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린 선물 “조엄 고구마”를 아시나요.
연제철
소싯적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던 보릿고개 시절이 생생하다
그때 그 시절엔 다 그랬으리라.
생활여건이 좋은 가정이라면 몰라도 봄의 시작과 동시에 힘든 먹을거리
부족 현상은 힘들고 고단한 삶 자체였다.
조금이나마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구황작물을 최초로 고구마를 가져와 백성들에게 전파하여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한 훌륭한 분을 기리는 기념관이 원주에 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흰쌀밥보다는 잡곡밥을 먹지만,
그때는 쌀이 모자라 옥수수, 조, 보리 등 잡곡밥을 자주 먹었다.
잡곡에 고구마를 넣어 밥을 지으면 밥이 부드러워지고, 맛이 훨씬 좋다.
현재 고구마가 주식보다는 간식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구마는 기후와 토양에 별 구애받지 않고 다른 작물처럼 김을 매지도,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잘 자라기 때문에 전국에서 재배 된다.
문익공 조엄 선생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조중운(趙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도보(趙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도내(道內) 사노비(寺奴婢) 1만 여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蠲減)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 비율을 적용, 전세 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았다.
중앙으로 진출한 뒤 대사헌·부제학·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한성부우윤, 예조·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신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이다.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부르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경신대기근(1670~1671년) 때는
역사상 다섯 번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기근 중 에 아주
심했던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며
이에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조세 탕감과 함께
쌀을 풀어 백성들을 주제하는데 총력을 쏟았다고 하니까
당시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기근에 허덕이고 있는 조선 땅에 한 줄기
희망의 불씨를 살려낸 분이 문익공 조엄 선생이다.
조엄 선생은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고구마 뿐 만 아니라 특히 경상도관찰사 재임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상훈과 추모 내용을 살펴보면 1794년(정조 18)
좌의정 김이소(金履素)·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覈御史)
이상황(李相璜)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1814년(순조 1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海槎日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라고 소개 하고 있다.
해사 일기는 1763년 8월부터 1764년 7월까지
1년여의 내용을 총 5권에 기록된 조엄 저서로,
일본의 각 지역을 돌면서 지은 시 300여 수와 외교문서 등이 기록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고구마의 구입경위와 저장방법 등
고구마의 전반적인 내용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출출하다. 먹고 싶은 저녁.
땅거미가 진 늦은 저녁을 먹을 시간 ,
호야 불 밑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밥에통통한 노란 고구마 정말 맛있었다.
지금은 종류가 개량되어 밤고구마,
자색고구마, 꿀 고구마, 호박 고구마 등 종류도 많고,
요리법도 개발되어 간편식, 맛 식으로 즐길 수 있다.
참 좋은 세상에 고구마활용 먹거리는 최고다.
1776년(정조 원년) 홍국영의 무고로 유배를 당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1777년 유배지인 김해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선생의 묘소는 당시 임금이 내려준 논과 밭 즉
사패지가 있는 원주에 강원도기념물 76호로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