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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세 분석 스크랩 유대인의 유랑의 역사
나키스트 추천 1 조회 1,051 11.10.10 11:21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다시 미움 받는 유대인  

    

 

D  

                                  2002. 4. 6. 뉴욕에서 시위하는 팔레스타인

                                  의 지지자들. 이스라엘의 상징 '다윗의 별'

                                  을 나치스 상징 스와스티카로, 샤론 이스

                                  라엘 수상을  히틀러로 동일시한  표어가

                                  인상적이다.

 

프랑스 동부의 스트라스부르. 이곳의 유대인 묘지에 얼마 전 경악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 독일의 십자기장이 유대인 묘지를 온통 뒤덮고 있었던 것. 2차대전 중 나치에게 600만 명이 학살당한 유대인들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묘지 모독 사건이었다. 누군가 유대인들을 자극하기 위해 고의로 저지른 일이 분명했다.

 

21세기, 신종 반유대주의 확산

유대 노인들은 2차대전 이후 요즘처럼 반유대주의가 확산된 적은 없었다고 우려한다. 4월 8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대인과 유대인 재산에 대한 폭력과 파괴행위는 지난 2000∼2001년 사이 약 500건에 육박했다. 이는 반유대 행위가 지난 5년간(1995∼1999년) 크게 감소했던 것과 대비된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그러나 현재의 반유대주의는 작년보다 더 심각하다. 9·11 테러로 인해 미국에서는 반아랍주의가 확산되었으나 미국이 대테러전으로 아프간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 국제적인 인심을 잃을 무렵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이 격화되고 이스라엘이 또 하나의 ‘대테러전’을 선포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친이스라엘 일변도인 미국의 태도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력 공세로 인해 아랍권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심지어 미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반유대 정서가 팽배해지고 이에 따른 행동이 표면화되고 있다.

2000년으로 접어들면서 격화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는 작년 말부터 무차별 자살테러로 강도가 높아졌다. 아랍계와 유대계가 공존하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팔레스타인 측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으며 ‘죽이겠다’는 협박성 이메일이 유대인 학생들에게 전송되기도 한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압박 공세로 반 이스라엘 시위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집트, 시리아, 바레인, 요르단, 터키 등 아랍 국가에서는 미국 대사관이나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유럽에서도 아랍계를 포함한 반 이스라엘 시위대의 과격 시위와 더불어 유대인 학교와 묘지, 예배당에 폭탄이 설치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간다에 본부를 둔 범아프리카운동(FAM)도 팔레스타인의 편을 들어 이스라엘이 연금하다시피 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기구 수반을 풀어줄 것을 촉구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을 지켜보는 지구촌 이웃의 대부분은 ‘강자인 이스라엘이 약자인 팔레스타인에게 해도 너무 한다’는 의견이다.

 

