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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학당 공부방 스크랩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나?
모학선생 추천 0 조회 67 09.06.20 02: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드라마로 2009년 5월 예정 중인 선덕여왕. 드라마를 시청 하기 전 선덕여왕의 역사적 지식을 알면 더욱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을까해서 <역사스페셜>에서 했던 방송본을 구성해 올려 놓는다.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란다. 드라마에 앞서 한국역사에도 여성이 다스리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결코 우리 역사의 흠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할 유산이다.  

 

<역사스페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나?   


우리 역사상 여왕은 세 명이 있었습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입니다. 이 세 명의 여왕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신라에서만 탄생했다는 점인데요. 신라와 같은 시대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여왕이 즉위한 일은 없고, 그 후대인 고려나 조선에서도 여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상 아주 특이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라기보다는 전설상의 인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여왕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왜 신라에서만 여왕이 탄생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이런 여왕의 존재는 우리 역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일에 쌓여있는 신라의 여왕들. 역사스페셜, 오늘 이 시간에는 신라에서만 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하나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땅 최초의 여왕은 선덕여왕입니다. 경주에 있는 분황사1)에는 선덕여왕 때 세워진 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탑인데요.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하나하나 쌓아올렸는데, 참 아름다운 탑이지요. 그런데 이 탑에서 선덕여왕과 관계가 깊은 아주 독특한 유물이 발견됐습니다.

 

          

           


634년 선덕여왕 3년에 창건된 분황사. 이 곳에는 사찰을 지을 때 함께 세운 탑이 하나 있다. 1915년에 이 탑을 수리할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 만든 사리함이 발견됐다. 당시 이 사리함 속에는 옥으로 된 장신구를 비롯해서, 다양한 유물들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주 독특한 유물이 있었다. 실패와 바늘통을 비롯해서 각종 바느질 용구가 발견된 것이다. 사리함에 담겨있던 이러한 유물들은 사리를 봉안할 때, 탑을 세운 사람의 소망을 담아서 사리와 함께 넣은 공양품이다. 일반적으로 사리 공양품은 불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을 넣는다. 그런데 분황사 탑 안에서 실패와 바늘통, 가위와 바늘 등이 발견된 것은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금바늘과 은바늘이다. 이러한 바늘은 이전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리공양물이다. 분황사를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선덕여왕이기 때문이다.


김연수 학예연구관 인터뷰

"금이나 은이라는 재질은 일반인이 사용하는 용품이라기 보다는 왕실용품에 가까운 성격을 나타낸다. 그래서 분황사 사리탑이 선덕여왕의 발원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라면 좀 더 여왕과의 관련성이 깊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유물이 여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면 사찰의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분황사' 향기로울 芬, 황제 皇.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라는 뜻이다. 사찰의 이름 자체가 여왕을 상징하고 있다.


"선덕여왕 3년 봄에 연호를 인평이라 하고 분황사를 세웠다." (三年春正月改元仁平芬皇寺成 )


몇 년 동안 연호를 사용하지 않다가 분황사를 세울 당시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한 것은, 이 때는 어느 정도 왕권이 확립됐던 시기로 보인다.


당시 분황사 주지 종수 스님

"왕실에서 지은 사찰은 대부분이 국가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 평화를 위해서 사찰을 짓고 기원하는 호국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전례가 있기 때문에 분황사 역시 선덕여왕의 호국의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의 분황사는 그렇게 큰 사찰은 아니다. 그러나 창건 당시 경주 7대 사찰의 하나로 꼽힐 만큼 화려하고 큰 절이었다. 분황사 복원도 분황사를 창건했던 시기와 규모로 비춰볼 때, 선덕여왕이 이 절을 세운 것은, 통치에 대한 자신감과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분황사 바로 옆에 있는 황룡사지에서 뚜렷해진다.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 이곳에는 경주 어디에서나 그 모습이 보였던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 목탑. 이 탑 밑에서 분황사 탑에서 발견된 유물과 비슷한 유물이 발견됐다. 바늘통과 가위, 칼, 실패 등 바느질 용구가 발견된 것이다. 신라 최고의 탑에서 이러한 유물이 발견된 것은 분황사 탑에서 나온 금바늘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황룡사탑의 성격은 삼국유사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은 신라가 천하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탑을 9층으로 하고 층마다 의미를 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9층은 각각 일본과 중화, 오월과 말갈 등 주변의 아홉 개 국가를 의미한다. 이것은 신라의 9적을 물리쳐서 나라를 지키려는 뜻이다. 황룡사탑은 신라를 세상의 중심국으로 세우고자 했던 선덕여왕의 기원, 그 자체이기도 했다.


