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자여, 그대 생명에 바라밀생명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음을 생각하라. 어느 때나 큰 희망과 밝은 미래와 성공을 꿈꾸고 매사에 정성을 기울여 최선을 다할지니라. (나무석가모니불) ~~~
금주의 법어--부처님이 깨달은 궁극적인 진실
금주의 법사--불광법회 선덕 혜담스님
<법문내용>
존경하고 사랑하는 불광법회 법등가족 형제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해서 오늘의 불광법회를 함께 하고 계시는 전국의 사부대중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형제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항상 함께 해서 집안이 평안하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여러분의 마음이 청안하시길 기도해 마지 않습니다.
오늘 법문의 본론을 말씀드리기 전에 반야바라밀의 의미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1982년 34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불광사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큰스님께서 몸이 좋지 않아서 제가 대신 법문을 엉겁결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안되겠다 싶어 38세의 늦은 나이에 일본 유학을 갔습니다. 옛날에는 불광사에 와서 큰스님의 반야바라밀 법문을 들으면서 도대체 이해가 안 되어서 저게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서 4년간 불교학 공부를 했고 그전에는 강원에도 있었고 졸업 후에는 선방에서 정진도 했고 군법사로 4년 가까운 세월을 군장병들을 향해 불법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범어사 말사 가운데 법륜사라는 말사 주지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8개월 정도 하면서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49재가 들어오면 기쁘지가 않고 내 시간을 뺏긴다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두고 토굴에 가서 공부하다 불광사에 왔습니다.
나름대로 불교에 대해 공부하고 불광사에서 큰스님의 명을 따라 법문을 2년간 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가 마하반야바라밀 말을 하면서도 무슨 말인가 궁금해서 나름대로 당시에 나와 있는 불교서적을 사서 반야바라밀을 다 뒤져 봐도 속시원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문하면서도 내가 거짓말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반야바라밀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큰스님을 졸라서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3년 동안 반야바라밀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불광사에 와서 살림 살고 기회가 되어 각화사도 지었고 각화사에서 하루 종일 조사어록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1999년에 광자 덕자 큰스님께서 입적에 들었다는 전화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생각한 것이 '큰일났다 어떡하지'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일본 유학가지 않았으면, 조사 어록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 하지 않았는가, 큰스님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시는 속에 마하반야바라밀을 설할 사람이 아무도 없겠다는 생각에 아쉬웠습니다. 은사스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유학 간 것이 큰 다행이라 큰스님 안 계신 이 불광도량에 나름대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게 된 것이 천우신조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광도량은 부처님의 교리를 설하는 곳이 아닙니다. 때문에 다른 절에서 교리를 공부한 불자들은 마하반야바라밀 법문을 들으면 보통 2~3년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저건 무엇일까?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란 말은 좋은데 이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3년 동안 마하반야바라밀에 대해서만 공부했고 자신이 붙었습니다. 한국 불교 서적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핵심을 나름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사어록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벽암록을 비롯해서 조사스님들의 화두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어서 큰스님께서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공부했던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조사스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서 큰스님께서 안 계신 이 불광도량에 나름대로 법을 설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렇게 애를 쓰면서 반야바라밀을 공부했어도 자신이 생긴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20년 전에 생겼는데 주변에 보면 아무 생각없이 반야바라밀 법문을 합니다. 반야바라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그 자리를 봐야 법문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법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광덕스님 상좌들이 이 도량에서 반야바라밀을 설하는데 자신을 가지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말하면서 그와 어긋나는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는 우리 불광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의 주제인 '부처님이 깨달은 궁극적인 진실'을 읽어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없이 무상 고 공 무아 혹은 부정 무상 무아이긴 하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에 대해서 범부들이 집착하기 때문에 범부들의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부처님의 깨달은 궁극적인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즉 부정에 대한 가르침이나 고의 가르침, 무상의 가르침은 불법이며 부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부처님의 진실한 깨달음 자체는 아니다. 순수한 불교에서의 참된 깨달음 자체는 그것이 아니다. (법회보 참고)
아마 대부분의 재가와 출가 불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저게 무슨 말인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광자 덕자 스님께서 호법법문에서 말씀하신 것을 발췌한 겁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혹은 일체개고라는 3법인이나 4법인을 설하면서 그것이 불교인 것처럼 말합니다만 그건 진실된 불교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상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지 깨달음의 진실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모든 것은 고이고 모든 것은 무상하고 모든 것은 나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해 너희가 보고 있는 현상이란 궁극적인 진실이 아니라 집착이고 전도된 생각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4념주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이 관신부정(觀身不淨)입니다.
