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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15]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 26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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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 : 두려워하지 마라 <독서 : 창세 49,29-31.33;50,15-26ㄱ / 복음 : 마태 10,24-33>
아주 오래전에 천호성지에서 피정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순교자 묘지가 있다.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묘지가 거기에 있다. 한때 고을의 원員으로 있었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늘은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그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며 당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체험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라고 말한 바오로 사도와 같은 강한 믿음을 지녔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거듭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시며 용기를 준다. 복음 전파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체험에 대한 증언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느님과 복음에 대한 증언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과 박해에 직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이다. 비복음적 가치들과 맞서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하는 도전이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때문에 겪게 될 세상의 비난이나 박해나 어려움에 대해선 두려워 말고 오직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논어에서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분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시는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말씀자료 : 김권일 신부] |
[가해]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17-07-15) I 묵상기도방 |
시작기도 : ▷
우리에게 당신을 심어두신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 당신의 자리도
함께 만들어 두셨음을 저는 이제야 압니다.
당신이 제 마음속 새겨두신 공허와 허무가
당신의 자리인지 저는 오래도록 몰랐습니다.
그래서 온갖 다른 것들로 그 자리를 채우려 했고
때로는 채워졌다고 착각도 했습니다.
오로지 그 자리가 당신만이 채울 수 있음을
저는 이제야 압니다.
주님 당신을 바랍니다.
당신의 자리를 당신께만 내어드리겠습니다. |
오늘의 기도지향 :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진리이신 주님!
이 땅의 모든 학생들이 학문의 기쁨을 알게 해주시고 진리를 탐구하며 느끼는 경이로움에 눈뜨게 하소서.
배움을 통해 삶을 알아가고, 삶을 통해 배우면서 배우는 일을 기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당신의 지혜를 나누어 주소서.
오늘의 복음 : [가해]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 26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영적독서 : 북극곰! 어디로 가야 하나?
지구온난화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북극곰이다. 북극 여름이 아무리 더워야 섭씨 5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데 2007년부터 무려 20도가 훌쩍 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섭씨 20도면 반팔을 입고 다녀도 약간 더울 날씨인데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후 대변화가 북극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말에 '봄눈 녹듯이 녹는다!' 는 표현이 있는데 북극 빙하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녹아내린다. 북극곰은 영하 40도의 추의와 시속 120킬로미터의 강풍을 견디며 살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북극 사냥꾼이다. 어떤 짐승도 범접할 수 없는 지상 최강 사냥꾼이 북극곰이지만 지구 온난화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1979년에 비해 80퍼센트나 되는 빙하가 사라진 북극 생태계는 먹이사슬이 끊어지면서 여러 생물종이 사라지고 있다. 특히 북극 생태계 먹이사슬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북극곰에게 빙하가 사라지는 일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공포와 같다. 생물체는 먹이가 없으면 죽는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도 먹을거리가 없으면, 온 북극을 헤집고 다니는 북극곰처럼 식량을 찾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이다.......<황창연, '북극곰! 어디로 가야 하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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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14주간 토요일(2017-07-15) I 복음묵상방 |
야곱은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에집트 땅에 묻힌다. 요셉은 형제들을 거듭 용서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죽음에서 구하시려고 자신에게 시련을 겪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도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 요셉은 죽기 전에 집안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충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인다. 히브리서 저자는 요셉의 이러한 믿음을 되새긴다. "요셉은 죽을 때 믿음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에집트를 빠져 나갈 일을 말하였습니다.(히브 11,22)(제1독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박해받을 때를 대비하여 당신의 제자들을 격려하신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판날에, 제자들이 이 지상에서 당신께 보였던 것과 같은 태도를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제자들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될 때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앞에서 제자들을 위해 증언해 주실 것이다(복음). |
<복음묵상-1> : † 두려워하지 말라!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다보면 반대가 분명 있기 마련인데 그 반대를 주님이신 당신만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 어차피 드러나기 때문이고 그때 반대를 받을 각오를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언젠가 드러날 것이기에 아예 매 맞을 각오로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로 하면 그것을 숨기려고 할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죽음을 각오하면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없기 때문인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당신도 죽으셨으니 우리도 죽을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통치자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우리 육신에 대한 권한밖에 없는데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 온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신이 죽는 것보다 영혼이 죽는 것을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자존심과 기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영혼을 파는 것이 얼마나 비굴하고 비참한 것인지, 이것은 이 세상에서 한 자리 얻기 위해 자기 지조를 버리고 진리마저 저버리는 것, 그 이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시는 비유가 참새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참새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데 우리 인간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방학이 되면 서울에 사는 사촌이 저희 집에 와서 지내다가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 먹을 거 없던 시절 저보다 사촌들에게 먹을 것을 더 많이 주시고 같이 잘못하였는데도 저만 야단치시는 어머니를 보고 제 어린 소견에 어머니가 저보다 사촌들을 더 사랑한다고 서운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해 사는데도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가난하고 안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더라도 하느님이 우리를 그들보다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환난을 받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더 예뻐하고 사랑하실 것 틀림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틀림없는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일지 그것이 문제일 뿐이겠지요..........◆
[말씀자료 : 김찬선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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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2> : † 하느님을 왜 두려워 하는가?