'始構建...三韓以爲...君臣安樂至今...(黃龍寺 刹柱本紀)'

'탑을 세웠다. 과연 3한을 합했고 군신이 안락함은 지금까지 그것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분황사탑에서 발견된 금바늘. 이 금바늘이 상징하는 것은 황룡사 탑을 세운 의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땅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강력한 신라를 만들어가려는 의지이자, 그 뜻을 실행으로 옮긴 흔적이었던 것이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 9층탑. 이 탑은 규모만 엄청난 게 아닙니다. 주변의 아홉 개 국가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루려는 선덕여왕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탑입니다. 이 땅 최초의 여왕이 된 선덕여왕. 그래서 우리는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요. 이 선덕여왕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중에서도 외모나 성품 등, 여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지귀라는 남자의 이야긴데요. 평소 선덕여왕을 사모했던 지귀는 여왕이 영묘사에 온다는 말을 듣고, 영묘사 탑에서 여왕을 기다립니다. 여왕을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든 지귀, 그 사이에 여왕이 왔다가면서 이 지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팔지를 두고 가게 됩니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이 두고 간 팔찌를 보고 심장이 불타올랐다고 합니다. 그 불에 탑이 불타고 또 영묘사까지 태웠다고 합니다. 여왕이 꼈던 팔찌라면 아마 이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선덕여왕이 아주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상상할 텐데요. 그리고 팔찌를 두고 간 점 등으로 보면, 성품 또한 자상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리고 몇 살에 왕위에 올랐던 걸까요. 선덕여왕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즉위할 당시의 나이를 알아보겠습니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부인사. 이곳에는 선덕여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숭모전이 있다. 지금까지도 그 공덕이 추앙되고 있지만. 이 선덕여왕에 대해선 베일에 쌓여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선덕여왕의 집안을 살펴보면, 아버지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王薨無子) 대신 진평왕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 맏딸은 덕만. 이 덕만공주는 훗날 왕위를 잇는 선덕여왕이다. 둘째딸 천명은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어머니다. 막내딸 선화공주는 훗날 백제 무왕과 결혼하는 인물이다.2)

 

선덕여왕의 나이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아버지 진평왕의 재위기간에 있다. 진평왕은 무려 53년 동안 통치한다. 그렇다면?


▶ 의문 1 - 선덕여왕은 몇 살에 즉위했나?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는 632년. 이 해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을 통해서 여왕의 나이를 추정해보자. 선덕여왕의 조카인 김춘추의 나이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춘추는 603년에 출생.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즉위했던 632년에, 김춘추는 서른 살이다. 김춘추의 어머니이자 선덕여왕의 여동생이었던 천명부인의 나이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명부인이 최소한 스무 살에 김춘추를 낳았다고 하면, 언니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아들이 서른 살이었기 때문에 천명부인은 쉰 살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천명부인의 언니인 선덕여왕의 나이가 밝혀진다. 왕위에 오를 당시 동생이 쉰 살이었다면, 선덕여왕도 이미 쉰 살이 넘었던 것이다.


