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효(張興孝)
자는 행원(行原), 호는 경당(敬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태사(高麗太師)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이고, 사인(士人) 장팽수(張彭壽)의 아들이다.
증(贈) 지평(持平)의 묘지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19)에 공이 태어났다. 자질이 순후하고 뜻이 견고했으며 배우기를 독실히 하고 실천에 힘썼다. 젊어서부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학문하는 방법을 들었다. 거경(居敬)과 명리(明理)를 대요(大要)로 삼아 마침내 과거 공부를 물리치고, 《소학》ㆍ《근사록》을 존신(尊信)하면서 여러 경전에 두루 통하였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였으며 용맹을 떨쳐 곧게 전진하여 개연히 구도(求道)를 자신의 책무로 여겼다. 김 선생이 자주 칭찬하기를, “이 사람은 훗날 크게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안색을 온화하게 하였으며 어버이 말씀에 순종하였다. 추울 때 따뜻하게 해드리고 더울 때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일, 맛있는 음식으로 받들었던 일 등의 절차는 한결같이 《소학》을 따랐다.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부모의 초상을 겹쳐서 당하였다. 마침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상례(喪禮)를 예법대로 극진히 하여 장례(葬禮)에 때를 놓치지 않았다. 아우 흥제(興悌)와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김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다시 서애(西厓) 류 선생(柳先生)을 따라 배움을 청하여 강마(講磨)하기를 오래 하자 조예(造詣)가 더욱 깊어졌다. 일찍이 밤에 류 선생을 모시고 있었는데,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불의 빈[虛] 곳이 이(理)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허(虛)는 실(實)과 상대되는데 이(理)는 상대가 없습니다. 허(虛)로써 이(理)를 삼을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니, 류 선생이 즉시 응답하기를 “허(虛)에는 허(虛)의 이(理)가 있고 실(實)에는 실(實)의 이(理)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의 추대와 인정이 매우 대단하였다. 늘 책상을 마주하여 마음을 보존하고 천성을 기르는 방도에 대하여 지적하여 말해 주었으니, 실증하여 바로잡는 일이 많았다.
또 일찍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생기지 않은 때와 정(靜)한 가운데 모름지기 물(物)이 있다는 내용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반복해 변론하였다. 한강 선생은 공의 학문에 마음으로 깨달은 바가 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복하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
공은 한결같은 뜻으로 몸을 숨겨 드러내지 않으려 하여 산수에 은거하면서 세상일을 사절하였다. 자리 오른쪽에 ‘경(敬)’ 자를 크게 쓰고, 이를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평상시에 늘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에 절하고, 마치면 주자(朱子)의 화상(畵像)에 절한 다음 물러나 서실에 들어갔다.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좌우에 있는 서적을 읽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깨닫지 못하면 밤새도록 연구를 하느라 잠을 자지 않았고 깨달음이 있으면 비록 한밤중이라도 반드시 촛불을 켜고 글로 써 두었다. 또 자리 곁에 책자(冊子)를 두고 자신의 말을 기록하여 때때로 꺼내 보면서 공부한 정도가 생소한지 익숙한지를 증험하였다.
날마다 관동(冠童)과 함께 예를 익히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였으니 가슴속이 상쾌하였다. 50여 년 동안 이처럼 하면서 발자취를 성부(城府)에 들인 적이 없었으므로 이웃 마을에서조차 그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였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마저도 자주 떨어졌지만 기뻐하여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을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학도가 늘 수십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각각 그 자질에 따라 가르쳤다.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독서하지 않은 자와 어찌 조금이라도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도를 떠날 수 없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고기가 물에서 나오면 죽고, 사람이 도를 떠나면 귀신이 된다. 여러분은 어찌 물고기가 큰 골짜기에 있지 않고 물에서 나오는 것을 배우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심(心)을 근원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만물이 흙을 근원으로 하는 것과 같다. 진실로 기름[養]을 얻는다면 이[理]가 자라지 않음이 없고 사물이 왕성하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기름을 잃어버리면 이치가 없어지지 않음이 없고 사물이 손상되지 않음이 없다. 고요할 때 존양(存養)하고 움직일 때 성찰(省察)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은, 그 공부가 《소학》에 근본을 두고 정(正)으로써 함양하는 것이 곧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역학계몽(易學啓蒙)》에 대한 호옥재(胡玉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다가 오류가 있음을 한탄하여 반복해서 자료를 살피고 연구하였다. 공력을 쌓은 지 20여 년 만에 마침내 원리에 근거하여 낱낱이 사실을 밝혀내어 12개의 도(圖)로 만들었다. 12회(會)에 12월(月)을 배분하고 24기(氣)를 그 속에 나누어 배열하여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라고 명명하였다. 건(乾) 이상의 6회(會)는 복희(伏羲)의 선천도(先天圖)를 활용하였고, 구(姤) 이하 6회(會)는 문왕(文王)의 후천도(後天圖)를 활용하였다. 이는 이전의 성현이 말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공이 처음으로 추산하여 깨달았으니,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보고 탄복하였다.
