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김철웅은 스포츠형으로 짧게 깍아 쓸어넘길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만 더 있으면 머리를 잡아뜯어버릴 듯한 태도였다. 가끔 그의 입술사이로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180 센티가 넘는 키에 100 킬로그램을 훌쩍 상회하는 거구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복도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긴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보던 장문석이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신 사납다. 좀 가만히 있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되니까 이러는 거 아니유, 형님."
"너 때문에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뒤엉킨다. 제발 진정 좀 해라."
씩씩거리며 말하던 김철웅은 장문석의 제지에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그들은 지금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서울 양천구 신월7동에 와 있었다. 그곳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복도는 국과수 건물내로 법과학부 물리연구실내 총기연구사무실앞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경찰청 산하 기관으로 연구소 내에 법의학부와 법과학부가 있다. 법의학부에서 하는 일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일은 사체 부검 등이 있고 법과학부는 독과 화학류 그리고 총기등을 연구하는 부서가 있다.
장문석과 김철웅이 찾아온 곳은 법과학부의 총기연구실이었다. 현관에서 발견된 총탄을 발견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한의 가슴을 통과한 총탄이었다. 정식절차를 밟으면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고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장문석이 김철웅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40대 중반의 흰 가운을 걸친 사내가 나왔다. 장문석과 김철웅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에서 나온 사내는 오른 손에 가로세로 10센티미터 크기의 투명한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 비닐봉투 안에는 작은 쇠붙이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박사님. 결과가 나왔습니까?"
"흠. 정확한 결과는 나중에 공문으로 보내드리겠지만, 이것이 어떤 총의 탄환인지는 밝혀졌습니다."
국과수 연구원 이태승의 말에 장문석과 김철웅이 한걸음씩을 내딛었다. 그만큼 그들의 궁금증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김철웅의 소리치듯 물었다.
"뭡니까?"
"귀청 떨어지겠어요! 러시아제 스나이퍼용 장총인 드라구노프 전용 탄환입니다."
"예?"
이태승이 김철웅의 커다란 목소리에 눈살을 찡그리며 대답하는 것을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멍해졌다. 장문석이 입을 열었다.
"드라... 뭐라구요?"
"드라구노프! 러시아 연방과 공산권 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저격용 총입니다. 최대 사거리 2300미터, 유효사거리 800미터. 탄의 폭발력은 최신의 스나이퍼용 총들에 비하면 약하지만 안정성이 높아서 저격수들이 애용하는 총입니다."
장문석과 김철웅이 입을 벌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책에서나 보았던 이름이 이태승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그들이 드라구노프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국에서 드라구노프라니. 적응이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들이 살면서 보아 온 총기라고는 M1, K2, M16, 38권총을 벗어나지 못했다.
통상의 대한민국 남자들은 아무리 군대를 의무적으로 다녀온다고 해도 38권총 구경도 못해본 사람이 태반인 것이다. 그들도 경찰이 아니었다면 38권총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무슨 만화책도 아니고 형사가 그런 저격용 총에 맞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임형사가 국정원 같은 첩보기관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
"김형사님. 그건 김형사님이 밝혀야지요. 나한테 물어 볼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태승이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철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문석이 김철웅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다.
"정신차려, 이 자식아! 명색이 강력반 형사라는 놈이 어벙하기는!"
장문석은 김철웅을 구박하고 있었지만 김철웅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사실은 그도 김철웅이 한 말을 입에 담을 뻔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태승에게 인사를 하고 국과수를 나왔다. 국과수내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김철웅의 갤로퍼 조수석에 올라 탄 장문석이 운전석문을 열고 올라오는 김철웅을 보며 말했다.
"임형사 이놈. 도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웬 저격총이 나오냐구?"
"형님이 모르는데 난들 알겠수?"
"수술은 잘 끝났을라나?"
"그 자식 체력 모르쇼? 한방에 죽을 놈 절대 아니니 걱정 붙들어매셔두 됩니다. 형님."
"그래! 잘 될 거다.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반장님한테 보고나 드려요. 궁금해 하고 계실 테니까."
김철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장문석이 핸드폰을 꺼냈다. 이장후반장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태운 차가 남부순환도로에 들어섰다. 김철웅은 악셀을 있는 대로 밟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한 것이다.
장문석이 보고를 마치자 이장후는 핸드폰을 껐다. 그의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몸은 이십대도 따라오기 힘들만큼 균형이 잘 잡혀있는 덩치가 커다란 사내였다.
"이반장. 뭐래?"
"드라구노프라는 러시아제 저격총의 탄환이랍니다."
"드라구노프?"