▶ 의문 2-선덕여왕은 결혼했나?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이 결혼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결혼을 했고 결혼한 남편의 이름까지 나온다.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 갈문왕(葛文王)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붙는 명예적인 호칭으로, 왕과 왕비의 아버지나 동생, 그리고 여왕일 경우는 남편에게도 붙여진다.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 '음'자를 단서로 선덕여왕의 남편을 추측할 수 있다.


주보돈 교수 경북대학교 사학과

"음(飮)이라는 글자는 마신다는 뜻인데 이 물은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이 활동하던 그 전후시기를 기록상으로 찾아보면 ‘음’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한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이란 글자와 유사한 글자는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 글자로 반(飯)이라는 글자를 찾을 수가 있는데 이 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두 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사람은 백반(伯飯)이라고 하는 인물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국반(國飯)이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음(飮)과 반(飯)이라고 하는 글자는 지금 보면 전혀 다른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 당시 붓글을 쓰면서 흘려 써서 특히 비슷하게 쓸 수 있는 그런 글자이기도 하고 또 목판 새겨가면서 이 두 글자는 같은 글자로 새겨질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음갈문왕은 백반 아니면 국반 중 한 명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백반과 국반 중에서 어느 쪽이 선덕여왕의 남편이었던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삼촌인 국반은 선덕여왕에 뒤를 잇는 진덕여왕의 아버지이고. 따라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촌간이다. 국반이 아니라면 백반만이 남는다. 백반이 남편이라면, 선덕여왕은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과 결혼한 것이다.


주보돈 교수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전혀 이상스럽고 불가능한 일이 되겠습니다만은 당시 근친혼은 일반적인 행해지고 있던 그런 관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진흥왕도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삼촌과 질녀의 관계였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그녀는 결혼한 여성이었고, 쉰 살이 넘어서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지요. 쉰 살이 넘은 것도 놀랍고, 그런 나이의 여성이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선덕여왕이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올랐는지 그것을 알려주는 단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의 성품에 대해서 '관인명민(寬仁明敏)'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관인명민’이란 도량이 넓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선덕여왕이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단서는 선덕여왕이 왕이 된 이후에 붙여진 존홉니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른 후 선덕여왕에겐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가 붙여집니다. 성조황고란 글자는 성스러울 성, 조상 조, 황제 황, 시어머니 고로 이우러져있는데, 풀이하면 '신성한 황제의 혈통을 이은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선덕여왕 이전의 왕들에게는 따로 존호를 붙인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선덕여왕만 유독 성스러운 혈통을 강조했던 걸까요.

 

 


경주에 있는 낭산. 낭산의 소나무 숲은, 신선이 내려와서 노닐었다고 해서 신라 때부터 신유림으로 불렸다. 이 신유림 안에 선덕여왕의 능이 있다.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신라의 왕위계승을 살펴보면, 사위가 왕이 된 일이 많이 발견된다. 신라에서만 다섯 명의 사위가 왕위에 올랐고, 통일신라에서도 세 명의 사위가 왕으로 즉위한다. 사위뿐만이 아니라 외손자도 왕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신라는 남자 쪽에서만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라, 여자 쪽에서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여자 쪽에서도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여성이 왕이 되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이 직접 왕이 된 일은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선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은 성골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골은 일반적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왕족 계층을 말한다.


신형식 교수 이화여대 교수

"고대사회는 특수한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각 신분들은 자기의 입장을 강화 내지는 최면을 세우기 위한 여러 계층, 계급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왕실이나 특권층은 자신들의 우월한 배타적인 신성성을 강조하는 제1 신분층을 말하자면 인도의 브라만 계급처럼 자기들 스스로 배타적으로 아마 그런 계급을 자칭하지 않았나..."


그런데 다른 왕들의 경우, 성골이라는 것을 굳이 밝힌 적이 없는데. 선덕여왕 때만 유독 이 '성골'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용숙 교수 부산대 사학과

"성골남자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해야만 성골여자가 즉위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사회구조적으로 신분혈통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진평왕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해서 그 기반을 다져도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선 여러 가지 명분 축적이 그만큼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당시 일본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40년 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최초의 여성 천황인 스이꼬 천황이 탄생한 것이다.


