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슉! 천백의 쌍수는 그대로 허공을 치고 만다. 허공을 쳤음에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대전의 석벽이 박살이 나 버린다. 그 위력 실로 통천가공할 것
이었다.
(이럴 수가. 이런 지척의 거리에서 청혈무영수를 피하는 인물이 있다니..)
천백의 안색은 대변했다. 순간, 그는 살이 에이는 듯한 도기를 느꼈다.
대경하고 피하려 했으나...
[욱!]
그는 헛바람을 일으켰다. 위로 신형을 날리려 하니 머리카락이 한줌이나 날카롭게 잘려져 나갔다. 그리고 뒤로 신형을 날리려 하니 등어리가 베어져 나가는 충격을 느꼈다.
우로... 그리고 좌로... 어디로 몸을 날려도 살을 에이는 도기는 정확히 그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천백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단엽의 가공할 무공에 아예 질려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단엽을 응시했다. 그는 단지 한 자루의 천마도만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이빨이 천백에게는 절망을 느끼게 했다. 단엽은 천마도를 거두었다.
[역시 서궁세가의 인물이라니...]
그의 시선은 천백의 양손으로 향해 있었다. 천백의 양손. 거기에는 어느새 깊숙한 상처가 나 있었다. 천백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데 거기에서 흐르는 피는 푸른빛이었다. 철군무와 칠대장로의 안색이 굳어졌다.
[천백... 그대가 서궁세가의 인물이라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들은 분노했다. 특히 칠대장로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들은 그동안 진한 우정을 천백에게 주었던 것이다. 한데 그가 철저히 자신들을 우롱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천백은 돌연 앙천광소했다.
[크핫하하...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우리는 받은 만큼 돌려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고통이, 이런 배신이 아픈 줄 알았다면 우리 서궁세가의 고통도 알았어야 했다. 크핫하하... 우리는 주고 또 줄 것이다.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스스스... 그의 신형이 무섭게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멈춰라!]
칠대장로가 일제히 소리치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흐흐...가소로운 놈들. 너희들은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펄럭! 천백은 허공에서 팔소매를 흔들었다. 팔소매는 떨어져 칠대장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우우웅! 그것은 단지 팔소매가 아니었다. 푸른 광채를 눈이 부시게 뿌려내는 한 쌍의 환이었다. 칠대장로는 일제히 그 환과 천백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실로 경인지경. 그런 그들이 합공을 펼치니 그 위력은 그야말로 통천가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쌍의 환은 얼음처럼 그들의 공세를 피해 날아들었다.
[음...헉!]
중원무정과 대성녀의 팔소매가 환에 잘려져 허공으로 날리웠고 이어 축융신군과 천룡현공이 앞가슴에 피를 뿌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천백의 신형은 더욱 허공으로 치솟았고 대전의 천정에 바짝 접근했다. 그는 그대로 천정을 파괴하고 도주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철군무는 태사의에 앉은 자세 그대로 태사의와 함께 허공으로 무섭게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오른다고 느낀 순간 그는 이미 천백에게 이르러 있었다. 천백의 안색이 미미한 변화를 일으켰다.
[후후...역시 철군무답군.]
그는 사정없이 철군무를 향해 쌍수를 뻗었다.
콰아아! 청혈무영수의 가공할 위력은 그대로 철군무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반항인가?]
철군무는 냉소를 흘렸다. 그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쾅! 청혈무영수는 정확히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러나 철군무는 한차례 몸을 주춤했을 뿐 담담히 웃으며 그대로 천백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허억! 그가 그동안 자신의 무공을 숨기고 있었던가.)
천백은 대경했다. 그가 아는 철군무라면 당연히 청혈무영수에 피를 토하고 죽어야 했다. 아니, 설령 죽지 않는다 해도 치명저인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한데 그는 멀쩡하다.
멀쩡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팔을 움켜잡았다.
[으으... 과연 군협천 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답다.]
천백은 도저히 손을 빼낼 수가 없음을 알았다.