유대인, 유랑과 고통의 역사

유대인들은 사실 지난 수천 년간 약자로 존재해 왔다. 유대 민족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 손자 야곱으로부터 형성되어 천 년쯤 후인 다윗, 솔로몬 시대에 잠시 강력한 왕국을 이루었을 뿐, 솔로몬 사후에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이 두 왕국이 각각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에 멸망한 후로는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소수 민족으로 완전히 전락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강제로 낯선 타국에 이주되었고 본토에는 인근 다른 민족이 옮겨와 살았다.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 통치기에는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이 허용되고 성전 재건도 이루어졌으나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한 후로는 다시 헬레니즘 왕조들의 지배하에 복속된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통치하던 기원전 2세기경, 마카비 집안을 중심으로 뭉친 유대인들은 일시적인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이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63년, 그들은 새롭게 부상하던 로마의 지배하에 놓인다. 통치 초기에 로마는 이 지역에 왕을 세워서 간접적인 통치를 하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난 때도 로마가 세운 이두매인 헤롯 왕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헤롯 왕 사후 로마는 헤롯의 아들들에게 유대를 분할하여 통치하게 했고 이후에는 총독을 보내 직접 지배했다. 총독들의 무능과 폭정이 계속되고 황제 숭배가 강요되자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서기 66년,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 반란자들이 로마 수비군과 싸워 승리하고 기세를 올린 반란군이 연전연승하자 이듬해 네로 황제는 당시 최고의 장수였던 베스파시아누스를 파견한다. 전투준비를 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자살로 혼란에 빠진 본국에 돌아가 황제가 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다시 자신의 아들 티투스에게 군사를 맡겨 예루살렘 공략을 맡긴다. 70년, 티투스는 포위공격으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유대인들은 132∼135년 다시 한 번 로마에 저항하지만 로마군에게 여지없이 패하고 다시는 재기를 꿈꿀 수 없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개칭하고 주피터 신전을 세웠으며 유대라는 지역 이름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어버렸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접근조차 금지된 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전 대신 유대인 회당을 세워 이를 중심으로 결속했고, 율법에 정통한 랍비들이 사라진 제사장 계급을 대신하여 정신적 지도자로 나섰다. 랍비들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구약 율법을 전승하고 탈무드를 교육하며 내부 규율을 강화했다. 히브리어와 종교의식 교육에 열을 올리고 유대인 공동체가 속한 국가의 법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따르기로 규정함으로써 불필요한 충돌을 막았다. 칼리굴라 황제 때 황제 신격화를 거부하여 잠시 마찰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은 기독교도만큼 탄압을 받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으며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제국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4세기 들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도읍을 옮겼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자리잡아갈수록 유대인들의 자치권은 사라지고 여러 가지 차별조항이 하나씩 생겨났다. 옛 유대 땅인 팔레스타인 지역은 기독교 성지로서 예루살렘과 주변 여러 지역에 교회가 들어섰으나 유대인들의 접근은 허가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일년에 단 한 번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상인으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로 대거 이주했다. 10세기까지 유대인들은 북유럽, 동유럽에까지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물론 유대인들은 유대교와 고유 전통을 고수함으로써 당시 유럽 일대를 지배하던 카톨릭과 그리스정교 양측으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과 루머

7세기,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다음 팔레스타인 지역은 약 400년간 줄곧 아랍인 이슬람교도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를 허용하였고 종교 자유를 일부 허용하는 대신 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들의 손에서 건져내자는 십자군 운동을 제창하면서 불똥은 엉뚱하게도 유대인들에게 떨어졌다. 당시 카톨릭교도들은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게 했으며 아직도 그들만의 종교를 고집하고 있다는 종교적 적개심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데 대한 질투에서였다. 카톨릭 신앙의 열기로 들떠 있던 십자군들은 도중에 유태인 마을을 약탈하기 일쑤였다. 1099년 예루살렘을 일시 점령하자 그들은 성내 거주하던 아랍인들과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했는데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렸다.

십자군 원정이 끝나자 이익을 본 것은 서유럽의 상인 계층이었다. 베니스, 제노아 등 무역도시는 전쟁을 통해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자신들만의 길드 조직을 강화했다. 상업에서 밀려난 유대인들의 최후 선택은 금융 분야였다. 12세기 들어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인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왕실과 봉건영주, 수도원, 상인들에게 대금업을 시작했다. 물론 위험부담이 높았기 때문에 이자는 매우 비쌌고 그에 따라 유대인들은 더욱 미움을 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샤일록이 악덕 고리대금업자로 묘사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갖가지 루머까지 퍼져 유대인들은 아예 악마 취급을 받았다. 사람의 피로 제사를 지낸다는 둥,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흑사병이 발생했다는 둥, 뜬소문이 서유럽을 강타할 때마다 유대인들은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몰수당했다.

유대인들은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았다.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유대인에게 황색 유대인 표지를 부착하게 했는데, 따지자면 이것이 나치스가 유대인들에게 부착하게 한 ‘황색 별’ 표지의 기원이다. 또한 이 무렵 유대인을 격리시키기 위해 벽으로 둘러싼 유대인 거주구역 ‘게토’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나치스에게 계승된다. 계속되는 추방과 생명의 위협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동유럽으로 이주했다. 일부는 박해와 빈곤을 피해 신대륙 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독립