이장후의 말을 들은 사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생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지방 경찰청 형사과장인 신형준 총경이었다. 순경부터 시작한 사람으로 형사생활만 이십년 가깝게 한 사람이다. 그는 이장후 반장과는 동갑이었다.
그들은 사석에서는 말을 놓는 절친한 친구사이였지만 이곳에서는 이장후가 그에게 말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공적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동부경찰서 형사과장실이었다. 그들 외에도 여러 사람이 지금 긴장한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격총의 탄환이라...... 그럼 프로라는 말이잖아. 이제 형사생활 9개월 된 새파란 쫄따구가 저격을 당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구만. 내가 삼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경찰 생활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형사 뿐만 아니라 경찰관이 전문 암살자에게 저격당했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네. 대체 임한이라는 그 친구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가장 최근이라면 일주일 정도 수원지검에 파견을 나가 있었고 그 전이라면 마약사건을 한 건했던 것뿐입니다. 제가 알기로 임형사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저격당할 정도의 일을 하고 다닌 적은 없습니다."
"그래? 하지만 저격을 당했다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런 저격총을 사용하는 자가 무작위로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쏘고 다닐 리는 없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네 반에서 처리했던 그 마약사건의 놈팽이들 부모가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네.그들이 청부업자를 고용했을 가능성은 없나?"
"제 생각입니다만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로 임형사가 아무리 밉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할 사람들은 아닙니다. 만약 배후가 그들 중에 있다면 범인이 밝혀졌을 때 그자의 신분이 제 아무리 높다고 해도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 자식이 귀하다 해도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도 모르게 실행했다면 또 모르지만 이번 건은 너무 공개적입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형사 1개 반을 그쪽
수사에 전담시킨 상탭니다."
"그렇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 세상이니까. 잘했어."
고개를 끄덕이던 신형준의 시선이 허진곤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허진곤이 침을 삼켰다.
"방금 전에 들어왔던 소식이외에 다른 소식이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과장님."
"흠. 그 외국인이 수상해. 철저하게 추적하도록 다시 한번 지시하게. 그 드라구노프라는 총을 내국인이 사용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이 안 돼. 전문 저격용 총기라면 군에서도 다루는 곳이 한정된 것일 테고. 러시아제라면 국내에서는 사용하는 곳도 별로 없을 텐데. 군에 협조공문 보낸 결과는 왔나?"
"아직입니다. 과장님. 하지만 군에서도 적극 협조하겠다는 연락이 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결과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국인에 대한 추적은 본청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전국에 내린 상태이고 형사 1개반이 그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외국인은 추적이 어렵지 않습니다. 머리색과 눈의 색깔은 검은색으로 변장할 수 있겠지만 피부색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방금 전 동부경찰서에서 1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어린아이가 계단을 내려오는 외국인을 보았다는 제보를 해왔다.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한 흰피부의 남자가 검은 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는 아이의 말에 즉시 출동한 강력2반 형사들이 그 아파트 주민들 전부의 인적사항을 동사무소의 협조를 받아 확인했다. 그 결과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전무했다. 의심할만한 외국인이었고, 그 외국인은 일차 용의자로 지목된 상태였다. 신형준의 얼굴이 굳어지며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가 했던 이 일은 국가 공권력에 대한 명백한 도전 행위야.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은 잡아야 한다. 경찰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대통령께서도 우려를 표명하신 일이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신형준의 시선이 다시 이장후를 향했다.
"그나저나 그 친구가 깨어나야 뭐가 되도 되겠어. 당사자가 말을 해줘야 그가 무슨 일에 얽혀 있는지 알게 아닌가. 그 친구 수술은 어떻게 됐어, 이반장?"
"아직 수술중이랍니다."
"그래. 그 친구 신변보호는?"
"전경 일개 소대를 수술실과 병원 주변에 배치한 상탭니다. 강력4반의 이정민과 곽원섭 형사가 함께 있습니다. 총기와 실탄이 지급되어 있습니다. 사안이 어떤지를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두 긴장하고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침입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신형준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허진곤이었다.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신형준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순경부터 총경까지 시험과 특진을 거듭하며 올라간 사람이었다. 그만큼 경찰을 사랑하고 경찰관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경찰관이 저격당한 이번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다.
같은 시간 수원지검 특별수사부 부장검사실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특수부장 진성재와 부부장 윤형석 그리고 강력부의 최재헌 검사였다. 진성재의 시선은 윤형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승우의 배후세력일 가능성이 크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긴 하지!"