서유럽 가톨릭 국가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0% 이상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응답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대체로 양심의 가책이나 사후심판과 관련되어 있었다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두려움과는 어떻게 연관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두려워해야 할 분인가? 사랑해야 할 분인가?라는 주제로 먼저 묵상해야겠습니다. 결론은 하느님은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그 이유로는 우리가 불완전하고 죄스러운 인간일 때는 하느님이 항상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이후로 부터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두려워 하면서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 자격이 있습니다.
1.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두려워함
요즘 신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갑자기 무슨 이런 말을??? 이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마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이 암(癌) 같은 질병, 직장에서의 부도나 퇴출, 가정에서의 불화나 이혼, 대인관계에서의 갈등이나 고독 등으로 말하지, 하느님과의 소원한 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물론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자아 의지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첫사람 아담에게도 자아의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 자유의지를 악으로 택하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세상 삶 속에서 허덕이는 고통의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자아의지, 자의 선택의 권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지, 하느님을 무시한, 도외시한 선택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병장수를 최대의 가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암이라는 진단이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또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직장에서의 퇴출이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으로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사람에게는 이혼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선택한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도 하느님과 함께 할 때는 축복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지금 생활과 같이 하느님 현존성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 생활인 경우는 하느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아의지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잘 나갈 때는 자기 복으로 생각하고 지내다가, 잘 안되면 하느님에게 불평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오늘복음에서도 말씀했듯이,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병이 걱정이 되든, 직장이 걱정이 되든...의사나 직장 상사에게 매달려서 구걸을 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께 그 생명의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느님에게 매달리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무슨 병이 걸리면 어느 종합병원 무슨 의사를 소개받으려고 하지, 교회로 나가서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말입니다. 좀 과격한 표현으로 말하면, 하느님은 우리 신자들의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악세사리에 불과한 것이 오늘날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니 앞 통계에서 보듯이 내세에 심판을 받을 생각을 하니까, 지은 죄에 대한 양심은 있고...그래서 두려운 것이지요....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 할 때 슬기, 통달함, 의견, 굳셈, 지식, 효성, 두려워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함이란 어떤 뜻인가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 함'이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해야 할 분이지 두려워해야 할 분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허물 투성이인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매순간 모든 사건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은 두려운 하느님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지만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거나 탈선하고 싶을 때, 우리 앞에 떠오르는 아버지는 잘못을 꾸중하시고 야단을 치실 아버지의 모습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죄스러운 것이 많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느님은 항상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함은 "하느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긴다." 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함' '하느님을 어려워함' 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2.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바빌로니아로 귀양가게 될 것임을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로 낙인 찍으려 했습니다. 예레미아는 자신이 전해야 하는 메시지 때문에 곤경에 처하여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위기를 맞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기에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이제 이 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주십시오."(예레 20,12) 하며 위기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의지함으로 힘을 얻습니다. 다시말하면 예례미야는 위시 때 하느님을 먼저 찾았습니다. 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행하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우리도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불의에 동조하거나 그냥 묵인만 하여도 큰 이익을 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선(善)을 선으로 갚아주시고, 악(惡)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손해 볼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안다 "하느님이 어디 있어! 내 맘대로 하면 그만이야!" 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며,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며,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일깨워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 후에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나친 걱정이나, 억울함을 참지 못하는 울분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심한 불안 등은 모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증거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마태10,29-31)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 믿음이 있는 자에겐,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삶 속에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가? 아니면 나는 내 맘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께 대한 경외심,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집회서의 말씀을 함께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과 희열을 맛보며 수(壽)를 누린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삶의 끝이 좋으리니 죽는 날에 축복을 받으리라.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아멘)..............◆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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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님! 찬미 받으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