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청춘 / 이주옥
침대 위에서 주인보다 더 주인 행세를 하던 연노랑 쿠션이 거실 소파 위에 얹혀 있었다. 자발적 이탈은 아닐 것이다. 한때 사랑이라는 오만한 이름 옆에 누워 무한정 체온을 높이던 것이 무슨 연유로 내침을 당했을까.
딸아이는 불면증으로 꽤 오랜 시간 고통받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그런 여친이 안타까웠던지 기린 모형의 수면 쿠션을 선물했다. 쿠션의 보드라움이 몸을 포옥 안으면 숙면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이 담긴 듯했다.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안고 어루만지며 잠든 아이를 보면 나 또한 마음이 편하고 흐뭇했다.
어느 날, 아이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엄마, 나 그 사람이랑 헤어졌어요’
딸이 1년 넘게 연애하는 동안 상대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간간이 아이를 픽업하러 온 한 청년의 정수리만 베란다 위에서 스캔했을 뿐. 그들의 연애를 내놓고 응원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시에 날아든 이별 소식은 황망했다.
딸만 둘인 나는 아이들과 비교적 많은 것을 공유하는 편이다. 미주알고주알 전하는 연애사를 들으며 나 또한 때때로 마음이 달뜨고 가라앉았다. 그래서일까. 아이의 이별은 내 이별처럼 공허하고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그즈음 다가온 연인의 생일선물을 주문했던 아이는 취소 버튼을 누르며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이별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다고 했다. 딸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얼굴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한 젊은 남자를, 어떤 언행을 부각시켜 이미지만으로 기억되게 할 수 없다”라는 말로 지난 연인을 보호했다. 1년여 넘게 일상을 아우르고 지탱시키던 연애는 그렇게 마무리되고 아이는 점차 평온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침대 위에서 무한정 방만하게 널브러지던 쿠션이 자꾸 벽 쪽으로 밀려나며 모로 세워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스스럼없이 껴안던 행위가 이별이 주는 거리감으로 차츰 경직돼갔으리라.
끝나버린 사랑을 떠올릴 물상이 곁에 있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피차 좋을 건 없을 터, 주군의 어루만짐 속에서 콧노래 부르며 오만방자한 애첩처럼 굴던 쿠션은 변질의 시간 안에서 내침 당한 폐비가 돼 처참하고 초라해졌다.
아이는 퇴근길에 대형 쓰레기봉투를 사 들고 와 소파 위에 툭 던져두었다. 봉투는 한 이틀 쿠션 옆에서 기가 죽은 채 놓여 있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물건이 아닌, 함께 한 시간과 마음이었기에 선뜻 버리기 쉽지 않았으리라.
아무래도 버리는 것은 내 몫이지 싶었다. 구부리다 못해 완전히 반으로 접힌 몸체가 한때 찬란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쓰레기 더미에 봉투를 놓고 들어오는데 끝난 사랑에 울먹이는 청춘 하나가 사랑을 다시 찾을 방법이 있겠느냐며 바짓가랑이를 잡아채는 것 같아 발길이 터덕거렸다. 인연의 강을 거슬러 흐른 청춘들에게 봄처럼 다사로운 사랑이 다시 찾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