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 소식에
눈에 덮인 젖가슴이 다시 한껏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식구가 늘 때마다
가슴이 파헤쳐지고 겨드랑이
솜털이 날리고 구름이 만장처럼 떠 있다
사람들이 떠나고 해 질 무렵이면
가슴이 부스럭거리기 시작한다
늘어진 배를 발로 찬다거나
꼬물꼬물 젖을 빨며 한 삶을 준비하는 봉분은 빵빵하다
하루의 노역이 힘에 부친 듯
주둥이를 땅속에 묻고
꿈쩍도 하지 않는 산
발아래 얼음장 밑 실개울 물은
말없이 흘러간다
갓 태어난 몸이 저 물길 따라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봉긋한 숨소리에 산은 모로 돌아눕는다 (부분)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2.10.28. -
이승에서의 삶은 죽어 봉분 속으로 수축되지만, 그 ‘죽음-삶’은 뒷산의 젖을 빨면서 재생하여 다른 삶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 삶의 조짐을 보여주는 사물이 뒷산의 “가슴이 파헤쳐지”면서 날리는 “겨드랑이 솜털”이다.
이 솜털은 ‘새로운 삶’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봉분 속 주검의 소망에 의해 날리게 되는 것일 터, 그 새로운 삶이란 “발아래 얼음장 밑 실개울”의 물길 따라 들어가는 “새 세상”에서의 삶이다.
생계에 질린 냄새들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모두 탄력 잃은 삶들에
걸려 있어 짠하다
문턱이 튕겨지며 눈썹을 흩트릴 때마다
떨리는 완력들
각도대로 자주 인내의 모양을 바꾼다
원을 그리다가 평행선으로 치솟고
곡선으로 힘주다가 파선으로 쏟아진다
뒤태들이 실수로 버려지지만
헐렁한 등을 입고 있어 푹신하다
내 등에도 뒤집힌 등들이
실수로 옮아온다
톡톡 터지는 뜨듯한 솜털들
각자의 행선지로 같은 노선을
기어가는 아침마다에
갓 태어난 내가 안겨 있다
한강을 건너면 오늘은 살아나고
문턱이 쏟아질 때마다 하루씩
어려진 나이를 먹는다 (부분)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2.10.27. -
생활인의 일상을 안은 ‘버스-삶’이 달리면서 튕겨지고 흔들리는 탑승객들의 뒷모습은 마치 “실수로 버려”진 것처럼 쓸쓸하다.
하지만 저 버려진 ‘뒤태들’을 보여주는 생활인들은 도리어 “헐렁한 등을 입고 있어 푹신”한데, 외로운 이들이야말로 따스함의 소중함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여 버스 속 이들 사이에 있는 ‘나’는 “갓 태어난” 아기가 되어 요람 속의 담요를 덮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쉽게 붙잡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너무 오래 흔들려왔으므로
놓아주고 싶은 것들,
해는 저물고 어김없이 시작하는 새해
잠 못 드는 연휴 지나
구 년째 의식이 없는 병실에 간다
궤도를 잃은 유성처럼 흔들리는
그 눈빛에 안부를 물어야 한다
촛불을 대신 끄고 손뼉 치며
생일을 축하해야 한다
늘 웃는 얼굴인 그가 크게 웃으면
모두가 환해지던 때가 있었다,
놔주기에는 아직 힘주어 따뜻한
손이 있다 (부분)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2.10.26. -
‘구 년’ 동안이나 의식불명인 분을 돌봐 와야 했던 고통은, 이제 저 분이 매달려 있는 생명의 줄을 놓아주고도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들 터이다. 하지만 그 줄을 놓지 못하는 것은, “놔주기에는 아직 힘주어 따뜻한/손”을 화자가 느끼기 때문이다.
아직 병자의 손은 온기를 잃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삶을 붙잡는 힘이 들어가 있다. 어떻게든 삶을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그 의지는 생명이 지닌 본질적인 힘일 것이다.
〈이성혁 / 문학평론가〉
Frozen Lake (from "The Human Stain", Arr. for Piano & Cello) · Rachel Portman · Raphaela Gro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