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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팔순잔치를 치른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는 여전히 바쁘다. 그는 오늘도 지(知)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야전(野戰)사령관이다. “선생님의 서재엔 어떤 신무기가 있나요?” 매번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에 감탄을 하면서 비결을 물었더니 “고양이 일곱 마리”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서재로 들어갔더니 3m가 넘는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가 무려 여섯 대나 보였다. “고양이는요?” “저게 바로 내 고양이들이지.”
컴퓨터를 사과(apple)라고 부르는 것은 보았어도 고양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본다. “컴퓨터로 하는 설계를 캐드(CAD)라고 하잖아. Computer Aided Design. 이건 내 사고(思考)를 도와주니 ‘Computer Aided Thinking’, 줄이면 캣(CAT)이지 뭐. 아무리 슈퍼 컴퓨터라고 해도 사람의 생각을 대신해 줄 수는 없어요. 사고의 주체는 인간이고 컴퓨터는 그 사고를 도와줄 뿐 대신해 줄 수는 없지. 그런데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고의 해결사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고양이가 여섯인데요?” “그래, 작은 고양이는 내 안방 침대 곁에 있지.” 그는 노트북을 작은 고양이라고 불렀다. 아마 잠자리에서도 노트북으로, 전자책으로, 메일도 보내고 메모도 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가 일곱 마리나 필요한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컴퓨터 전원을 차례로 켰다. “자, 이 컴퓨터에서는 인터넷을 열어놓고 TED 동영상을 들으며 중요한 내용은 마인드젯(mindjet)의 앱으로 정리를 합니다. 다른 컴퓨터에는 에버노트(evernote)의 DB를 검색하면서 중요 자료를 긁어 마인드젯의 메모 노트에 갖다 붙이고.”
이 교수는 수잔 블랙모어 교수의 최신 미메틱스 인터넷 강연이 크라우드 컴퓨팅으로 정리되어 한 편의 논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의 컴퓨터에는 마인드젯 말고도 ‘더브레인’, 국내 앱으로 ‘씽크와이즈’도 있었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 그리고 그 발톱으로 화면의 자료를 긁어 재빨리 DB를 구축해 가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컴퓨터를 고양이라고 부른 것이 실감이 났다.
이렇게 자료로 모은 파일은 아래아한글로 변환시켜 드롭박스로 보내 저장한다. 그러면 일곱 대 아니 수십 대의 다른 컴퓨터에서 바로 불러내 원고 쓰기가 가능해진다. 해외 여행을 하는 경우도 서재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새끼 고양이’들은 무릎에도 올라와 있다. 책상 맞은편 안락 의자 옆에는 아이패드, 갤럭시 노트, 킨들 같은 모바일 기기들이 나란히 꽂혀있었다.
그가 자주 찾는 사이트는 ‘와이어드’ 전자판(www.wired.com).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꼭 들어가 본다고 했다. “논문이나 책이 되기 이전에 지식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취재한 기사들이지. 이미 나온 책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같이 생각해가는 시대거든.”
디지로그나 생명자본주의와 같은 말은 인터넷을 검색해도 안 나오던데 그게 바로 이 같은 글로벌 지식의 싱크로나이즈에서 나온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의 배와 함께 침몰할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지금 뗏목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이렇게 지식의 최전선이 형성됐는데, 정작 지식인들이 후방에만 앉아 있으면 되겠어요?”
아톰에서 비트로 비트에서 다시 아톰으로 ‘디지로그’엔 벽이 없다
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중국, 집도 3D 프린터로 ‘출력’
글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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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종이가 아니라 입체 구조물이 출력되는 기기죠.”
“그걸로 집 지었다는 얘기 들어봤어?”
“네? 아뇨. 총을 만들어서 문제가 됐다는 뉴스는 봤습니다만.”
“이걸 좀 보라고. 중국 상하이의 한 기업이 3D 프린터로 집을 지었어. 200 평방m 짜리 집 10채를 ‘출력’ 하는 데 하루 밖에 안 걸렸대.”
이어령 교수가 건네준 PDF에는 집을 짓고 있는 커다란 3D 프린터와 그렇게 만들어진 집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사진). 재빨리 기사를 검색했다. 지난 4월 15일자로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상하이 잉촹(盈創)장식설계회사(대표 馬義和·46)가 길이 32m, 너비 10m, 높이 6.6m 짜리 대형 3D 프린터에서 뽑아낸 구조물을 조립, 하루 동안 집 10채를 지었다고 보도했다. 한 채 가격은 4800달러(약 497만원). 소후닷컴은 8월 25일자 기사에서 “24일 창장(張江)첨단공업지구에 들어선 이 주택에서 첫 거주 체험이 있었으며 다들 만족스러워했다”고 전했다.
“FT는 ‘집을 통째로 출력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구조물을 출력해 조립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3D 프린트 하우스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사족을 달았네요.”
