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긋기
최상미
조카의 옷을 못 쓰게 만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새로 산 옷 몇 가지를 빌려줬다. 빌려준 옷은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다. 조카는 새 옷을 한 번 빨아 입는다고 물에 적셔 빨랫줄에 널었다. 빨간 민소매 원피스가 널린 빨랫줄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서 있었다.
옷은 완전히 준 것이 아니다. 1, 2월 겨울까지만 빌려준 것이다. 그런데도 아까운 생각이 들면서 '겨울 다 가면 나는 언제 입지?' 라는 생각을 했다. 남편의 눈치를 봐가며 구입한 옷인데다 한 번도 입지 않았으니 아까운 마음이 들만도 했다. 꿈이다.
조카의 꿈속 등장은 꿈 꾼 다음 날 희미하게 드러난다. 겨울 속에 땀을 흘리며 산성로를 오르는데 울산이 집인 큰집 식구가 근처에 왔다는 소식이다. 치과 일로 왔는데 늦은 점심을 함께 하자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 내려와 '도랑추어탕'으로 갔다. 예고 없는 시숙부부와 조카 부부의 만남, 그리고 점심값 지출은 어쩌면 조카의 옷을 버려 새 옷을 빌려주게 되는 일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갑작스러운 큰집 식구와의 만남은 연결이 된다지만 꿈속에서 옷을 빌려주고 아까워한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분명 밥값은 아니다. 남편이 평소 옷 사는 것을 환영하지 않으니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던 내 의식이 꿈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빌려준 옷은 꿈속에서도 남편의 눈치를 봐가며 장만한 것이니.
커다란 키위나무 한 그루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줄기 아래쪽 한 부분에는 긴 바나나 송이처럼 빽빽하게 달린 키위가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달렸다. 동그란 모양 위로도 많은 키위가 달렸는데 나무가 돌아가니 아래위 열매가 후두두 떨어졌다. 열매가 떨어지니 좋은 꿈은 아닌듯하다. 아니지. 꿈이란 좋은 꿈과 나쁜 꿈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하루를 보낸 저녁 무렵, 키위 꿈은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 본다. 전날 자전거 라이딩 약속이 있었다. 여러 꿈을 꾼 후 아침이 되자 라이딩 나서는 일이 내키지 않는다. 코스도 자갈이 많은 임도라 신경이 쓰인다. 임도 아닌 도로를 달린다 해도 나서기가 주춤거려진다. 약속 한 시간 전에 못 간다는 문자를 넣으니 '그냥 오시요. 의논도 하고'라는 답이 온다. 무슨 의논이냐고 물으니 제주도 라이딩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의논하자고 한다.
봄도 아닌 겨울에 바람 많은 제주도 라이딩이라니. 5일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낸다는 것도 무리인데다 여건도 형편도 못 되어 불참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짬짬이 모이는 팀인데 나를 빼고 모두 참석했다는 소식이다. 이것은 키위나무 줄기에 동그랗게 달려있던 열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위 많은 열매는 무엇을 뜻할까.
나무가 가만히 있지 않고 도는 것은 어떤 모임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보아도 되겠다. 위에 달렸던 열매는 마음 맞는 팀을 제외한 윗사람과 그 외 사람들이 아닐까도 싶다. 호포 임도도 함께 하지 못했고 제주도 라이딩도 못 간다 했으니 꿈속에서 열매가 떨어진 것은 나의 불참과 연관이 있지 싶다. 나무가 컸던 것은 오십 여명의 회원을 둔 클럽을 의미할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내 맘대로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분석해 본다.
임도 라이딩 행을 취소한 후 A에게 문자를 한다. 새해도 되었으니 B와 함께 점심을 하면 어떻겠냐고. A는 좋다며 산에 오른 후 점심을 하자 한다. 사실 A와 B는 지난 밤 꿈에 등장한 인물이다. 어딘가를 가야 하는데 A 자신은 안 갈 것이니 나보고 딸이랑 같이 가라했다. B는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승용차를 타고 갔다. B가 탄 차의 여섯 명의 숫자는 임도 라이딩을 한 사람의 숫자와 동일하니 선긋기가 가능하다.
옷을 빌려준 꿈은 또 다른 의미가 되는 것도 같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는 일기 예보에 내복과 겉옷 두 개만 입고 집을 나선다. 밖에 나오니 생각보다 추워 등이 서늘하다. 여분의 옷을 챙기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냥 길을 나선다. 바쁘게 걸으니 땀이 난다. 목 부분은 더운데 등줄기는 여전히 허전하다. 볼일 보고 해거름에 들어올 때는 춥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을 만나 걸음을 같이하니 식은땀에 등은 더욱 서늘하다. 꿈속에서 조카에게 옷을 빌려준 것은 추위를 겪으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새 옷을 한 번 빨아 입는다고 물에 적셔 넌 것은 내 속옷이 젖은 것과 연결되기도 한다. 원피스의 빨간 색깔은 그날의 기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호포임도 라이딩에 C와 D 그리고 나 셋만 간다는 꿈을 꾼다. 둘만 갔다 오라며 C의 가방에 일지를 넣어주고 나는 가지 않았다. 이런 꿈을 꾼 것은 동호회에서 같은 임무를 맡은 C에게 일지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듯하다. 일지를 넣어주려고 C의 가방을 여니 '뿌리 깊은 나무'라 적힌 테이프 상자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무거운데 테이프는 왜 메고 나왔냐고 물으니 자기 신랑이 듣는 거라며 그냥 놔두라고 했다.
'뿌리 깊은 나무'라 적힌 테이프 상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꿈을 꾼 날은 꿈과 현실 사이에 선이 그어지지 않더니 다음 날에야 어렴풋이 연결이 된다. 번개 라이딩이 잡혔다는 문자가 날아온다. 앞선 번개에 불참했더니 궁금한 것이 많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한 바퀴 하자는 말에 서로 만난다. 가방에는 C에게 보여줄 일지를 챙겨 넣은 채다.
꿈에 보였던 '가방'과 '일지'는 선 긋기가 된듯하다. 그렇다면 '뿌리 깊은 나무'의 글귀는 또 무슨 의미일까. 저녁 무렵 석간신문을 펼쳐 든다. 새해부터 시작한 MBC 수목드라마<해를 품은 달>의 인기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다. 지난해 최고의 사극이었던 <뿌리 깊은 나무>의 초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려고 그 글귀를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뿌리 깊은 나무'는 동호회 클럽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짜 맞추어보면서 혼자 히히거린다.
하룻밤에 일곱 가지 꿈을 꾸었다. 아직도 두 가지는 줄긋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꿈에 나오는 모든 것은 그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라 하니 풀리든 풀리지 않든 상관없다. 꿈은 머리로 하는 언어가 아니라 감정과 정서 에너지로 되어 있으니 귀담아 들으라 한다. 꿈은 살아 있고 꿈은 건강과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꿈은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 하니 이제는 나도 꿈을 기록하여 꿈과 현실에 줄긋기를 하려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꿈 분석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첫댓글 하루밤에 일곱개씩이나 꿈을 꾸다니요? 흐유~
잠은 제대로 잤능교?
꿈을 따라간 들꽃글도 좋으네요. 으~ㅁ
분석이 대단하시네요. 꿈을 기억하는 능력도 대단하시구요.ㅎㅎ 잘 읽었습니다.^^
세발자전거 타는 다섯살짜리 친군가 봐요 다섯과 오십에 줄끗기 하면 되나요. 무럭무럭 자라세요 당신의 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