다음순간, 푸앗! 그는 스스로 자신의 팔을 절단해 버렸다.
이어 쾅! 그의 신형은 천정을 꿰뚫고 사라져 버린다. 저주 서린 한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크핫하하하... 기억하라. 오늘의 나는 받은 만큼 또 고통으로 돌려 줄 것임을... 크핫하하하.]
철군무는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천백이 자신의 팔을 끊어버리고 도주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지독하군.]
그는 단엽의 면전에 내려섰고 곧 손을 내밀어 단엽의 손을 잡았다.
[고맙네.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한데 아깝군. 놈을 잡았어야 하는 건데.]
철군무는 씁쓸하게 웃었다. 단엽은 담담히 말했다.
[꼭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가 떠난 이상 그만큼의 의미는 있는 것
이지요.]
이어 그는 서둘러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이 명단의 인물들을 척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큼 희생이 커질 뿐입니다.]
순간, 철군무는 명단을 아홉 조각으로 나누었다. 그것을 칠대장로와 단엽
에게 한 조각씩 나누어 주었다.
[자, 이 명단에 적힌 대로 우리 헤어져 일을 하기로 하세. 그리고 이곳에
서 만나세.]
[알겠습니다.]
단엽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마디를 더 했다.
[이미 백의성의 고수들이 우리가 할일을 미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행여 그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마시길...]
칠대장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칠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그 뒤로 철군무와 단엽이 따른다.
소림백팔 나한진의 위력은 가공했다. 전설적인 무적의 대진. 그것이 소림
에 출현한 것도 손꼽을 정도였지만 아직까지 패배를 모르는 절진인 것이다.
똑똑... 청아한 목탁소리. 웅혼한 독경소리가 풍운회의 총단 심처에서 흘러
나온다. 소림백팔나한대진이 여기 풍운회의 총단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한 거대한 대전을 중심으로 정확히 백팔명의 노승이 합장한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웅장한 기태가 그들의 일신에서 구름처럼 흐르고 몸을 서서히 움직이나 그 움직임 하나에 거대한 힘이 솟아난다.
이 소림백팔나한진을 중심으로 근 일천 명에 가까운 마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바닥에 무수히 널브러진 마인들의 시신들은 소림백팔나한진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간 것이다.
선두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백의소녀가 있었다.
눈 위에 피어있는 동백꽃처럼 아름답고 싸늘한 기품의 여인.
그녀는 만빙담주이자 천마교의 천마사종 가운데 일인인 백빙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만빙담의 마인인 일백육인의 백의인이 우뚝 서 있었다.
표정은 얼음처럼 냉막하고 전신에서는 가공할 만한 한기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때, 백빙은 소림백팔나한진을 주시하며 싸늘히 냉소쳤다.
[흥! 소림백팔나한진이 그토록 대단한가? 한번쯤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좋아! 이 백빙이 소림의 전설에 도전해 보지.]
그녀의 신형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고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일백 육인의 백의인이 부챗살처럼 갈라지며 소림백팔나한진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소림백팔나한진을 공격하니 그들 나름대로의 가공할 합벽진을 전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미타불...]
최초로 소림백팔나한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상대가 전개하는 합벽진이 결코 만만히 볼것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무림 사상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대격전의 막은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
대전,
사방이 백색대리석으로 장식된 정갈한 분위기의 대전이었다. 세 명의 노승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터질 듯한 중압감이 대전에 감돌고 있었다. 흰 백염이 허리 밑까지 흘러내린 세 노승. 소림장문인 무운선사. 소림장경각 주지 무경신승. 소림법불원주 무해신승. 바로 소림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이다. 그들 세 노승의 표정에는 한결같이 침중한 빛이 드
리워져 있었다.
문득 무운선사의 굳게 다물린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아미타불... 오늘의 결전에 소림의 사활이 걸렸도다.]
그이 표정은 어두웠다. 무경신승은 합장하며 담담히 말했다.
