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12 - 영국 식민지인 버마 일본군과 협력했다가 다시 싸우다!
미얀마(버마)는 인도양 연안국으로 1988년에 기존의 국호 버마를 미얀마로 바꾸었으며 수도는 양곤
이었으나 2005년에 핀마나(네피도)로 옮겼는데, 면적은 68만㎢로 남한의 7배이고 인구는
5,500만명으로 버마족이 68%, 샨족이 9%, 카렌족이 7% 기타 133개 소수 민족이 16% 에 이릅니다.
대영제국은 미얀마를 식민통치하면서 농지 개간 및 인프라 확대를 위해 인도계 주민들을 버마에
대거 이주시켰으니, 아삼 지방과 마니푸르 지방의 브라흐민과 크샤트리야등 상위 카스트 출신이
많았는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및 소수민족을 우대해 불교도 버마인들을 견제할 목적이었습니다.
양곤시에 정착한 힌두교 인도 상인들은 영국인 처럼 버마 현지인들을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며 통혼은 커녕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때 일본군이 진주해오자 인도로 도망갔으니, 양곤(랭군)시
인구의 다수가 힌두교도였지만 2차대전과 버마의 독립을 계기로 거진 다 떠나 이제 2% 정도에 불과합니다.
영국 식민당국에 의해서 인도 동부에서 이주해 온 무슬림들은 버마 현지인 여자들을 현지처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으니... 힌두교에서는 외국인과의 통혼을 금기시하지만
이슬람에서는 무슬림 남성과 비무슬림 여성과의 결혼을 권장하는 편으로, 이에 버마인
승려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무슬림들을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벼르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과 벨기에가 의도적으로 투치족을 우대하며 후투족을 착취하자 전후에 다수
인종인 후투족이 폭동을 일으켜 소수인 투치족을 무차별 살해하는 인종청소가 벌어졌으며,
영국은 1815년 실론(스리랑카)을 식민통치하면서 다수의 불교도 싱할리족을 지배하기
위해 소수의 힌두교 인도계 타밀족을 우대했으니 종전후 결국 26년간의 내전이 발생합니다.
미얀마 민족분쟁의 근본 원인은 영국의 “국경선 멋대로 긋기” 이니 미얀마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음에도 영국 식민통치에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버마족이 독립후 미얀마
사회의 주도층으로 부상하면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보복이 자행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소수민족이 버마족에 대항해 무기를 집어 들었고 곧바로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슬림 로힝야족은 영국에 빌붙어 부를 축적하는등 식민통치 앞잡이로 버마족을 차별했는데, 1948년
에 미얀마가 독립하자 수천명 불교도들을 축출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2012년에 불교도 여자어린이
를 집단 성폭행해 불태웠으며 2016년에는 수백명의 로힝야족이 칼과 화기류로 무장하고 국경경찰
초소를 공격해 9명을 살해했으니 미얀마는 이제 130만 “무슬림 로힝야족을 인종 청소” 하는 중입니다.
미얀마의 주 종족인 버마족이 미얀마에 이주한 때는 9세기경으로 그 전에 살고 있던 민족은 남부에는
몬족, 중북부에는 퓨족이었는데.... 몬족은 현재 태국과 버마에 살던 동남아의 토착 종족이었고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지닌 민족이었으니 인도의 불교 문화도 이 몬족을 통해 동남아 각지로 전해졌습니다.
퓨족은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평화주의적인 삶을 살던 종족이었으니 남녀불문하고 7세부터
20세까지 절에 들어가 승려와 같은 생활을 했고, 잔인한 형벌도구나 처벌도 없었으며,
누에의 목숨을 해친다고 비단조차도 경멸했다니 말 그대로 불교의 이상향과 같은
민족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후 퓨족은 남조의 확장으로 쇠퇴하고 버마족으로 대체됩니다.
9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은 중국 운남의 남조국은 태국과 미얀마를 공략하였으니 이 과정에서 태국
에 살던 몬족과 미얀마 중북부에 살던 퓨족은 큰 타격을 입었고, 그 과정에서 운남에 살던
버마족과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으니 타이족은 미얀마 동부 샨 고원에 정착해 미얀마
타이족인 샨족이 되었고 태국을 세웠으며, 버마족은 미얀마 중북부에 정착해 퓨족을 대체합니다.
중국 남부에서 월족이 남하해 베트남을 세웠듯 운남에서 남하한 버마족은 1044년에 미얀마의 첫번째
왕조인 버간 왕조를 세우니 파간(Pagan) 왕조로 알려져 있는데.... 다르게는 그 전인 849년에 성립
되었다고도 하나 전설과 뒤얽혀서 정확히는 알수 없고, 그나마 역사적으로 뚜렷해지는 것은 11세기
아노야타 왕(제위 1044~1077) 때니 버마족을 통합하고 버마족의 전통신앙인 낫 신앙을 확립했습니다.
버마족은 몬족의 승려 신 아라한을 통해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도입했으며 왕은 소승
불교를 육성하기로 결정하고, 남쪽의 몬족 도시인 타톤에 불경을 요청하였으나 거부
당하자 타톤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불경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다르게는 캄보디아
의 앙코르조가 테나세림 일대 까지 확장을 하자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봅니다.
