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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
유형 |
전시관·미술관 |
휴관일 |
월요일 |
주소 |
Dvortsovaya Naberezhnaya, 34 190000 Saint-Petersburg |
가는방법 |
지하철역 넵스키 대로에서 도보 또는 1 ,7, 9, 10 뜨랄레이 부스 이용, 궁전광장이 보이는 곳에서 하차 |
네바강을 따라 길게 위치해 있는 박물관으로, 총 250여만 점의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어 유럽 문화를 집대성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영국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에 손꼽힌다. 19세기말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했다. 겨울궁전을 비롯한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1050개의 전시실과 120개의 계단이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입장권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겨울궁전 입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겨울궁전 입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겨울궁전 중앙 계단(요르단 계단)으로 가는
회랑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겨울궁전 중앙 계단(요르단 계단)의
천정 벽화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겨울궁전 중앙 계단(요르단 계단)의
주위 실내 장식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겨울궁전 중앙 계단(요르단 계단)의
주위 실내 장식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겨울궁전 중앙 계단(요르단 계단)에서
이성수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샹들리에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표트르 Hall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표트르 Hall의 샹들리에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의
황금 기둥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의
샹들리에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문장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의
천정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 천정화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발쇼이 교회에서
이성수
에르미타주 미술관
전쟁 갤러리
에르미타주 미술관
전쟁 갤러리
에르미타주 미술관
전쟁 갤러리
[ 이 곳에는
러시아의 역대 장군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게오르기 홀(대옥좌관)
에르미타주 미술관
게오르기 홀(대옥좌관)의
대옥좌
에르미타주 미술관
게오르기 홀(대옥좌관)
에르미타주 미술관
게오르기 홀(대옥좌관)의
바닥 장식
에르미타주 미술관
게오르기 홀(대옥좌관)의
천정 장식
에르미타주 미술관
게오르기 홀(대옥좌관)의
천정 장식
에르미타주 미술관
게오르기 홀(대옥좌관)의
대옥좌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천에 그린
그림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나무 조각품
예카테리나 2세와 에르미타쥬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명소 에르미타쥬는 영국의 대영 제국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에 꼽히는 보물 창고이자 제정 러시아 황실의 영욕이 서린 대표적인 세계 예술 문화 유산의 창고다. 명성에 걸맞게 전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에르미타주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 있는 궁전으로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쳐였던 `겨울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에르미타주 내에 있는 소극장 건물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궁전은 원래 이처럼 방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터 대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후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 끝에 제위에
오르게 된 피터 대제의 딸 엘리자베따가 오늘날의 겨울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2세 때에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녀는
밖으로 실내 정원이 나 있는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프랑스어로 `에르미타주`(운둔지, 인적이 없는 방)라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에르미타주 명칭의 유래다.
1764~1787년 예카테리나 2세는 궁전 옆에 `소
에르미타주`와 `구 에르미타주`를 건설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 회랑을, 그리고 1783~1786에 에르미타주 극장을 만들었다. 1799~1851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 에르키타주다.
에르미타주가 출현한 1764년 당시 베를린의 네고니안트라는 갑부가 부채 대신 자기의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일찍이 스몰니에 최초의 러시아 여성 학교를 세울 정도로 유럽의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예카테리나2세는 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유럽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커녕 박물과조차 전혀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2세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주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리 공자, 브를리 남작, 크로자 남작, 윌 폴 총리, 보뎅,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다. 그로 인해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2세 때에 이미 2000여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에르미타쥬는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게 되는가 하면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 정부 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모스크바 국립 표현 박물관에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 가는 등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명명된 이곳은 현재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호, 르누와르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고, 이태리와 로마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이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피카소, 고갱, 고흐
등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다량 전시되어 있는 것이 유명한 이유다.
독일출신의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 출신으로 표트르 3세의 황후이다. 1762년 궁정 혁명을 통해 남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키고 제위에 등극하여 1796년까지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다. 그녀는 표트르 1세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제국을 확대했고 통치 제제를 근대화했으며,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연유로 독일 출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사에서 대제로 기록되고 있다.