김은숙 교수 한국교원대 사학과

"천황이 즉위했을 때, 신라는 진평왕대였다. 이 진평왕대에는 일본과 교류가 많았다. 신라에서 일본에 불상과 까치도 보내고 신라 사신도 파견해 가지고 일본 조정에 갔다 왔습니다. 그런 사신들에 의해서 진평왕은 일본에 여자천황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이고, 진평왕은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후계자로 여왕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일본의 상황과 진평왕의 뜻이 맞았다고 해도 전통적으로 귀족의 입김이 센 신라에서, 여왕의 계승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다면 선덕여왕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여왕을 옹립했던 대표적인 세력은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김유신이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의 뜻을 펼쳐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여왕을 뒷받침했던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김춘추와 김유신은 왜 여왕을 지지했던 것일까.


주보돈 교수

"김춘추와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지지하게 된 것은 두 사람 모두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진골귀족들의 반발을 받아서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서 폐위가 결정되어 왕위에 쫓겨났던 인물로 진골귀족들에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유신도 마찬가지다. 그는 금관가야 귀족의 후예였다. 그런데 금관가야 멸망 후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지만 보수적인 진골귀족들로부터 상당히 배척당하고 결혼하기도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자연히 춘추와 유신은 의기투합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에 따라 가지고 진골귀족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선덕왕을 지지하고 옹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여왕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여자 쪽에서도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특성 때문에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와는 달리 고구려와 백제에선 딸이 왕위를 잇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라처럼 사위나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한 일도 없었습니다. 여성의 가계에서 왕이 나타나고, 여왕까지 탄생한 일은 유독 신라에서만 있었던 일입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그 실마리는 바로 이 무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무덤은 황남대총인데요. 황남대총은 경주에 있는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으로, 동서 길이가 80미터, 남북 길이가 120미터, 높이만 해도 25미터나 됩니다. 이런 거대한 규모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독특한 생김새입니다. 이 황남대총은 표주박을 업어놓은 것처럼 생기기도 했고, 또는 낙타 등처럼 생기기도 했는데  이 황남대총에 신라에서만 여왕이 나타날 수 있었던 단서가 숨어있습니다.

 

 


표주박을 엎어놓은 듯한 거대한 무덤. 황남대총의 모양이 이렇게 독특한 것은 두 개의 무덤이 서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황남대총에서는 고대 신라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들이 쏟아졌다. 특히 북쪽 무덤에서는 수천 점의 장신구가 출토됐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금관이다. 곡옥과 각종 장식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금관. 당시 이렇게 화려한 금관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금관과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은제 허리띠에 그 단서가 숨어있다. 허리띠 한 쪽에 명문이 새겨져있는데. 바로 '부인대'라는 글자다. 이것은 북쪽 무덤의 주인이 여성이었음을 알려준다.

 


북분과 연결된 또 하나의 무덤. 남분에서는 주로 무기가 출토됐는데, 이런 유물을 통해 이 무덤이 남자의 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됐다. 그러나 이것은 순금이 아닌 금동으로 만든 관이다. 금동관 이외에 은관도 출토됐는데. 여자의 무덤에서 나온 금관에 비하면 장식도 단순하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거대한 능의 규모나 화려한 유물들이, 이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데, 최고의 귀족이거나 왕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무덤에서 왜 남녀의 유물에 차이를 둔 것일까.