버마족은 미얀마 남부 몬족 도시들을 병합했지만, 몬족은 19세기까지 계속 저항했으니 버마족이 공격
해서 합병하고, 몬족이 독립하고, 버마족이 진압하고, 몬족이 태국으로 탈출하고, 또 다시 버마족
이 합병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중에 무역망의 쇠퇴로 버마족의 버간국 역시 침체기에 접어듭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버간(파간)국 나라티하파티왕은 원나라의 신종(臣從)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었고 사자를 처형하며 운남을 선제 공격했지만..... 원의 기병 전술에 대패
하여 1287년 항복을 타진하러 가던 나라티하파티왕이 왕자 티하투에게 살해당하며
버간국은 멸망하고 타가웅을 위시한 북부 지방은 원나라의 행정 구역에 편입 되었습니다.
이때 남부의 몬족은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는데 이 왕국은 한타와디라는 별명이 있으니 수도를
따서 버고 왕조라고도 하지만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는데... 중북부는
샨족 저항군이 원나라군을 몰아내고 잉와를 수도로 왕국을 건설하니 코에이 게임(징기스칸
시리즈)에서 자주 보이는 아바(Ava)가 이 도시이니 250여년간 미얀마는 남북으로 분열됩니다.
남부 몬족은 태국의 수코타이와 아유타야에 동남부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테나세림을 빼앗겼으나 불교
문화를 꽃피울수 있었고, 수도 버고(페구 Pegu)를 중심으로 해외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으니 15세기
신소부 여왕은 자신의 몸무게와 동일한 양인 40킬로그램의 금을 107미터 높이의 슈웨디공 파고다
에 입혔고, 그 뒤를 이은 담마제디는 신소부와 자신의 몸무게의 4배의 달하는 금을 또 입혔다고 합니다.
북부 샨족- 버마족 연합왕국 잉와(Ava)는 버마화가 덜한 북부 샨족과 싸웠는데, 샨족이 운남을 공격한
결과 명나라가 1444년과 1446년에 역공을 가해 그들은 물론 잉와 까지 초토화시키고 속국으로
삼은 후에야 물러갔으니 잉와는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북부의 샨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1527년에 잉와를 멸망시켰고 이때 잉와의 속국 버마족의 따웅우(Toungoo)가 독립해 떨어져 나갑니다.
1531년 버마족 따웅우 왕조의 왕 따빈슈웨티는 통일전쟁을 시작했으니 남부의 몬족세력을 먼저 노렸고,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었는데.... 주변의 경계를 불러와 삐, 버고, 아라칸이
동맹을 맺어 따웅우에 맞섰으나, 따빈슈웨티는 이들을 모두 무찌르고 삐와 버고를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따웅우국은 북진해 잉와와 샨족을 복속시키고 아라칸을 공격하던중 몬족 문제로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하게되었는데 따웅우가 커지니 아유타야는 몬족을 지원했고, 몬족이 아유타야로 도주하자 버마군이
국경을 넘어서 이들을 추적하고 이 때문에 태국과 미얀마의 전쟁은 상당수가 이런 형식으로 일어납니다.
1547년 아유타야를 공격한 버마 따웅우국 따빈슈웨티는 함락에는 실패하였지만 아유타야군을
철저하게 격파했고 사령관이었던 아유타야의 왕비 수리요타이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버마로 돌아온 후에 포르투갈인 근위장교에게 암살당하지만, 이복형 버인나웅에 의해
따웅우 왕조 치하의 미얀마는 안정을 되찾고 재통합되어 동남아 최강제국으로 발돋움합니다.
버인나웅은 뛰어난 정복군주로 서로는 인도의 마니푸르, 서남은 아라칸, 북부는 중국 경계지역의
샨족까지, 동북으로는 1563년 태국 북부의 란나를 점령하고 아유타야를 공격해 격파하고
국왕의 항복을 받은후 보물과 흰 코끼리 4마리를 얻었으며 1569년 재공격해 함락했고,
1570년에는 아유타야와 동맹을 맺어 버마에 맞선 란쌍 왕국의 위앙쨘을 공격해 정복합니다.
따웅우국 버인나웅이 1581년 죽자 반란이 일어났고 아유타야 흑태자 나레쑤언은 버마 본토까지 진격해
오니.... 버마 지역은 북부의 잉와, 중부의 삐와 따웅우, 그리고 포르투갈인 필리페 데 브리투가
점령한 남부로 나뉘는데 브리투는 아라칸에 고용돼 용병으로 들어왔다가 자신의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잉와의 왕 아나욱페룬은 삐, 따웅우를 점령하고 1613년 마지막으로 남은 폴투칼인 필리페 데 브리투의
세력을 미사 중에 땅굴로 공격해 미얀마를 재통합하니 부흥 따웅우 왕조라고 하는데 왕족의 핏줄이
버마왕족에 이어졌으며, 남부 몬족은 프랑스인들의 협조로 1740년 버마에서 독립하여 부흥
한타와디 왕국을 세웠고 1752년 북부의 잉와를 함락시킴으로써 부흥 따웅우 왕조는 멸망 합니다.
