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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대웅전. 일설에 의하면 6ㆍ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사람들을 대웅전에 가둬놓고 불을 질렀다 한다. |
선(禪) 교(敎) 경계에 걸림 없이 자유로웠던
‘불교계 안자’ 혜철 25년 만에 돌아와 산문을 열자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온 것 같다’
칭송하는 가운데 교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까지
몰려들고 문성왕 국정 자문역까지 맡게 돼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곳에 아름다운 사찰, 태안사가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봉우리와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이곳은 찾아오는 이가 드물고 고요해서 마음 닦는 수행자들이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에는 용이 깃들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구름이 깊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또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여 삼한의 명승지라 할 만한 곳이다. 동리산문을 활짝 연 혜철국사(惠哲國師, 785~861)의 비문에 나와 있는 태안사에 대한 설명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태안사는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
태안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탑이 하나 있다. 바로 6ㆍ25 전쟁 때 순직한 경찰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그것이다. 1950년 8월6일 새벽 경찰의 전투본부로 사용하던 태안사에 북한군이 기습하여 48명의 경찰이 전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은 붙잡힌 사람들을 법당에 가둬놓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태안사는 일주문과 능파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천년 동안 이어온 태안사의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태안사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밤이 되면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그 때문에 이곳을 찾은 불자들은 방문 밖을 나갈 수 없었다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고 법당에는 향불이 꺼졌으며 급기야 폐사 위기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태안사는 전쟁의 참화가 남긴 상처가 너무도 컸던 곳이다.
그러나 1985년 염불선을 주창했던 청화대종사(淸華大宗師, 1923~2003)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대종사는 3년 동안 산문을 나가지 않고 대중들과 함께 천년고찰 태안사를 재건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정진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뜻이 밖으로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곳을 향하였다. 주민들에 의하면 곡성이 생긴 이래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재건을 위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오늘날의 태안사를 있게 한 것이다.
이곳에는 동리산문을 개창한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의 부도와 비석이 나란히 놓여있다. 비석의 앞부분은 혜철의 생애가 담긴 비송(碑頌)이고 뒷부분은 태안사의 역사가 담긴 동리산기실(桐裏山紀實)이다. ‘기실’이란 ‘사실 그대로를 적은 글’이라는 뜻이다. 1927년 일제가 우리의 정신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자 이를 지키기 위해 박한영(朴漢永, 1870∼1948)스님이 태안사의 역사를 정리해서 써놓은 것이다.
동리산기실에 의하면 847년 혜철국사가 쌍봉사에서 태안사로 와서 법당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을 지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혜철이 이곳에서 선당(禪堂)을 열고 가지산문의 도의와 실상산문의 홍척, 그리고 사굴산문의 범일 등과 함께 마조도일의 종지에 대해서 경연(競演)을 펼쳤다고 한다. 이들 모두 서당지장의 법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니 함께 모여서 스승이 전한 진리에 대해 법담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여러 선종 사찰 중에서 태안사보다 성대한 곳이 없었으며 법회를 열 때마다 이곳에 모인 청중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니, 당시 태안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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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혜철국사비. 비문 뒷면의 ‘동리산기실’에 의하면 귀부는 혜철국사 비석의 좌대이지만, 용관(龍冠)은 광자대사의 것과 바뀌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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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베려면 도끼를 잡아야
혜철은 경주 출신으로서 속성은 박 씨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던 것 같다. 고기나 생선에서 나는 노린내나 비린내를 맡으면 피를 토하였으며, 짐승들을 도살하는 장면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앉을 때는 항상 가부좌를 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예를 표할 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곤 하였다. 일상의 모든 행동들이 마치 출가한 스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는 15세의 나이로 출가를 하게 되는데, 영주 부석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공부하고 깨달은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어제는 벗이었는데, 오늘은 자신들을 이끌어주는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료들은 혜철을 가리켜 불교계의 안자(顔子)라고 부르곤 하였다. 안자는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이 매우 훌륭해서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증자(曾子)와 자사(子思), 맹자(孟子)와 더불어 안자를 4성(聖)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헌강왕 6년인 814년 가을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난다. 그런데 가는 도중 목숨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였다. 마침 당나라로 들어가는 배에 죄인들과 함께 탔는데, 혜철도 죄인으로 오인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당시 군감이 조정에 보고하여 죄인 30여 명과 함께 사형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다른 죄인들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고 혜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군감은 고요하면서도 당당한 그의 모습을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정을 조사한 결과 오해가 풀렸고 죽음에서 면할 수 있었다.
당나라에 도착한 그는 손발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찬 서리와 눈보라를 참아가며 마침내 서당지장을 만나게 된다. 첫 만남에서 혜철은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훗날 말 없는 말(無說之說)과 법 없는 법(無法之法)을 신라에 전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혜철은 신라에 있을 때 교학과 계율을 공부하면서도 선(禪)을 함께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수행이 이미 무르익은 상태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스승을 만난 것이다. 혜철이 물건임을 알아본 스승은 얼마나 기뻤는지 처음 만난 제자를 마치 옛 친구를 대하듯이 반겼다. 그리고 스승은 그에게 조용히 심인(心印)을 전하였다.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진리의 샘물을 맛본 제자의 마음은 마치 드넓은 하늘과 같이 확 트이게 되었다.
혜철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말이 비록 다르고 진리의 세계는 은밀하지만, 나무를 베는데 필요한 것은 도끼라(伐柯執釜)는 사실을 깨치게 되었다. 선의 세계에서 언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무를 베려면 도끼를 잡으면 되는 것이다. 즉,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마음을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스승 곁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당이 입적을 했기 때문이다. 빈 배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여기저기를 유람하다가 서주(西州)에 위치한 부사사(浮沙寺)에 이르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3년 동안 치열하게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마음의 눈을 뜬 선사로서 마음과 언어의 경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선과 교의 경계에 걸림 없이 자유로웠던 인물이었다.
고국을 떠난 지 25년만인 839년 그는 신라로 돌아온다. 이미 그의 명성은 신라에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귀국을 환영하였다. 이때의 일을 비문에서는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온 것 같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혜철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태안사에 자리를 잡고 동리산문을 활짝 열게 된다. 선(禪)과 교(敎)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성향 때문인지 태안사에는 선을 공부하겠다는 사람뿐만 아니라 교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전했는데, 이는 부처님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태안사가 발전하게 되자 중앙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문성왕은 중요한 일이 있으면 혜철에게 자문을 구했고 혜철 또한 자신의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혜철을 극진한 예로 대하고 많은 지원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왕실에서 혜철을 존경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여기에는 청해진을 열었던 장보고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것처럼 장보고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 위주로 사람들을 등용하였다. 이는 평등을 강조했던 선불교의 이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장보고는 동리산문을 비롯한 호남지역 선종 사찰에 경제적 지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841년 장보고가 사망하고 10년 후인 851년 정부는 청해진을 폐지한다. 또한 장보고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김제 벽골제로 이주시킨다.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장보고 세력에 대해 부담을 느낀 것이다. 왕실이 혜철과 태안사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작용한 것 같다. 혜철에 대한 일종의 경계라 할 것이다.
이 지역은 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곳이다. 또한 태안사는 고려를 세운 왕건의 정신적 지주였던 도선국사를 배출한 곳이다. 도선은 혜철의 제자이다. 태안사는 고려에게는 은혜의 공간이지만, 신라에게는 아픔일 수도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