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320 주일설교.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장 34~42절)
-----------------------------------------------------------------------------------------------------------------------------------------
이번 사순절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 예수님이 스스로 밝혀 주셨던 보배로운 말씀들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고 하고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 예고를 하셨던 이야기와, 그에 대해 제자들이 반응하는 내용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또 다른 목적과 이유가 되시는 말씀으로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는 제목으로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전체의 내용은 12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려고 세상에 나가는 제자들이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행동지침들을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요, 성령님의 동행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우리가 복음 전도와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할 사명을 지닌 제자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늘 반복해서 읽고 따라야 하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마귀들을 상대해서 물리치고 이겨 내야만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빈 손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권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아멘. 제자들 모두에게 성령이 동행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예수님처럼 권세와 능력과 지혜로 사역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춰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권능을 주셨다는 이 말씀 전과 후에 딱 적합한 말씀을 덧 붙이고 싶습니다. 전(앞)에 적합한 말씀으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요 14:26) 내가 만나야 되는 사람의 상황과 현장의 조건에 따라 무슨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지 등을 다 알려 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 전하기 전에 기도로 먼저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후(뒤)에 붙이고 싶은 적합한 말씀은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1) 는 말씀입니다. 막상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입이 굳어지지 아니하고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특히 이 말씀은, 권세자 앞에서 섰을 때 무섭고 떨려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당당하게 예수님을 시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복음에 대해서는 반드시 할 말은 다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담대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순서를 정리해 드리면, 우리가 제자로써 세상에 파송되기 위해서는 ① 먼저 기도로 준비하게 하시고, ②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는 권능(성령)을 주시고, ③ 누구 앞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만을 구원자로 시인하고,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십니다. 하고자 하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도록 이렇게 강하게 세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복음만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사랑스런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으로는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6절)는 말씀입니다. 많이 들어보시고 다 아실 겁니다. 10장의 나머지 내용들은 집에서 차분하게 읽어 보시고 오늘 본문 34절을 읽어 드립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아멘.
여기서 화평이라는 단어와 검이라는 단어가 서로 극과 극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화평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생각하는 화평에 큰 차이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화평은 무엇이었를 까요?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기를 원하는 화평(평안)은 크게 세 가지라고 봅니다. ① 가족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가정에서의 화평, ② 재정의 넉넉함에서 오는 여유로움의 화평, ③ 건강한 육신으로 살아가는 행동의 자유를 누리는 화평, 이 세가지의 화평만 누리고 있어도 많은 부분에서 여유로움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화평, 그리고 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화평과 검이 나오는 34절 앞에 나오는 32, 33절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면 부인당하고, 시인하면 시인해 주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는 진정한 화평은 바로 이런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믿음이 자라납니다. 복음으로 단단히 무장했습니다. 제자로 세상에 파송 되었습니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성령과 동행하면서 뭇 사람들 앞에서 구원자의 이름을 당당하게 시인(선포)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화평의 결과는 이런 과정으로 전개 되도록 세밀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화평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현재의 상황 자체가 화평을 잘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현실 자체가 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드리는 것 만으로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가족끼리, 동료끼리, 이웃끼리 잘 먹고, 건강 지키며, 돈 많이 벌어서 여유롭게 살아가게 되면,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수님은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지닌 우리들에게 정신차리라고 깨우침의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너희들이 만약 그런 화평의 관념에 사로 잡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복지 부동의 자세로 주저 앉아 있다면 나는 너희들을 복음으로 다시 일으킬 것이고, 다시 제자로 세워 줄 것이고, 다시 검을 주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내가 주는 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복음의 검, 말씀의 검, 구원자 예수 이름의 검이니라” 아멘.