러시아 전통 복장의 예카테리나 2세 (작자 미상)
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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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표기 |
Екатерина II |
공식칭호 |
전 러시아 여제(임페라토라), 전제군주 |
지역 |
러시아 |
재위기간 |
1762년 ~ 1796년 |
출생 - 사망 |
1729년 ~ 1796년 |
가족관계 |
부친 : 크리스티안
압구스트(Кристиан Август/Christian August, 1690년 ~ 1747년), 독일 안할트-제릅스트
공후 |
계보 |
전임자 : 표트르 3세(Пётр
III/Peter III, 1728년 ~ 1762년,
재위 1761년 ~ 1762년) [네이버 지식백과]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 독일출신의 러시아 여제 (러시아 왕가, 인문과교양) |
시테틴 성(현재 폴란드 북서부의 도시 셰친)
1729년 4월 21일, 예카테리나 2세는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시테틴(현재 폴란드의 셰친)에서 안할트-제릅스트
공후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여제의 본명은 소피야 압구스타 프레데리카이다.
소피야는 공후의 딸로서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무용, 음악, 역사, 지리, 신학 등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쾌활하고 지적 호기심이 컸으며, 또래 남자아이들을
이끌고 놀 정도로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한다.
러시아로 온 직후의 소피루이 카라바크, 1745년
1744년 소피야는 모친과 함께
러시아로 향했다. 옐리자베타 여제가 후계자인 표트르 3세(표트르 표도로비치) 의 배우자로 소피야를 간택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황후를 위해 프스코프 대주교 시몬 토도르스키, 최초의 러시아
문법 저자 바실리 아다두로프, 발레 연출가 랑게 등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그녀를 가르쳤다. 소피야는 배우자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밤늦도록 러시아어, 러시아
역사, 정교, 러시아 전통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그녀의 열정은 궁정 내 인사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1744년 6월 28일 루터교에서 정교로 개종한
소피야는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러시아 이름을 부여받고, 그 이튿날 표트르와 약혼했다. 결혼 당시 예카테리나는 16세, 표트르는 17세의 나이였으며 결혼식은 1745년 8월 21일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예카테리나에게 무관심한 표트르로 인해 부부관계는
소원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의 빈자리를 독서로 채웠다. 그녀는 역사,
철학, 법학 서적과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의
주요 저작, 그리고 상당한 양의 문학작품들을 섭렵했다. 더불어
사냥, 승마, 무도회 참석도 그녀의 주요한 취미가 되었다. 남편은 다른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예카테리나에게 감추지 않았다. 남편의
외도 속에 예카테리나에게도 스캔들이 생겨났다.
한편, 옐리자베타 여제는 예카테리나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는 두 번의 유산 끝에 결혼 9년 만인 1754년 9월 20일
아들 파벨을 어렵사리 낳았다. 난산 끝에 태어난 아기는 여제의 명에 따라 예카테리나로부터 격리되었으며, 예카테리나는 출산 후 40일 만에 처음으로 아들을 볼 수 있었다. 파벨에 대한 보육은 전적으로 여제가 관장했으며, 예카테리나의 접견도
제한되었다.
일련의 역사가들은 파벨이 예카테리나의 정부 중 한명인 살티코프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예카테리나 2세가 남긴 기록들은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공식적으로 이러한 가설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되었지만, 파벨의
친부 논쟁은 당대 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757년 12월 9일 예카테리나는 딸 안나를
낳았지만 표트르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부부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의 서거로 표트르가 제위를 계승한 후
부부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표트르 3세는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 공개적인 동거를 시작했고, 예카테리나도 정부(情夫)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실질적으로 부부관계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리 오를로프 : 예카테리나 2세의 총신으로 궁정 혁명을 주도했으며, 여제와의 사이에 아들(알렉세이)을 두었다.