숭정(崇禎) 계유년(1633, 인조11) 봄에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임금의 명이 이르기도 전에 공이 생을 마쳤다. 이날은 2월 7일이었으니, 향년 70세이다. 병으로 누워서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으나 정신은 혼란하지 않았다. 임종하던 날 밤에도 여전히 《맹자》 〈양심장(養心章)〉을 외우면서 문인들에게 거듭 타이르고 신신당부하였다. 또 이르기를 “내 꿈에 하늘에서 관이 내려왔으니, 분명 일어나지 못할 조짐이다.”라고 하고 곧이어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천등산(天燈山)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비는 독실치 못함을 근심하고 夫士患不篤
일찍 알려지지 않을까 근심 않네 不患聞之不早
아, 생각건대 경당은 於惟敬堂
도를 실천하는 데 용감하였네 勇於蹈道
학봉에서 퇴계로 거슬러 올라 繇鶴泝陶
거의 큰 스승이 되었다네 幾卽大方
서애 선생에게서 바로잡았고 旣訂之厓
또 한강 선생에게 질의하였네 又諏之岡
당시 공부에 독실하였지만 疇篤其工
나라에 등용되지 못하였다네 而罔有獲
〈일원소장도〉를 남겨서 一元有圖
후세의 현인을 기다렸다네 以竢來哲
홍여하(洪汝河)가 지었다.
〇 선생에 대한 제문
삼가 생각건대 선생은 恭惟先生
타고난 기질이 맑고 깊어 禀氣清淑
물처럼 맑고 거울처럼 깨끗하네 水澄鏡明
타고난 자질이 참되고 순수하여 賦質純粹
옥같이 윤기나고 금처럼 정교하네 玉潤金精
일찍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여 夙遊溪門
자상한 가르침 잘 받들었다네 克承誘掖
학문에 연원이 있었으니 學有淵源
바른 학맥 찾을 수 있었네 得尋正脈
덕업이 높고도 성대하기에 德崇業茂
사문을 잘 이끌어 주었다네 領䄂斯文
가지고 있는 것을 잘 미루어 推其所有
백성을 돕고 임금을 존중하였네 庇民尊君
내면에 쌓은 것을 다 쏟아내어 庶罄所蘊
세상에 모범을 후세에 전하였네 垂世範俗
품은 뜻이 시대와 어긋나서 志與時違
산수를 찾아가 은거하였다네 投跡雲林
함양한 것은 바로 무엇인가 所養伊何
오직 이 본심이었다네 惟此本心
온갖 이치가 다 들어찼으니 萬理森然
그 깊이를 알 수 없도다 莫窺淺深
일이 닥치면 얽매이지 않고 事至不凝
일이 지나면 자취가 없었네 事過無跡
바라보면 두려워할 만하나 望之可畏
가까이 하면 정이 넘쳤다네 親之可悅
후학을 맞이하여 이끌 때는 接引後進
직접 실천하여 가르쳤다네 爲敎以身
억누르기도 추켜세우기도 하여 或抑或揚
사람의 재능에 따라 이끌었네 各隨其人
아, 사리에 어두운 나 또한 嗟余昏蒙
그 아름다운 자취 사모하였네 亦慕芳塵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아 不我遐棄
천박하고 용렬한 날 받아주셨네 容我譾劣
도 높은 선생 찾아 바로잡으려다 就正有道
학업을 못다 마치고 말았네 庶將卒業
훌륭한 말씀 귓가에 울리는데 法言在耳
하늘이 얼마나 속히 데려가는지 天奪何速
북두성이 떨어졌으니 北斗其隕
소자는 어디를 우러러볼까 小子安仰
태산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泰山其頹
소자는 어디에 의지할까나 小子安倣
조촐한 제수로 술잔 올리자니 薄奠來設
하염없이 눈물만 샘솟는구나 淚迸懸泉
영령께서 남아 계시리니 不亡者存
감히 영전에 고합니다 敢告靈筵
*호옥재(胡玉齋) : 호방평(胡方平)이다. 송나라 휘주(徽州) 무원인(婺源人)으로 자는 사로(師魯), 호는 옥재이다. 동몽정(董夢程)에게 역(易)을 배우고 역학을 깊이 연구하여 후에 주희의 뜻을 발명한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