예수님 말씀의 주요 포인트는 화평은 예수님 자신뿐이라는 겁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것은 구원자 예수 이름을 우리 마음에 입술에 장착시켜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화평과 검으로 다 그렇게 준비 되어 있습니다. 이미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이 마음에 믿음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푸라기 하나 들 정도의 의지만 있으면 세상에 나아가 예수이름을 시인하고, 전파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이라는 진짜 화평 대신 세상이 주는 가짜 화평에 더 관심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나의 상황과, 여건과, 시간과, 일상의 분주함을 이유로 들으면서, 때로는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서, 검을 휘두루기는커녕 내게 검이 있는지 감각조차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만으로 이미 화평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에수 이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보다 더 적극적으로 시인하는 제자로써의 왕성한 동력은 상실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순절에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하여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들려주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세상과 누리려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화평을 모조리 깨트리러 왔노라, 나는 너희들이 강력한 말씀의 검, 복음의 검을 들고 세상에 나아가 거짓된 화평을 모조리 깨트리는 나의 충성된 제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왔노라,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느냐, 일어나라, 당당한 걸음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즉각 반응해서, 나의 의지박약함을 일깨우고 복지부동의 자세를 풀어헤치는 새로운 결단의 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누구를 상대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머 좋은게 좋은 거지, 적당히 선을 정해서 이사람, 저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둥글 둥글 잘 지내면 다 좋은 거 아니야”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는 세상이 주는 거짓 화평에 맛서 싸울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세상 곳에는 어둠의 영적 존재들이 주인으로 행세하면서 판을 벌려놓고 온갖 종류의 거짓 화평들을 펼쳐놓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검을 주시겠다고 표현 한 것도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터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렁 설렁 준비 없이 나갔다가는 칼집에서 칼을 빼 보지도 못하고 일순간에 당할 수 있는 살벌한 전쟁터가 바로 거짓 화평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라는 장소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최고의 화평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또한 복음의 검도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살벌한 영적 전쟁터 입니다. 사순절은 내가 참 된 화평만을 취하고, 거짓 화평을 모조리 끊어내는 결단의 절기입니다. 내게 주신 복음의 검, 말씀의 검을 들고 세상에 나아가 맞서 싸우는 절기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고, 예수 이름으로 싸우고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 하시는 우리 주님의 강력한 의지의 말씀 앞에, 모두 순종으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제자로 세상에 파송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마시고, 내 가족과 이웃에게 구원자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하는 진정한 화평의 주인공, 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걸림돌, 장애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게으름, 나태함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35~37절을 읽어 드립니다.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아멘.
사람들이 가족간에 화평(화목)을 누리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예수님은 이런 화평을 주시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내게 합당하지 않으시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가족간에 원수지간을 만드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을 잘 모르는 분들이 들으시면 눈이 휘둥그레 질 겁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여러분들이 이미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이시지만 질투의 하나님 이십니다. 무엇에 대해 질투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 보다 다른 어떤 것(우상, 돈, 사람, 명예, 권력, 음란, 사치, 취미....)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 하는 것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경 중에 제일 중요한 계명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라고 직접 확인해 주셨습니다.
가족과 원수되게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과 화평(화목)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수련회에 가서 이런 내용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기억이 납니다. 내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포기하지 못하고 끝가지 미련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속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만약 세계 최고의 크루즈 여행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여행사에서 안내장이 오기를 모든 부대비용(음식비 포함)은 당연히 무료이니 몸만 오시면 되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옷과 가방을 제외하고 1인당 10개의 품목만 지참 할 수 있습니다. 10개를 초과하게 되면 승선이 거부 됩니다.」 수련회 참가자들에게 안내문 대로 무엇을 지참하고 가실 것인지 각자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고민하지 마시고 지금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사람)들로 품목을 구성해 보세요. 무엇들이 떠오릅니까?
제가 진행하며 보았더니 성경책은 꼭 가져 가겠다는 분들이 많았고, 휴대폰은 당연하고, 방안의 분위기를 위해서 향기나는 화초를, 미용은 포기할 수 없으니 화장품과 드라이기를, 폼 나는 썬글라스를, 야식은 참을수 없으니 라면 한 박스를, 애완견 없이는 잠 못자니 동거하고 있는 강아지를, 등등 참 재미난 선택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기서 두드러진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랑하는 아들 딸들은 반드시 데려가겠다고 선택했고, 반대로 반드시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남편이었습니다. 왜 남편들 안 데려 가세요? 라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죠, 그런데 남편을 데려가서 여행 망할 일 있어요, 남편은 집에 혼자 놔두면 더 잘 신나게 놀아요 등의 대답들을 하시더군요. 불쌍한 남편들일까요? 죄 값을 받는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10가지씩 다 선택 한 후에 여행을 가게 되었고, 드디어 결정의 시간들이 왔습니다. 첫째, 바다 여행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가지고 있는 물건 중 세 가지씩 버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둘째, 풍랑으로 인해 수심이 낮은 곳으로 밀려 왔으니 또 세가지씩 버리십시오. 셋째, 난파 직전이니 또 세가지씩 버리십시오. 넷째, 긴급 보트를 타고 앞에 보이는 섬으로 탈출 하시되 나머지 한 개를 버리시고 혼자만 가야 합니다. 한 개 남은 것을 즉시 버리십시오. 이런 결정의 과정이었습니다.
