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암장학재단설립기념비(啟巖奬學財團設立記念碑) 비문(碑文)
저자: 장길남(張吉男)
![](https://t1.daumcdn.net/cfile/cafe/230DE84855C8249532)
전북 임실군 운암면 사량리에 위치한 장진영 기념관 부지 내에 있는 계암장학재단설립기념비의 좌우면과 후면에 새겨진 글이다. 저자 장길남은 장진영의 아버지다.
계암 장진영(張眞英)은 서기1972년 6월 14일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에서 아버지 장길남과 어머니 백귀자의 2녀 중 차녀로 전주예수병원에서 출생하였다. 전주교육대학부속초등학교, 기전여자중학교, 중앙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상명대학교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어릴 적부터 꾸준한 노력과 의지가 강하고 자립정신이 투철하여 본인 스스로 해결하는 노력파였고 고등학교까지 개근상을 받았고, 대학재학 중에는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광고 모델료를 받아 스스로 출연비를 마련하여 1993년 5월22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대전·충남 「진」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예능방면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피아노연주를 잘하였고 미술도 잘하여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대학 진학과 동시에 「영화배우」로 발탁되어 연기자로서 본격적인 연예활동을 시작하였다. 2001년 청룡영화여우주연상 외 많은 상을 수상하였고 배우로 출연하면서 그의 탁월한 연기는 빛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일류 명배우로서 자리를 굳혀갔다. 인생은 희비쌍곡선이라 하더니 2008년 9월, 뜻밖에도 병원에서 중병검진을 받게 되어 1년여에 걸쳐 강한 집념으로 요양 투병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끝내 2009년 9월1일 38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간다더니 가슴에 맺힌 통한을 그 누가 알랴, 울어 봐도 불러 봐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자나 깨나 진영이를 찾아 그리워하는 부모마음… 진영이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항상 부모님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장성하여서도 언제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 1995년 아버지가 경영하는 「삼화화학회사」가 부도를 맞자 아버지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부도를 막아주어, 재산 파탄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부모가 편하게 살도록 승용차와 고급아파트며 가재도구까지 마련하여 주었으며, 임실군 운암면 사량리 동곡마을 후록에 선영을 조성하는데 2억원을 부담하였으며, 본인의 모교인 중앙여고에 장학금으로 매년 천만원씩 3년동안 기탁하였고 전주인재육성재단에 2천만원 사망 직전의 유언에 따라 사후 5천만원을 중앙여고에 전달하였으며, 아버지의 평생소원인 사립고등학교 건립추진이 회사의 부도와 현금도난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알고 현금 11억1천만원을 출연하여 장학재단을 설립토록 하였다. 비록 진영이는 떠났지만 그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2010년 3월 15일 설립인가를 받아 재단법인 계암장학회가 발족하게된 것이다. 진영이의 출연금 11억1천만원은 장학재단기금으로 하고 아버지의 사재 10억원으로 임실군 운암면 사량리의 부지 9백평을 마련하여 이곳에 건평 150평 건물 두동을 건립하고 한동은 재단법인 계암장학회 사무실과 인동장씨 32세 백은공 종중사무실로 한동은 계암기념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2010년 3월25일 착공하여 동년 7월30일 준공을 마치고 2010년 9월1일 계암 장진영의 1주기를 맞이하여 개관식을 갖게 되었다. 이에 우리 재단법인계암장학회는 계암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재단을 더 키우고 알차게 운영하여 훌륭한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육성해 나갈 것을 굳게굳게 다짐하면서 그 뜻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하여 이 비에 새겨 세우다.
2010년9월1일 인동장씨 32세 백은공 종중대표 재단법인계암장학회이사장 장길남
첫댓글 자랑 스럽습니다.짝짝짝!!
전주시 완산구에 우리 상장군계 장문 집성촌이 존재합니다. '백은공' 종중에 대해 하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였네요!진영이가... 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장석용(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