십자군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약 200여 년 동안 이슬람의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517년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합병된다. 그 역시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튀르크는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복귀한다. 1860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에 유대인 거주지역이 생겨나고, 이 때부터 시오니즘이 고개를 들면서 유대인들이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시온으로 돌아가자”며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외친 시오니즘은 예전부터 랍비들이나 일부 유대 지식인들이 주장했으나 여기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언론인 데오도르 헤르츨이다. 그는 1896년 「유대 국가」라는 책을 펴냈고, 1897년에는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즘 의회를 소집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그의 주장은 억압받던 다수 유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시오니스트들은 유대 민족 기금으로 유대인들의 이주를 돕고 튀르크인들과 아랍인들로부터 토지를 매입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편에 선 오스만튀르크는 유대인 1만 2천 명을 추방하고 시오니즘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대전 중 시오니스트이자 화학자인 하임 바이츠만이 폭약을 제조하여 영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영국은 감사의 표시로 1917년 “대영제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고향을 설립하는 데 호의적”이라는 내용의 발포어 선언을 한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으로 아랍인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전쟁이 끝나면 아랍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워주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1915년에 공포한 상태였다. 영국의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두고두고 분쟁을 야기한다.

1차대전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 된다. 유대인들의 귀환은 더욱 가속화되어 1936년에 이르면 유대인 약 15만 명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이 때에는 히틀러의 집권으로 불안을 느낀 독일계 유대인들의 이주가 많았다. 이내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을 계획하고 독일군이 점령한 유럽지역에서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종전 후 팔레스타인 문제로 고심하던 영국은 유엔에 이 문제를 인계하고 유엔은 다시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국가로 양분시키기로 결정한다. 아랍인들은 극력 반발하며 거부했지만 유대인들은 대환영을 표하며 1948년 5월 14일, 영국군 철수를 기점으로 재빠르게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선포했다. 아랍 5개국 ―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 은 이튿날 당장 전쟁을 개시했으나 9개월간 지속된 이 ‘이스라엘 독립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저력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봉쇄조치와 더불어 1973년까지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을 치렀으나 결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오히려 건국 당시 이스라엘의 몇 배나 되는 영토를 내 주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신앙과 결속력

유대인들이 2천 년 만에 나라를 세운 저력은 성서 예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교육을 통한 유대 종교와 전통의 계승, 피압박민족으로서의 강한 민족의식과 애국심이라는 정신적 요소에다 막대한 자본, 정치적 로비 등에 있다.

그들의 신앙과 선민사상은 이민족들에게 배척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어려움 속에서도 고유한 전통을 잇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라를 잃고 각지로 흩어진 후에도 유대인들은 모세 이래로 내려온 유대 절기를 대대로 지켰으며, 히브리어를 끝까지 계승했다.

세계 80여 개국에서 귀환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1948년 건국 당시 66만 5천 명이던 이스라엘 인구는 1951년, 불과 3년 만에 133만 명으로 늘어난다. 독립 50주년을 맞이한 1998년까지 이스라엘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도합 260만 명에 달했다. 수천 년간 나라 없이 흩어져 살다보니 유대 혈통도 여러 민족과 섞일 수밖에 없었기에 이스라엘 의회는 귀환법 규정을 강화했다. 1970년 이래 ‘유대인’의 자격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제한되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유대인”이라는 자격조건은 자녀를 유대인으로 양육하는 이가 어머니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런 가정교육에 힘입어서인지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이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의 결속력은 대단하다.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곳마다 유대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유대인 공동체가 반드시 존재한다. 독립을 전후하여서는 세계 각지에서 금융과 상업적 수완으로 모은 거대한 유대인 자본은 이스라엘 재건과 해외 유대인들의 귀환·정착 지원금으로 아낌없이 본국에 뿌려졌다.