끝까지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 까요? 대부분 아들 딸들 이었습니다. 그나마 남편을 선택하고 함께온 가족 중에는 이니 남편은 중간에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계속해서 남편들이 불쌍합니다. 어찌 되었든 가장 나중에 남은 것은 역시 사람이었고, 아들 딸들 이었습니다. 발표의 시간에 어느 권사님이 나오셔서 선택한 품목과 차레로 버린 품목을 이야기 하시면서 딸을 버려야만 하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다 이렇습니다. 가족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제가 진행한 프로그램의 의도는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이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만 남게 되고, 우리는 최후의 선택지로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의 선택지로 하나님을 선택힐 수 있는지 알아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모든 것을 과감히 배제 시킬 수 있는 결단과, 마음 속에서 가장 끝가지 버리지 못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록 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가장 먼저 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을 최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들 딸들을 어떻게 생각하니까? 너무나 사랑스럽죠. 내 목숨 기꺼이 내어 주더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자녀들 아닙니까? 어떤 힘든 과정이 있어도 내 자식 입 속에 고기 반찬 넣어줄 수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모 마음 아니겠습니까?
자 이런 인간애적인 애정 표현은 가족의 화목을 이루는데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냉철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 사랑에 대한 관심, 열정, 투자 등을 생각해 보시면서 내가 예수님을 상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까? 자식에 대해 그토록 쏟아 붇는 열심과 애정을 전부 회수해서 예수님께 투자할 용의가 있으십니까?
내가 가족에게, 자녀에게 모든 시선을 빼앗 긴채 살아가고 예수님을 저 멀리 방치 해 둔다면 질투하시는 우리 주님은 가족간에 불화가 일어나게 만들고 원수가 되게 만들어서라도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다시 예수님에게 돌려지도록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진짜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불화가 일어나고 원수 지간이 되기 전에 자진해서 가장 먼저 예수님만을 사랑하시는데 최선의 열심, 최고의 관심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내 마음이 지금 예수님에게 우선 순위가 있는지,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내 가족을 우선 순위로 두고 살아가는지가 왜 중요한지 오늘 말씀 결론에 나옵니다. 우리 다같이 38, 39절을 큰 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아멘.
돈, 재물, 명예, 권력, 탐식, 음란, 향락, 이런 세상의 것들과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열심을 다하는 것이 너무 과해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우리 예수님의 부르심에 전혀 응답할 수 없습니다. 제자로써의 삶이 중단이 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명은 아예 내 의식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예수님 을 사랑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도, 그것이 부모이든 자녀이든 지간에 과감하게 제외 시키실 겁니다. 불화를 일으키든 원수가 되게 하든 얼마든지 그러한 방법도 다 사용 하실 겁니다.
39절을 다시 읽어 드립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아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내 자식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서 목숨 걸고 사셔야 합니다. 매우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지금 내 목숨이 누구 때문에 살아 있고, 누구 때문에 영생의 보장이 되었는지를 가장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나를 살려 주신 그 분을 위해, 이제는 내 목숨을 기꺼이 내 놓으면서까지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영생을 위해 내가 질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목숨 걸고 세상의 거짓 화평과 처절하게 싸워나갈 때 진정한 화평(예수님,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심령에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그렇게 하시면 내 가족, 내 자녀들은 예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데 힘쓰고 계시며 어떤 종류의 화평을 얻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마음 속으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목숨을 걸기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님은 나태하고 게으름에 빠진 우리 모두를 다시 믿음으로 강하게 무장시키셔서 제자로 파송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부르심에 응답하여 화평의 예수님을 마음에 품으시고, 복음의 검, 말씀의 검을 들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나아가셔서 예수님의 이름, 구원자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선포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예수님만으로 참 화평과 참 만족을 얻으시고,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위해 충성과 헌신을 다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영생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사순절을 맞이하여 다시 복음으로, 다시 제자로, 온전하게 세워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의 연약한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붙들어 주셔서 승리하신 우리 주님만을 따라 십자가의 길로만 나아가는 충성된 제자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