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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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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 스크랩 시화속의 영월군 - 신승엽 저[詩畵속의 寧越郡.2007.10.15.영월군 발행]
사랑해 김원식 추천 0 조회 50 08.06.10 14:1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제목 : 시화속의 영월군(화보집)

발행 : 영월군청 문화관광과

저자 : 신승엽 영월군 부군수

 

 

詩畵속의 寧越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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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일본에 소개된 ‘강원도의 詩’ 중 영월군의 詩畵
   友(벗에게)
   국민의 고향 강원도
   有情<鄕>(유정·향)
   有情<結>(유정·결)


‘시인 문효치’의 단종애사와 김삿갓
   장릉
   청령포와 망향탑
   관풍헌과 단종의 시
   김삿갓 무덤

 

 

 


江原道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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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 신승엽


춘천의 봄 경춘가도변을 수놓은 연분홍 진달래
샛노란 개나리꽃, 연두색 신록이 화려한 향연
현란한 칼라의 카니발은 연인들을 유혹 한다네.
여름 소양댐 아래 강변에서 마시는 맥주한잔의
시원함은 각별한 맛일세.
소양댐 찬물에서 키워낸 송어회 안주 한 접시는
춘천의 일미라 할 만한 자랑거리라네.
가을단풍에 물든 산자락이 한 폭 그림으로
드리운 의암호를 내려다보면서 오르는 삼악산은
이 산이 토해내는 등선폭포라는 말 그대로 신선이
된 듯한 후련함을 느낀다네.
산을 내려와 등선폭포 어귀 통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땀을 들리며 마시는 막걸리에 도토리묵 칡막국수는
이곳에서만 맛 볼수 있는 진미이지.
겨울이면 의암·소양·춘천호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호반순환 도로변 가로수 설화가 환상적인 춘천일세.
벗이여 이 좋은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춘천으로 오시게나
닭갈비를 구워놓고 동동주나 한 잔하며
정담이나 나누어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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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고향 강원도
강원도는 한반도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양구군은 국토의 정중앙으로 공인을 받은 바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힘차게 내달려 국토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 중심에 날카롭지 않고 둥글면서도 그윽한 향기를 가지고 넉넉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곳이 강원도이다. 인심이 좋고 비옥한 땅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강물이 흘러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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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6천년 이전부터이다. 양양군의 오산리 유적, 양구군의 만대리 유적에서는 석기시대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강원도의 동쪽지방은 영동, 서쪽지방은 영서라고 부른다.
이 큰 산줄기에는 금강산을 비롯해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등의 산이 연봉을 이루고 있고 3개의 국립공원이 지정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봄이면 강원도의 꽃인 철쭉꽃을 비롯한 아름다운 꽃들이 산과 들 강변을 수놓고, 여름이면 **한 노음과 시원한 계곡을 찾아 온 국민의 휴양지가 된다.
강원도는 ‘한국관광의 1번지’라고 자*할 만큼, 한국인이 찾고 싶은 바캉스 피서지로 첫 손가락에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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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은 태백산맥을 분수령으로 동서로 나뉘어 흐른다. 한국의 3대강 중 한강과 낙동강이 발원한다. 한강은 가원도의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이 나라의 수도인 서울시 한복판을 흘러 서해로 흘러간다. 한국의 발전상을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그 ‘한강’이다.
낙동강은 태백시의 검용소에서 발원하여 이 나라의 남단에 있는 제2의 도시 부산시를 거쳐 남해로 흘러간다.
이와 같이 강원도는 산과 강, 바다 모두가 하늘이 내린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강원도는 국민의 고향이라 불려진다.


강원도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함께 사는 하늘이 내린 천혜의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예로부터 이곳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르고 *후한 인심으로 이웃과 다정하게 살아왔다.
조선시대 초기 강원도로 이름 붙여진 이후 610년이 넘었다.


강릉 단오제를 비롯한 민속 문화와 오대산의 불교문화가 강원도에서 꽃피웠다. 15세기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난 이율곡 선생과 그의 어머니이자 이 나라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신사임당은 강원도가 자랑하는 큰 성현이다.
지금 강원도는 인간 생명의 수도건설을 비전으로 200만이 힘을 모아 나가고 있다.


