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도요타를 다시 서게 했나… 수뇌부 현지 연쇄 인터뷰"
최악의 3년이 최고의 3년으로…
세계 1위 오를 욕심에 과잉 생산, 1000만대 리콜 사태후 나락으로…
자만은 자멸 부른다는 교훈 얻어…
주가, 반년 사이 80% 이상 올라…
3년 만에 돌아온 원점은 예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일본 도요타시에 위치한 도요타자동차 창업자 고(故) 도요다 기이치로의 옛 자택.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이는 집 앞 정원에 작은 벚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높이 3m가량의 이 나무 앞에는 나무막대가 세워져 있는데
그 위에 '2011년 2월 24일, 도요타 재출발의 날'이라는 엽서 크기의 금속 푯말이 붙어 있었다.
이 나무는 도요다 기이치로의 손자인 도요다 아키오(57) 사장이
미국 의회 청문회에 나가 리콜사태에 대해 증언하며 눈물을 흘린 뒤
정확히 1년이 지난, 겨울비가 내리던 날에 아키오 사장이 직접 심었다.
기념관의 오기소 이치로 관장은 "아키오 사장이 품질 문제로
고객에게 피해를 입혔던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아 식수(植樹)한 것"이라며
"그런 맹세를 창업자인 조부(祖父)가 살던 집 앞에서 했다는 것은
아키오 사장이 그만큼 맹세의 무게를 중요시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2년 전 '재출발의 날' 이후 도요타에서 2월 24일은
모든 부서가 고객 제일주의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날이 됐다.
아키오 사장은 올해 도요타 신입사원 입사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요타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신차 '크라운'의 핑크색 모델이 함께 전시된 자리였다.
"크라운의 핑크는 벚꽃 색깔입니다.
가혹한 겨울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벚나무의 저력에 도요타의 재탄생을 비유한 것입니다."
아키오 사장이 미 청문회에서 느낀 수모와 반성을 담아
창업자 할아버지 앞에서 벚나무를 심어 '도요타 재탄생'을 맹세한 이후 2년이 지났다.
아키오의 맹세는 이미 지켜진 것처럼 보인다.
작년에 글로벌 판매 1위 자리를 탈환했기 때문이다.
리먼 쇼크, 1000만대 리콜, 엔고, 일본 대지진 등 초대형 위기를 딛고 2년 만에 다시 쓴 왕관이다.
올들어 엔저 훈풍까지 불면서 주가는 6개월 전보다 80% 이상 올랐다.
그러나 아키오 사장은 말한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아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베스트(best)보다는 베터(better)'를 목표로 삼아 도전합시다."
아키오 사장 취임 이후 지난 3년간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도요타가
자신들의 미래 전략을 알리기 위해 준비한 '더 좋은 차 만들기 설명회'에 참가했다.
이틀간 도요타의 핵심 공장, 새 연구시설을 둘러보고,
실무진부터 최고경영진까지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이틀간 도요타 심장부 곳곳을 다니며 만난 어떤 사람도
'1등'이나 '자신감' '부활' 등의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 도요타가 어떻게 위기 극복을 했고,
어떻게 1등 복귀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홍보는 한마디도 없었다.
대신 위기를 통해 도요타가 무엇을 배웠고, 또 배운 것을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틀간 가까이서 지켜본 도요타의 모습은 챔피언이 아니라 철저한 도전자였다.
도요타시의 중심인 도요타 거리 1번지에 위치한 사무 본관 건물.
건물 앞 벚꽃의 옅은 분홍빛과 검은 건물이 대조를 이루며 지극히 일본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상 15층에 검은색 유리로 싸인 이 건물은 아키오 사장 등 도요타 최고경영진의 전용차가
1층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지하 통로로 들어간 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무실로 올라가기 때문에 외부인과는 완벽히 차단돼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고니시 고키 홍보부장은
도요타가 이 건물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위압적인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건물 로비에 전시된 차량 앞의 포스터 광고 문구를 보셨나요?