김창호 교수 경주대 문화재학과

"이 무덤은 여러 가지 출토물로 볼 때 부부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쪽 남자의 무덤에서 금동제 관이 나왔고 북쪽 여자의 무덤에서 순금제 관이 나왔다는 사실은 북쪽 여자 주인공의 신분이 남자보다 적어도 동일하거나 훨씬 높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남녀의 유물을 통해서 당시 신라 여성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고대 신라 여성의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남자보다 신분이 높은 여자는 결혼을 해도 그 지위가 바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의 선도산. 이 선도산에서 당시 신라 여성의 지위를 알려주는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운제부인이라고 하는 신라의 여성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터가 남아있는 것이다. 운제부인은 신라 2대 왕인 남해왕의 왕비였다.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는 운제부인은 선도산에 산다고 해서 선도산 성모라고도 불렸다. 지금도 제단터에서는 조선시대의 기와부터 신라 시대의 기와조각까지 발견되는데. 오랫동안 이곳이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박흥국 박사 당시 포항공대 강사

"이 선도산 성모가 얼마나 추앙받았는가 하면 삼국유사나 조선왕조시대 때 편찬된 동경잡기를 보면 제사관계 기술의 가장 첫머리에 나타날 만큼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는 진평왕대의 비구니가 절을 지으려할 때 영험으로 도와주는 그런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운제부인 뿐만이 아니라 당시 신라에서는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부인,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부인도 국신으로 섬겼다. 이렇게 여성을 국신으로 숭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박흥국 박사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에서는 출산을 할 수 있었던 여성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여성이 신모로 추앙받기도 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여성이 국가의 제사를 직접 주관했던 경우도 있었다.


'제 2대 남해왕이 시조인 혁거세의 사당을 만들었다. 그 후 왕의 누이인 아로가 제사를 주관했다.'(第二代南解王三年始立始祖赫居世廟四時祭之以親妹阿老主祭)


그렇다면 고구려와 신라는 어떠했을까.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저자.

"고구려에서는 추모왕의 어머니였던 유화부인을 부여신으로 고구려 말기까지 숭배하게 됩니다. 유화라는 말은 몽고에서는 샤먼의 나무라고 부릅니다. 즉 유화부인은 제상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곡물의 여신, 대지의 여신, 생명의 여신, 물의 여신으로 숭배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성을 신으로 숭배하던 전통은 백제에서도 발견된다. 고구려 추모왕의 부인인 소서노는 자식들과 함께 백제를 세우는데 큰 힘을 쏟았다.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재산을 기울여서 국가를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셨다. 그 공로가 하늘과 같다."


이런 소서노가 죽자 백제에서는 나라가 위태로워졌다며 도읍을 옮긴다. 그리고 사당을 세운 후에 국모로 숭배한다. 이렇게 세 나라 전부 여성을 국신으로 받들거나 제사장을 지냈던 전통이 남아있었던 것은, 고대사회에서 여성의 신분이 결코 낮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초기까지만 이어진다. 그렇다면 유독 신라에서만 여성을 숭배한 전통이 오래 동안 남아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용숙 교수