“중요한 것은 3D 프린터가 갖고 있는 의미야. 지금까지는 아톰(atom·원자·물질의 최소 단위)에서 비트(bit·정보의 최소 단위)로 가면 다시 아톰으로 변환이 안 됐어요. 그런데 3D 프린터는 (컴퓨터상의) 비트를 다시 (물질인) 아톰으로 변환시킨단 말이지.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디지털이 다시 아날로그로 자유롭게 넘나들게 됐다는 게 3D 프린터가 갖고 있는 핵심 맥락이야. 내가 늘 말하는 ‘디지로그’가 바로 이거거든.”
“지난해 3월 오바마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앞으로 4년간 미국 학교 1000곳에 3D 프린터와 레이저 커터 같은 디지털 제작도구를 완비한 디지털 공작실을 설치하겠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지금 무료 급식이다, 9시 등교다 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한데 미국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3D 프린터 체험 교육을 시키려 하지. 신기술이 많은데 왜 하필 3D 프린터일까? 그렇지, 지식의 최전선이 바로 거기 있거든. 디지로그는 우리가 먼저 한 말인데 실전(實戰)은 미국과 중국에서 벌이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거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2차 산업인 제조업은 3차 산업인 정보·서비스업에 뒤진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통설이 깨졌다는 얘기야. 크리스 앤더슨은 ‘웹 2.0’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지(知)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인데, 2012년 『메이커스』라는 책에서 이렇게 단언했어. ‘이제 아이디어만 있으면 제조 지식이나 설비가 없어도 누구나 1인 메이커가 된다’고. 블로그를 통해 누구나 언론사 사장이 된 것처럼, 3D 프린터를 사용하면 누구나 공장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얘기야. 오바마의 전략은 결국 제조업 공동화 국가인 미국을 정보화 사회와 산업화 사회가 결합된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뜻이지.”
“정말 10년 뒤에는 문명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상상조차 쉽지 않네요.”
“미국에 이런 농담이 있대. 10년 전에는 아이들이 밥을 먹지 않으면 ‘얘들아, 지금 중국에는 네 또래 수십만 명이 굶고 있단다. 어서 먹어라’고 했는데, 지금은 공부하지 않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거지. ‘공부 안 하면 중국 아이들에게 밥줄 다 뺏길 거다’라고.”
작은 바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역시 이곳에 오면 신기하게도 그것은 대하처럼 흐르는 문명의 ‘몽둥이’로 바뀐다.
“이렇게 ‘잠자는 사자’가 ‘눈뜬 사자’로 변했는데 잘못하면 한국은 ‘잠자는 토끼’가 되는 거지. 지식의 최전선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앞으로 그 이야기를 하자구.”
대륙 국가인가 해양 국가인가 응답하라, 한국
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 중국의 ‘도광양회’를 읽는 하이퍼 텍스트
글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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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교수는 이 뻔한 말도 예사롭게 넘기지 않는다. 중국을 잠자는 사자라고 한 말은 나폴레옹의 정확한 워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자가 아니라 거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그냥 지도를 가리키며 한 말이라고도 했다. 당시엔 중국을 용이라고 부르는 일은 있어도 사자로 지칭한 예는 찾아볼 수 없고 라이온이라고 하면 보통 영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ADHD증세로 끝까지 읽은 책이 거의 없었다는 나폴레옹인데도 『손자병법』번역서만은 늘 옆에 두고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황화론처럼 그역시 중국의 잠재력을 평가하면서도 경계심을 품었던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잠자는 사자’가 2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냉전 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외교정책으로 내세운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이 밖에 퍼지지 않도록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름)와 연결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잠자는 사자’ 같은 중국 경계론을 피하기 위해 만든 이 말은 구체적으로 ‘不對抗’(맞서지 말라) ‘不樹敵’(적을 만들지 마라) ‘不?旗’(깃발을 올리지 말라) ‘不當頭’(선두에 서지 말라)의 4불(不)과 초월과 초탈을 권한 양초론을 들 수 있다.
“시 주석의 ‘잠에서 깬 사자론’은 그동안 지켜온 도광양회의 외교 원칙을 부정하는 선언 아니냐며 인터넷에서는 불이 붙었지. 그런데 우리 블로그만 잠잠해서 ‘한국은 잠자는 토끼인가’라고 물었던 거야.”
“그럼 도광양회란 결국 잠에서 깨어난 사자를 경계하지 않도록 하자는 위장전술이었다는 말인가요?”
이 교수는 웃었다. “도광양회는 그 말 뜻 자체가 애매해. 중국인도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려운 말이거든.”
그러더니 별안간 낚시 이야기를 꺼낸다. “옛날엔 낚시로 텍스트의 의미를 하나하나 낚았다면 요즘은 그물로 ‘의미의 고기떼’를 잡아 올리는 하이퍼 텍스트의 시대야.”