하지만 꼰바웅 왕조를 세운 버마족 슈웨보의 영주 알라웅파야의 등장으로 몬족은 곧바로 밀리기
시작했고, 1757년에는 수도인 버고가 함락당함으로써 다시 멸망하고 버마의 지배하에 놓이자
몬족은 아유타야로 도주하니 이들을 쫓던 버마군이 국경을 넘으면서 다시 전쟁이 발발
했으니 아유타야를 포위 공격했으나 포탄 오발로 알라웅파야는 부상을 입어 1760년 사망합니다.
이후 꼰바웅 왕조의 3대 왕 신뷰신은 1765년 아유타야를 침공해 2년간의 전쟁 끝에 1767년
아유타야를 함락해서 멸망시키고 아유타야 유물들을 강탈했으며, 청나라 건륭제의 침략도
무찔러 전성기를 맞지만.... 청나라의 침공 때문에 버인나웅 때와 달리 아유타야를
합병하지 못했고 다수의 정예병력을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윈난성 지역 국경으로 보냅니다.
버마는 소수의 주둔군으로는 아유타야 전지역을 통제할수는 없었으니 구-아유타야는 딱씬
에 의해 빠른 속도로 통합되고 강력하게 부활하니 톤부리-방콕 왕조 시암은 버마에
복속된 란쌍과 란나를 찾았고 테나세림 일대에서 버마와 대립하는데, 버마는 대신에
서쪽으로 확장하여 인도국경의 마니푸르를 합병하고 아라칸을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꼰바웅 왕조 6대 국왕 보도파야의 치세에 버마는 최전성기에 달해 1784년에는 아라칸을
병합하였고, 144,000명의 대군으로 시암(태국)을 침공했는데 전근대 버마군의 총동원
병력이 7만인 것을 감안하면 과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시암(태국)으로 침공한 14만
대군은 “유럽식 신식 무기” 를 앞세운 라마 1세의 짜끄리 왕조(태국) 에게 패배 합니다.
아라칸인들이 반란을 일으킨후 영국령 인도로 도주하자 버마는 국경을 넘어 아라칸 반란군
을 공격하다가 영국군과 충돌해 긴장이 증폭되었는데, 영국은 국경을 침범하지 말라고
버마에 경고를 했지만 버마는 국경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토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동남아에서는 지배는 땅보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남아는 국경개념이 희박하지만 다만 시암(태국) 같은 경우는 1840년대에 서구 문명을
도입하는 “개화정책” 을 펼치면서 서양으로부터 국경개념을 도입하였고, 베트남은
원래 부터 중국의 유교와 관료제를 도입한터라 크메르나 란쌍을 정복하면서
곳곳에 성이나 식민지와 같은 기미주를 설치했으니 국경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대영제국은 청나라 침략을 위해 미얀마를 전략 요충지로 봤는데, 1820년대 초에 버마가 아쌈의 타이계
왕국인 아홈 왕국까지 복속시키자 주민들이 영국령 인도로 달아나니 버마군이 추격하는지라 1824년
1차 영국-버마 전쟁이 일어났으니, 버마군은 벵골로 선공을 가해 벵골의 영국군을 패퇴시켰지만
버마 남부에 상륙한 영국군에게 허를 찔려 1826년에 항복하고 아라칸과 테나세림을 영국에 할양합니다.
1852년에 일어난 2차 전쟁에서는 버마 남부 저지대를, 1885년의 3차 전쟁에서는 고지대까지 점령당해
미얀마는 멸망했으며.... 수도는 영국에 의해 만달레이에서 바다에 가까운 양곤으로 옮겨졌고
꼰바웅 왕조 임금 티바왕은 인도 서해안의 어촌 라트나기리로 끌려가 유폐당한채 숨을 거두었으며,
인도 무굴왕조 최후의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미얀마의 수도 랑군으로 끌려와 유폐당해 숨을 거둡니다.
식민지배 시절 영국은 왕정제와 신분제를 없앤후 옥좌를 인도제국 콜카타박물관으로 뺏어갔으며 종족 간
생활권을 무시한채 멋대로 국경선을 긋는 한편, 소수민족들에겐 자치권을 부여해 경찰과 군인 자리
까지 줬지만 주류민족인 버마족에겐 직접통치를 시행해 차별정책을 펴서 “민족 간 갈등” 을 부추겼습니다.
영국 식민지당국은 또 인도인들을 대거 받아들여 경제까지 인도인이 장악하게 만들어서 랭군(양군) 전체
인구 중 2/3를 외지인이 장악했고 이 중 53% 가 힌두교도 인도인이며 국토 전체로 보자면 1931년
기준 전체 인구의 7% 였으며, 영국은 미얀마를 산업화하지 않고 버마족을 시켜 삼각주 지역을
곡창 지대로 만들어 1930년대에 세계 쌀 수출국 1위로 만들었으니 전형적인 수탈경제 구조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땅 상해 일부를 빼앗아 조계지를 만들고는 담을 세우고 문을 만든후 “개와
중국인은 들어오지 마시오” 하는 팻말을 세웠으니... 스페인, 포르투칼,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및 미국등 서양 나라들은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지인들을
“개나 돼지” 취급했는데... 하기사 식민지 백성들이 어찌 “사람대접” 받기를 기대할수 있겠습니까?