申勝燁(신승엽)
1951년 강원도 평창군 출생
강원도청 30년간 근무
전 강원도산업경제국 지식산업과장
현재 영월군부군수 재임 중
2001 ~ 2005년 강원도공무원문학회장 역임
2003년 월간 ‘문학세상‘ 에세이부문 신인상 수상
2007 강원공무원문학상 수상
강원공무원문학회. 동강문학회. 한국강원수필가협회 동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평창 관광의 길 안내’ 1992
‘강촌에서 띄우는 편지’ 2004

 


강원도 유정<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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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촌에는 강원도인만의 순후한 사람들이 옛날의 전통을 이어서 살아가고 있다.
지나는 길손이 물을 청하면, 선뜻 물 한 사발에 건네는 따뜻한 인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산촌에는 도시인의 메마른 정서와는 달리 이웃에 경조사가 생기면, 한달음에 달려가 내일처럼 돌봐주는 정겨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산촌 사람들은 아직도 맛난 음식이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서로 나눠서 먹는 인정이 넘치게 살아간다.

 


강원도 유정(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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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서는 동해안은 유라시아의 대륙 동단에 위치해 있어 떠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다.
해가 떠오르는 수평선 너머에 일본의 토마현이 있다.
강원도와 토마현은, 이 두 지역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어두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다가오는 시대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관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저렇게 살아서 넘실대는 파도와 같이 동해를 연결고리로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金旺起(김왕기)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생
시인. 공무원
1992년 ‘시세계’ 신인상
강원도공무원문학회
한국문인협회 강원도지회 춘천·평창지부·관동 문학회·수향 시 낭독회원
현 홍천군의회 의회전문위원
시집
‘산책’. ‘그리움이 가득한 길을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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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화 교류 20년의 궤적
   미술·문예 등 다채롭게 소개  - 2007년 5월 19일 일본 마이니치신문 보도 전문-
1998년부터 한국과 문화교류를 하고 있는 토야마 시의 그래픽 디자이너 우에노 히로유키 씨(62)가 약 20년간의 교류에 대해 ‘강원도의 시’로 정리했다.
한국에서도 전람회를 개최하고 있는 마이니치 서예전 심사회원인 야마모토 씨(67. 후쿠오카현 사바에시)의 글씨 등, 한일의 미술·문예 등이 많이 소개되어 있고 희망자에게는 판매도 하고 있다.
우에노 씨는 1988년 광고 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이후로도 여러 번 방한하였다. 1997년에는, 한국 현대디자인 실험 작가협회에 제안하여 토야마와 한국의 디자이너가 ‘미래’를 테마로 제작한 포스터 교류전을 양국에서 개최하였다. 우에노 씨는 이 때 실행위원을 맡았다. 또한, 시니어 국제협력 사업으로 약 1개월 동안 강원도 삼척 국립대학교와 토야마 유리공방과의 교류의 계기를 만들어, 그 대학교에 올해 유리공방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 책의 중심 중 하나는 강원도 디자인협의회의 장완영 씨와의 만남. 우에노 씨는 2004년 장완영 씨가 서울에서 연 개인전을 보고 ‘어릴 때가 그리웠다’고 말했으며, 장완영 씨의 ‘고향의 사계’를 중심으로 한 책을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디자이너가 만든 만큼 화려한 이 책에는 장완영 씨의 작품 약 20점 외에도, 친구이기도 한 야마모토 씨의 글씨가 한국의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게재되어 있다. 또한 토야마 유리공방 관장인 노다 유우이치 씨의 유리조형물이나 에세이 등 한일의 약 40명이 등장하여 우에노 씨의 교류의 폭을 알 수 있게 한다.
우에노 씨는 ‘정말 좋은 사람들과 만났다. 이 책에서 양국을 잇는 한국과 일본의 느낌을 각 페이지로부터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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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강원도<->예술·문화의 교류
그림·글·시...43명이 기고- 토야마의 우에노 씨 양국어 병기, 레이아웃에 기교