"지형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좋은데 비해서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있기 때문에 자연히 외래문화의 수용이라든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늦었다. 때문에 사회전통문화가 오랫동안 유지했다. 이러한 점은 불교나 유교문화 수용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 늦었다는 점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여성을 국신으로 숭배했던 사회, 또한 여성이 제사장으로 군림하던 전통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사회. 이런 신라의 전통은 여왕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신라사회는 대대로 여성을 신성시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떠했을까요. 여기에 있는 바위는 경상남도 울산군 강동면 천전리에 있는 바윕니다. 이 바위에 신라여성의 지위를 알려주는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져 있네요. 먼저 오른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른쪽에 보면 '을사년에 사탁부 소속의 갈문왕이 놀러왔다. 그와 함께 온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으니 어사추여랑왕이다' 이번에 왼쪽에 있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이 왼쪽에 있는 기록도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은 을사년 즉 525년에 사부지갈문왕과 그의 누이인 어사추여랑왕이 이곳에 놀러온 일을 기념해서 새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갈문왕이라고 하는 것은 왕과 아주 가까운 친척에게 내려지는 명예적인 호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글자는 '어사추여랑왕'인데 여성에게도 왕이란 칭호를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바위에는 그때 함께 왔던 귀족들의 이름도 새겨져있는데, 일길간지라는 관등을 가진 영지지의 처, 거지시혜 부인, 사간지라는 관등을 가진 진육지의 처, 아육모홍 부인도 함께 왔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귀족들과 함께 부인들이 유람을 왔고, 그 부인들의 이름을 전부 실명으로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왼쪽에 또 다른 귀족부인들의 이름이 보이는데요. 일리등차 부인과 사효공 부인. 이렇게 이 바위에는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당시 이곳에 온 사람들 중에는 왕이라고까지 칭호를 받았던 여성이 있었으며, 다른 귀족부인들도 모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녀의 이름을 실명으로 똑같이 기록한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여성들이 존중을 받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떳떳하게 밝히게 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이 바위야말로 신라여성의 지위를 가늠하게 하는 열쇠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신라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살펴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은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다. 당시 신라 여성들은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신라시대에 창건된 취서사. 취서사에는 당시 신라 여성의 경제력을 알려주는 유물이 남아있다. 한 여성의 재력으로 이 탑을 세운 것이다. 지금은 기단과 1층만 남아있지만. 취서사탑은 본래 3층탑이었다. 1930년대 탑을 해체했는데, 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시주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867년 이찬 김량중의 딸 명단(明瑞)이 봉화 취서사의 불탑을 조성할 때 재산을 시주했다'


무여스님 취서사 주지

"요즘 기계가 좋은 시대에도 탑을 조성하기도 어려운데, 그 당시에는 조성하기도 어렵거니와 상당한 재력이 아닌 분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낼 불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찬이라는 고위 관직자의 딸이긴 했지만 당시 명단에게는 상당한 재산이 있었고, 그 재산으로 지금의 사회활동에 해당하는 '시주'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에게 재산이 있었고, 그 재산을 본인 스스로 처분한 예는 많이 발견된다. 지금도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갈항사 석탑. 동탑과 서탑이 한 쌍을 이루는 이 탑을 세울 때도 여성의 경제력이 뒷받침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갈항사의 두 탑이 천보 17년, 무술 중에 창건되었는데 생질과 누나, 누이동생. 이 세 사람의 힘으로 세워졌다'


이렇게 당시 신라에서는 남성과 여성 양쪽 모두가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속은 어떻게 이루어졌던 것일까.


최재석 교수 고려대 사학과.

"직접적인 자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접시대인 고려시대를 보면 아들 딸 차별 없이 균분상속을 했고 그 다음 세대인 조선시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신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많은 여성들이 재산을 불사에 시주를 했습니다. 시주를 했다는 것은 개인 재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신라시대도 아들, 딸 차별 없이 균분상속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속만으로 경제력이 보장됐던 것일까.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이 기와들은 당시 신라 여성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신라시대의 기와 중에는 이렇게 삼베자국이 남아있는 것들이 많다. 이것은 기와를 구울 때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안쪽에 삼베를 깔고 굽는데, 굽고 나면 이렇게 선명하게 자국이 남는 것이다. 기와마다 이런 삼베를 사용했다면, 당시 신라에서는 삼베를 대량으로 필요로 했을 것이다.

 


고대 사회, 삼베를 비롯해서 직물을 생산하는 일은 대대로 여성의 몫이었다. 신라 시대 벽화는 남아있지 않지만, 같은 시기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에서 여성이 베를 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문헌에는 신라 여성들이 공동으로 직물을 생산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한가위의 유래가 되는 길쌈이다.

 

 

'왕이 6부를 정하고 이를 둘로 나누어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고 매일 아침 일찍이 대부의 뜰에 모여 늦은 밤까지 길쌈을 했다.' - 三國史記, 권 1, 신라본기 22"


당시 감독관이었던 '왕녀'의 지휘에 따라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베를 짠 것으로 보아, 길쌈이 일상생활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효숙 교수 경원대 의상학과

"당시에 길쌈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게 요즘 생각하는 단순한 놀이 차원이 아니었다. 당시 견포나 마포 같은 직물로 세금을 냈기 때문에 직물이 화폐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직물을 잘 짜는 것은 경제행위와 직결된다. 때문에 국가에서 모든 국민의 직물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일년에 한 번씩 길쌈놀이를 해서 직물 생산기술을 높였다."


