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용(지은이)의 말
한 남자가 지나간 길을
온몸으로 따라 갑니다.
나도 뒤에 오는 그 남자의
그 남자가 지나간 길이 되겠지요.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닌,
길은 만들어 가는 것
내 몸에 길이 생겨
멀리서 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2022년 10월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잠자는 혀의 얼굴을 내민 슬픈 괴물의 시 쓰기
1996년 《문예와비평》으로 등단한 김선용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352로 출간되었다. 김선용의 시집은 자신에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집요한 질문의 형식을 통하여 궁극의 시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을 핍진하게 보여준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슬픈 괴물이라고 자조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는 역설이다. 이규보가 시마(詩魔)를 이야기하며 시에 미친 자들의 병폐를 조목조목 따져 드러냈지만 이는 시를 쓰는 자부심의 이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다.
■ 해설 엿보기
김선용의 시집 『나비가 지나간 자리처럼』은 어떤 것에 대한 간절한 지향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란 생활인으로 살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이며 좀 더 분명히 말하면 내면에 출렁이는 시를 향한 염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들림’의 형식으로 시인의 삶을 지탱해온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시집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도 삶과 시라는 형식이 과연 조화로운가 하는 회의와 함께 결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주체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인의 말’에 분명히 나와 있다.
한 남자가 지나간 길을
온몸으로 따라 갑니다.
나도 뒤에 오는 그 남자의
그 남자가 지나간 길이 되겠지요.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닌,
길은 만들어 가는 것
내 몸에 길이 생겨
멀리서 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 「시인의 말」 전문
시의 길이란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는 발언은 그리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지만 그 이후의 발언은 문제적이다.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닌,/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단호한 선언은 시적 주체로서의 자기 확인의 의미를 띤다. 이 자기 확인은 역설적이게도 자아분열을 동반한다. “내 몸에 길이 생겨/멀리서 오시는 분”이라는 진술은 시적 주체의 자기갱신의 욕망을 보여준다. 내 몸에 길을 내는 자도 멀리서 오시는 분도 모두 자신인 까닭이다. 멀리서 오시는 분은 갱신된 시적 주체이며 동시에 사물화하면 시의 다른 이름이라 할 터이다. 이 순정한 시적 주체의 고백이 이 시집의 배음으로 흐르고 있다.
강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사랑을 훔친 소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열아홉 소년의 순정이
저 눈발과 함께
소멸해 가고 있다
고통도 살아있어
죽어가는 것도 축복이라며
한 몸 부서지고 있다
배고픈 아이
기도하는 아이
간절한 아이
달을 따먹으려
노모의 집 쓸쓸한 안마당에서
때로는 천보산(天寶山) 내다뵈는
아파트 갈비뼈에 매달려
홍시처럼 오십일 년을 살아온 소년
이제 그 소년을 따먹은
흰 낮달이 지고 있다
― 「달과 소년」 전문
이 시는 연대기적 자화상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강물 같은 편지”는 시적 화자의 삶의 범주이며 포기할 수 없는 가치 실현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소년에서 장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그를 매혹하고 추동했던 실체가 바로 “강물 같은 편지”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편지란 구체적 사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시적 화자 스스로 보내고 받은 자기 고백과도 것이다. 이 자기 고백의 염결성은 “열아홉 소년의 순정”이 “홍시처럼 오십일 년을 살아온 소년”으로 지나온 과정에서 그 변용을 허락하지 않는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랑을 훔친 소년”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과 오십일 년을 소년으로 살아온 이유가 이 “순정” 때문이다. 순정이 “눈발과 함께/소멸해” 간다는 것은 대상을 향해 바쳐진 전일성 때문이다. 그랬을 때 “죽어가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죽어 가는 것이란 신성한 대상을 향한 제의적 성격을 지닌다. 신성한 대상의 상징이 바로 “달”이다. “소년을 따먹은” 달의 상징은 추론컨대 시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의미로 달은 매혹이며 죽음인 셈이다. 버릴 수 없는 궁극의 상징인 것이다.
― 우대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