식민지가 되지 않을려면 우선 각 세력들이 권력을 놓고 싸우는걸 중지하고 일치단결하며 귀족과
사회지도층이 재산 일부를 국가에 헌납하고 국민들은 특별세를 납부해 군사비를 모은 다음
에,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부터 성을 쌓는 노역에 나가고 군에 지원해 배의 선창에서 노를
젓는 노잡이를 맡는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또 새 무기를 개발하고 장정들이 한해
에도 몇달씩 실전 훈련을 받으며 군사력을 키운다면 어느나라가 감히 "침략" 하려고 하겠습니까?
버마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지배계층을 형성한 인도에서 파견한 식민지 관리와 기독교 선교사
들로부터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당한 일부 소수 민족들의 통치를 받았으니 이런 영국의
교활한 식민지배 정책으로 인해 아직도 미얀마에는 인도사람들을 미워하고 식민지배
당시 다수 종족인 버마족을 억압했던 카렌족등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민족 문제" 가 있습니다.
1930년대에 민족주의가 성행해 독립운동의 기운이 불타올랐으니 버마족은 불교와 사회주의, 반외세주의
3개 사상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영국은 현실에 무관심한 소승불교의 교리와 기독교로 개종한 카렌족
등 소수 종족들로 하여금 교묘하게 다수종족 버마족을 탄압하여 70여년에 걸쳐 식민통치를 지속하니
미얀마독립운동 국부 아웅산 장군이 이끄는 따킨당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운동이 일어납니다.
아시아의 40개 국가 중에 완전한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 단 한나라” 뿐이었으며 중국
과 태국은 반식민지 였고, 나머지 37개 국가는 오스만 투르크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델란드 및 포르투칼의 식민지 였으니...... 게다가 일본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근대화에 성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니 동남아인들에게는 “꿈과 선망의 대상” 이었습니다.
한국의 김옥균과 서재필, 윤치호에 중국의 손문에 인도인으로는 영국 총독 암살에 실패하고 1915년
일본에 망명한 라쉬 비하리 보스와 찬드라 보스 , 버마 아웅산과 우누에 네윈과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등의 독립 운동가들은.... 서양 식민지 당국에 쫃기면 의례히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을 일본정부는 적극 지원했으며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는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을 지원하고 김옥균은 그의 집에 몇달간 머물게 하는등 민간인들도 개인적으로 망명해온 식민지
독립 운동가들을 도우는데 헌신적이었으니, 손문은 일본에 2차례 망명하는 중인 1905년 7월 도쿄
에서 “중국동맹회” 를 창설해 일본인 포함 1만 5천엔이라는 거금을 모금해 중국혁명에 사용했습니다.
따낀당을 중심으로 한 반영 무장독립운동은 국민적인 지지로 세력을 뻗쳐나가게 되니 영국식민지 정부
는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고 따낀당의 주요 인사들은 대거 체포 투옥되는데, 아웅산
장군은 우누와 네윈등 30인의 동지들을 이끌고 일본의 대 태평양 정보기관인 '남기관' 의 도움을
받으며 당시 일본령이었던 중국 해남도에서 스즈키 게이오 대령의 지도하에 군사훈련을 받게 됩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과 싸우던 장개석군에게 막대한 군비와 군용 물자를 원조하고 있었으니... 군수
물자들은 영국령 버마를 통과하여 중국으로 들어가는 루트를 선택했는데 이것이 "죽음의 철도"
즉 "콰이강의 다리" 로 유명한 버마로드 이니.....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일본에게는
버마로드를 차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전략이었으니 아웅산 장군등 버마독립군을 지원한 것입니다.
1. 무장 독립 운동의 핵심인 아웅산 장군과 30인의 지사들에게 무장 봉기에 필요한 군사 교육
을 시킬 것. 2. 게릴라훈련이 끝난 이들을 다시 버마에 잠입시켜 반영 무장 독립 운동
을 일으키고 버마독립 정부의 수립을 선포할 것. 3. 장개석을 지원한 버마로드를 차단할 것
1941년 일본의 소위 대동아 전쟁의 개전과 동시에 태국 방콕에서 30인의 지사를 중심으로 버마
독립의용군이 결성됐으니 일본군에 의해 엄격한 훈련을 받았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의용군은 일본 요구에 의해 스즈키 게이오 대령을 사령관으로 하여 버마로 진군하게 됩니다.