이렇게 직물을 생산하는 일은 국가의 주력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직물의 생산을 관장하는 관서를 두었고, 그 관서는 직물의 종류에 따라서 세분화되어 있었다. 특히 직물을 생산하는 관서마다 생산을 총괄하는 여성 감독관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母'였다. 이 '모'는 신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관직이다.


조효숙 교수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려나 조선에도 직물을 생산하는 관서가 있었는데 그 시대에 장인이나 관리들은 모두 남자였다. 그에 비해서 신라에서는 여자가 직접 직물을 생산하는데 감독하는 관리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 이곳에는 당시 신라가 일본과 교역할 때 가장 중요한 물품으로 여겨던 신라의 직물들이 보관되어있다. 그 중에서 신라에서 수출했던 양탄자가 남아있는데, 이 양탄자 끝에 달려있는 꼬리표에는 흥미로운 글자가 새겨져있다.


紫草娘宅(자초랑댁). 이 글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성시 교수 일본 와세다 대학

"자초랑댁이라고 하는 것은 신라귀족의 가호다. 그러한 가호를 갖고 있는 귀족이 자신이 제조했던 삼베와 일본의 명주와 교환을 지시한 내용의 꼬리표다. 여기 표시된 자초랑댁은 삼베제조의 주체, 제조업자로 볼 수 있다. 이 자초랑댁이라고 하는 귀족의 가호에 붙어있는 娘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한국 고대의 자료를 보면 낭이라는 글자는 귀족의 딸, 특히 공주를 뜻하는 문자로 나온다."


자초랑댁이 직물을 생산하는 제조업체라면, 자초랑은 직물을 수출하는 업체의 대표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렇게 수출 상품에까지 여성의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당시 신라 여성들은 집안에만 갇혀있던 여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이나 상속을 통해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했고, 그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던 것입니다. 그런 신라 사회의 분위기에서 여왕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비해서 여성이 아무리 지위가 높았다고 해도 왕까지 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여왕이 통치하게 되면서 여왕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은 없었을까요. 이 연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 기록 중에서 이 연을 사용했던 일은 신라에서 처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신라에서 최초로 사용된 연은 선덕여왕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선덕여왕 말년에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난을 진압하는데 이 연이 사용된 것입니다.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이 반란은 신라 역사상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연이 사용된 반란에는 선덕여왕의 최후와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비밀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한 밤 중에 반월성에 큰 별이 떨어졌다."(丙夜大星落於月城)


647년 비담의 난 때 있었던 일이다. 반란군은 반월성에 떨어진 별을 보고 승리를 장담했다고 한다. 그러자 반란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왕군이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연에 불을 붙여 날렸다고 한다.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왕군이 연에 불을 붙여서 날렸다. 마치 별이 하늘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연이 사용된 후 반란은 진압됐다. 비담의 난은 신라의 역사를 바꾼 중대한 사건이었다. 선덕여왕의 이어 또 한명의 여왕이 왕위에 오르고 여왕을 지지했던 신흥세력이 전면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연을 통해서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비담의 난은 어떤 사건이었던 것일까. 경주의 동쪽, 반월성과 마주보고 있는 명활산. 이곳에는 신라시대에 가장 큰 산성 중에 하나였던 명활산성이 있다.


선덕여왕 말년, 비담은 이곳(명활산성)을 본거지로 반란을 일으킨다. 현재 발견된 성곽의 둘레는 4.5키로미터. 명활산성은 자비왕 때 궁궐로 사용했을 만큼, 중요하고 유서 깊은 성이었다.


