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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 조반니 벨리니 작
<은갈치 눈동자와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
당신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타볼산 위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수석 제자단격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타볼산 정상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깊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는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을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모 중에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이 특별한 광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잠깐 동안이나마 하느님의 나라가 제자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깃들어있는 진정한 신성(神性)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잠깐 동안입니다. 그들은 아주 ‘살짝’ 하느님의 나라를 맛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와 광채 역시 한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치러내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거쳐야 항구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중심 대화는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셔야 할 일, 고통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대화였습니다. 지금의 이 변모는 시편의 서곡과도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 부활과 승천 이후 완전한 변모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잠깐 동안 맛본 황홀한 하느님 나라에 완전 취해버린 베드로는 지금 이순간의 찬란한 모습을 계속보고 싶은 인간적 욕구로 인해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간절한 염원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베드로를 휘감은 것은 짙은 구름이었습니다. 영속적인 승리와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짙은 구름 속을 헤쳐 나가는 일이 아직 남아있음을 암시하는 구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아직 보류된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지는 현실은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구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기꺼이 막막한 현실을 견디는 일이며 여러 가지 부당한 현실이나 고통과 십자가 앞에 침묵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활짝 갠 하늘이 열릴 그날이 올 때 까지 참고 또 참을 일입니다.
우리네 한평생 빛과 어두움이 언제나 교차합니다. 우리네 인생 하느님 나라의 빛나는 광채와 인간 세상의 비루함이 공존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하느님 나라의 찬란한 영광과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할 고통이 수시로 반복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 사이를 매일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도래할 빛나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침묵의 행군을 계속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셔서 간절히 기도하시던 가운데 얼굴이 변하셨습니다. 진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열렬히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도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의 대가였던 성인들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충만한 기쁨으로 빛납니다. 그들의 눈빛은 총기와 생명력으로 반짝거립니다. 마치 갓 낚아 올린 싱싱한 은갈치 눈동자처럼 신선합니다.
그러나 기도나 영적생활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푹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마치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 같습니다. 초췌하고 무기력합니다.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얼굴입니다.
자주 우리 얼굴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진지하고도 충실한 기도생활을 통해 반짝 반짝 빛나는 얼굴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얼굴, 대체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울적한 얼굴인가, 수시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타볼산의 예수님처럼 열렬하고도 진지한 기도를 통해 얼굴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인생관이 변화되는 은총을 맛보는 이번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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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24 사순 제2주일 창세15,5-12.17-18 필리3,17-4,1 루카9,28ㄴ-36
참 행복의 길
하느님 없이 참 행복은 없습니다.
얼마 전 이색적인 기사가 신문의 두면을 완전히 채우고 있었습니다.
“당신, 행복하신가요?” 제하의
‘긍정 말하고 실천하는 사이 놀라운 변화…행복을 배워보실래요.’에 이어
‘만족스러운 삶은 곧 관계가 풍부한 삶’
‘행복 원천은 사람이다.’ 라는 소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구절입니다.
오늘 날 행복이 절대적 화두로 부각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도 배워야 합니다.
몰라서 불행이요 알면 행복입니다.
그러나 위 내용이 전부는 아닙니다.
반쪽의 불완전한 행복입니다.
저는 ‘행복 원천은 사람이다’란 말에 즉시 이의를 제기하며
정답을 내놨습니다.
‘행복 원천은 하느님이다’로 말입니다.
혹자는 ‘사람이 희망이다’라 하는데
역시 저는 ‘하느님이 희망이다.’로 정정합니다.
“하느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하느님,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당신뿐이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
제가 좋아하는 시편의 고백들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일 때 비로소 사람이 행복이 될 수 있고,
하느님이 희망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만 행복을 둔다는 것은, 희망을 둔다는 것은 너무 위태합니다.
분명히 할 것은 행복 원천은 하느님이요
하느님만이 궁극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에 저는 참 행복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새삼 하느님이 행복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사순 제2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하늘을 쳐다보아라.”
착한 목자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구원의 출구입니다.
시종여일,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똑같은 주님은 또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오늘 창세기를 보십시오.
주어(主語)는 하느님이고 목적어(目的語)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느님의 인도 따른 아브라함의 삶입니다.
이걸 깨닫는 게 믿음이요 지혜요 행복입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도 여기까지 하느님이 인도해주셨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연히 여기까지 살아온 우리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가 눈물 나도록 고맙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손수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아라.’는 말에 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하늘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잊고 땅만 보고 살기에 영적시야도 좁아져
여기서 시작된 인간의 불행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을, 하느님의 무한한 축복을,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영원한 꿈과 비전을, 희망을 상징합니다.
예전 써놓은 자작 애송시입니다.