일본 군대를 등에 업고 진군한 버마독립의용군은 3개월만에 영군군을 버마에서 몰아내고 1943년 8월
1일 독립합니다만..... 일본은 버마로드의 차단이 목적일 뿐 버마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애초 약속
과는 달리 버마에서 친일인사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고 영국보다도 더한 식민통치를 자행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식민지 조선에서 징집한 군인들을 일본 군대의 첨병에 서게해 이들이 버마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게 했으며, 잔인한 일본 군대를 증오하던 버마 민중들에게 그 군인들은 일본 본토인이 아닌
조선인들이라 그렇다고 변명했으니 일부 미얀마(버마)의 노년층들은 약속을 저버리고 식민통치를
행한 일본 보다 그 앞잡이로서의 한국(조선) 사람들을 더 미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은 종전후 버마 독립을 약속하면서도 전쟁 초반에는 버마 지역에 군정을 실시했지만... 버마인들
의 전쟁 협력을 필요로 한 일본 제국은 버마를 필리핀 처럼 보다 일찍 독립시키기로 결정했고, 1943년
군정을 폐지하고 반영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수감중이던 바모를 국가원수로 하는 “버마국” 이 수립됩니다.
1943년 11월 5, 6일 일본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 참여한 각국 정상들을 보면 일본 제국 외에 태국,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왕징웨이 정권, 버마국, 필리핀 제2
공화국, 자유 인도 임시정부,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괴뢰국), 라오스 왕국등 모두 11개국 입니다.
일본은 마치 요즘의 G7 회담처럼 "대동아 공영권" 국가들의 정상을 모아서 회의를 했으니
이 회의는 이른바 "대동아회의" 라고 불리는데.... 여기에서는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아시아를 서양인들인 “귀축영미(鬼畜英米) 로 부터 해방” 시키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마침내 1943년 독립을 달성한 버마국은 곧 일본과 협약을 맺고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일본군
은 군대를 주둔할수 있었고 버마국은 태국에 버마의 동부 영토(예전에 태국을 침공해 빼앗았던)
를 할양했으며, 점령 초기 버마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구세주, 해방자” 라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버마가 옛날 전쟁에서 획득한 동부지방을 일본 권유에 따라 태국에 돌려준 것은, 일본군이 싱가폴을 함락
하고 남방으로 진주하자 영국의 반식민지 태국은 일본군과 싸우지 않고 연합해 함께 영국군을 공격
했으니 일본이 협력에 대한 보답으로 한 것이라 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의 잔학행위가 이어지고
영국 보다 가혹한 통치를 펼쳐 버마인들을 학살해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니 차츰 반일로 돌아서게 됩니다.
1944년 연합군은 태평양의 섬들을 탈환한 가운데 인도와 중국 운남성에서 버마로의 진공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 병참 및 항공 기지는 인도 마니푸르주의 “임팔”에 있었으며 영국군 제프리
스쿤스의 4군단이 주둔했으니 4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여단 및 1개 공수연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버마 주둔 일본군은 전쟁의 승기를 잡기위해 저 임팔을 공격해 인도로 진격하고자 했으니 3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연대를 동원해 북상하는데... 치명적인 약점은 보급품을 수송하기가
힘들어 말에다 싣고 가는 수준이었으며, 임팔 전투는 1944년 3월에 시작되어 7월까지
계속됐지만 일본군은 보급을 지속할수가 없어 극심한 기아에 탄약이 소진되어 결국 후퇴합니다.
대본영은 임팔작전의 결행시기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1943년 말에야 제15군
에게 준비 명령에 따라 사단별 담당구역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도록 했으니, 동부 정면에 제18사단을 배치하여 연합군의 진출을 막도록
하고 제33사단, 제15사단, 제31사단 등 3개 사단으로 임팔을 침공하기로 결정합니다.
15군은 병참부대로 트럭을 보유한 자동차 중대 160개, 말들을 이용하는 치중병 중대 60개에
5개 공병연대였으나.... 버마 방면군에서 90개, 40개, 3개로 줄었고 남방군을 거치면서
26개, 14개, 2개로 줄더니 대본영에 제출될 때는 18개, 12개, 0개로 쪼그라 들었으니 임팔
만 점령하면 싱가포르 전투 처럼 대량의 물자를 노획하는 행운이 또 오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제15사단은 선박이 부족해 중국 난징에 있던 병력수송이 늦어졌으니 육로를 개척하며
버마로 향하는 가운데 야마우치 사단장과 참모장만 버마에 도착했는데... 현지군은
작전을 빨리 결정해 달라며 독촉해, 육군성 군사과장 니시우라(西浦進) 대좌가
도조 히데키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으니 도조가 물은 것이 저 유명한 6개 조항 입니다.
1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2 현실성 있는 작전인가? 3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할 일이
생기겠는가? 4 버마 방어에 공백이 생기겠는가? 5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 수 있는가? 6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때 막을수 있는가? 우물쭈물
하자 도조는 버럭 호통을 치는등 한심스러워 하면서도 결국 못이기는체 결재를 합니다.