내 몸이란 사람이 제일 아끼는 것이라 누가 천만 금을 준다고 해도 손이나 손가락 하나도 떼주지 않습니다. 스님들도 도를 이루기 위해서 몸이 있어야 한다고 합리화 합니다만 승속을 막론하고 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몸이란 것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다. 너희가 집착하고 아끼는 몸뚱아리는 오늘도 허물어지고 있고 언젠가는 없어진다. 그러면 이 몸은 구더기가 끓고 마침내 사라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젊은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몸 자체에 집착하지만 그것도 순간적이라 금방 지나갑니다. 항간에는 어떤 사람은 이혼을 못해서 안달이고 어떤 사람은 이혼해서 불행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문명국에서 결혼한 사람의 절반이 이혼한다고 하니 뭔가 잘못된 겁니다. 처음에는 상대방 몸이 사랑스러웠으나 결혼해보니 별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몸이 더럽다고 정의하는데 이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리이긴 하지만 결코 부처님의 근본 깨달은 내용은 아닙니다. 이것이 다른 절이나 법사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광덕큰스님의 독톡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을 큰스님께서는 순수불교라고 명명했습니다.
순수불교에서는 무상 고 무아 부정 대신에 상락아정이라고 열반4덕을 말씀하셨습니다. 열반을 증득하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상락아정, 모든 것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라는 것이 있고 청정하다는 말씀입니다. 교리적으로 4법인을 부정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야바라밀 법문이 어려움을 느끼는 겁니다. 4법인과 정반대되는 열반사덕을 증득하면서 삼법인을 이해하고 열반사덕이 맞다는 것에 찬성해야 됩니다. 열반사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결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큰스님께서 상좌들 이름 정할 때 다다를 지(至)에 돌림자를 상락아정으로 붙였습니다. 옛날에 큰스님의 상좌로 있다가 환속한 스님으로 지아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출가해서 큰스님께 인사드리니 김해 사람이냐고 물으셨는데 뒤에 보니 지아스님이 김해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지락이라 이름할 수 없어서 지환이라 했고 저는 지상이라 했습니다. 불광이 시끄러울 때 제 이름이 상락아정 중에 상(常)이라고 했더니 권속들이 잘난 척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지금 불광이 돌아가는 걸 보면서 은사스님이 왜 당시 막내인 저에게 열반사덕 중에서 상자를 줬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불광의 사상인 반야바라밀에서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 나옵니다. 나의 생명이란 상락아정이라서 청정하고 항상 하여 변하지 않고 환희에 찬 것이라는 마하반야바라밀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큰스님께서는 항상 찬탄에 대해, 환희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스님들 가운데 광덕 큰스님처럼 그렇게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헌신한 분은 드물 겁니다. 이런 사상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모두 열반사덕입니다. 내 생명은 부처님 생명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도 여기에서 나온 겁니다.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부처님의 궁극적인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진실이란 한 마디로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대품반야경』 「조명품」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여 이렇게 설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능히 모든 것을 비추니,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어두움을 없애니, 일체의 번뇌와 온갖 소견을 없애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편안하고 조용하니, 능히 일체의 두려움과 고뇌를 끊었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일체종지이니, 일체의 번뇌 및 습기를 끊었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마하살의 어머니이니,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나오기 때문이다. ' (법회보 참고)
반야바라밀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없앤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란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오늘의 인간으로 진화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원시시대 부터 있었던 근본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야생이 우글하던 고대 사회에서 인간은 참 약한 존재였습니다. 힘도 없고 달리기도 못하고 이빨도 다른 짐승에 비해서 떨어져 항상 두려움에 차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나름대로 진화해 왔습니다. 21세기 지금 현재에는 인간이 인간과 같은 기계를 만들고 있을 만큼 발전했는데 그 근본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이라고 나옵니다. 즉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있을 수 없다고 나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공포심을 떨쳐버리려고 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공포심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요즘은 부부가 다 함께 출근을 하니 그렇지 않겠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남편이 출근할 때 몸조심하라고 부인들이 인사했습니다. 이렇게 몸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많은 위험요소가 있어서 자동차에 부딪히거나 공사판에서 떨어지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수재가 날 때 제일 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 서울 강남에서 사람이 죽기도 하고 재산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어떻게하면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주안점입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반야바라밀인데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 나에게는 두려움이 침범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가끔 반야바라밀은 도깨비 방망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반야바라밀은 화수분과 같은 것이라 모든 것을 나오게 합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반야바라밀에서 나옵니다. 반야바라밀에 다 내재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을 우리는 믿고 내어쓰자는 겁니다. 이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 것으로 해야 합니다.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도 있지만 불광에서는 창립초기부터 반야바라밀을 염송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꾸준히 염송하면서 내 생명이 바로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열반적정의 생명임을 체득하라고 합니다.