-땅의 행복은/밤마다 누워/하늘을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 -
땅은 ‘사람’으로, 하늘은 ‘하느님’으로,
별들은 ‘은총’으로, 꽃들은 ‘사랑’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하느님 없이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하여 하늘을 잊지 말고 살라고 언제 어디서나 눈 들면 하늘입니다.
답답할 때
드넓은 ‘하늘 창’을 바라보며 마음을 환기해야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내 마음의 하늘에 담아 두어,
희망의 별들, 사랑의 별들, 믿음의 별들 총총히 빛날 때 저절로 행복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평생 살면서 이 말씀을 화두로 간직하고
어둡고 답답한 절망스런 현실을 대할 때 마다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며 믿음을 새롭게 했을 것입니다.
둘째,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라.”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영예롭게도 하늘의 시민입니다.
비록 땅에서 살지만 우리는 하늘 시민으로,
하늘이신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늘의 시민으로, 시민답게 살아갈 때 행복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민이란 존엄한 품위를 잊어버리고
육적 욕망에 따라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아갈 때 자초하는 불행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은 그대로 길 잃어 방황하는 오늘 날 사람들을 향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이래서 사순절의 절제와 극기의 수행입니다.
수행생활로 육적욕망이 정화되어야
성령의 활동도 활발해지면서 영적갈망도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저절로 하늘의 시민이 아닙니다.
부단히 영적체험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하늘 시민으로서의 신원의식도 뚜렷해집니다.
오늘 1독서의 아브라함, 2독서의 바오로, 복음의 예수님과 세 제자들 모두가
하늘 시민들의 모범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들은 예수님 지도하에 산상피정을 통해
주님의 변모를 체험하면서
하늘 시민으로서의 신원의식 또한 확고해졌을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그대로 하늘의 시민들인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게 진정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되고 희망과 용기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시민이 되어 살 때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매일 끊임없이 계속되는 미사와 성무일도를 통한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내외적으로 변모시켜 주면서
하늘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확고히 해 줍니다.
셋째,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산상피정 중 세 제자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말씀입니다.
감미로운 변모체험도 잠시뿐입니다.
대부분의 단조롭고 삭막하기까지 한 광야여정입니다.
광야여정 중에 만나를 먹고 살았던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역시 말씀의 만나를 먹고 광야인생을 살아갑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나를 비추는 빛입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된 인간 존재입니다.
사람은 빵만이 아니라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감미로운 주님 변모신비체험에 집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집착해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주님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주님 말씀이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끕니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합니다.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성모님 역시 신비체험을 한 경우는
침묵 중에 마음 깊이 담아 두고 곰곰이 새겼습니다.
묵묵히 침묵 중에 말씀을 받아드려
그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자 믿음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 모범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 말씀을 군말 없이 믿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 합니다.
믿음 역시 나무와 같습니다.
하루아침이 아닌 평생 커가는 나무처럼,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평생 커가는 믿음의 나무들 같은 우리의 삶입니다.
과연 우리 믿음의 나무들을 잘 커가고 있는지요?
사순 제3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자주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별들을 헤아리며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십시오.
*하늘의 시민으로, 시민답게 살아가십시오.
자주 교회전례나 피정 또는 온갖 수행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하늘 시민으로서의 신원의식을 확고히 하길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생명과 빛인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구원의 출구입니다.
바로 이 셋이 참 행복의 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케 하시고,
당신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 역시 당신 몸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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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다른 곳에 비해 기름 값이 저렴한 주유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운전수가 스스로 주유를 하는 셀프주유소로, 겨우 리터당 1~20원 저렴한 것이 아니라 웬만한 주유소보다 1~200원까지 저렴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합니다. 그러다보니 근처의 주유소들은 얼마 못가 기름 값을 내리기 시작하더니만, 요즘에는 문제의(?) 셀프주유소보다 딱 10원 비쌉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어느 주유소를 이용할까요? 10원이라도 저렴한 셀프주유소를 이용할까요? 아니면 10원 더 내고 주유원이 기름을 넣어주는 편한 곳을 이용할까요?
저는 다른 주유소에서 가격 인하 정책을 써서 이 셀프주유소가 곧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주유소보다 더 잘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유하는 것을 그렇게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저렴한 셀프주유소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스스로 하는 것과 남이 대신 해주는 것. 과연 어떤 것이 더 행복할까요? 사실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합니다.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군 생활을 들 수가 있지요. 대한민국 남자라면 의무적으로 군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이 군대라고 하지요. 그래서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악몽이 다시 군대에 가는 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이 선택한 길은 어려워 보여도 행복해 합니다. 등산을 생각해 보세요.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요.
‘어차피 다시 내려올 건데 왜 땀 흘려 올라가는 거야? 다리도 아플 텐데....’
