으로 가는 길, 소백산이 하얗다. 꽃이 피고 아기 이파리가 나와도 가끔은 겨울이 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면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소백산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입맛을 다시며 죽령에 차를 세웠다. 처음엔 비로사에서 비로봉까지 가장 짧은 코스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상고대를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조금 더 걸어 연화봉까지 가보자.
맑은 하늘에 푸른 초원의 소백산. 이때부터 소백산을 좋아하게 됐다.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유독 겨울산행을 좋아했다. 눈 소식에 마음이 들썩 거리면 주저 없이 배낭을 꾸렸다. 그중에서도 소백산은 황홀한 눈산행을 했던 곳 중 하나다. 그날은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죽령에서 비로봉까지,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나는 눈의 여인이 되어 걷고 또 걸었다. 모두 내려간 다음에도 홀로 산에 남아 밤을 보냈다. 이제는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오래전 일이다.
연화봉까지 갈 것도 없었다. 나는 제2연화봉에 만족했고, 대피소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대피소에선 도솔봉이 시원하게 보였다. 오래전 걸었던 산을 보니 가슴이 벅찼다. 비로봉과 연화봉도 한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와서 보는 산은 한없이 크고 멀어 보였다.
취사장 앞에서 뭐 좀 먹을까 했더니 바람이 너무 찼다. 건물에 붙어 있는 얼음 부스러기가 수시로 날아왔다. 바람은 얼른 내려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 왔던 길로 향했다. 이날 단양엔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고치령으로 가는 길에선 괜히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 백두대간을 하겠다면, 이 길을 따라 지원해 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고치령을 지났던 그해 여름, 소백산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찬란했다. 파란 하늘에 조각구름, 푸른 초원엔 야생화가 가득했다. 소백산을 좋아했던 게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혼자서 종종 찾을 만큼, 이 산이 좋았다.
자동차 여행 중에 오른 멋진 산세의 대야산 정상부.
마구령은 고치령에서 멀지 않았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인지 통행량이 제법 있었다. 자동차로 백두대간 고개를 지나면서, 나는 점점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하지만 야영 없이 지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과연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할 수 있을까? 야영 짐을 메고 일시종주를 하면 얼마나 힘들까? 결정된 것도 없으면서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10년 전 34세의 나는 힘듦을 생각하고 시작하지 않았는데, 44세의 나는 힘듦을 먼저 생각했다.
도래기재를 넘으려다가 봉화에 들렀다. 감사하게도 한국산악회 변기태 회장님이 손님용 작은 집을 내주셨다. 나는 민들레를 뜯어 비빔밥을 만들고, 지난번 문경에서 캔 달래로 된장국을 끓였다. 김광석 노래를 틀어 놓고 맥주 한 캔도 잊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곳곳엔 산악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익숙하고 편했다. 따뜻한 난로를 상상하며, 한겨울 산악인들과 둘러 앉아 산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멋진 공간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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