러시아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승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트르 3세는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획득한 영토를 프로이센에 반환했고, 덴마크에
대항하기 위해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표트르는 독일 홀슈타인 공국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할
목적으로 덴마크 원정을 계획했다. 또한 교회 개혁을 명분으로 러시아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원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
이처럼 즉위 이후 표트르 3세가 펼친 대내외 정책은 제국의 군부와 교회를 비롯해 지배 계층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표트르 3세에 대한 비판 세력은 황제가
무지몽매하고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며, 통치 능력이 전혀 없다고 비난했다. 반면, 예카테리나는 지혜롭고 박식하며 신앙이 깊으나, 남편에게 박해받는 착한 아내로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남편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훼손되고, 황제에 대한 근위대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자 예카테리나는 최측근들과 함께 반란을
획책했다. 오를로프 형제, 포툠킨, 표도르 히트로보 등 반란의 주모자들은 근위대들을 선동하고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1762년 6월 28일 표트르 3세가 페테르부르크 근교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음모는 실행에 옮겨졌다. 수도에서는
예카테리나에 대한 충성 서약이 진행되었고, 오를로프 형제가 이끈 근위부대는 표트르 3세를 체포했다. 정교 탄압과 프로이센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이유로
표트르 3세에 대한 폐위가 공포되었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킨 예카테리나는 제국의 여제로 등극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대관식은
1762년 9월 22일 모스크바에서 거행되었다. 역사가 클류쳅스키는 “예카테리나는 남편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합법적인 황위 계승자인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는 이중 탈취를 실현했다.”라고 여제의 권력 획득 과정을 평가했다.
궁정 혁명을 통해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통치 초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훈장과 포상을 남발하며 귀족들에 대한 특권을 확대했다. 또한
러시아 전역을 시찰하며 지방의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자신의 위상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계몽주의 사상에 대한 신봉은 통치 노선을 설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1767년 말 근대적 법제 마련과 이를 통한 러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구성된 입법위원회는 예카테리나 2세의 계몽주의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입법위원회는 지주 귀족, 도시민, 농민, 카자크와
소수민족 등 제국의 신민 대표들이 참여하여 각 계층의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1년 반 동안의 입법위원회 활동은 계층 간의 이견과 충돌 끝에 종결되었다. 귀족
특권과 농노제가 상존하는 러시아의 현실에서 예카테리나 2세가 지향한 계몽 절대주의 노선은 이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가 취한 친귀족적 정책 기조는
귀족 계층에게 더 많은 특권을 제공하여 농노제 하의 농민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은
한층 강화되었다. 1773년 우랄의 야이크 강(현 우랄 강) 지역에 돈 카자크 출신의 푸가초프라는 인물이 등장해 스스로를 압제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온 표트르 3세라고 주장했다. 1773년 9월
푸가초프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많은 카자크와 농민,
이민족들이 이에 동조해 우랄 지역 곳곳에서 봉기했다.
푸가초프는 추종자들에게 농노제의 종식, 자유로운 토지 이용, 세금과 징병 면제, 종교적 전통 복원 등을 약속했다. 반란 세력은 오렌부르크 지역의 요새들을 점령하고 볼가 강 중하류 지역까지 장악해 나갔다. 이들은 지주 귀족들을 처단하고 영지를 불태우며 마을과 도시들을 유린했다.
1774년 러시아 정규군이 투입되어 어렵사리 반란군을 진압해 나갔고, 체포된 푸가초프는 1775년 1월 모스크바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푸가초프의 반란으로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와 러시아 현실의 만만치
않은 간극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푸가초프 반란으로 예카테리나 2세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지방 통치 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여제는 1775년 행정 개혁을 시행했다. 행정단위로 30~40만 명을 기준으로 한 구베르니야(주)가 획정되었고, 구베르니야는 다시 주민 수에 따라 10개 우에즈트(군)로
분할되었다. 29개의 구베르니야가 신설되어 총 50개로 재편되었고, 144개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정립된 행정 체제는 1917년까지
유지되었다. 구베르니야 통치 체제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행정, 사법, 재정이 상호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와 더불어 예카테리나 2세는 사법 분야의 개혁을 시행했다. 이것은 계급적 토대 위에 사법제도를 개편한 것으로 신분에 따라 상이한 사법적 절차가 적용되었다.