바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안에서도 당연히 스스로 선택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세상의 유혹은 편하고 쉬운 일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가 시작한지도 벌써 2주가 되었습니다. 첫 주에는 우리들의 유혹에 대해서 그리고 이번 주에는 쉽고 편한 것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산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특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그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당시 어렵고 힘들게 전교활동 하던 것을 제쳐 두고 이곳에 안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대표로 말하지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유혹하고 있는 편하고 쉬운 길만을 선택하려는 어리석음을 이제 버려야 할 것입니다.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주님의 뜻이 담겨 있기에 우리 스스로 기쁘게 선택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길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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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2013. 2. 24.)(루카 9,28ㄴ-36)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루카 9,22)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뒤에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루카 9,28-36).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과 하늘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만들어 준
일종의 시청각 교육이었습니다.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미리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체험을 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는가?(마르 14,50)
제자들이 달아났다고 표현되어 있는 일에 대해 제자들을 위해서 변명을 한다면,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요한 18,8)."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제자들이 달아난 것으로 보여도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달아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고,
또 그들이 달아난 뒤에 뿔뿔이 흩어진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은 일단 달아났다가 다시 모였고, 함께 있었습니다(루카 24장).
일시적으로 달아나고 흩어진 모습만 보고,
그 뒤에 바로 모여서 함께 있었던 모습을 안 본다면,
그것은 몹시 불공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으면서도 달아난 것이 아니라,
그런 체험을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서워서 달아났지만 금방 다시 모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제자들은 수난 예고 말씀을 들었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모습도 보았지만,
실제로 수난이 닥쳤을 때의 상황은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날씨가 추워질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는 것과
실제로 추위를 겪게 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또는 실제온도와 체감온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일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과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본 일들은 모두
그 뒤에 사도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할 때까지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준 힘과 용기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종착역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서 경유지를 거쳐 가는 일과 같고,
또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면 헤맬 수밖에 없는데,
제자들은 헤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만 강조하다가 그 뒤에 있는 부활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숭배하는 이상한(변태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신앙인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죽으셨지만 영광스럽게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패배자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의 뒤를 따릅니다.
신앙인의 영원한 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지상 생애의 힘든 나그네 길을 감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부활하기 위해서 꼭 죽어야 하는가?"
(또는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 꼭, 항상, 언제나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 하는가?")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죽으셨으니까 부활하신 것인데,
예수님처럼 부활하려면 예수님처럼 죽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재림 때 자기가 살아 있기를 희망했고, 믿었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2)."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1테살 4,15)"
종말이 닥칠 때, 그때까지 안 죽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로 들어가서 영생을 얻으려면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최종 목적지인 영광스러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려면
가는 도중에 고난의 가시밭길 같은 십자가의 길을 만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 가야 한다."
('만난다.'가 아니라 '만나더라도'입니다.
중간에 가시밭길을 안 만날 수도 있고, 그러면 다행이고,
혹시 만난다면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고 잘 참고 견뎌내야 하고...)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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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
복음: 루카 9, 28ㄴ-36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조반니 벨리니 작
보통 사순절이 시작하면 저절로 힘든 일이 생겨 노력하지 않아도 고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도 저는 장염으로 고생하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조차 받아들이기를 힘겨워하고 있을 때, 저보다 더 큰 고통으로 시작하시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주일 미사를 끝내고 신자분들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먼저 성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손을 다치셨는지 깁스를 하시고 안수를 청하며 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저는 손을 어쩌다 다치셨냐고 일상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기계에 두 손가락이 으스러져서 절단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놀라서 안수도, 말도 할 수 없이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이 오히려 웃음을 지어보이시며, “아니에요, 전 하느님께 감사드려요.”라고 놀란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기계에서 손을 빼내고 손가락이 두 개만 잘린 것을 바라보며 바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어요. 한 손을 다 잃을 수도 있었잖아요.”
저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만약 나였다면...?’이란 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 신자분께 강론에 당신 이야기를 써도 되느냐고 여쭈어보고,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 오시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성경도 꾸준히 읽었는데 얼마 전까지 주춤 하시다가 손이 다치기 전에 굉장히 많이 읽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을 ‘살아있는 표징’이라고 합니다. 표징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가시적 증거를 말하는데, 그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그 힘이 있는 것입니다.
