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협(李民協)
자는 경달(景逹), 호는 내헌(萊軒),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영동 정(領同正) 이전(李磚)의 후손이고, 증(贈) 참의 이광영(李光英)의 아들이다.
비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종 을축년(1565, 명종20)에 공이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선조(先祖)의 훌륭한 공덕을 품어 재능과 기예가 출중하였고, 학식을 쌓고 문장을 갈고닦았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남계정사(南溪精舍)에서 도(道)를 강학할 때 공이 문하에 들어가 배우기를 청하였다. 경전의 뜻을 강론할 때는 터럭 하나라도 분석하였으며 몸을 단속하는 행실은 정밀하게 연구하여 실천하였으니, 선생이 매우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당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건재(健齋) 박수일(朴遂一), 지주헌(砥枉軒) 이규문(李奎文), 인재(訒齋) 최현(崔晛), 풍뢰당(風雷堂) 박성일(朴成一),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 수암(守菴) 정사진(鄭四震), 와룡당(卧龍堂) 박진경(朴晉慶) 등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는데, 시를 지어 주고받아 술을 마시면서 읽은 시첩(詩帖)이 있다.
임진년(1592, 선조25) 겨우 약관의 나이에 분개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의병을 불러 모으고 군수품을 모집하여 도와 이룬 공이 많았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염습(斂襲)하고 빈소를 차리는 일에 필요한 물품과 장사지내는 예법에 대해 평소 스승을 모시고 수업하는 자리에서 강론하여 밝혔으니, 이척(易戚)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여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몸을 해칠 정도로 몹시 슬퍼하자, 이웃 마을 사람들이 추대하고 탄복하였다.
집안에는 형제로서 자신을 알아주는 즐거움이 있었으니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과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이 제종형제이며, 고을에는 마음을 알아주고 강마(講磨)한 자가 있었으니 남계(南溪) 이길(李洁)과 서담(西潭) 홍위(洪瑋)가 선배들이다. ‘농사지으면서 노년을 마치리라[終老鋤萊]’라고 편액하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병진년(1616, 광해군8) 7월 17일 질병으로 침소에서 생을 마쳤으니, 향년 52세이다. 황산(荒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공의 행적과 덕성은 사우(師友)의 연원과 오랜 친구와의 강론에 달려 있었으니 여기에서 증명할 수 있다. 정밀하고 심오한 조예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여 여러 번 떨어졌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재주와 덕을 감추고 근심하지 않았으니, 가학(家學)을 잇고 자손이 번창한 것은 진실로 하늘에서 복과 자손을 내린 것이다.
인사(人事)가 예전과 달라 공의 자손이 아름다운 행적이 사라져 묻힐까 두려워 비석을 세워 드러내고자 하여 나에게 명문(銘文)을 부탁하였다. 다만 글재주가 없는 이 사람이 어찌 감히 높은 덕을 칭송하겠는가마는, 내 이름을 적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삼가 명을 쓰니, 다음과 같다.
피눈물로 지낸 삼년상 온갖 행실의 근원이요 泣血三年源百行
높은 재주로도 펼치지 못한 것은 운명이로다 才高不展是有命
이영세(李榮世)가 지었다.
이척(易戚)의 예 : 형식으로나 내용으로 모두 훌륭하게 상례(喪禮)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논어》 〈팔일(八佾)〉에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喪與其易也, 寧戚.]”라고 하였다.
이길(李洁) : 1547~1589. 자는 경연(景淵),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1694년(숙종20) 신원되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홍위(洪瑋) : 1559~1624. 자는 위부(偉夫), 호는 서담(西潭),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과 교유하였다. 65세 때인 1623년(인조1) 군위(軍威)로 낙향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하자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사우(師友)의 연원 : 학문에 도움을 받은 스승과 벗의 학통(學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