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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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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시끌 잡담 하늘호수에서 만난 국강상(國 罡 上)광개토대왕
구산(九山) 추천 0 조회 289 16.11.01 22:30 댓글 1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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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11.03 15:15

    첫댓글 장도는 장산열도라고도 하며 묘도군도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산동성의 유일한 海島縣(해도현)으로 오늘 날 인구는 4만 3천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10개의 유인도와 22개의 무인도를 포함 32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산선생님께서 다녀오신 장도박물관이 廟島(묘도)에 있는지 다른 섬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인도 10개의 섬은 남장산도, 북장산도, 대흑산도, 타기도, 대흠도, 북황성도, 남황성도, 묘도, 소흑산도, 소흠도로 표기하기 때문입니다. 묘도에는 마고여왕을 모신 사당 즉 천후궁이 있으며 천후궁은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 의식을 주관하던 곳이었기에 묘도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싶어 여쭤봅니다.

  • 작성자 16.11.04 07:46

    질문 감사합니다.장도현의 현재 인구는 5만2천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박물관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문 말미에 도표를 추가하였습니다.장도박물관은 남장산도에 있고, 항해박물관은 묘도에 있습니다.그리고 북장1기 유적지가 대흑산도에 있고,조류전시관이 남장산도의 봉산에 있습니다.이를 통틀어 장도현이라고 부릅니다.

  • 16.11.03 15:26

    2002년 5월 5일 마조탄신기념일이자 현응궁에서 향을 피운지 880주년 되는 날이라하여 큰 제사를 지냈다는데 역대의 官祭(관제), 民祭(민제) 등 수많은 의식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당나라가 발해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성덕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영해군사직을 내렸다는 장도 바다, 구산선생님 모시고 언젠가 갈 날이 오리라 봅니다. 장도에서는 구석기 말기의 타제석기, 신석기 시기의 색을 칠한 도기들, 용산문화를 반영하는 알껍질을 붙인 도자기, 商(상)나라, 周(주)시대의 청동기를 비롯하여 문명의 발상지임을 보여주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 16.11.05 22:29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광개토대왕문 청동그릇에 나타난 문양을 풀어주셨는데 놀라운 추정이라 학계에서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하리라 봅니다. 청동그릇에 새겨진 井와 十 두 기호를 북두칠성과 칠성판 아래 부분으로 보셨는데 井는 글자 토대 바깥 윗부분에 디자인 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북두칠성 또는 하늘로 볼 수 있지만 글자 속에 함께 있는 十자는 로고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十자가 井자일직선아래쪽에 있다면 로고로 보는게 맞지만 전체 글내용에 포함된 내용이라면 청동그릇 10개를 만들었다가 맞지 않을까요. 너무 길어졌습니다.

  • 작성자 16.11.04 07:58

    十자의 풀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게 사실입니다.다만 구산의 생각으로는 上(井)과 下(十)로서 하늘과 땅으로 보고싶습니다.

  • 16.11.03 15:22

    댓글 달아주시면 광개토대왕에 대한 이바구 또 올리겠습니다. 답사대장 장순복

  • 작성자 16.11.04 07:59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 16.11.04 15:33

    고려대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2005년 5월 7일부터 10일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 광개토대왕비 희귀탁본 3점을 한꺼번에 전시한적이 있습니다. 첫번째 탁본은 일본 지바(千葉: 천엽)현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으로 일본학자 미즈다니 데지로(水谷悌二郞: 수곡제이랑)가 광복 후 공개했던 탁본이죠. 미즈다니 데지로는 탁본 공개와 함께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주구경신)가 처음 소개한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글자를 임의로 판독해 외곽선을 뜨고 그 바깥에 먹을 칠해 만든 雙鉤加墨本(쌍구가묵본)이란 사실과 일본 내에 유포되어있는 많은 탁본들도 원석 탁본이 아닌

  • 16.11.04 13:33

    석회탁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일본을 뒤집어지게 만든 정직한 학자였습니다. 일본군 대위가 가져온 탁본을 기초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파했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로 비문을 고쳐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던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셈이죠. 두번재 탁본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석회탁본이었습니다.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가 글자를 알아보기 쉽게 글자 바깥에 회칠을 한 뒤 뜬 탁본이죠. 세번재 탁본은 한학자이신 청명 임창순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原石(원석)탁본이었습니다. 청명 임창순선생이 처음 공개한 탁본은 1889년 청나라 종실 인사를 포함한 6명이