연합군은 서부 정면에 조지 기포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3개 사단과 기갑 1개 사단, 오드
윙게이트 장군의 공수부대 6개 여단, 북부에는 조지프 스틸웰 장군의 미군, 중국 국민혁명군
X군 3개 사단, 동부에는 웨이리황 장군의 중국 국민혁명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3방면
으로 포위 태세를 갖추었고 제14항공대 플라잉 타이거즈등 공군 부대도 공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연합군은 레도 공로를 '도쿄로 가는 길' 이라 불렀으며 스틸웰 장군은 태평양 방면 해상공세에
호응해 반격작전을 위해 중국군 90개 사단을 미국식 장비로 개편하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으니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준비하면서 결행을 망설이고 있던 43년 9월말, 연합군
의 선봉부대는 후콩계곡의 북쪽에 나타나 계곡을 정찰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와 마주칩니다.
1943년 10월 30일, 일본군이 계곡에서 마주친 것은 중국군 제38사단의 정찰부대였으니 정보를 입수한
무타구치는 제18사단 제56연대를 급파하여 중국군 제38사단을 포위하려했으니 1개 사단 병력을
1개 연대 병력으로 포위하려 한 것으로... 문제는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은 손입인 장군이 이끄는 X군
미제 무기로 무장하고 미군 교관들에게 훈련받았던 당시 중화민국 육군의 최정예부대 였다는 점입니다.
일본군 제56연대는 밀림의 중국군을 포위하여 압박해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전차와 중화기로
원통진지(Admin Box)를 구축하여 공중보급을 받으면서 방어하고 있었으니, 방어진의
일각에 구멍을 뚫고 돌입하여 분단한다는 전법은 먹히질 않았는데 특유의 반자이 돌격을
감행해 보았지만 결과는 뻔했고 보급이 안돼 나무 뿌리나 벌레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습니다.
스틸웰 장군은 버마 당나귀 700필에 군수물자를 싣고 도착한 미군 특수부대 5307 혼성연대와 합류해
마인칸 공격을 명했고 일본군 제18사단이 3월 5일을 기해 마인칸에서 철수하였으나 메릴 부대가
퇴각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은 340명의 환자를 등에 업고 정글속을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으니 후에 이 '메릴의 약탈자' 의 전훈을 살려 유명한 “그린베레” 가 탄생합니다.
일본군 작전계획은 1. 제31사단은 남쪽에서 국경을 돌파하여 임팔로 향한다. 2. 제15사단과 제33
사단은 기습적으로 친드윈강을 도하 국경으로 향한다. 3. 제15사단은 직선으로 임팔 동북부
에 진출해 연합군을 포위한다. 4. 제31사단은 북진하여 코히마를 점령해 증원부대를 저지한다.
5. 코히마 작전후 제 31사단 일부를 임팔 주전장으로 돌린다. 6.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한다.
영국 제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은 아캡 방면에 있는 제15 인도군단 중에서 제5,
제7 인도사단을 빼내어 임팔과 디마푸르에 파견하는 동시에 제33 인도군단에서도
제2사단과 제50 인도전차여단을 증파하는가 하면 제14군의 예비대 인도전차
사단도 이 지역에 투입했으며 현지의 제4군단에게도 임팔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제4군단 예하의 제17 인도사단은 이미 일본군에게 퇴로가 끊겼고 제23 인도사단도
우크룰 남쪽에서 포위당하자 제23 인도사단은 암호문서 등을 소각한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일본군 제33사단의 사사하라 연대와 대치중인 제17 인도사단은
좀처럼 퇴로를 발견할수 없었는데 개전 초부터 일본군 제33사단과 맞서 싸워왔습니다.
3월 14일, 토이톰 고지에 진을 친 연대에 철수지시가 내리자 트럭과 전차를 이끌고 임팔로 철수를
시작했고, 철수행렬이 산허리를 거의 통과하고 있을때 일본군 정찰부대가 발견해 연대 본부에
보고하자, 연대장 사쿠마 대좌는 제33사단장 야나기타 중장에게 영인군이 총퇴각했다고 보고합니다.
그 말에 사단 사령부는 전선까지 이동했는데, 철수했다던 제17 인도사단은 철수는커녕
압도적인 포화를 퍼붓고 있었으니 전차포로 일본군의 최일선 진지를 쑥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날아드는 보고는 '영인군의 증원부대가 계속해서 전선에 도착하고
있다.' 는 것뿐이었으니 일본군에 철수명령이 내려져 결국 영국군은 무사히 후퇴합니다.
무타쿠치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임팔은 3주일이면 충분히 뺏을수 있지. 그러나 그 다음의 문제가
있단말이야. 임팔로는 만족할수가 없어. 자동차, 전차, 대포 따위는 적의 것을 빼앗아가지고
우선 브라마푸트라 강으로 나간다. 여기서 캘커타로 부터 뻗어나오는 벵골 철도와 아삼 철도를
차지한다. 제대로 들어맞으면 레도도 탈취한다. 아니 델리의 붉은 성벽(城壁) 까지 진격하는 거지. ”
가까스로 33사단은 임팔평야 입구까지 도달했지만 비센푸르 요새에 부딪치자 소형 전차를 앞세워
요새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포화 앞에 무산되고 말았으니, 신임 다나카 중장은 남아있는
화력을 모두 집중하여 요새를 격파하라고 명했지만 제33사단의 포병 화력은 불과 150 mm
유탄포와 100 mm 캐논포 몇문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영국군의 포화 앞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나카 중장은 긴급지원을 요청했으나 대본영은“전투기 24대를 미얀마 전선에 파견할 것임.