[소림은 건재할 것입니다. 역사 이래 누구도 소림백팔나한진을 깨지는 못했습니다. 설령 서궁세가의 인물일지라도 소림백팔나한대진은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무운선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소림이 건재한다 해서 살아 있는 것은 아니오. 무림이 도탄에 빠져있거늘... 풍운회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거늘... 그들이 죽으면 결국 우리들 소림 역시 죽은 것이오.]
[아미타불...]
무경신승의 표정은 돌연 처량해졌다.
[아아... 이럴 때 소사숙이 곁에 있었다면...]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역시 단엽옥승이 천엽성승의 화신이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오직 무운선사만이 아는 일이었다.
무운선사는 탄식했다.
[그 분은 운명하셨을 것이오. 서궁세가에 납치된 이상.]
[아미타불.]
무경신승의 두 눈에 뿌연 물기가 맺힌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답답해졌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서궁세가가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그들은 무림에 피를 뿌리고 있는 것인가? 누구도 그들을 상대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아... 이 시대의 절대적이라는 철군무조차 그를 상대할 수 없단 말인가? 서궁세가를 어쩔 수가 없단 말인가?]
[그렇소. 누구도 서궁세가를 무너뜨릴 수가 없소.]
무해신승의 음성이었다. 그는 줄곧 침묵하다가 최초로 입을 열었고 무운선사와 무경신승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무해신승의 신형이 빠르게 그들 곁을 스치고 지난다. 동시에,
[음...헉!]
무운선사와 무경신승은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마혈이 제압당했고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대가 왜?]
그들은 대경했다. 무해신승은 차갑게 웃었다.
[본인은 무해신승 이전에 서궁세가의 서궁해라 하오.]
무궁선사와 무경신승은 입을 딱 벌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사형제지간이다.
수십여 년의 세월을 함께 생활한 형제와도 같은 사이인 것이다. 한데 그가 서궁세가의 인물이라니...
그가 서궁세가의 인물임을 몰랐다니...
어이가 없었고 전율스럽기조차 했다.
무해신승은 담담히 말했다.
[자신을 숨기고 말아야 함은 고통인 거이오. 그것이 일이년을 넘어 수십년에 이를 때에는 저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소. 노부가 만약 서궁세가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서궁세가의 깊은 한을 잊었다면 나는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 그 고통의 굴레를 벗어야겠소. 노부는 무해신승이 아닌 서궁해로 돌아갈 것이란 말이오. 때가 되었기 때문이오. 녹옥불령을 주시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두 분의 목숨이 아니라 그것뿐이오.]
순간, 녹옥선사와 무경신승의 안색이 흑색이 되었다. 대소림사의 최고 신물 녹옥불령은 곧 장문인을 나타냈고 대소림사의 모든 제자들은 녹옥불령에 의해 움직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해신승은 무운선사에게 다가왔다.
[이제 보니 당신은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몸이구료. 이 몸이 직접 꺼내겠소.]
그는 무운선사의 몸을 뒤졌다. 무운선사는 말했다.
[무해. 너는 소림의 제자이다. 네가 서궁세가의 인물이기는 하나 대소림사의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제발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후후... 서궁해는 서궁해일 뿐이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그는 녹옥불령을 꺼내들며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 녹옥불령으로 소림백팔나한을 나의 수족으로 부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단지 그들에게 자결을 요구할 것이오.]
무운선사와 무경선사는 절망했다. 소림백팔나한의 죽음. 그것은 소림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데 서궁해가 채 몇 걸음도 걷기도 전이었다.
[서궁해... 너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담담한 음성이 돌연 대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어 퍼펑!
대전의 창문이 박살나며 무엇인가가 서궁해를 향해 날아갔다.
서궁해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잘려진 사람의 머리였다.
[으으...이들은...]
머리는 둘이었다. 그것을 양손에 잡은 서궁해는 무섭게 떨고 있었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무운선사와 무경신승도 그들 두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무당과 청성의 두 장로가 아닌가?]