처음 법문 들을 때 우리는 범부 중생인데 왜 자꾸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고 하느냐 하는 의구심이 처음에는 들지만 자꾸 염송하다보면 어느 날 깨닫게 되고; 보게 됩니다. 내 생명이 한량없는 공덕 생명임을 보게 됩니다. 지금 불광 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지 않느냐고 의심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것은 시간 문제이지 머지않아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결코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우리 불광 불자들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우리 불광법회가 이렇게 활발하게 살아있는 것은 주위의 모든 모략과 억압을 이겨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머지않아 불광법회의 정상화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고 불광이 없어진다면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내가 안고 있는 두려움을 다 극복하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계속 정진해 나가야하겠습니다.
제가 6년 전에 불광사에 밥을 얻어 먹기 위해 내려왔다고 했는데 물론 그때는 몸이 상당히 안 좋았습니다. 신장에 암이 생겨서 신장 하나를 떼내고, 갑상선에 암이 있다고 해서 갑상선도 떼내고, 심장에 스탠트를 하나 박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많이 힘들어서 의사가 많이 있는 서울 근방에 살아야겠다고 해서 각화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불광사에서는 방을 안 주면서 방을 얻으려면 각화사를 불광사에 넣으라고 어이없는 말을 해서 그냥 빌라를 얻어 6년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건강도 회복되고 해서 10월 14일에 각화사로 원대복귀하려고 합니다. 제가 70세를 기념으로 해서 낸 책에도 썼듯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는 담당의였던 현문거사와 본정보살의 보살핌이 크게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덕택에 별 무리 없이 법문할 수 있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서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각화사로 가더라도 죽지 않는 한 불광법회 법문은 할 것이라 염려는 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은 진담입니다. 각화사에 있더라도 법문을 하든 안 하든 일주일에 한 번은 불광법회에 참석해서 축원도 하고 법문도 할 것을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조선시대에 어떤 효자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다 아버지가 병환이 들어 한의사에게 가니 3년 묵은 인진쑥을 구해서 달여먹이면 병이 나을 거라 했습니다. 이 효자는 3년 묵은 인진쑥을 구하기 위해 전국의 약방을 다 돌아다녔는데 1~2년 된 인진쑥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다 3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시고 그때 효자는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의사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인진쑥을 베어다 말렸으면 벌써 3년이 되었을 것인데 찾아만 다니며 시간을 보냈으니 불효막심하다고 자책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마하반야바라밀을 몇 십만 번 염송해야 된다고 해서 몇 십만 번 한 후에야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임을 체득할 수 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닙니다. 지금부터 하면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 되는 겁니다. 이 점을 우리는 생각하고 형제 여러분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반야바라밀 수행을 부지런히 해서 형제 여러분의 삶이 항상 즐겁고 편안하고 청안하시길 빌어 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정토를 성취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
첫댓글 혜담스님께서 빌라에 사실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에 놀라웠고 마음 아팠습니다. 이에 눈감고 이러한 사정을 추악한 은처 의혹 투성이인 지정을 호도하기 위한 호재로 쓰고 있는 자들이 초래할 업보가 섬뜻해 지는 걸 느낍니다.
우리가 이렇듯 쉽사리 접할 수 있는 반야바라밀 법문이 큰스님과 혜담 스님의 각고의 정진으로 주어지는 소증한 은혜라는 걸
법문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됩니다.
법회 전반과 법문 일체를 녹취 편집하느라 수고 크신 바라밀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오늘 사진 찍으신 송지 보살님, 자성인 보살님 감사합니다.
유튜브가 올라오지 않은 까닭에 개인적으로 녹음한 음성을 풀어 쓰다보니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음에 양해바랍니다.
녹음 소리가 맑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나마 풀어 쓸 정도는 되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법문 녹화편집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늘 수고에 감사드리며 건강과 행복하시길 기원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혜담 스님께서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각화사로 다시 가신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이 회복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스님께서 건재하시고, 불광 법회를 이어가고자 하는 불광 형제들이 존재하는 한, 불광 정상화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바라밀님, 녹음만으로 일지 작성하시기는 어려웠을 텐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