편집한 것은 토야마시에서 디자인사무소를 경영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인 우에노 히로유키 씨(62). 디자인 일을 시작한 지 40년을 맞아 ‘생업인 된 강원도와의 교류의 결과를 나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 한다.
우에노 씨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88년, 신문의 광고 기회 때문이었다. 한국과 관계된 여러 일을 하는 사이 지인도 생기고, 1997년에는 한국 현대 디자인 실험 작가협회와 협력하여 포스터 순회 교류전을 열었다. 실행위원회 회장이었던 우에노 씨는 전시장 중 하나였던 강원도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다. 이전부터 토야마현 디자인 협회가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0년 강원도 디자인 협의회와 토야마현 디자인 협회가 서로 교류를 조인했다. 게다가 우에노 씨가 토야마현의 국제협력 사업으로 강원도 삼척시청에 파견되기도 하고, 강원도의 미술대학이나 행정직원들이 토야마 유리공방 등을 실제로 방문하는 등, 교류는 깊어져 갔다.
출판을 생각하게 된 것은 2004년에 절친한 친구인 장완영 씨(전 강원도 디자인 협의회 회장)가 작품집의 출판 기념전을 서울에서 열었을 때였다. ‘장완영 씨가 자신의 그림을 집대성해서 출판한 작품집을 중심으로 하면, 교류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다’. 곧 책의 구성이 떠올랐다.
지금까지의 인맥을 통하여 작품 제공이나 기고를 부탁했다. 인연은 문화·예술의 벽을 넘어서, 지방자치단체 직원, 유학생과 홈스테이 호스트, 겨울연가를 계기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에까지 넓어져, 다채로운 사람들이 흔쾌히 동참했다.
장정이나 레이아웃은 우에노 씨의 전문분야이다. 심플하게 그림만 실은 페이지, 시의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배치한 페이지, 작은 사진을 한자 형태로 가공한 페이지 등 기교를 부렸고, 색의 표현을 고려하여 최상급 종이를 사용했다. 글자의 폰트도 한자와 히라가나로 나누어 썼으며 표지 커버는 장완용 씨의 그림을 대담하게 이용했다. 기고문은 한일 양국어로 병기하는 등 교류의 기록에 어울리도록 신경을 썼다. 기고자 중 한 사람인 지인 히사이즈미 미치오 씨는 ‘현과 도라는 행정형식적인 관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의 실질적인 교류가 이어지는 것이 멋있다. 그 결과를 나타낸 우에노 씨도 대단하다’ 고 말했다.
‘강원도의 시‘는 서점 등을 통하지 않고 희망자에게 직접 판매하고 있다.
2007년 5월 20일 아사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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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와 김삿갓
    문효치


장릉
발길이 문득 영월땅으로 간다. 寧越-편안히 넘어 가는 곳. 그러나 영월은 마음 편히 넘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말만 들어도 슬픈 임금 단종이 묻힌 곳이요, 세상을 등지고 걸인처럼 떠돌던 시인 김삿갓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칼같은 산들이 얽히고설키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하다(동국여지승람)’ 는 영월은 이 두 인물로 해서 찾는 이를 숙연케 하는 고장이요 비감이 어리는 고장이다.