  • 16.11.04 15:34

    拓工(탁공) 이운종에게 탁본을 뜨게 했으며 10여벌의 탁본을 만들었다 한벌의 값은 白銀(백은) 10금이었다고 적혀있어 학술적가치가 있는 탁본이었습니다. 미즈다니 데지로의 탁본에는 훼손된 부분이 보이기 때문에 청명 임창순 탁본보다는 훨씬 뒤에 탁본을 떴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명 임창순선생의 아들 임세권교수는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가 석회를 칠한 후 글자를 고쳐 탁본을 뜨고 세월이 흘러 칠했던 석회가 떨어져 나간 뒤 뜬 탁본일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신묘년 이래로부터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신민(臣民)으로 삼았기 때문에 4세기 후반 한반도 남쪽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일본의 주장은 지금도

  • 16.11.04 14:22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구려 장수왕 3년(404년)에 세워졌습니다. 사각기둥모양으로 몸돌의 높이 6.39m, 무게 37톤입니다. 몸돌 비면에 1775자가 새겨져 있고 150여자는 지워져 읽을 수가 없습니다. 구산선생님 덕분에 박물관을찾는사람들 카페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구산선생님의 또 다른 글을 기다려봅니다 답사대장 장순복

  • 작성자 16.11.04 15:48

    말씀하신 광개토대왕 비문의 해석에 대해서는 한.중.일 삼국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많은 의견을 설파하였습니다.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정답은 얻지 못하였습니다.이문제는 임나일본부설이 연계되어있어 쉽게 해결될 사안이 아니니 별도의 장을 만들어 구산의 의견을 제시해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럼 다시 수수께끼의 # 문장에 대해서 여담을 올려보도록 합니다

  • 작성자 16.11.05 18:06

    작가 최인호는 # 문양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비밀의 의미를 쫓아 역사 속으로 파고 들면서 그가 겪은 답사실화를 <왕도의 비밀>이란 이름으로 세권의 책으로 발표한바 있습니다. 사학자들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부호나 낙서등으로 발표하고있는 문양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국내의 산성에서부터 서울대 박물관, 여주, 영동, 충주, 경주를 비롯, 남해지방까지 1만㎞의 답사여행을 떠나게 되며 중국 대륙도 3차에 걸쳐 3만㎞의 대장정을 감행하였다고 합니다.

  • 작성자 16.11.05 18:23

    저자는 결국 # 문양은 모두루총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차용된 `물의 손자요 하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그리고 광개토 대왕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영토를 다물하게 되는데 # 문양이 나오는 유적지는 광개토대왕의 공격루트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집안지역의 고분에 놓인 시신들의 방향이 동북방에서 서남방으로 향하고 있어 백두산의 천지를 성산의 성수로 숭상하고 있었다는 근거를 들어, #문양은 북두칠성과는 관계없이 우물 정(井)자에서 유래된것이라고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글쎄요. 이게 옳은 판단이었을까요?

  • 작성자 16.11.05 18:58

    광복 50주년을 맞어 SBS tv는 다큐멘터리 ‘왕도의 비밀’을 DVD로 제작하여 출시하였습니다.
    1년간의 기획과 답사 그리고 2년간의 촬영등 총 3년간의 제작기간,한국, 일본, 중국에 걸친 장장 10만 킬로미터의 대장정. 고구려 전공학자 20명, 제작스텝 50여명을 동원하였습니다.이리하여 오랫동안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던 유물, 유적을 완벽히 재현하였다고 하였습니다.그렇게하여 잊혀진 왕국,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였다고 하고 있는것입니다.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강상(國罡上)이란 북두칠성의 뜻은 어디로 가는것일까요.20명이란 전문 학자들도 그것이 한계였을까요?

  • 작성자 16.11.06 10:49


    그럼 무엇이 문제이었을까요.그 해답을 본문에 <장군총능침방향도>로 설명을 추가하였습니다.장군총에서 능침의 시신이 놓인 방향을 검토한 결과 머리를 동북방향으로 하였으므로 백두산 천지와 연계하여 이를 우물로 단정지었던것입니다.그러나 시신의 방향은 발이 지향하는 방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습니다.그곳에는 북두칠성형태의 섬이 있었고,그 위치에 천손족의 동기를 부여한 고구려(고조선)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답글 | 수정 | 삭제

  • 작성자 16.11.08 14:26

    발해가 하늘호수가 되는 과정을 지도를 통하여 본문 서두에 추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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