구파일방 가운데 무당파와 청성파의 장로. 그들이 목이 잘린 채 머리통만 덩그러니 날아든 것이다. 서궁해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으으. 해명, 해국. 너희들이 죽다니... 너희들이 죽을 수도 있다니...]
서궁해명, 서궁해국. 이들 두 사람은 무당과 청성 두 문파에서 성장한 서궁세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바로 서궁해의 친형제이기도 했다.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나의 두 아우를 죽였느냐? 나오라! 어서!]
그는 피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으니 너희들 역시 피눈물을 흘려야 함은 인과응보이다.]
낭랑한 음성과 함께 대전의 창문을 통해 한사람이 날아들었다. 바람처럼 그는 무운선사와 무경신승의 몸을 스쳐 지났으며 그 순간 무운선사와 무경신승은 제압된 자신들의 마혈이 풀림을 느꼈다.
그들 앞에는 한명의 청년이 나타나 있었다. 긴 흑발을 치렁하니 나부끼며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뿌리며 서 있는 그는 단엽이었다.
무운선사와 무경신승은 그가 누구임을 알아보고 격동했다.
[오오... 소사숙이 아니옵니까?]
[아미타불... 소사숙께서 살아오시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무경신승은 왈칵 눈물을 흘리며 단엽을 끌어안았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녹옥불령의 이름으로 명한다.]
서궁해는 녹옥불령을 들고 으스스한 괴소를 흘렸다. 단엽은 차갑게 웃었다.
[네놈은 그것을 들고 떠들어댈 자격이 없다.]
단엽은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그것뿐이었다. 한데 어느새 녹옥불령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 불가사의한 무공에 무운선사와 무경신승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서궁해는 벼락은 맞은 듯 전신을 격렬하게 떨고 있었고 곧 처절하게 외쳤다.
[크으으... 죽였어야 하는 건데... 일찌기 죽였어야 하는 건데... 가주이시여..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너무 믿었소이다.]
그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웃었다.
[크핫하하... 당신은 스스로가 이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인간인 줄만 알았지 또 하나의 잘난 인간이 있었던 줄은 몰랐던 것이오. 아니 알았으면서도 당신 자신의 과신으로 인해 일찍이 죽였어야 했던 인물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오.]
피눈물이 흐른다. 그 피눈물은 역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두 아우의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이오. 당신의 그 과신으로 인해 수많은 우리 형제가 죽어가고 있고, 나는 나의 두 아우를 잃어야 했으니...]
여기까지 말한 서궁해, 돌연 그는 손을 세워 자신의 머리통을 내려쳐갔다.
퍽! 천천히 서궁해는 무너져 내렸다.
그는 단엽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느끼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단엽은 잠시 감정 없이 죽어 넘어진 서궁해를 주시하다가 녹옥불령을 무운선사에게 넘겨주었다. 무운선사는 단엽의 손을 뜨겁게 움켜잡았다.
[훌륭하게 성장하셨군요. 소사숙.]
무경신승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훌륭하게 성장하시다니... 무슨 말인지?)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단엽이 삼년여전의 진짜 그 개망나니 어린중이라 사실을. 그는 지금도 단엽을 천엽성승의 화신 단엽옥승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단엽은 바삐 말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소림백팔나한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한계가 있음으로...]
[아미타불...]
무운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전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소림백팔나한과 만빙담의 혈전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혈전은 이제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소림백팔나한진은 강했다. 그러나 백빙이 이끄는 백육인의 만빙담 고수들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소림백팔나한들은 지쳐 있었다. 벌써 수시진 동안 천마교의 마인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후 다시 만빙담의 고수들을 상대로 하여 치열한 격전을 치루고 있었으니 그들은 극도로 진력이 고갈되어 있었고 그런 상태로 펼치는 소림백팔나한대진이 온전히 위력을 발휘할리는 만무한 것이다. 거기에다 뒤에 처져 있던 천마교의 수백 마인들의 소림백팔나한대진의 허점을 노려 짓쳐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소림백팔나한대진은 유사 이래 최초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무운선사와 무경신승이 크게 놀랐다.