단, 10일간만 사용후 즉시 원대로 복귀시키도록 할 것.” 전투기 24대는 공중전 몇번 치를
전력에 불과하니 이런걸 지원이랍시고 시간 제한까지 준다는 것 자체가 대규모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항공전력을 배제하고 싸워왔다는 소리인데 “연합군의 비행기는 3천기” 가 넘었습니다.
사토 고토쿠 중장이 이끄는 제31사단이 친드윈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로 제31보병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58연대로 구성된 '미야자키 지대' 가 병력 4천 명으로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나뉘어 돌진했는데, 미야자키 부대가 아라칸산맥으로 접어들었을때 기상천외한 발상을
했으니 염불로 인도로 가는 원정길이니 염불을 외며 부처님의 공덕(?)으로 아라칸 산맥을 넘었습니다.
미야자키 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로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영국군
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철수했는데, 이때 미야자키 연대장은 부하들의 총을 몽땅 버리게 한 다음 노획한 영국군 무기를
장비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조치였으니 아리사카총의 탄약 보급은 끊긴
상태로 상대가 흘린 보급물자를 주워 싸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탄약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테니스 코트 전투는 테니스장 끝에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니 이게 중요한 이유는 안쓰러웠던 임팔 전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제대로 싸웠다고
할 만한 전투이니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 공방전 열흘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 낙하산이 자기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습니다.
전선 보급로는 막혀버렸고 제5비행사단장 다조에 중장에게 사토 중장의 애처로운 전보가 날아들었으니
탄약 1발, 쌀 1톨도 없이 적의 식량을 탈취하여 전투를 계속 중, 최후의 기대를 공중수송에 걸고 있을
뿐임. 제15사단장도 “이제 본 사단은 호우와 진흙탕 속에서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있음. 제1선 부대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실로 제15군과 무타구치의 무능이 그 원인 임.”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9명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어 영국군의 지휘아래 임팔 전투에서
활동했으니 심리전을 했으며, 포로의 심문이나 통역, 일본어 번역, 선전물 제작 등을 맡아 했으니
부대의 명칭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 로 '인도 - 버마 전선의 공작부대' 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일본군의 10~ 20%는 조선인(한국인)인지라 광복군 9명은 일본어 전단 작성뿐만
아니라 일본 노래에도 해박하여 일본군의 향수병을 자극할 노래를 골라 틀었다 하니
실제로 일본 육군 15사단 소속 조선인들이 선무공작방송을 듣고 여러명이 함께 투항
하거나 또 육군 소위 한명이 소대원 일부와 함께 항복하러 오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충칭에서 조직됐는데 공산주의 계열들도 조선의용군을 조직했지만 장개석
정부는 일본군과 전투를 허락하지 않고 일본군 내의 조선인 병사들을 상대로 선무공작만
허용했는데 장개석의 입장으로는 1개 군단 5만 정도는 돼야 전투를 벌일수 있는데 광복군
이나 조선의용군은 백분지 1에도 못미치는 각 3~400명에 불과하니 전투력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광복군이 전투하자면 무기와 탄약, 군량과 장비를 대주고 트럭을 제공하며 언어가 다르니 협력할 부서와
매뉴얼을 개발해야 하고 군자금을 대주어야 하는데 몇백명에 불과하니 불허한 것으로, 조선의용군은
대장 김원봉등 100명 정도만 광복군에 합류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연안으로 가서 모택동의 홍군에
합류해 일본군과 전투했으며 광복군은 해방될 때 까지 일본군과 단 한차례의 전투도 치루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이 이런 곤란에 허우적거리고 있을때 스장군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38사단과 제20사단은
천천히 카마인에서 모가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니, 선발대인 제5307연대는 5월 17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티나 비행장을 탈환했고 제14여단을 증원하여 육상으로
남하하는 제16여단과 호응해 철로 폭파와 함께 핀봉 부근의 일본군 군수품 창고를 불살랐습니다.
31사단은 무기와 식량이 다 떨어진지라 맨몸으로 막으라고 한 것이니“ 사단 1만 장병은 아사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으로 화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제15군에게 책임
이 있음.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결국 사토 사단장은 자기 책임하에 독단적으로 철수 합니다.
그나마 31사단이 다른 사단보다 순탄하게 후퇴함은 31사단이 전진할때 주민들을 약탈하지 않고 교섭을
통해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물자를 입수한 덕이었으니, 그 때문에 31사단이 패퇴할 때도
원주민들은 그들을 가엾게 여겨 약간의 식량을 제공해주거나 휴식처도 내주었지만, 다른 사단들은
진군 과정에서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획득했기 때문에 철수과정에서 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토 고토쿠 휘하의 31사단은 후퇴지에서도 식량과 탄약이 없자 분노를 곱씹으며 계속
후퇴했으니 급기야 사토 중장은 무타구치 사령관을 만나겠다며 사령부로 향하지만
정작 무타구치는 자결하라며 단도만 남겨놓고 숨어버리는 추태를 부렸고, 이에 사토
중장은 이를 갈며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를 쑤셔버리겠다." 며 그 칼을 들고 나갑니다.
