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용수보살약찬게(龍樹菩薩畧纂偈)용수보살이 간략히 엮은 게송
[용수보살 略記]
저자(著者) 용수보살(龍樹菩薩, 梵名 Nāgārjuna) 인도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창시자로 용맹(龍猛), 용승(龍勝)이라고도 한다.
2~3세기 무렵 남인도 바라문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4베다를 배워서 천문과 지리를 잘 알았고, 여러 가지 재주가 뛰어났으며, 도술(道術) 등에 통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찌기 세 명의 벗과 함께 은신술을 익혀 왕궁에 들어가서 궁녀들을 침릉(侵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어느날 그 일이 탄로나 결국 세 명의 벗은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혼자만 겨우 죽음을 모면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애욕이 곧 모든 고통의 근본임을 깨닫고 입산하여 불탑(佛塔)에 참배하고 출가하였다.
출가 후 싫증을 모르고 삼장(三藏)을 부지런히 익혔고, 설산(雪山)으로 가서 한 노승을 만나 대승경전을 배우기도 하였다.
비록 경전의 이치를 꿰뚫어 다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 진실한 뜻을 대충 알기는 하였다.
그 힘으로 외도 논사들과 담론하여 그 논리들을 깨뜨리면서 삿된 교만심이 일어나 스스로 새로운 계(戒)를 정하고 새로운 옷을 입기도 하였다.
한 날은 수정방(水晶房)에서 고요히 정진을 하였는데 와중에 그 모습을 대용보살(大龍菩薩)이 보고 가상하게 여겨 용궁(龍宮)으로 데리고 가서 무량한 대승경전을 보여 주었다.
스님은 마침내 교리를 체득하였으며 화엄경을 가지고 나와서 세상에 전하였다.
그 때 남인도의 왕이 바라문교를 신봉하고 불교를 공격하였는데,
스님이 앞장서서교화하여 바라문교의 신앙을 버리게 하였다.
이후에 큰 힘으로써 법을 펼치면서 수많은 대승경전의 주석서를 저술하였고, 대승교학(大乘敎學)의 체계를 수립하여 대승반야의 성품이 공(空)한 학설을 인도 전역에 널리 전파하였다.
만년에는 남인도의 흑봉산에 주석하였으며 제자로는 제바(提婆) 등이 있다.
출생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승예(僧叡)의 대지도론(大智度論) 서문과 여산혜원(廬山慧遠)의 대지론초(大智論抄) 서문에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900년 경이라고 전하며,
둘째, 백론소(百論疏) 상권에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530년 경이라고 전하며,
셋째, 삼론유의의(三論遊意義)와 도안(道安)의 이교론(二敎論)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등에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880년 경으로 AD 4세기 말엽이라고 전한다.
인순법사(印順法師) 등 대부분 현대 학자들은 세 번째 설(說)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입적(入寂)에 관해서는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에 실린 바 어떤 소승법사(小乘法師)가 스님을 매우 시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세상에 더 오래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선방에 들어가서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좌탈(座脫)하여 입적하였다고 전해진다.
또『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교살라국(憍薩羅國)의 사다바하(娑多婆詞) 왕이 용수보살에게 귀의하자 그에게 묘약을 주어서 두 사람이 함께 건강하여 노쇠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자가 일찍 왕위에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스님에게 빨리 돌아가시기를 청하였다.
이에 곧 마른 풀잎으로 목을 베고 입적하였으며, 사다바하왕도 슬퍼하다가 얼마 후에 목숨을 마쳤다고 한다.
용수보살의 저작으로는 「중론송(中論頌)」「십이문론(十二門論)」 「공칠십론(空七十論)」
「회정론(廻諍論」「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대승파유론(大乘破有論)」
「대지도론(大智度論)」「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인연심론송(因緣心論頌)」
「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 「복개정행소집경(福蓋正行所集經)」「찬법계송(讚法界頌)」
「광대발원송(廣大發願頌)」 등 수많은 논문이 있다.
세상에 흔하지 않은 견해로 세친보살과 더불어 「천부논주(千部論主)」라는 미칭(美稱)을 얻게 되었다. 후세에 스님이 지은 중론을 기반으로 공관(空觀)을 선양하는 중관학파가 생겨났으며 중관파의 초조(初祖)가 된다.
이 밖에 용수보살은 부법장(付法藏) 제13조로 존숭되어 한국과 중국과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팔종(八宗)의 종조(宗祖)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