[이 지경이 되다니...]
그들이 장내로 뛰어들려 할때 단엽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사용할 수야 없지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신에 희디흰 백포와 얼굴은 희디흰 복면으로 가린 인물들이 나타나 무서운 기세로 천마교의 마인들을 척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의칠성과 백의육군이었다. 또 유향신협과 보타신니, 남해성니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북궁천과 북궁추림도 그 가공할 무공을 사용해 천마
교의 마인들을 추살하고 있었다.
파죽지세. 천마교 수백여 마인들은 순식간에 한줌의 혈육으로 화해 널브러졌다. 백빙을 비롯한 만빙담의 고수들은 혼비백산했다.
[저들은 백의성의 고수...]
[피해라.]
백빙은 소리쳤다. 그녀가 본 백의성의 고수들은 실로 가공할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잡고 대결해도 자신이 자신 있게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강했다. 특히 북궁천과 북궁추림의 무공은 아예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대체 저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토록 무서운 무공을...?)
그녀는 백의성을 모르고 있었다. 서궁세가의 인물들이 백의성의 정체에 대해 모두 파악하고 있는 반면 그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 백빙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천마교는 단지 이용을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궁세가의 인물이 원하는 대로 그들은 죽어야 하고 서궁세가의 인물이 원하는 그대로 그들은 무림을 난세로 몰아넣을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천마교는 서궁세가의 인물에 의해 질질 끌려 다니는 개에 불과한 것이다.
백빙은 이제서야 그것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늦어 있었다. 그녀가 십 수 년간이나 동거동락했던 만빙담의 고수는 무참하게 도륙되고 있었고 그녀역시 사면초가였다.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 이미 천마교의 고수 대부분이 죽어 있었다.
[멈추시오.]
단엽이 외치자 백의성의 고수들은 손을 멈추었고 곧 단엽의 앞에 시립했다.
백빙은 살아남은 만빙담의 고수들을 주시했다. 불과 서른명 남짓이 피투성이가 된 채 살아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단엽에게로 향했다.
순간, 부르르...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떨렸다.
[당신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단엽인 것이다. 과거 마황성에 입성할 때 자신에게 진한 농담을 던졌던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연분홍빛 사랑을 심어놓은 사람.
[어떻게?]
그녀는 단엽을 보고 또 본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마황성에서 자신도 모르게 빠져나왔고 지금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백의성의 고수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단엽은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야 내가 누구임을 짐작할 수 있겠소.]
백빙은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당신이 백의성주?]
[그렇소. 그리고 당신을 죽일 수가 있었던 사람이오.]
백빙은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단엽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소.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천마교에 이용당하느니 무림을 떠나는 것이 낫소.]
[꼭 그래야만 하나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 모두 죽소.]
백빙은 고개를 떨구었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녀의 양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떠나겠어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우리는 만빙담으로 돌아가겠어요. 그곳은 나의 고향이니.]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어 단엽을 그윽이 주시했다.
[대신... 소녀의 한 가지 청을 들어주세요.]
[무엇이오.]
[당신은 꼭 한번 만빙담을 들러주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소녀는 당신을 영원히 기다리겠어요.]
단엽은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한동안 단엽을 주시하다가 서글프게 웃어 보인 후 만빙담의 고수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북궁추림은 그녀를 보며 탄식했다.
(아아... 나 역시 저 여인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을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엽은 그녀가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북궁세가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로서의 자부심, 그것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고 그의 앞에선 한없이 나약하게만 느껴지고 만다.
신선한 바람에 실려 간간이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어 버렸다. 풍운회의 총단에 몰아쳤던 무서운 혈풍. 그것은 단엽의 출현과 백의성의 출현으로 인해 희생을 극소화하고 평정이 된 것이다.
[승리했어요. 풍운회가 승리했어요.]