하이퍼 텍스트로 줄줄이 연결되어 올라오는 검색어를 보니 ‘도광양회’ ‘무소작위’ 같은 말이 꼬리를 문다. 거기엔 고철로 쓰겠다고 들여온 우크라이나의 폐선을 초음속기 탑재가 가능한 항공모함으로 건조한 랴오닝(遼寧)호라는 이름까지 나온다. 이는 근양에서 원양으로 중국의 해군 전략이 바뀐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당연히 랜드(land) 파워와 씨(sea) 파워의 대결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래서 EU 국가가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새로운 대륙세로 등장한 브릭스(BRICS)와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거지. 유라시아에 새 지정학론이 대두되는 이유가 이거거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하이퍼 텍스트들은 결국엔 우리 등잔 밑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은 대륙 국가인가 해양 국가인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던진다. 마이클 그린(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부소장)은 중앙일보 6월 11일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까지 진보냐 보수냐 하는 질문에만 익숙한 나는 뺨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얼얼하다.
“등잔 밑은 어두워. 잠자는 사자가 잠자는 토끼로 이어지기도 하는 하이퍼 텍스트의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지.” 이 교수가 덧붙였다. “이 검색어들을 봐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고기 떼의 은빛 비늘이 보이지 않나요?”
대륙과 해양 충돌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우리가 추구할 어젠다
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만리장성과 길
글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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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넘으려 하지 말고 눕혀. 만리장성을 눕히면 큰 길이 되잖아.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스케일의 토목술인데 중국인은 돌로 만리장성을 만들고 로마인들은 길을 만들었지. 성은 막고 길은 뚫는 것인데 사실은 같은 거란 말야. 만리장성의 벽을 눕히면 로마 가도가 되고 로마가도의 길을 세우면 만리장성이 되는 거지.”
그러고 보니 88올림픽 때 이 교수가 만든 캐치프레이스가 ‘벽을 넘어서’였다. 그리고 모든 올림픽 개회식 연출가들이 넓은 운동장을 하나 가득 메우려고 할 때, 그는 굴렁쇠 굴리는 6살짜리 아이 하나를 텅 빈 운동장에 등장시켜 정적과 공백의 퍼포먼스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베이징 올림픽은 어땠나. 13억의 인해 전술과 인류 문명의 4대 발명이라는 종이 화약 나침반 등을 들고나와 중국 파워의 위세를 세계에 자랑하려고 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중국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비롯해 자성의 소리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외교정책은 일시적인 전략이 아니라 100년을 두고 지켜야 할 중국의 문화요 정신이라는 해석이었다.
“내가 새천년 준비위원장 시절 한중일 학자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때 한국 참가자 한 분이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호칭한 글을 인용하다가 큰 소란이 벌어졌어. 왜 중국을 멸시하는 호칭을 썼는가. 사과하지 않으면 회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하는 거야. 그때 나는 좌중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이런 농담을 했어. ‘중국이라는 호칭도 따지고 보면 우습지않아요? 우리는 매일 기상예보 시간에 한중일 지도를 보는데 왼쪽에 중국 대륙, 오른쪽에 일본의 섬이 있고 그 가운데 한국의 반도가 있습니다. 기상도를 보면 한반도가 가운데 있으니 한국이 중국이 아닌가요?’라고(웃음). 중국 학자들도 피식 웃고 말더군. 대국사람답게.”
그러더니 이 교수는 옆에 있는 책 한 권을 펼쳐보였다. 거울에 비친 것 같이 똑같은 두 얼굴이 보였다. <그림>
“정 부장, 둘 중 어느 쪽 얼굴이 더 즐거워 보이지?”
“저는 아랫 쪽 같은데요.”
“그럼 정 부장은 오른손잡이야. 통계학적으로 오른손잡이는 그림의 왼쪽 눈을 주로 본대. 왼쪽 눈이 웃고 있으면 전체가 웃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지. 왼손잡이는 그 반대고. 좌우만 바뀐 같은 얼굴인데 사람에 따라 정반대로 보이는 것, 이걸 가지고 좌우가 싸우다니…. 우리는 지금까지 영국, 미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양 문명을 따라 경제발전도 하고 국위도 상승했어. 그런데 북한은 냉전 때 중국, 러시아의 대륙세력에 포함됐었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남쪽을 인공적인 섬나라로, 북한은 대륙의 일부로 만들어 놓았어. 지정학적으로 말야.”
지난 회 ‘응답하라, 한국은 대륙국가인가 해양국가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나왔다. 우리는 반도국가인 것이다. 대륙과 해양의 충돌을 초극해 양극을 조정할 수 있는 힘. 이것이 우리가 절실하게 추구해야 하는 어젠다가 돼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