박방룡 박사 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곳을 본거지로 한 것은 당시 비담의 세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반란을 일으킨 비담은 상대등이었다. 상대등은 지금의 국무총리격으로 왕위에 오를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때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관직이다. 이런 막강한 세력을 가졌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반란 당시 내세운 명분은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여왕의 통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이미 4년 전에 당태종이 제기했던 명분이기도 했다.

 

 


"네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이 경멸하고 있다. 또한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앞으로도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여왕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왕의 통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는 당태종의 말은, 신라에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이 말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비담에게 난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는다. 선덕여왕이 죽자, 사촌 여동생인 승만공주가 바로 왕위를 잇는데, 그녀가 바로 두 번 째 여왕인 진덕여왕이다. 진덕여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반란군 진압에 나선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통해서 비담의 난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추정해볼 수 있다.


김은숙 교수

"선덕이 살아있을 때 진덕을 후계자로 지목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비담의 난 때 선덕이 죽자 신속하게 진덕이 즉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선덕여왕파라로 하는 김춘추가 당시 일본에 가있는데도 즉위가 빨리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사전에 준비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비담은 진덕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반란군에 맞섰던 왕군의 총사령관은 김유신. 왕군을 능가할 만큼 막강했던 반란군이 갑자기 진압된다. 이런 비담 세력을 어떻게 진압할 수 있었을까. 수세에 몰렸던 김유신이 난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산시 압량군에 있는 이 곳은 김유신이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이다. 당시 백제의 국경과 접해있는 경산은 신라의 최전방기지였다.


김약수 교수 대구 미래대

"이 유적의 입지 성격으로 보면 넓은 광장은 군사훈련을 시킬 때 기본동작훈련, 마무리 훈련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나머지 야전훈련이나 기마훈련은 이 주변의 넓은 들판에 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유신은 압량주의 군주를 역임하면서 이 곳의 군사들을 최정예 부대로 훈련시킨다. 그렇다면 김유신이 수세에 몰렸을 때 이곳에서 힘을 지원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주보돈 인터뷰

"김유신을 지지하는 군사력이 아마도 지방에 있던, 김유신이 군주를 역임했던 압독군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경산지역의 병력이 급기야 동원되어 비담의 난을 진압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팽팽한 접전 끝에 비담의 난은 10여일 만에 진압된다. 마침내 진덕여왕의 지지파가 승리한 것이다. 이것은 여왕을 뒷받침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던 신흥귀족이 전통귀족과의 결전에서 승리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비담의 난이라는 진통을 겪으면서 신라는 또 한 명의 여왕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김유신을 비롯한 신흥귀족들은, 진덕여왕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정치일선에 나서고, 삼국통일의 길을 연다.


이배용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흔히 삼국통일아라고 하면 춘추와 유신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그들이 통일의 역군으로 성장하는데는 여왕 통치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어머니가 자식을 북돋아서 그들의 능력을 최대 발휘할 수 있게 하듯이 인재를 등용함은 그들을 믿도 최고로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통일의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여왕 특유의 통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통일을 완성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됩니다."


아버지 김춘추의 뒤를 이어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 문무왕은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이 사천왕사를 건립한다. 호국의 상징이었던 사천왕사는 통일을 염원했던 선덕여왕의 뜻을 받들어 여왕의 무덤 바로 아래에 세워진다. 문무왕은 출전에 앞서, 군사들을 이곳에 열병시키고 통일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등장하고, 250년이 흐른 후 신라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문헌에는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전례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통일신라 후기까지, 신라인들이 여왕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멸망한 후부터 여왕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여왕의 존재를 좀처럼 믿기지 않는, 특별한 사례로 바라보는 시각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잣대로 신라를 바라볼 뿐, 그 시대로 되돌아가서 신라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라로 되돌아가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신라 사회와, 그 사회에서 역동적으로 생활했던 신라 여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회였기 때문에 신라는,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세 명의 여왕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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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국보 30호.

     2.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6203.html 꼭 살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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