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탁구가 프로야구, 농구, 프로축구 등과 더불어서 범국민적인 최고 인기스포츠이던 시기가 있었다.
86년에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88올림픽의 전초전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한국 남자대표팀은 유남규, 안재형, 김완, 김기택 등의 기라성같은 스타들을 앞세워 결승에서 중국을 5-4로 이기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게임스코어 4-4에서 마지막 단식 주자로 나섰다가 마지막 세트를 21-18로 승리하고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던 안재형 선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탁구는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가 되었다. 18명의 인원과 각종 장비들이 필요한 야구와 달리 탁구는 동네 탁구장만 가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기에 서민들은 주말이나 저녁만 되면 탁구장을 찾았다. 전국 각지의 탁구장들은 탁구 레슨을 받으려는 어린이들과 아줌마, 아저씨들로 인해 발디딜 틈이 없었다. 친구와 천원짜리 한장을 들고 탁구를 치러 탁구장을 찾으면 1-2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30분을 칠수 있었던 때가 그때였다. 겨울에 장충체육관에서 '탁구최강전' 이 열리면 매 경기마다 입장표가 매진될 정도였다. 내가 탁구를 취미로 처음 치기 시작한 때도 이때였다.
2년 뒤인 88년, 역사적인 88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다. 바로 이때가 탁구가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올림픽이다. '환상의 복식조' 로 불리우던 여자복식의 '현정화-양영자' 조는 세계최강이던 중국의 '자오즈민-첸진' 조를 격파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남자 단식의 유남규와 김기택은 나란히 결승에 진출해서 한국 선수들끼리 결승전 경기를 벌였고, 유남규가 초대 올림픽 탁구 챔피온에 등극했다.
탁구가 조국에 두개의 금메달을 선사하자 국민들은 탁구에 더욱 열광했다. 세계선수권 대회나 각종 오픈 대회가 열릴때마다 국민들은 새벽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위성생중계를 시청했고 탁구장이 없는 동네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 중에는 방과후에 동네 탁구장에서 레슨을 받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90년에 중국 북경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 탁구는 또 한번 우승의 쾌거를 달성했다. 준결승에서 북한이 중국을 이겨주는 바람에 결승전에서 남북대결을 벌이게 되었고, 유남규가 부상으로 인한 연습부족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당시 '떠오르는 신예' 이던 김택수를 앞세워서 북한을 5-4으로 격파한다. 이날 김택수는 한국팀이 거둔 5승 중에 혼자서 3승을 올리며 한국이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 경기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고 통쾌한 90년 가을의 어느 늦은 밤이었다. 이때부터 김택수가 유남규를 제치고 한국 탁구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물결치는 감동 속에서 90년 12월, 나는 당시 국민은행에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외국 발령으로 인해서 가족들과 함께 싱가포르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외국인 학교(International School SIngapore)로 전학 수속을 마치고 91년 2월부터 학교에 다니게 된 나는 첫날부터 에어콘 빵빵하게 나오는 탁구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스웨덴, 독일, 대만, 일본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탁구클럽을 만들었고 초대 주장이 되었다. 우리 ISS(International School Singapore)의 탁구 클럽팀은 United World Colledge(다른 외국인학교), American School(미국인학교), French School(프랑스학교) 등과 자주 친선경기를 했으며 승리는 항상 우리 ISS의 것이었다. 나는 스웨덴, 독일, 대만, 일본 등 다른 국적을 가진 친구들과 탁구라는 공통분모를 통해서 매우 친해질 수 있었다. 그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한다.
91년 4월에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는 사상 최초로 남북단일팀이 구성되었다. 여기서 여자팀은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도저히 불가능하다던 기적을 창출한다. 남자단식에서는 김택수가 4강까지 진출해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렇게 탁구는 국민들의 머릿 속에 또 한번 강한 인상을 남긴다.
한국 탁구가 쇠락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기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부터였다. 국제대회에서의 거듭되는 승전보와 범국민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탁구팀을 창단하는데 인색했다. 이로 인해서 세계 최강이라는 한국이 탁구 프로화는 꿈도 못꾸고 실업팀 조차 4개팀밖에 보유하지 못하는 기현상이 고착되었다. 이러한 현실에 선수들도 지쳤는지, 금메달이 확실하다던 현정화-홍차옥 조는 중국팀에게 4강에서 패하면서 동메달에 머무르고 만다. 남자 단식의 김택수 역시 4강에서 스웨덴의 발트너에게 패하면서 동메달에 그쳤다.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행진이 주춤하자 국민들의 탁구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운동에 전념하던 대표 선수들에게 국민들의 무관심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그 이후 열린 각종 세계선수권 대회와 올림픽 등에서 한국 탁구는 단 하나의 은메달도 획득하지 못하고 점점 인기를 잃어 갔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탁구는 완전히 비인기종목으로 전락하고 만다.
세월은 유수처럼 흐르고.. 올림픽의 최초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지금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탁구신동 소리를 듣던 유승민 선수가 몇시간 전에 끝난 개인단식 4강전에서 스웨덴의 영웅 발트너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한국 선수가 올림픽 탁구 결승에 진출한 것도 88년 올림픽 이후 딱 16년만이다. 이것만으로도 유승민은 이미 자기 몫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쯤 되니 나는 욕심이 생긴다. 결승에서 Wang Hao를 누르고 조국에 금메달을 선사할 수는 없을까? 유승민이 금메달을 가져오게 되면 탁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더 이상 누구도 탁구를 비인기종목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을 것이며 사라졌던 탁구장들이 동네마다 한두개씩 다시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탁구장으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내일 저녁 8시에 열리는 유승민의 결승전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이 한판 승부의 유승민의 일생이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십수년의 세월을 '비인기종목' 이라는 설움 하에 지내온 국내 탁구선수들과 꿈나무들.. 그리고 나같은 골수 탁구동호인들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경기이다. 더군다나 유승민은 내 싸이 일촌이 아닌가?
지난 넉달간 나는 밤에 자기 전에 그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거기에 추가해서.. 내일 결전을 벌이게 될 유승민 선수를 위해서도 기도를 할 것이다.
-- 2004년 8월 22일, 태공망
P.S.) 유승민 선수!! 지금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유승민 선수가 아테네로 가기 전에 내가 한 말이 있었죠? "금메달에 대한 중압감을 가지지 말고 올림픽이라는 축제를 즐긴다는 기분으로 잘 다녀오시라" 구요. 그런데 이렇게 결승에 올라가시고 나니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꼭 이기십시오. 88년 이후 쇠락의 길만을 걸어온 한국 탁구를 둘러싸고 있던 '패배' 라는 저주스런 운명의 사슬을 깨십시오!! 그래서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다시 한번 한국 탁구가 중흥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염원과 눈물이 유승민 선수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파이팅~~!!
첫댓글 탁구에서 꼭 금메달이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탁구 아자아자 화이팅!
금메달 추가~!
축구의 한을 탁구에서라고...풀기를..ㅠㅠ....그리고 체조 미국한테서 금메달 돌려 받읍시다..우오오오..
오늘유승민선수가드디어금메달을따냈습니다.
체조오심문제는지금미국언론들이계속적의로문제제기를하고있구요우리나라도온국민의힘을모아서금메달을반드시되찾기위한노력을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