1785년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헌장’을 공포했다. 이는 귀족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 법령으로 귀족들은 봉직과 과세 의무에서 벗어났고 재판을 통해서만 처벌될 수 있었다. 귀족의 재산권은 완전하게 보장되어 소유 영지는 세습되었고, 영지 내 모든 자원도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범죄로 인한 처벌 시에도 몰수되지 않고 가족에게 귀속되었다. 귀족의 지위 상승은 농노제의 확대와 강화를 의미했다. 예카테리나 통치 말기 농노의 수는 전체 인구의 49%에 이르렀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를 문명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국민 계몽을 위해 교육 체계를 정비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러시아 최초의 사범대학을 설립하여 교사를 양성했다. 또한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사와 인쇄소 설립을 인가하여 언론 출판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국제관계에서 러시아의
역할 강화와 영토 확장을 지향했다. 1774년 제1차 튀르크
전쟁 후에 러시아는 드네프르와 돈 강 연안, 케르첸스크 만 지역의 주요 거점들을 획득했다. 1783년에는 발타, 크림, 쿠반
지방 등을 병합했다. 제2차 튀르크 전쟁(1787년 ~ 1791년)은
러시아가 부크 강과 드네프르 강 사이의 연안 지대를 획득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으로
인해 러시아는 흑해 지역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러시아 서북부
지역의 국경이 확장되었다. 1733년 1차 분할에서 러시아는
벨로루시 일부 지역을, 1793년 2차 분할에서는 민스크, 볼린, 포돌스크 지방을, 1795년 ~ 1797년의 3차 분할에서는 발트 해 지역을 획득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통해 러시아 영토는 현저히 확장되었고, 인구는 1763년 2,320만 명에서
1796년 3,74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러시아는
전체 유럽 인구의 20%를 점유하는 최대 국가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중간키에 금발이었다. 그녀는 높은 지성과 교양, 정치적 현명함을 겸비했고 자유연애를 옹호했다. 예카테리나는 다수의 정부를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예카테리나 연구의 권위자 바르테네프에 따르면 그 수는 23명에 이른다. 여제가 60세의 나이를 넘기고 있었을 때 마지막 총신 플라톤 주보프는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당시 일부 사료에 따르면 예카테리나는 1775년 포툠킨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1762년 이후 여제는 오를로프와의 결혼도 계획했으나 측근들의 만류로 취소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 통기 기간은 총신 정치의
절정기였다. 포툠킨을 중심으로 여제가 총애한 자들이 국가기관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예카테리나의 총신들은 1762년
6월 28일부터 시작하여 여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국가 운명과 국내외 정책, 그리고 군사행동에도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총신 정치는 당대
고위 귀족들의 정치적 관행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새로운 총신에 대한 아첨과 아부를 통해 사욕을
채웠고, 자신의 사람을 여제의 연인이 되게 하려고 애썼다.
1796년 11월 5일 아침 예카테리나 2세는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여제는 다음 날인 11월 6일 9시 45분에 향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제위를 계승한 아들 파벨 1세의 명령에 따라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 표트르 3세와 함께 페트로파블롭스키 사원에 안장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1세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제국을 확대했고 통치 체제를 근대화했으며,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연유로 독일 출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사에서 대제(大帝)로 기록되고 있다.
• 배우자 표트르 3세(Пётр
III/Peter III, 1728년 ~ 1762년, 재위 1761년 ~ 1762년), 러시아 황제
• 자녀
- 파벨(Павел/Paul, 1754년 ~ 1801년), 러시아 황제(파벨 1세, 재위 1796년 ~ 1801년)
- 안나(Анна/Anna,
1757년 ~ 1759년)
- 알렉세이(Алексей/Alexis, 1762년 ~ 1813년), 그리고리 오를로프 사이의 혼외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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