'권력보다 사랑이죠'입니다.
도요타는 이제 권력이나 권위를 버렸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고객에 대한 사랑, 도요타차를 애용해 주는 고객의 사랑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지난 위기를 통해 배운 겁니다."
성공은 자만을 부르고, 자만은 자멸을 가져온다.
반대로 실패에는 다음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싹이 내포돼 있다.
도요타의 3년은 이 교훈을 체득하는 시간이었다.
도요타는 GM보다 먼저 1000만대 생산고지에 올라 세계 1위가 되겠다며 과도하게 생산력을 키웠다가,
2008년 리먼쇼크 이후 300만대분의 생산 과잉을 견디지 못하고 표류했다.
짐 프레스 전 북미 도요타 사장은 "일부 도요타 전문 경영인들의 탐욕이 낳은 결과"라고 말했다.
취임 4년째를 맞는 아키오 사장은 지난달 6일 도요타 신(新)체제 출범 기자회견에서
"내가 지난 3년간 한 일은 도요타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작업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도요타가 돌아온 원점은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도요타의 지난 3년은 도요타 75년 역사상 최악의 3년이었지만, 동시에 최고의 3년이었던 것이다.
최근 현대차가 대규모 리콜 사태를 맞았다.
또 도요타 리콜 사태가 벌어진 뒤부터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도요타 비교보고서가 싹 사라졌다.
한 고위 임원이 "도요타에서는 우리가 더 배울 게 없으니
앞으로는 벤츠·BMW와 비교하는 보고서만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반면 도요타 연구소 관계자는 "현대차가 새로 나오면 전부 뜯어보고
현대차에서 배울 점이 뭐가 있는지 면밀히 연구한다"고 전했다.
창립자 기념관을 나온 뒤 향한 곳은 본사(本社) 공장이었다.
1938년 설립돼 도요타에서 가장 오래된 생산 시설이지만,
2000명의 최정예 인력이 도요타 제품 중 가장 첨단이라는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의 핵심 부품을 만들고 있다.
30년 전 아키오 사장이 입사 직후 처음 배속된 곳(생산조사부)이기도 하다.
안내받은 곳은 도요타 생산방식(TPS·Toyota Production System) 기본 라인이었다.
이날 본 광경은 지난 2007년 여름,
도요타가 실패를 모르고 성장 가도를 달리던 정점에
도요타 본사를 찾았을 때 봤던 것과 전혀 달랐다.
6년 전 도요타 홍보 담당자가 보여준 것은 양적 성장의 상징이었던 쓰쓰미 공장이었다.
본사 공장 인근에 있는 이 공장의 위용은 대단했다.
프리우스부터 캠리까지 7개 차종의 수백여 가지 변종 모델을
월 4만대씩 한치의 빈틈 없이 만들어 내는 눈부신 광경은 마치 '우리가 최고'라고 외치는 듯했다.
2000년대 중반 도요타는 자신의 실력만을 믿고 700만대 수준이었던 연간 생산능력을
2~3년 만에 1000만대까지 늘리면서 GM을 누르고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단기간에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거액을 들여 자동화 기기를 투입하고,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인력까지 현장에 투입했었다.
◇물량주의에 대한 반성
이번에 다시 찾은 도요타 공장에는 휘황찬란한 자동화 기기나 작업자의 현란한 움직임이 아니라,
수작업 기반의 작고 아기자기한 공작기계들을 사용해 일일이 손으로 만지고 확인하며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동화 기술이 모자라서는 물론 아니다.
도요타의 자동화 기술은 업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본사공장 기계과 미네 히로미치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인 자동화가 가능한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작업의 기본원리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걸 안 지키면 언젠가 문제가 터질 수 있으니까요."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자동화·물량 경쟁에 나섰다가
참사를 겪었던 뼈아픈 교훈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수작업을 중시하는 더 큰 이유는 인재 양성 때문이라고 했다.