서울에서 제천까지는 영동-중앙 고속도로를 이용해 쉽게 접근한다. 제천에서 38번국도가 영월가는 길이다. 영월읍에 당도하기 전에 장릉(莊陵)을 만난다. 무서운 정치적 탐욕과 음모에 의해 희생당한 한 어린 군왕의 능이다.
정치는 깡패들에게나 알맞은 직업이라고 한 그리스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이 떠오른다. 권력욕에 눈먼 수양대군의 사랑채에는 한명회, 홍달손, 양정 등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를 죽이고 이어 조정 중신들을 도륙한다. 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은 끝내 여기 영월 땅에 조카를 유배시키고 사사(賜死)까지도 서슴치 않았으니, ‘정치’를 가장해 인륜을 배반한 소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치적 야욕 집단에 의해 왕위와 목숨을 강탈당한 애처로운 영혼하나가 이 무덤에 머물러 있어 장릉의 흐린 하늘은 우울해 보인다. 오랜 세월 암매장 되었던 무덤을 찾아 오늘과 같이 품격을 갖춰 ‘능’으로 승격시킨 것은 240년이 지난 숙종 24년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왕릉으로서는 가장 규모가 작고 간략한 형식만을 취한 왜소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홍살문에서 일직선상에 정자각과 봉분이 설치된 여느 왕릉과는 달리 동을 지산의 협소한 비탈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능역이 훤칠하고 번듯하지 못하다. 비운의 왕릉임을 이 옹색하게 구겨진 구조에서도 알 수 있게 한다.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격해 실전(失傳)된 것을 찾아내는 등,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위해 ‘엄흥도 정려각’ ‘박충원 정려각‘ ’충신각‘ ’배식단사‘ 등의 건물을 함께 배치한 것도 다른 능과 다른 점이다. 슬픈 넋이 배회하고 있는 이 언덕 위 숲은 그래서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또 영월땅에 오는 이도 울적한 심사를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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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와 망향탑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다. 앞과 좌우에는 서강이 둘러 있고 뒤는 험한 산이 평풍처럼 버티고 있다. 푸른 강물과 산이 있고 모래사장과 솔숲이 있는 기막힌 절경이다. 그러기에 유람객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러나 배로 건너기 전에는 출입할 수 없는 완벽한 유배처이기도 하다. 험산을 배경으로 한 땅의 모양이 서강을 행해 길쭉하게 내밀어 있는 평지여서 마치 산의 혓바닥 같은 형국이다. 한 나라의 임금이었던 단종은 어느날 갑자기 삼촌에 의해 이 혓바닥 한가운데에 내던져 졌다.  단종에게 있어서는 이 아름다운 땅이 흉험한 운명의 아가리였다.
작은 너룻배로 물을 건너 다정한 가족과 거닐기에 좋은 곳, 애틋한 연인끼리 숲 그늘에 앉아 정담을 나누기에 알맞은 곳, 보석같이 수려한 이 땅을 ‘흉험한 운명의 아가리’ 라고 말하고 있는 내가 슬프다. 그러나 단종은 여기서 시시로 조여 오는 음험한 힘에 눌려 생명이 닳아지고 있었으니 어쩌랴.
그가 기거했던 집은 이 아가리의 안쪽 솔숲에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처절한 고독과 엄습하는 두려움에 가위눌려 지내야 했다.
강물이 아무리 맑아도 그의 외로움을 씻어줄 수 없었다. 조석으로 지저귀는 산새소리가 아무리 고와도 그의 공포감을 덜어 줄 수 없었다.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다시 땅을 내려다보고 눈감고 고개를 저어보고 나무 기둥을 쓰다듬어 보아도 서울에 두고 온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뒷산으로 올랐다. 아가리의 목구멍쯤 되는 곳이다.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 아래 남한강 줄기인 서강이 서울 쪽으로 흘렀다.
애끓는 심사를 강물에 실어 보냈다. 구원의 탄원도 띄워 보냈다. 지아비의 뜨거운 사모의 정도 흘러 보냈다. 그러나 강물은 무정하게도 이 모든 것들을 그냥 남겨두고 저 혼자 흘러갔다. 그는 그리움이 북 받칠 때마다, 눈물이 솟구칠 때마다 이 절벽위에 돌을 쌓았다. 쌓이고 쌓인 돌이 작은 탑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탑을 망향탑이라 했다.


저 물에
그리움을 던져 보았는가.
그리움이 쌓이면
무겁고 딱딱한 돌이 되는 것을.


가슴에 돌이 자라나
짓찧어대는 아픔을 아는가.


저 물에
돌을 던져 깨뜨려 보았는가.


돌 속에 피가 있어 저 물을 진하게 적시는 것을.


돌을 던지고 다 던져도
그래도 남은 돌이
여기에 쌓여 있음을 아는가


      문효치 ‘단종의 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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혓바닥 중간쯤의 솔밭에 ‘단묘유지비’가 세워져 단종의 옛 집터였음을 기념하고 있다. 영조39년에 원주감영에서 세운 것이자. 조금 떨어진 곳에 ‘청령포 금표비’도 이끼를 뒤집어 쓴 채 버섯모양으로 서 있다.
이것도 영조2년에 세워진 것으로 임금이 계시던 곳이니 뭇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게 한다는 뜻으로 설치한 것이다.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을 잡인의 출입금지 구역으로 표해 놓았다. 그러나 이 구역은 또한 단종이 벗어날 수 없는 금지구역이기도 했다. 이 표석은 어쩌면 자유의 숨통을 막는 단단한 마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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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헌과 단종의 시


1457년 6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은 곧 관풍헌으로 거소를 옮긴다. 그 해 홍수가 나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관에서는 단종을 영월의 객사였던 이 집으로 옮긴 것이다.
‘관풍헌(觀風軒)‘ 이름이야 좋다마는 단종은 이 집으로 옮기면서 더욱 급박한 운명의 굴레에 얽매인다.  그는 관풍헌의 동쪽 가까이 자규루에 올라 괴로운 심회를 시로 읊는다.