고정원씨의 예를 들어봅니다. 그분은 자신의 가족의 생명을 무참히 앗아간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딸들까지도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냥 그러는 척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영철씨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으며 편지를 보내고
사형폐지 운동 등을 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그분의 진심을 믿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시고 계시기에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면서, ‘아! 무언가 있구나!’라고 보이지 않는 것을 그분을 통해서 조금씩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어딘지 모를 존재에게서 오는 나에게는 없는
‘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함께 산에 오른 세 사도들에게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그렇게 희게 빛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표징은 앞으로 보여주실 표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표징 중 가장 큰 표징은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신들은 대부분 자비와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떤 신이 그 자비와 사랑의 힘을 보여주었습니까? 하느님이 죽으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람의 수준으로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의 힘’,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오늘 타볼산에서 변모한 것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의자에 편히 앉아있거나 칼을 들고 있거나 저울을 들고 있는 등의 인간의 상상으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분이셨다면 그것은 저에게 어떠한 표징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서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고 사탄의 세력 속에서 3일 밤낮을 갇혀있어야 했다는 것, 이것이 사람의 수준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 하느님 사랑의 표징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즉 표징이 되시기 위해 ‘힘’을 얻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 오르십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모세는 구약의 핵심은 율법서인 모세오경을,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예언서에서 당신에 대해 나와 있는 것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셨을 때 그들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듯이,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 전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을 통해 당신이 앞으로 당하게 될 ‘Exodos’, 즉 ‘출애굽’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1절을 직역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즉 ’탈출’ 관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실 때,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도 산다.”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이 여기서는 모세와 엘리야로 대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직전에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강화시키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표징은 ‘힘’이 있어야합니다. 표징에 ‘힘’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곰과 같이 겨울을 나야 하는 동물들은 몸속에 6개월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양분을 축적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겨울과 같은 어려운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있습니다. 평상시 영양분을 잘 비축해 두었던 사람들은 이 겨울을 잘 견뎌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겨울을 제대로 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기도 또한 꼭 절실해서 하기 보다는 앞으로 올 겨울에 대비하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 기도합니다. ‘오늘’이란 뜻은 ‘매일’ 양식을 달라는 것이고, 우리에게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가 미사 때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에서 보듯이, ‘성경말씀과 성체’로 우리 앞에 현존하십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혹은 유령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유령은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어버렸으니 육체를 살게 하기 위해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먹어 보이시며 당신은
육체까지도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양식으로 끊임없이 먹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거나 공부하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이미 양식을 먹어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즉 죽은 영혼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어서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을 알듯이, 우리 영혼을 위해서라도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어쩌면 영적 양식을 필요로 하지 않게 죽어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힘이 없어서 어떠한 표징도 되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도 기도의 힘을 잘 느낍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성체조배를 하고 하는 것과 하지 않고 하는 것과는 비록 내용이 같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를 냅니다. 기도하지 않고 시작한 하루는 말도 실수하고 판단도 잘못 할 때가 많지만 충분히 기도하고 시작한 하루는 영적인 힘을 하루 종일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저는 영혼이 배고파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말씀도 읽고 묵상하고 성체도 영하고 다른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제 영혼이 살아있고 힘이 있고 표징이 되고 있다는 증거임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살아있기에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은 예수님의 가장 큰 표징을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손가락이 잘려서 감사기도를 해도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표징이 되어가면서 내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행복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힘이 없으면 배고파서 살아갈 수 없는 살아있는 표징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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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을 지어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지난 주일에 유혹도 은총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유혹을 많이 받으셨죠? 사순절을 맞아 희생 봉사, 극기 절제의 삶을 살려고 하니까 왜 그렇게 없던 일이 생기는지…그래도 나름대로 절제된 삶을 통해서 기쁨을 간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 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신명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 (루카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등산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피정을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한마디로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바뀐 것은 기도하시는 가운데 바뀌었습니다. 나의 얼굴도 기도하는 가운데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고 하셨습니다(노래 한번 할까요?)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흰옷을 입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의 상징이고 예수님으로 온 몸을 무장한다는 의미(로마13,14)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의 옥좌에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 는 질문과 함께 그 대답이 나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묵시7,13-17).
결국 흰옷은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통해 이미 흰옷을 입은 사람이니 만큼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빛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 줌으로써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위로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명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오직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야훼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오니”)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27,4).하며 자신의 갈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바람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루카9,35).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손에 펴들고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 삼아 주님의 초막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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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며 이러한 물음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을 갖추셨다면 더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을까?’, ‘산에서 변모하실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변모하셨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그 순간 회개하지 않았을까?’
과연 그랬을까요? 어쩌면 모두들 믿기는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복음에 등장한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았고,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신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힘을 불어넣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황홀한 체험을 안겨 주셨다고 해도 신앙을 한층 굳건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멋진 예수님, 절대적 권능의 예수님,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만 보고 사람들이 믿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통해 삶의 고통과 역경을 이겨 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와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는 고통 안에서 당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부활하신 뒤의 모습은 철저한 고통과 죽음을 전제합니다. 고통과 죽음이 배제된 영광스러운 모습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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