도요타 생산방식의 기본 원칙은 현장의 작업자가 원리 원칙을 확실히 익혀 작업을 개선하고 품질을 높인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의 인재들이 직접 손끝으로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의 기본을 익혀야 한다.
가와이 미쓰루(65) 기술 총책임자는 "작업자가 생산 과정을 장악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엔지니어가 생산라인을 설계한다고 해도 결국 낭비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프리우스 같은 첨단 차량도 결국 처음에는 모터에 구리코일 한 개까지 손으로 감아보며
고민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자동화 라인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가와이 기술 총책임자는 도요타 생산직의 최고위직이며 전무급에 해당한다.
자리를 같이했던 기리모토 글로벌 홍보실장은 "중학교 졸업 후 도요타에 입사해
50년간 현장을 지켜온 '도요타 생산방식의 영혼'과도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도요타에는 중·고졸 생산직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아 중역까지 오른 인물이 꽤 있다.
고졸 생산·기술직은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차장 이상 승진이 거의 불가능한 현대차와 대조적이다.
가와이 기술 총책임자는 "50년 회사 생활에서 시련이 없었던 시기는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열심히 해서 목표를 달성하면 상사는 항상 "수고했다. 이게 100이라면 남은 것이 또 100이다"라고 얘기했다는 것.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좀 여유를 갖고 하자"는 얘기는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지난 4년간 리먼쇼크, 품질문제(리콜사태), 지진 등 엄청난 위기가 있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재 양성까지 저절로 됐으니 그만큼 현장에 더 많은 실력이 붙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도요타 생산 라인을 보고 있자니 현대차의 상황이 떠올랐다.
현대차는 생산 라인을 설계하는 엔지니어들과 노조원인 생산직 사이에 업무 개선을 위한 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대화가 사실상 단절된 게 10년이 넘었다.
이런 기업문화는 단순히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개선하고 현장에서 배우는 과정 자체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제조기업이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잃게 만든다.
돈과 물량으로 승부하는 자동화에만 치중함으로써
자칫 도요타가 겪었던 실수를 반복할 우려마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대차 생산라인 개선에 참여 중인 한 외부 컨설턴트는
"현대차의 생산기술 엔지니어들의 능력이 도요타에 비해 점점 떨어지고 있다"면서
"개인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개선할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차 설계 전략의 핵심은 '단순화'
공장 방문에 이어 메인 행사 '더 좋은 차 만들기 설명회'는
본사 연구소 내에 위치한 '엔진 공동개발동'에서 진행됐다.
지난 2월 완공됐는데, 연면적 10만㎡(약 3만평) 12층 건물에 상주 엔지니어 숫자가 2800명이다.
도요타 연구개발 총괄인 가토 부사장은 작고 나직한 목소리로
1시간 일정의 절반가량을 신차 설계 전략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전략의 키워드는 '단순화'였다.
도요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생산 차종과 물량이 급속도로 늘어난다.
게다가 차량 기능이 복잡해지고 각종 전자장비가 덧붙여지면서
개발·생산 프로세스가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도요타 리콜 사태가 이런 복잡성을 해결하지 못해 '폭발'한 것이라 진단하기도 한다.
도요타는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파악해 최선의 방법을 찾는 데 몰두했다.
해결책은 4~5년 전부터 폴크스바겐이 추진해 온 '레고블록형 설계 전략'
즉 자동차의 공통 부품을 레고블록처럼 만들어 끼워 맞추는 방식이었다.
'복잡성의 폭발'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 다양하고 성능·품질이 좋은 차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최초의 설계 단계부터 어떻게 하면 가장 단순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마스터 플랜'을 제대로 짜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적(敵)의 전략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가토 부사장의 발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도요타는 폴크스바겐보다 설계 단순화 전략 수립이 늦었다.
지금이라도 폴크스바겐 식의 레고블록형 설계를 준비한다.