"임형사는 경찰입니다. 업무상 그에게 검거되어 교도소로 간 자들이나 그 가족이 원한을 가질만은 하지만 그 때문에 형사를 총으로 쏘는 사람은 최소한 대한민국엔 없습니다. 인생을 포기한 자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습니다. 수십년 동안 형사가 테러를 당한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작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주먹으로 때리거나 심한 경우 몽둥이로 패는 정도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런 짓을 한 자들은 교도소에서 수년이상을 보내야했습니다. 그리고 총으로 저격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닙니다. 일단 보통 사람들이 저격용 총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개조된 인명살상용 엽총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저격용 총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구입루트 자체를 찾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승우의 입을 열어야 답이 나오겠군요?"
"그렇지."
옆에 있던 최재헌의 질문에 윤형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진성재가 질문을 던졌다.
"이승우는?"
"오전에 조사를 하고 몹시 힘들어해서 오늘은 구치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정문욱 고검장님 부탁도 있고 해서요."
"그 양반이 무슨 부탁을?"
진성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윤형석은 정문욱을 고검장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전직 고검장 출신 변호사가 맞았다. 정문욱은 대구고검장이었던 사람으로 퇴직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분이 이승우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기린건설에서 선임했습니다. 오후에 잠깐 면회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랬나?"
진성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의 피의자 접견신청은 법으로 보장하는 권리이다.
경찰이 검거하거나 검찰이 직접 검거한 범인들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에 있게 되면 그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될 동안 머무는 곳은 검찰청이 아니라 구치소다. 검찰청에는 그들을 재울 장소가 없다.
구치소에 있는 피의자에 대한 변호사의 면회신청은 방해받을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권리다. 하지만 구치소에서 검찰청으로 불려와 조사를 받을 때는 면회가 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정문욱은 면회가 가능하도록 윤형석에게 이승우를 구치소로 보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검사도 언젠가는 변호사를 한다. 그것이 그들을 강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만드는 이유가 된다. 검사의 월급은 그 사회적 위치에 비하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변호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닌 바 권력은 반대로 변호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검사가 의지를 갖고 수사하면 대한민국에 사법처리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겨서 옷을 벗으면 변호사를 하면 된다. 그 때문에 소신도 고집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사후 보장이 되지 않는다면 소신을 가지고 일을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검사들은 검사를 그만두면 변호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변호사들과 얼굴을 붉히는 일은 잘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전직 검사 선배 출신의 변호사에게는 인간적으로 강하게 나가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특히 그만둔 지 1년 이내인 검사 출신 변호사에게는 일정한 대접을 해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는데 그것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관예우다.
정문욱이 그 케이스였다.
"병원에는 누가 갔나?"
"최원영 계장과 박훈 경사가 가 있습니다."
윤형석의 대답을 들은 진성재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완고한 고집과 그만큼의 투지가 어우러진 눈빛이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반드시 밝혀내겠다. 윤검사, 각오를 단단히 해야할 거야. 만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저렇게까지 보여주려 하는 자들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
앞으로의 수사 일정에 대한 상의가 계속되는 특수부장실의 분위기는 각오를 새롭게하는 사내들의 열기로 점점 뜨거워졌다.
변호사의 피의자 접견은 일반인들이 면회를 하는 것과 다르다. 변호사가 피의자를 따로 만날 수 있는 접견실이 모든 구치소에는 마련되어 있다. 수원구치소도 마찬가지였다.
수원구치소의 피의자 접견실은 사방 다섯 평 정도의 크기에 방의 가운데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구조였다. 그곳에서 정문욱은 이승우를 만나고 있었다.
정복을 입은 교도관 한 명이 문 근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문욱은 머리가 반백인 노신사였다.
혈색이 좋고 나이에 비해 눈매가 매서운 사내였다.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은 자네와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는 아니네. 어차피 검찰조사가 본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수 없기 때문에 지금 조언할 단계는 아니야. 하지만 자네도 잘 알다시피 검찰의 질문에는 일절 대답하지 말게. 나와 상의한 내용만을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어서 온 거라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초췌한 안색의 이승우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검찰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신을 차린 곳은 검찰이었다. 일본에서 검찰에 송환되는 과정에 대해 강하게 이의제기를 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 답답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송환과정에 이의를 제기하려면 그가 일본의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말해야 했다. 하지만 건설업체의 자금담당이 야마구찌의 보호 하에 있었다면 문제는 오히려 더 꼬일 것이었다. 야마구찌가 나오면 동무파가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일은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상태로 전개될 것이 확실한 것이다.
검찰에서 자신이 야마구찌의 보호 하에 있었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해야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검찰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한국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데리고 온 이상 일본에서 자신이 야마구찌의 보호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인 것이다.
정문욱은 가지고 왔던 얇은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는 서류뭉치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이승우의 앞으로 내밀었다.
"기린건설 사장이 자네에게 이 편지를 꼭 보여주라고 하더군. 읽어 보게."