미국의 금융과 정치를 주도하는 미국 유대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를 밀약하여 이스라엘 독립 당시 미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낸 바 있다. 이스라엘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편 미국 정치인 중에서 성공한 인물이 없고, “선거에서 낙선하는 지름길은 유대인을 헐뜯는 것”이라는 미국 속담이 생긴 것을 보면 미국 내 유대인 세력의 막강함을 느낄 수 있다. 1951년 설립된 미국-이스라엘 홍보위원회(AIPAC : American-Israel Public Committee)는 미국 전역에 그물처럼 얽힌 지부를 통해 백악관과 의회, 정치초년생 집단, 대학에 이르기까지 자금을 지원하면서 친이스라엘 성향의 정치가를 늘리기 위해 활발히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 뉴욕에 자리잡은 미국유대인위원회(AJC : American Jewish Committee), 미국유대인의회(AJ Congress : American Jewish Congress), 비방대응기구(ADL : Anti-Defamation League)는 유대인 권익 보호를 위한 3대 조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정한 태도로 다시 미움받아

오랜 세월 유대인들은 소수였고 피압박민족이었다. 그들이 2천 년 만에 나라를 재건하고 다수 민족인 주변 아랍 세력 사이에서 꿋꿋이 버티며 지난 반세기 동안 번영을 이룩해 온 것은 흡사 신앙심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성서 속 인물 다윗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윗은 골리앗이 되고, 골리앗은 다윗이 되었다.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으며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 하에 막강한 화력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초토화시키고 팔레스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스라엘은 이제 골리앗으로, 이들에게 돌팔매를 던지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은 다윗으로 비유되고 있다.

1988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립을 천명하고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어려운 협상을 통해 1993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져 가자지구와 여리고 지역의 자치권이 팔레스타인 측에 허용되었다. 그러나 1999년쯤에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선포하려던 중동평화협상의 당초 일정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의 강경파들로 인해 계속 지연되고 있으며 작년에 강경파인 아리엘 샤론 총리가 집권한 이후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테러와 보복의 연속으로 치달았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및 아랍계 테러리스트로 인해 수십 년간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생존권을 인정치 않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제 여론은 강자인 이스라엘 측이 먼저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조치를 그만 두고 유연한 태도로 평화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3월 3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즉각적인 휴전 협상과 이스라엘군의 라말라 철수 등을 요구했고, 4월 4일에는 다시 만장일치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서 지체 없이 철수할 것을 재차 결의했으나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모두 외면하고 있으며 ‘테러범 색출’을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늦추지 않고 있다.

어느 이스라엘 관리는 “아랍인들이 1948년 유엔결의안 181(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와 아랍국가를 각각 건설하기로 한 결정)을 거부한 것은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실수였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말은 일면 옳다 해도 너무 매정하게 들린다. 민족이 겪었던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야드바셈 박물관을 만들고 ‘기억의 산’에 6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2차대전 중 죽어간 600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이 겪은 설움과 압박을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고 있다. 최근 세계 각지에 반유대 정서가 확산되고 반유대 행위가 급증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역지사지의 교훈을 잊은 유대인들이 자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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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0.10 11:46

    첫댓글 우수한 유대인들의 두뇌로 보다 말 그대로 선택받은 착한 민족으로서의 이미지를 심으면 좋겠군요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교를 믿는 그들 정통 유대인과 유대교를 종교로 선택한 민족 모두
    그들의 영토에서 떠돌이 짚시가 되는 이유는 언제나 금융지배를 위한 집착과 탐욕의 무절제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미국 유대인들의 모든 행태로 그들이 인류 공공의적으로 지목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수한 두뇌와 선민사상에 집착 이 인류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신음하게 해서는 않됩니다
    그것만이 그들의 생존방식이라면 비 유대인 모두가 그들을 공공의 적으로 배척해도 어쩔수 없겠지요?

  • 11.10.10 16:41

    그런데 이슬람교는 유대인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더군요.

  • 11.10.10 18:40

    유태인이되 표면만 유태인인 사람들이 탐욕으로 지구를 함정에 빠뜨리고 인간을 노예화 하려는 악마주의에 빠진거조.. 뛰어난 지혜를 잘못된 방향으로 쓰고 있음을 빨리 깨달아, 원심으로 돌아와야겠지요?

  • 11.10.11 08:10

    진짜 유대인과 가짜 유대인은 변별력을 가집니다. 지금 프리메이슨은 가짜 유대인입니다.진짜 유대인들은 전쟁 자체를 거부합니다.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합니다.

  • 11.10.10 21:59

    잘 읽었습니다.
    종교도 중요하지만, 좀 더 인본주의적으로 변하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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