그러나 폴크스바겐과 같은 큰 덩어리 개념이 아니라,
더 작고 세분화된 블록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승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도요타 분석의 권위자인 도쿄대 후지모토 교수는 '폴크스바겐이
30개의 레고블록을 끼워 맞춰 모든 차를 만든다면,
도요타는 '지금까지는 1000개의 블록을 갖고 차를 만들었지만
이것을 300개로 줄이겠다는 식'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폴크스바겐 만큼 기술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도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국내 한 자동차 설계 전문가는 "지금 폴크스바겐이 업계를 선도하는 것 같지만, 승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며
"도요타가 폴크스바겐보다 비용을 더 아끼면서 효율을 개선하는 데 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삼성보다 더 빠른 의사 결정 조직
설명회가 끝난 다음 안내된 곳은 신설된 신(新)엔진 개발센터의 개발 현장이었다.
지난달 전사 조직 개편 때 신설된 조직이다.
도요타는 "대외비"라면서 약 10분 동안만 센터 핵심 조직이 집결해 있는 (건물 '엔진 공동개발동' 3층에 있는) 연구 공간을 공개했다.
도요타가 이 조직을 신설한 이유는 폴크스바겐을 잡기 위해서다.
도요타는 지난 15년간 하이브리드카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키워왔다.
그 결과 작년 연간 판매 100만대를 넘겼다.
하지만 100만대라 해봐야 전 세계 자동차 판매 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대에 불과하다.
반면에 하이브리드카에 집중하다가 생긴 폐해가 매우 컸다.
엔진 개발에 소홀했던 게 대표적이다.
비싼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하면서도 가격을 크게 높이지 않기 위해서는 엔진을 최대한 싸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폴크스바겐이 더 성능 좋고 연비 좋은 엔진을 속속 내놓으면서 도요타의 비교 우위가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게다가 혼다·닛산·마쓰다 등이 하이브리드가 아니라 기존 동력전달 장치를 개선해
연비를 대폭 높인 신차를 내놓으면서 한순간에 도요타 '비(非)하이브리드 차량'들의 연비 경쟁력이 떨어지게 됐다.
도요타는 신엔진 개발센터라는 신설 조직을 통해 폴크스바겐과 맞설 성능과 연비가 더 좋은 엔진을 개발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거창한 첨단 연구 장비들이 아니었다.
3층의 1000평 이상 되는 공간에 500명에 달하는 엔지니어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풍경이었다.
별다른 장비도 없이 사람과 PC,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미팅 공간들만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 시설을 보유했다는 도요타가 사람들만 모아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엔진을 빨리 만들기 위해 도요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커뮤니케이션이었기 때문이다.
도요타 내부에 이미 더 좋은 엔진을 개발할 설비나 인력 자원은 충분하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자원을 모아 어떻게 좋은 아이디어와 계획을 빨리 만들어 내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기술관리부 야하기 마사히코씨는 "이곳의 시설은 미팅 공간, 생각 공간, 지식 카페 등
각 부서 엔지니어들의 지혜를 집결하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현대차 등 의사결정이 빠르다는 조직을 연구한 도요타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업무에 필요한 모든 조직을 한 건물에 모아
아이디어 수립부터 최종 결정까지 '원스톱'으로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필요 안건이 있을 때 수시로 모였다 흩어지는
'태스크포스'를 도요타 방식으로 더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도요타는 자신들의 대단함이 아니라 지난 위기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끊임없이 설명하려 했다.
그 노력은 그들이 보여주는 전략, 신제품, 공장, 연구소
그리고 말단 직원부터 최고 임원의 언동에 그대로 배어나왔다.
세계시장을 장악하겠다는 혼네(속마음)를 숨긴 일본 특유의 겸손일까?
아니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을 알리고 싶어서였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위기를 통해 배우는 도요타 특유의 진화 능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투기→수송기→여객기→경비행기 50년… 일흔네 살의 '현역' 서호선 기장"
"하늘에도 '길'은 있다… 위험과 싸우지 않고 위험을 피할 줄 알아야"
1982년 베테랑 조종사의 실수로 낙하 훈련 가던 특전사 53명 숨져
1981년에도 특전사 40여명 순직
"퇴교 조치됐으니 복교는 어렵다 다시 육사 시험을 쳐 들어가면 신원 관계는 문제 삼지 않겠다"
지상에서 사는 우리와는 다르게, 서호선(74)씨는 인생 대부분을 하늘에서 보내고 있다.
