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만세/서범석
밥 한 술 넣고 불고기 한 점 넣어 씹는다
밥맛이 아니네
봄동 겉절이 한 입 섞어 씹는다
밥맛은 녹았네
구운 간고등어 한 젓갈 듬뿍 뜯어 넣고 씹는다
밥맛은 행방불명
달래간장 넣어 구운 김에 싸서 씹는다
밥맛이 날아간 밥맛
얼큰한 콩나물해장국에 밥 말아 먹는다
얼큰한 전주집 콩나물해장국 맛이다
구수한 된장국에 술술 말아 먹는다
구수한 할머니 냄새가 모락모락 솟는다
미끈미끈 미역국에 슬슬 말아 먹는다
미끈미끈 넘어가는 미역국 맛이다
팔팔 끓인 민물생선매운탕에 훌훌 말아 먹는다
팔팔하던 시절 계곡낚시 손맛
아예 식탁의 모든 것 다 집어넣고
참기름 한 숟갈 고추장 한 숟갈 얹어서 비빈다
맛과 향기와 감촉 속으로 코 박고 먹는다
모두 있어서 아무 맛도 아닌 비빔밥
밥 한 술만, 물고
자꾸 씹는다 제 맛이다 밥맛이다
달착지근한 엄마의 젖
아름다운 독재/서범석
흰 눈 위의 사람 발자국 하나둘
그냥 따라갑니다
앞 사람의 그림자 위에 얹힌 구름 발자국
요술 지팡이 함께하는 안개 발자국
우듬지 눈꽃에서 노래하던 참새 소리 또 따라갑니다
자동차 검은 보닛 위의 외로운 고양이 발자국
찬바람 끌어안고 열심히 따라갑니다
바람결에 꽃길로 굴러가는 비겁한 발자국 하나
그냥 뒤따라가기로 합니다
오만 원짜리 지폐 굴리며 달리는 바람 발자국
개코로 냄새 맡고 꼬리 흔들며 따라갑니다
스무 살 슬리퍼의 퇴임사/서범석
너는 떠나고 나 홀로다,를
햇살 밝은 방바닥에 펼친다
질긴 20년이 나를 허물지 않았느냐,를
닳고 해진 뒤꿈치에 새긴다
당신의 온몸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살았다,를
비스듬히 파인 뒤축에 숨긴다
너와 더 살더라도 너는 날 버렸을 거다,를
낡고 병든 몸으로 가슴 벅차게 말한다
우리 둘을 엮어 준 등줄기는 아직 멀쩡하다,를
벌레 먹은 낙엽같이 추억으로 남긴다
앞코가 지금도 용기 있게 나갈 수 있도록 사랑이 가벼웠다,를
너의 사랑이었다고 입속으로 읽는다
네가 방 안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를
기꺼이 고백한다
네가 떠난 이 방을 나도 지킬 수 없다,를
내 사랑에게 분명하게 밝힌다
너의 퇴임이 나의 정년이었다,를
질질 끌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쓰레기통으로 간다
짧지 않았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하늘로 갈 것이다
놀부 놀이 / 서범석
지하철 문이 닫혀 순간 절망하다가 다시 열리는 문틈으로 쏜살같이 승차하는 행운을 물고 찢어지는
아가씨의 입에서 쏟아지는 웃음에 발 걸고 사진 찍기
아직 어린 여자 가수가 시달리다 죽었다는데, 거기에다 bad tweet 또 날리는 즐거운 인생
남의 집 애호박에 말뚝 박기 좋아하던
딴전 부치려는 플라타너스 아래 쇠똥구리 말똥구리 여러분께
새벽마다 스마트폰으로 '카톡카톡'을 쏴 보내는 글쟁이 론 박사의 예절 뚫는 화살
꺾어라. 늦가을 이제라도 푸른 잎을 달아보는 어린 아카시 나무 머리 없는 겨드랑이 가운데에 살짝 내려앉아 불콰한 얼굴로 지쳐가는 단풍잎 하나 걷어차는
불붙는데 부채질하기
아이, 참, 재미없다. 빚값에 계집 뺏기
밤마다 빠지는 어지러운 스마트폰 게임
네가 양보하는 거야 / 서범석
길가에 앉아 흙놀이에 파묻힌 아기들을
또랑또랑한 초등학생들이 조잘조잘 비껴간다
휜 다리를 절룩이며 무거운 엉덩이를 옮기는 할머니를
이어폰으로 귀 막고 달려가는 청년이 제비처럼 스쳐 간다
자전거에 쌀자루 달고 비걱거리는 아저씨를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앞지른다
헬멧 따위로 안전을 쓰고 달리는 오토바이를
승용차 모는 놈이 피해 가잖아
작고 낡은 차 몰면 커다란 새 차 모는 놈이 쌩하고 앞서간다
영락없이
넌, 잘나가는 놈이잖아
[ 서범석 시인 약력 ]
* 1948년 충주 출생.
* 등단 : 1987년 《시와의식》. 1995년 《시와시학》 등단.
* 시집 『풍경화 다섯』『휩풀』『종이 없는 벽지』『하느님의 카메라』『짐작되는 평촌역』『놀부 놀이』 등. 비평집 『문학과 사회 비평』『한국현대문학의 지형도』『비평의 빈자리와 존재 현실』 등. 학술서 『한국 농민시 연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