[천마교의 마인들은 대부분 죽었으며 몇 천 명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도주했습니다.]
멀리서 소흑자와 소백자가 뛰어오며 외치고 있었고 은은히 종소리가 혈전의 종식을 알리며 들려오고 있었다.
아담한 정실.
은은한 황촉불빛 아래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단엽과 철군무였다.
두 사람이 정실에 있으니 정실이 그들의 기도에 의해 터져나갈 듯 하다.
[술 한 잔 하겠나?]
철군무는 침묵을 깨고 부드럽게 말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먼저 제가 올리지요.]
단엽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철군무에게 권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술을 따랐고, 철군무 역시 단엽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철군무는 술잔을 들었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풍운회는...]
단엽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서궁세가는 아직 존재하고 있고 그들의 힘은 엄청납니다. 제가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알고 있네.]
철군무는 단엽이 듣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단엽은 공손히 말했다.
[듣고 싶습니다.]
[으음...]
철군무는 말하기가 힘든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이어 벌컥 술 한잔을 담숨에 들이킨 후 말했다.
[류향... 그 아이가 보고 싶네... 불쌍한 녀석...]
그의 눈에 투명한 물기가 맺혔다.
[어미 없이 자란 아이이지... 그 아이 못 본지도 꽤 오래되었군. 헌데 그 아이가 자신을 철저히 은폐한 채 서궁수와 함께 있다니... 가슴이 쓰리네. 아아... 그 아이의 목적은 서궁수를 죽이는 것이겠지만... 죽일 수가 없을 것이네. 나는 서궁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초지자의 가문인 서궁세가...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야... 어쩌면 이백여 년 전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그때 이미 서궁수의 탄생을 예언했을 것이고 그를 위해 모든 준비를 했을 것이네. 그만큼 그는 뛰어나... 나조차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그를 류향, 그 아이는 결코 죽일 수가 없을 것이네.]
천군무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의 시선은 허공으로 향한 채 공허히 말했다.
[서궁수의 한... 서궁세가의 한... 그들의 한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이백 이십년 전에 시작되었네... 끔찍한 비극으로부터...]
우수수...
낙엽이 처량하게 떨어져 내리는 밤이었다. 달빛은 교교하고 수많은 별빛이 현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거기, 저 찬란한 대우주가 숨 쉬고 있는 하늘에 만월이 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 만월을 주시한 채 굳어져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신에 걸린 옷은 하얀 학창의 머리에는 통천관을 쓰고 있었다.
뒷짐을 진 그의 나이는 이십 삼사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지극히 평범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만큼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심연처럼 깊고 고요한 그의 두 눈에는 대우주가 가득 투영이 된 채 숨 쉬고 있었다. 마치 대우주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바로 서궁수였다.
서궁세가의 가주이자 과거 군협천의 가주이기도 했던 인물. 그리고 그는 이 시대의 모든 음모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무서운 인물이기도 했다.
휘이잉...
한줄기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치렁한 흑발을 출렁이며 스쳐 지났다.
그제서야 그는 흠칫 상념에서 깨어나며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곁에는 철류향이 몽롱한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천마도의 해변.
쏴아아.... 파도가 밀려왔다 덧없이 스러져 갔다. 문득, 그는 해변을 따라 거닐며 나직이 독백했다.
[나의 인생 이십사 년... 많은 것을 이루었고 많은 고통을 줄 사람에게 주고 또 주었다. 그러나 이 가슴에 사무치는 한... 증오... 저주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들려오고 있다. 한을 가슴에 품고 죽어간 선조들의 절규가...통곡이... 저 지하유부의 혼탁한 숨결을 헤치며 울려오고 있다. 무엇때문인가? 누구때문인가? 그들이 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가?]
그는 앙천광소를 토했다. 그런 그이 눈에 피눈물이 고였다. 그는 벼락처럼 몸을 돌려 철류향의 어깨를 잡았다.
[류향... 너는 아느냐? 알고 있느냐? 우리 서궁세가의 피맺힌 한을...]