그는 현역 최고령 조종사다. 비행기 조종간을 잡은 햇수가 올해로 50년이 됐다.
그는 전투기→수송기→여객기를 몰았고,
지금은 항공 촬영을 하는 회사에서 경비행기를 몰고 있다.
"사업용 항공기는 나이 제한이 없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면 육체적 나이는 40대로 나온다."
짧게 깎은 머리와 두꺼운 목덜미가 그걸 증명했다.
김포공항 활주로 외곽에서 그의 비행기에 탑승했다.
미국에서는 출퇴근용인 9인승 세스나기(機)를 개조해 좌석 4개로 줄였고,
동체 아래엔 자동 카메라가 부착돼있다.
카메라가 30억원대로 비행기 가격과 맞먹는다.
30초당 한 장씩 자동으로 촬영된다고 했다.
비행기는 심하게 흔들렸다.
풍랑 속 배를 탄 듯 속이 메스꺼웠다.
가는 곳은 전북 익산이었다.
공단 조성을 위해 익산군청에서 발주한 것이다.
촬영 지점에 접근해서는 40여분 동안 빙빙 돌았다.
멀미의 정점은 이때였다.
그를 만난 것은 '현역 최고령 조종사' 타이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파란만장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남 서천군의 산골 출신인 그는 상경해 야간고에 다녔다.
조선일보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1959년 그 급사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19기)한 것이다.
생도 1학년 때인 초여름 어느 날, 수업을 받던 그는 학교 본부로 호출됐다.
생도대장(준장)이 말했다.
"한 달 전쯤 자네를 퇴교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자네의 평소 품행으로 납득이 안 가 재고를 해달라고 상신했다.
하지만 특무대(보안사)에서 '오늘 자로 퇴교 조치하고 보고하라'는 문서가 다시 내려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퇴교 사유는 '신원(身元) 불량'이었다.
6·25 때 누나가 '여성동맹 위원'으로 활동했고,
외삼촌은 '보도연맹'으로 처형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퇴교 조치된 그는 특무대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우리 마을에서 그때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누나밖에 없었다.
적(赤) 치하에서 한글을 아는 여자는 면사무소에 나오라고 해서 몇 번 나갔다고 한다.
그게 여성동맹 위원이 된 연유다.
외삼촌은 내가 너무 어려서 얼굴도 잘 몰랐다.
그분 아들인 외사촌 형은 현재 공군 현역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왜 나만 연좌제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가."
젊음의 좌절감으로 혼자 돌아온 뒤 일주일 지나서였다.
특무대에서 연락이 와서 다시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자네 가족의 부역 행위는 허위가 아니나 현실을 무시해 과도하게 처리한 것 같다.
하지만 이미 퇴교 조치가 됐으니 복교는 어렵다.
만약 자네가 다시 육사에 시험을 쳐 들어가면 신원 관계는 문제 삼지 않겠다."
그가 낙향하자,
누나가 울며 불며 "네가 사관학교에 다시 안 들어가면
우리는 '부역자' 낙인이 찍힌다. 제발 다시 사관학교 시험을 쳐라"고 사정했다.
육사에 다시 들어가면 동기생은 상급생이 된다.
그런 창피를 그는 견뎌내진 못할 것 같았다.
그해 말 그는 공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그가 공사 생도가 됐다는 소식에,
영문 모르는 육사 동기생들은 "참 웃기는 놈"이라고 했다.
공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조종사'가 됐다.
어느 날 조종 훈련 중 한 동기생의 실수로 단체 기합을 받게 됐을 때,
야구방망이에 잘못 맞아 그의 척추뼈가 어긋났다.