영국군이 추격해 전사자와 아사자, 병사자 시체들을 마주했는데 열대 우림의 습하고 더운 기후와 파리떼로
사흘만 지나도 피부가 썩고 파먹혀 육탈(肉脫)이 된 상태였고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더해져 영국군은
전염병 창궐을 우려해 추격을 멈춘뒤, 생사를 불문하고 석유를 끼얹어 길가에 널부러진 일본군들을 소각
처리했으며 패주중인 일본군 역시 하얀 뼈가 드러난 동료들의 시체들을 '백골가도(白骨街道)' 라 불렀습니다.
일본군 15군 예하 사단들은 전사자 3만 2천명, 병사 및 아사자 2만명 이상을 내 사실상 60% 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 전멸을 넘어 궤멸됐으며.... 한편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만 7,500명이었으니 일본군에
비해 매우 적은데 이 중에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 사람들은 훨씬 적고 대부분은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임팔전투 패배로 인한 버마 전선의 붕괴를 막기위해 44년 6월 증파된 일본군 49사단은 조선 경성
에서 44년 1월 신편된 사단으로 1만 7천명 중 20% 3,400명은 조선인으로 구성되었고, 49사단
은 친드윈강 인근에서 전멸하는데, 츠지 마사노부의 회고록에 49사단의 조선인 병사에 대한
언급으로 외모나 전투시 동작등 평소에는 전혀 구분이 안되지만 부상당해 야전병원에서
고통으로 "아이고!" 라고 "신음만은 조선말" 로 하면 그때서야 조선인인걸 알게된다고 했습니다.
임팔작전이 실패하자 호각지세였던 일본군의 버마-벵갈 전선은 붕괴했고, 1945년 3월 아웅 산 장군이
이끄는 버마군이 총구를 거꾸로 돌려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버마를 맡았던 스틸웰 장군도 무타구치
만큼은 아니지만 전투태세도 못갖춘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하며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무리한
공세를 추진하다 1941년에 버마를 뺏기고 걸어서 버마 국경을 넘어 달아났던 무능한 인간이었습니다.
이후 일본 제국이 영국군의 반격으로 계속 밀려나자 1945년 3월 27일, 버마 국방상 아웅산(후임 네윈)이
이끄는 30인의 동지들은 1944년에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 을 조직했었는데, 아웅산의 버마국민군
(옛 독립군)은 영국편으로 돌아서 1945년 3월 27일 총부리를 거꾸로 돌려 일본군을 공격하니 믿었던
버마군의 배신으로 더이상 버마를 통치할수 없음을 알게된 일본군은 1945년 4월 버마동부로 후퇴합니다.
1945년 5월 2일 영국군은 아웅산의 버마독립군과 함께 수도 랑군을 탈환했으며 일본군이
버마에서 축출되면서 버마국 정부는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일본은 불교를 이용해
버마인들의 민심을 끌어모으려고 했으나 동남아인들이 믿는 상좌부 불교와 일본인
이 믿는 대승불교의 교리상 차이 등으로 인해 불교를 이용한 버마인 회유는 실패했습니다.
일본군을 몰아낸 아웅산 장군은 10만명에 달하는 미얀마 독립의용군들을 세력으로 해서 영국과
독립 교섭을 시작했으며 오랜 교섭 끝에 마침내 1947년에 영국으로 부터 버마국 독립을
승인받은 후에 4월 총선에서 아웅 산이 이끄는 AFPFL 이 많이 당선됐으나.... 7월 내각 회의
도중에 아웅 산과 내각 장관 7명이 기관총을 든 암살범들에게 사살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1948년 1월 4일 일본군에게서 훈련받았던 30인의 동지 중 하나인 우 누를 초대 총리로 선임하면서
5개 지역을 아우르는 버마연방이 수립됐으며, 의원내각제 형태의 정치체제를 채택했지만
4개 소수민족들의 자치권이 중앙정부에 의해 박탈되자 꺼인족과 공산당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연방제는 사실상 와해 상태에 들어가고 이후 30인 중에 네윈 장군이 실권을 쥡니다.
1983년 10월 9일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저 아웅산 묘소를 참배할 때 북한군 공작원
3명이 폭탄을 터뜨려 미리 도착한 15명 중에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자원부장관에 차관급 5명과 김재익 경제수석, 함병춘 비서실장 및
심상우 의원등 모두 13명이 죽었는데 전대통령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살아 남았습니다.
아웅산의 딸인 아웅산 수찌는 민주화투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군부가 민간이양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니 이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2016년 집권에 성공했으나 2021년에 다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니 가택연금 중인데....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군부가 여자와 어린이까지 무차별로 살육하고
있지만 세계 어느나라도 말뿐이고 개입하지 않으며 아세안과 중국은 오히려 군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