그의 손끝이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철류향은 그이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여전히 몽롱한 눈빛이었다.
[크흐흐흐... 위대한 철씨 가문이여 너희들의 가증스러운 얼굴에 침이라도 뱉아주고 싶다. 더러운 인간들. 무엇이 너희들을 그렇게 철저하게 완벽토록 만들었는가? 무엇이 너희들을 무림의 하늘로 만들었는가? 우리 서궁세가의 덕분이었다. 우리 서궁세가의 희생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너희들이 존재할 수가 있었겠는가?]
철류향의 몸에 서서히 변화가 왔다. 그녀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다.
(기회인가? 이것이 나에게 마지막 기회인가? 죽여야 한다. 이후에는 이 같은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철류향은 흔들리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손만 뻗으면 그를 죽일 수도 있다. 한데 망설이고 있다.
(거대하다. 너무도 거대하여 도저히 죽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동안 이자는 너무도 거대하게 나의 영혼을 지배해 왔다.)
이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새삼 서궁수란 존재가 자신이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존재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서궁수의 말은 계속 되고 있었다.
[서궁세가는 군협천을 위해 모든 고통을 참았다. 문서와 명령서를 다루었기에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채 생활해야 했고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한데 너희들이 이백이십 년 전 서궁세가의 인물들에게 베푼 독한 마음 그것이 서궁세가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었다.]
서궁수의 음성은 처절했다. 그것은 통곡이었으며 절규이기도 했다.
[당시 군협천의 가주는 철중옥. 서궁세가의 가주는 서궁백이었다. 그때 서궁백 선조의 나이는 삼십. 성격은 온화했고 인의대덕했다. 단지 그만이 그런것이 아니라 서궁세가의 모든 인물은 선도를 추구했기에 결코 사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 서궁백에게 실로 치욕적인 음모의 굴레가 씌워진 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음모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서궁백 선조께서 천마교의 백면요희와 결탁하여 군협천의 비밀을 빼돌렸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천의 얼굴을 지닌 희대의 요부가 자신의 얼굴을 바꾼 채 서궁세가에 잠입했고 서궁백은 그녀의 치맛자락 아래 굴복하여 정신없이 군협천의 비밀을 빼돌렸다 했으니... 근거는 없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 어떤 확증도 없었다. 하나 그 일로 인해 철중옥은 무섭게 분노했고 급기야 서궁백 선조를 죄인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소문 하나에 철중옥은 수백년 간 헌신적으로 충정한 서궁세가를 외면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는 소문 하나에... 서궁백 선조는 한 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으셨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믿음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믿음으로 군협천의 철씨 가문에 충정한 것인데 철중옥은 그분의 믿음을 소문 하나로 깨버린 것이지. 모든 것이 백면요희의 음모임이 명백한 데도 삼척동자라 해도 서궁세가의 결백을 믿고 있었음에도 서궁백 선조는 죄인이 되어야 했고 사마인들만의 전유물이던 뇌옥에 강제로 떠밀어 넣어졌다.
크흐흐... 서궁백, 그분은 알고 있으셨던 것이다. 철중옥이 왜 자신을 그 뇌옥에 밀어넣었는지.. 왜인줄 아는가? 류향... 그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군협천은 분명히 무림의 하늘이었다. 그러나 이 땅위에 군림하는 그들도 한 가문에 대해서만큼은 열등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니 바로 우리 서궁세가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철중옥은 서궁백 선조의 결백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기회에 서궁세가의 위에 서고자 그 열등의식을 권위의식으로 뒤바꿔 보고자 서궁백을 죄인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서궁백 선조는 변명해야 할 하등의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철중옥은 자신의 권위의식을 내세울 만큼 내세우고 그분을 석방해야 했다. 그러나 서궁세가의 백여 식솔이 서궁백 선조의 무죄를 주장하며 뇌옥의 문에 머리를 짓이겨 자결했을 때도 그는 외면했고 크으으... 다시 백 명...