군병원에서는 민간인 의사를 불러와 척추 수술을 마쳤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규정상 기동(機動)이 심한 전투기를 탈 수 없었다.
그는 수송기 부대로 전출됐다.
여전히 그는 촉망받는 장교였다.
1982년 미국의 공군대학에서 석사과정 교육을 마치고
돌와온 그는 비행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6월 어느 날 새벽, 그의 부대 조종사가
특전사 훈련병들을 싣고 출발했다.
한강 미사리에서 낙하 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그 베테랑 조종사에게는 익숙한 항로였다.
하지만 그날 수송기는 이륙한 뒤 구름 속 청계산을 들이받았다.
조종사와 훈련병 등 53명 전원이 숨졌다(청계산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음).
군 조사 과정에서 그는 "우리 대대원이 희생됐으니 내게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
상급자로는 전대장, 작전부장, 비행단장이 있었지만, 그가 지휘 책임을 지고 전역했다.
연좌제로 퇴교 조치당하고 다시 들어갔던 군(軍)과는 이렇게 인연이 끝났다.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고 바로 한 해 전인 1981년에도 특전사 40여명이 비행 사고로 순직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에 앞서 경호를 위해 내려가다가 변을 당했다.
제주도에는 항법 시설이 두 곳에 있다.
제주공항에는 이착륙을 위한 항법 시설,
한라산 정상에는 항로(航路)를 위한 항법 시설이 있다.
초짜인 조종사가 이를 모르고 악천후에
한라산 항법 시설로 접근해 사고가 난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군 사고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중령으로 전역한 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1988년 아시아나항공이 설립되자, 창설 팀을 꾸리던
공사 선배의 권유로 그쪽으로 옮겼다.
그는 아시아나항공의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조종사 최고 직급인 운항(運航) 상무까지 올라갔다.
정년 뒤에는 조종사 자격시험을 담당하는
건설교통부 심사관(촉탁직)으로 재직했다.
―차를 몰 때처럼 비행기도 초행길에는 서툰가?
"어떤 노선으로 처음 비행을 나가려면 먼저 '관숙(慣熟) 비행'을 한다.
교관급이나 이미 그 노선을 다녀본 기장과 함께 가본다.
지형지물과 기후 특성을 미리 익혀두는 것이다.
1997년 대한항공 801편 괌 사고(228명 사망)도
조종사가 이 노선에 익숙하지 못해 발생했다.
괌 공항의 항법 시설은 활주로와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있다.
조종사는 항법 시설 쪽으로 따라가다가 언덕을 들이받았다."
―어떤 노선의 첫 비행은 사고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하나?
"조종사는 이륙 전 두 시간쯤 노선을 확인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요즘에는 내비게이션이 이륙부터 착륙까지 아주 정확하게 유도해준다.
가끔은 항로를 잘 안다고 자신할 때 더 위험할 수 있다."
―무슨 뜻인가?
"1978년 무르만스크에서 대한항공 902편이
소련 전투기에 의해 강제 착륙당한 사건(2명 사망)이 있었다.
당시 파리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북극 항로로 들어섰다.
GPS는 없던 시절이었다.
조종사는 이륙할 때 좌표를 찍는 것을 깜박했다.
늘 다니던 길이고, 별을 보고 항법사도 있으니 자신이 있었다.
이 노선에서는 소련 영공에 가까이 붙어오면 최단 거리다.
그러다가 소련 영공에 잘못 들어갔던 것이다."
―창공(蒼空)은 비어있고 지상에서처럼 도로를 닦아놓은 것도 아닌데,
하늘의 길이 있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객기는 아무 데로 못 간다.
항로가 딱 정해져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비행기의 컴퓨터 화면으로는 보인다."
―한 공항에서 다른 공항으로 가는 항로는 딱 하나뿐인가?
"두 비행기가 나란히 날 수는 없다.
다만 위아래로 날 수는 있다.
보잉 점보가 위에서 날고, 그 아래로 보잉 757기(機)가 동시에 나는 경우가 있다.