종이를 건네받아 읽어 나가던 이승우의 얼굴이 한순간 하얗게 변했다. 그의
눈동자는 편지의 맨 아래 서명이 있는 곳에 못박혀 있었다. 그곳에는 이름 석자 옆에 펜을 잘못 놀려 생긴 듯한 몇 개의 점과 선이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이상함을 느낀 정문욱이 편지를 뺏어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편지에는 평범한 안부를 묻는 말과 검찰 수사에 응할 때 주의해야할 몇 가지에 대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왜 그러나?"
"아무 일도 아닙니다. 밖에서 저를 걱정해주는 분들이 많으시다는 사실이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그래?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건가?"
"예, 변호사님."
정문욱은 오랜 수사 경험과 피의자를 다룬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승우의 태도에서 무언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뢰인이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계속 추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네. 그럼 나는 가보겠네."
"예."
정문욱이 접견실을 나서자 그 뒤를 교도관이 이승우를 데리고 따라 나왔다. 복도를 걷는 이승우의 다리가 힘을 잃고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동행한 교도관은 이승우의 몸이 쇠약해져서 그러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가 이승우의 지금 심정을 알았다면 결코 그처럼 무심히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보통사람이었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승우가 본 편지의 마지막에 실수로 그려진 듯한 점과 선은 암호였다. 그 암호를 해석하면 하나의 문장이 된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가족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특이한 내용의 청부였지만 이자르 구르노브스키는 일의 결과에 만족했다. 목표는 무엇때문인지 모르지만 급하게 움직이려고 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목표가 먼저 움직였다면 실패할 뻔 했다. 하지만 목표의 움직임은 그가 방아쇠를 당기고 난 직후였기 때문에 그의 총탄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그는 목표의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튀는 장면을 보았었다. 심장을 관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두 번째 총탄을 쏘지 않고 그 자리를 바로 벗어났다. 청부는 목표를 죽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여도 좋다는 말은 있었지만 반드시 라는 말은 없었던 것이다.
이자르는 자신에게 청부를 한 사람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검게 염색되어 있었고 눈에도 검은색 렌즈가 끼워져 있었다.
하지만 생김새나 하얀 피부가 주변의 한국인들과 차이가 심해서 그가 외국인임을 몰라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짙게 썬팅된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파트를 벗어나자마자 근처 도로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을 훔친 것이다.
차량의 겉과 속은 상당히 지저분했다. 주인이 며칠은 사용하지 않은 듯 싶은 차를 고른 것이다. 차의 모양새로 보아 주인이 차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신고하려면 적어도 몇시간 길면 며칠은 걸릴 것이었고, 그 시간이면 그는 외국인이 많은 곳으로 이동해 있을 것이었다.
다른 외국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간다면 추적을 뿌리치기가 더 쉬울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난다면 그는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을 것이었다. 청부를 완수하고 받기로 한 대금은 그가 평생을 놀고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자르는 차안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안산의 공단지역이었다. 수백개의 공장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고 낮에는 사람들의 통행이 거의 없었다. 이자르는 공장과 공장의 사이에 있는 골목길에 정차하고 있었다.
높은 담들로 둘러싸인 공장들은 창문도 없는 건물들이어서 그를 지켜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사람을 만나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는 팔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사람이 나타나야할 시간이었다.
그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청부자가 나타난 것이다. 공장의 담을 돌아나온 청부자는 재빨리 차 뒷문을 열고 탔다. 그는 들고 온 가방을 좌석에 내려 놓은 후 백미러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자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영어였다.
"성공했더군."
"가슴을 맞히기만 하는 일은 사실 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 맞기만 하면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이런 청부는 받아본 적도 없어. 약속한 돈은? 돈 받기도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여기 있네."
청부자는 자신의 옆에 놓인 가방을 손바닥으로 건드렸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자르는 고개를 뒤로 돌려 그 가방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청부자의 양손이 이자르의 머리를 잡고 반대편으로 돌리며 꺾어버린 것은.
"뿌드득!"
목뼈가 부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차안을 울렸다. 이자르는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죽었다. 채 감기지 않은 그의 눈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다는 듯 어리둥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빛이 꺼졌다. 이자르는 러시아 특수부대 출신의 살인청부업자였다.
총기 뿐만 아니라 맨손 격투술도 고수라 불리울만 한 자였지만 그는 죽어야만 했다. 그의 목을 꺾어 버린 손은 너무나 빨랐고, 그 양손에 깃들어 있는 힘은 저항할 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청부자는 그가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자르를 죽인 청부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자르의 시신을 뒷좌석에 앉히고 그의 돌아간 머리를 바로 돌려놓았다. 자리를 운전석으로 옮긴 청부자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한 사람과 한 구의 시신을 실은 자동차가 골목길을 벗어나 빠르게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