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화양연화’ / 윤선경
친구가 일본 교토에서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오마카세 식당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SNS에 올렸기에 “화양연화!”라고 댓글을 달아줬다.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꽃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삼십 대 청춘만이 화양연화라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개개의 인생에서 화양연화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고 믿는 편이다. 어쩌면 조마조마하고 불안정한 젊은 시절보다 나이 들어 찾아온 느긋하고 충만한 행복이 화양연화에 더 적절할지 모른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2000년)’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은 심적 고통과 애틋한 연민을 수반하는 완숙한 사랑을 나눈다.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그리움. 영화는 암시로 두 사람의 화양연화를 보여준다.
몇 년 전 현재 사는 집으로 이사 오게 되었을 때 가구 배치를 위해 집을 방문했더니 거실과 방에 액자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전 주인은 지역에서 제법 알려진 예인이라 할 만한 분이었는데 갑작스레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거주하던 도우미는 가족 없는 분의 유품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귀한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소중한 물건이고, 그를 기리는 이들에겐 의미가 있는 물건이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나는 집이 깨끗이 비어있기를 바랐다. 이사 전날 보니 쓰레기 집하장에 그 물건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누군가 정성스레 붓으로 써서 선물한 족자, 그림, 사진들이 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그 장면이 화려한 한 시절의 조락으로 보여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연말에 책장과 서랍을 정리했다. 책을 과감히 버리니 은근한 쾌감이 있어 이어서 서랍 정리도 하게 되었다. 책을 버리는 과정은 한 시절의 추억을 버리는 것과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들고나갔다가, 다시 집어 오기를 반복했다. 서랍 정리는 부엌부터 시작했는데 물건을 모두 꺼내 놓고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사 모았을까. 서랍 하나에 우리 집의 역사가 모두 들어 있었다. 쓰지 않는 나이프와 포크, 주먹밥을 만드는 삼각 틀, 갖가지 수저 세트, 버릴 물건이 계속 나왔다. 없어도 불편함이 없는 걸 보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까워서 다시 서랍에 넣은들 다시 쓸 일이 없었다. 서랍을 비운다는 건 그 물건으로 다음에 무얼 하겠다는 희망, 미련을 버리는 거와 같았다.
모임에서 느긋한 일상을 사는 또래 친구들에게 과거로, 이전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 고개를 젓는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우리에겐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화양연화가 없는 걸까?
막내가 다섯 살이 되어 유치원에 가게 되자 나는 화실로 그림을 배우러 갔다. 그곳에서 5년간 유화를 그렸다. 그리고 어느 날 그림을 접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때쯤 되니 기초 없이 그리는 그림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니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탓인지 체계적으로 소묘를 배우고 수채화를 그리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지지난해에 마음을 먹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했더니 한 해가 훌쩍 지나고 말았다. 지난 가을 다시 용기를 냈다. 지금은 계절 학기를 수강한다.
대학 교정을 걸으면서 두런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에게서 뭔지 모를 기운을 느낀다. 차갑고 시원한 겨울 날씨가 가라앉고 주저앉은 몸과 정신을 새로이 일깨우는 것 같다. 학교에서 새해라며 떡국을 끓여줬다. 먹고 교실로 돌아올 때 나는 일행과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인생이 뭐 별 거 있나, 지금 이 순간이 나의 화양연화인 걸.” 중얼거리며.
수채화를 그리려고 처음 붓을 잡는데 가슴이 떨렸다. 손이 떨렸다. 기대 때문이 아니라 얼마나 못 그릴까, 얼마나 내가 실망할까 걱정이 되어서다. 하지만 움켜쥐고 있던 자존심을 버리니 그곳을 새로이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처음 서울로 글쓰기를 배우러 올라가던 순간, 대전에서 젊은이들 틈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순간, 글쓰기 동아리에서 글을 발표하고 나눔을 하던 순간들이 돌아보니 모두 나의 화양연화였다. 서랍처럼 바닥이 비워지면 늘 그곳에서 나의 화양연화가 새로이 피어났다.
첫댓글 인생의 '화양연화'
꿈꾸게 되네요!
내 인생의 화양영화는?
오늘의 미션을 안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