단종 ‘子規調‘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적에
시름 못 잊어 누대에 기대 않았어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던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류엔 오르지 마오

 


단종‘子規詩’


원통한 새가 되어 帝宮(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는데
어느 때 되어야 이 한을 다 할까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 골짜기에 지는 꽃잎 붉구나
하늘도 저 슬픈 사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젖은 내 귀에는 잘 들리는가


두견이는 여름 철새다. 그 울름소리가 맑기는 하지만 슬픔과 외로움을 앓는 소리다. 앓아도 몹시 처절하게 앓는 소리다. 아마 두견이의 울음에서 자아내는 소리의 정서는 마침 운명의 질긴 거미줄에 묶여 여기가지 온 단종의 심금을 떨어 울리게 했으리라.
이렇게 피맺힌 괴로움을 시로 토해내던 단종은 그해 10월24일 관풍헌 마당에서 세조가 의금부도사 왕방연 편에 보낸 사약을 받는다. 영월에 유배되어 한 해도 넘기지 못하고 그의 정갈한 목숨은 음험한 운명의 아가리로 삼켜져 버린 것이다. 왕방연은 사형을 집행하고 귀경하는 길에 청령포가 건너다보이는 강가에 앉아 자신의 착잡한 심정을 한편의 시로 남긴다. 그리고 이 시는 여기 시조비에 새겨져 서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겨울 추위는 땅 속가지도 파고드는데 시체는 강물에 버려 흘러내리다가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에 의해 건져져 암장되었다. 기리고 엄흥도는 후환이 두려워 고을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아무도 단종의 무덤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후 군수 박흥원의 현몽과 고로(故老) 엄주 신귀선 등의 고증으로 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게 되었으니 사후 60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그 후 160년 후에야 겨우 능으로 승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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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무덤
이 영월땅에 방랑시인 김삿갓이 묻혀 있음으로 해서 세상사를 명상케 하는 고장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잘못 엉켜버린 운명을 탄식하며 전국의 방랑하던 시인, 번득이는 기지와 해학으로 위선과 권위를 질타하며 비꼬아대던 시인, 고약한 인심과 가난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며 세상을 야유하던 시인, 지극히 서민적이면서도 탈속한 선인의 경지를 소요하던 시인 김삿갓.
그의 묘소를 찾아가는 595번과 998번 도로는 매우 아름다운 길이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옥동강을 끼고 가는 이 길은 단종의 피어린 역사로 인해 우울해진 마음을 자못 달래줄 만큼 상쾌하고 평화로운 길이다.
중간에 와석재를 헐떡거리며 넘기도 하지만, 길은 대체로 강과 함께 나란히 간다. 강이 휘어지면 길도 휘어지고 길이 곧게 뻗으면 강도 따라 곧게 뻗는다. 강이 잠시 물굽이를 일으켜 노래하면 길도 나무그늘을 잡아당겨 그림을 그리고 길이 구름자락을 끌어다가 얼굴을 가리면 강도 안개를 피워 몸을 감춘다.
김삿갓을 찾아가는 길은 이렇게 운치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강물은 내려오고 길은 거슬러 오르고 있다. 김삿갓은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 내려오느냐