비행기 간에는 고도(高度) 간격이 있다.
그전에는 2000피트 간격이었는데, 지금은 1000피트(600m) 간격으로 바뀌었다.
비행기 운항 대수가 많아져서 자꾸 연착이 되니까 고도 간격을 줄이게 됐다."
―어떻든 날아가면 되는데 너무 높이 올라서 날아갈 이유가 있나?
"높게 올라갈수록 연료 소모량이 적다.
공기 흐름이 없고 중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성능상 최고 고도와 최저 고도가 있다.
가능한 한 최고 고도로 가려고 한다.
비행을 할수록 연료가 소모돼 가벼워진다.
그러면 관제탑에 '고도를 더 높이는 걸 허용해달라'고 요청한다."
―비행 중 조종사들은 어떤 일을 하나?
"요즘에는 버튼만 누를 뿐이지 수동으로 조종간을 잡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도를 더 높여라' '앞 비행기와 얼마 떨어져 있으니
속도를 줄여라'는 등 관제탑과 교신을 하는 게 주 업무다."
―이륙부터 착륙까지 비행은 모두 자동으로 이뤄지나?
"가능하긴 하지만, 이륙은 양력(揚力)을 받아
속도 변화를 시켜서 올라가야 하니까 조종간을 잡는다.
착륙을 부드럽게 할 때도 수동으로 해야 한다.
오토로 하면 쿵 떨어진다."
―역시 사람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뜻인가?
"사실 쿵 떨어지는 '펌(firm) 랜딩'이 안전하다. 규정상으로 그게 맞는다.
많이 굴러가지 않고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면에 거의 닿을 무렵 손으로 출력을 줄여주는 연(軟)착륙은 승객 서비스 차원이다.
이는 눈비가 오거나 활주로가 미끄러울 경우 자칫 '오버런(overrun)'을 하게 된다."
―이륙과 착륙 어느 쪽이 어렵나?
"조종사로서는 이륙시키는 순간이 어렵다.
가장 많은 연료가 적재돼있어 비행기가 최고 중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약 이상이 생기면 치명적 위험이 있다.
착륙할 때는 출력도 작고 중량도 가벼워 편하다."
―하지만 착륙 과정에서 통상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기상이 나쁘면 아예 이륙을 안 시키지만, 착륙 과정에서는
조종사가 무리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1993년 아시아나 733편의 목포공항 추락 사고(68명 사망) 때
비행기는 공항을 두 번 선회했다.
마침내 세 번째 착륙을 감행하다 부딪혔다."
―그런 무리한 결정에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마음이나 자존심이 작용하는 걸까?
"정확한 지적이다.
위험과 싸우지 않고, 위험을 피할 줄 알아야 훌륭한 조종사다.
1989년 대한항공 803편 리비아 사고(72명 사망)를 냈던 조종사는
당시 공항에 안개가 꼈는데도 착륙을 시도했다.
'늘 뜨고 내렸는데 이걸 못 해' 하는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조종사는 사고 10년 전에도 그랬다.
방콕 공항에서 비가 퍼부었을 때 다른 항공기들은
미얀마로 회항했지만 그만 착륙을 시도했다.
무사히 착륙했고 '역시 베테랑은 다르다'는 박수를 받았다.
그때 항공사에서 규정을 어긴 그를 징계했다면 대형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회항(回航)하면 승객들이 항의하고 난리를 피우지 않는가?
"우리 승객들은 항공기 지연과 회항에 과도한 항의를 하는 편이다.
이런 점도 조종사에게 회항을 주저하게 만들기도 한다."
―얼마 전 대한항공 비즈니스석 승객은 여승무원을 잡지로 치기도 했으니.
"그 승객의 행위가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항공사에 몸담았던 입장으로는 기장의 문제도 보인다.
미리 기내에서 엄한 주의를 주는 등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결국 한 개인이 직장까지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다시피 했다.
그럴 사안은 아니었다."
그와의 비행은 2시간 반 만에 끝났다.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메스꺼움도 같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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