또 다시 백 명... 그리고 도합 사백 칠십 이명의 서궁세가 식솔들이 자결을 했을 때도 그는 결코 뇌옥의 문을 열지 않았다.]
서궁수의 몸이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로 인함이었다. 한과 증오로 인함이었다.
[흐흐...철중옥...그 죽일 놈은 서궁백의 무죄를 인정함은 자신의 권위의
식이 땅에 실추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개새끼!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같은 놈! 서궁백 선조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결했다. 죽기 전 그분은 간절한 청을 철중옥에게 올렸다.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서궁세가의 남은 이백여 식솔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계속하여 군협천의 아래에 두어 달라는 것이었다.]
쏴아아...
철류향은 모르고 있었다. 이 끔찍한 비사를... 기실, 이 군협천의 비사는 군협천이 저지른 사상 최대의 실수였기에 누구나 쉬쉬하는 것이었다.
(아아... 그런 일이 있었던가?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던가?)
몽롱한 그녀의 눈빛마저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크으으... 철중옥이 어찌 했겠는가? 그는 그 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리고 자신의 관용을 내세우는 것이 유리하다 생각했기에... 참으로 자비스럽게도 기꺼이 그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직 서궁세가의 인물들만이 군협천의 방대한 기밀문서와 방대한 명령서를 총괄할 수 있었기에...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비로 내세웠다. 후후... 그 후...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어찌 했겠는가? 믿음과 의리가 깨어져 버린 그들이 어찌 했겠느냐? 복수를 다짐했다. 그 고통을 한 순간에 주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주고 또 주어서 그 고통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때까지 주기로 했다. 이것이 전부이다. 군협천이 멸망해야 하는 이유와 너희들을 추앙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이 고통과 수모를 당해야 하는 모든 전모이다.]
서궁수의 표정은 무섭도록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그의 손은 철류향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 어디에서도 방금 전까지 무섭게 꿈틀거리던 한과 증오의 그림자는 엿보이지가 않았다. 철류향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어두웠다.
쏴아아...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서궁수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류향... 왜 나를 죽이려 들지 않았는가?]
순간 철류향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알았단 말인가?)
철류향의 신형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서궁수는 담담히 말하며 해변을 따라 걸었다.
[모두 알고 있었소. 당신의 가식적인 행동을... 그리고 그것이 나를 죽이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았소.]
그의 시선은 허공으로 향했다. 공허했다.
[그러나 당신은 잘 참았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서궁수를 죽일 수가 없었을 것이오. 당신에게 기회를 준 것은 나의 의도였으니까.]
쏴아아...
철류향의 신형은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떠나도록 하시오. 당신을 죽이지 않음은... 어린 시절의 정 때문일 것이오. 당신은 나에게 친절했고... 그런 당신을 사랑했소. 비극이 아니오? 원수의 자식을 사랑한 나와... 죽여야 할 자에게 사랑을 받은 당신... 모두가 비극이오. 핫하하....]
철류향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서궁수는 점차 그녀의 망막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 서궁세가 역시 무림을 떠날 것이오.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오. 우리의 한과 증오가 아직은 남았음이오. 돌아올 것이오. 십 년 후... 다시 돌아와... 더욱 무서운 고통을 당신들에게 줄 것이오.... 그리고 이 말을 당신 부친께 전하시오.]
서궁수의 신형은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철류향은 막연히 중얼거렸다.
[그랬던가? 그래서 그의 한이 그토록 컸던 것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이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가? 몸서리쳐진다. 너무나 무섭다. 이 고통을 그들은 십 년 후... 다시 이으려고 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무서운 고통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단 말이가? 그런가?]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크핫하하하....]
돌연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면전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신형을 심하게 비틀거리며 해변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한사람.
머리는 심하게 흐트러져 있고 두 눈은 광기에 젖어 있었으며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적용운... 그 역시 희생자이다.)
철류향은 탄식했다. 미쳐버린 듯한 산발의 인물은 바로 천마교주 적용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