김삿갓은 산으로 오르고 물은 산에서 내려가는 일, 김삿갓은 이렇게 세상을 거슬러 오르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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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상문은 고증한다.
김병연(김삿갓의 본명)은 양주에서 태어났다. 선천 방어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ㄹ의 난 때 난군의 포로가 되어 저들에게 협조한 죄목으로 참형되고 집안은 폐족지하를 당한다. 김병연은 자신이 김익순의 후손임도 모른 채 종복 김성수의 손에 넘겨져 곡산으로 가서 키워진다.
그후 다시 가복이 합쳐 영월로 스며들어 살게 된다. 영월은 정감록의 십생지지(十生之地)로 안전한 피신처였다. 김병연은 여기서 가문의 재기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우여곡절 끝에 향시에 응시하고 글제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 가산군수 정씨의 충절된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함)’ 을 받게 된다.
그때까지도 김익순이 조부인 것을 모르던 김병연은 타고난 글재주로 김익순은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통렬히 저주한다. 이글로 그는 장원급제 한다. 그러나 뒤에 집안 내력이 밝혀지고 김익순이 친 조부임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후손으로 천륜을 배반한 죄인이라 자탄하고 세상을 등지고 방랑생활로 들어간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이때부터 57세로 죽을 때까지 죽장에 삿갓을 쓴 떠돌이가 되어 문전걸식을 하며 시와 기행(紀行)과 숱한 화제를 남기고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작고한다. 동복에 묻힌 2년후 그의 차남이 지금의 영월 와석으로 이장시켜 모신다.


김삿갓을 생각하며 영월읍에서 18km즘 강과 함께 가다보면 김삿갓묘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좁은 계곡길이다.
이 길은 더 좋다. 산골 깊숙이 숨어들어가는 이 길은 오지를 gi해 구불거리며 흐른다.
감추어져 있던 계곡의 속살이 찾는 이를 반겨준다. 드문드문 피어있는 산벚꽃은 계곡의 비탈을 채색하고 있다. 이렇게 4km를 가면 김삿갓의 조촐한 묘소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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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自詠·자영’

찬 솔이 외로운 주막 안에
편히 누웠으니 내 이 세상사람 같지 않구나
산골짝에 가면 흰 구름 더불어 노닐고
시내에 이르면 새와 더불어 즐기도다
어지러운 세상사 어이 내 듯을 거칠게 하리
시와 술로 스스로 몸을 즐기고 있나니
달을 얻으면 생각을 너그러이 하고
유유히 단꿈에 젖는다.


‘흰구름 더불어 노닐고’ ‘새와 더불어 즐기며’ 시와 술로 세상을 건넌 그가 지금 여기에 잠들어 있다. 어찌 보면 세상을 잘못 산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자유를 만끽하며 신선처럼 산 것 같기도 한 김삿갓.
이제 그는 말이 없지만 그의 시와 행적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리라. 살아서는 문전박대도 많이 받았지만 이제 그의 무덤 주변 여기저기에는 그의 고혼을 달래주는 시비와 기념비들이 즐비하다. 그의 시를 읽는 값으로 무덤에 소주 한 잔을 부어 적신다. 술 향기가 산골에 퍼진다. 무덤 옆의 들꽃이 먼저 취한 듯 몸을 흔들며 화들짝 웃는다.


아마도 취한 들꽃의 눈에 몽롱하게 보일 이 산천이 하염없이 세월을 맞이하고 또 보내고 있다. 흐르는 세월의 틈 속에서 사람들은 태어난다. 그리고 제 운명의 고리에 묶여 버둥대다가 죽어가곤 한다. 지금쯤 김삿갓은 하늘에서 또 무슨 시를 쓰고 있을까. ‘시가 있는 길 중에서’


문효치
전북 군산 출생
1966 서울신문·한국일보 신춘문예당선
동국문학상·시문학상·평화문학상·시예술상·펜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사장


시집
‘연기속에 서서’
‘무녕왕의 나무새’
‘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
‘선유도를 바라보며’


저서
‘시가 있는 길’
‘시인의 기행 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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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6.10 17:57

    첫댓글 우리나라 조선 518년 27대의 왕중에서 가장 비운의 왕 이셨던 단종대왕. - 여기에 글들이 너무 애련하고 아름답네요.......영월군청 공보실에서 "시화속의 영월군" 발간 하는가? 이 책한권 구하고 싶는데 어떻게 구입하는지요? 된다면 "강원도의 時"도 함께...연락을 바라네. 원식이 친구.

  • 작성자 08.06.11 00:07

    내가 구해 봄세^^문광과를 쥐어 짜 보아야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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