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광주를 걷다’ 광주 순례를 마치고
[기고] 김종욱 서울지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사무처장
청명하게 맑은 하늘, 살짝 덥긴 하지만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주어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면 시원함이 느껴지는 그런 좋은 날에 광주를 찾았다.
5월에 광주를 찾아 망월동 묘역을, 1997년 조성되어 지금은 국립묘지가 된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시작한 건 대학생이 된 1992년부터 거의 매년 빠지지 않았으니 약 서른 번 남짓 방문한 셈이다.
하지만 늘 수고롭게 준비해 준 사람들이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떠먹었던 그간의 자리와는 달리 이번엔 내가 일정표를 짜고 버스를 섭외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군부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항쟁했던 광주 시민들의 사적지와 묘역을 둘러보기 위한 안내자를 섭외하는 것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준비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안 그래도 무거운 발걸음이 천근만근 더 무거웠다.
5월 14일(토) 오전 7시 합정역, 7시 20분 고속터미널역에서 각각의 탑승자들이 버스에 올라 광주로 내려갔다.
으레 그렇듯 지각하는 사람이 나와 출발 시간이 지연될 법도 했지만 다행히 모든 참가자들이 제시간에 맞추어 버스에 탑승해 준 덕분에 광주에서의 일정은 무리 없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학생, 노동, 농민, 통일, 인권 등 여러 영역에서 이 땅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열사들의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그리고 이번 묘역참배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망월동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분들 중 그간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어 무연고 묘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의 묘가 있다.
그런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차원의 유전자 감식으로 신원을 밝혀내는 작업을 통해 지난해에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희생된 당시 11살 어린 아이였던 ‘전재수’라는 이름의 희생자 신원을 밝혀냈다고 한다. 40년 넘게 행방불명된 자식을 오매불망 찾았을 부모들에게 자식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은 더할 나위 없는 아픔의 순간이었겠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자식의 묘를 찾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1980년 5.18 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이 여전히 많다고 한다. 빨리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길 바라지만 새로이 출범한 정부에서 그 작업을 수월하게 하게 놔둘지는 미지수다.
무명열사의 묘에서 이름을 되찾은 전재수의 묘. [사진-김종욱]
이후 국립 5.18 민주묘지에 들러 짧게 참배하고 인사드리고 빠르게 묘역을 빠져 나왔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참배객들과 참배의 시간이 겹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올해 광주 순례 일정은 묘역참배보다는 사적지 순례였기에 당시 희생된 열사님들께는 송구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와 정식으로 인사드리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빠르게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장소는 전남대학교였다.
다들 알다시피 전남대학교는 광주·전남 지역 최고의 명문 학교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교이기도 하다. 윤상원, 박관현, 김남주, 박승희 등등 이름만 대도 알 법한 수많은 이들이 이 학교에서, 또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다양한 공간에서 민주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산화했다.
이런 분들의 민주화 운동 기록을 학내에 남기기 위해 학교 교정에 민주길을 조성하여 열사들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단과대학 앞에 추모 조형물, 기념비와 동상 등을 설치했다고 하여 전남대학교를 일정의 첫 코스로 잡았다. 또 광주 시내 곳곳에 산재한 5.18 사적비 중 전남대학교 정문이 1번이라고 하니 그것도 겸한 코스 선택이었다.
전남대학교 교정에서 살짝 늦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코로나 후 학교 교정 출입이 금지되었던 데 반해 올해는 학교 교정 내에서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 중이었고, 우리들은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정문 부근 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민생고 해결을 했다. 오랜만의 소풍 느낌이 들었던 짧은 시간이었다.
점심식사 후 본격적인 전남대학교 민주길 탐방에 나섰다.
정문 좌측 길을 따라 법대 앞 박관현 열사 기념비, 또 야트막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보이는 사회과학대학 앞 윤상원 열사의 추모 동상과 갖가지 조형물들, 문과대학 앞 김남주 뜰과 시퍼렇던 박정희 유신정권의 비민주적 교육정책에 항거한 전남대 교수들의 대학교육 자율성 요구와 교육 민주화를 선언했던 교육지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교육지표마당, 1990년 그려졌으나 훼손이 심해 방치되었던 것을 2017년 후원금을 모아 새롭게 복원한, 전국에 몇 남지 않은 대학 내 벽화 중 하나인 ‘민족해방도’, 5.18 광장을 거치며 전남대학교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확인하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전남대학교 건물 외벽에 그린 ‘민족해방도’ [사진-김종욱]
이후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하차하여 옛 전남도청이 위치한 금남로까지 걸으면서 산재한 사적지 등을 둘러보았다. 5.18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의 첫 발포장소였던 곳, 또 5.18 당시 광주지역 민주인사들이 수습대책위 회의 공간으로 이용했던 홍남순 변호사 가옥, 5.18민중항쟁의 소식을 축소, 왜곡 보도하다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불탄 옛 광주MBC 터, 녹두서점 터,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등을 둘러보는 코스로 안내자의 해설과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옛 전남도청 분수대 앞에서 오월 광주를 걷다‘에 참가한 ‘서울민동과 통일뉴스 세토산책 회원. [사진-김종욱]
전남대학교에서 시작하여 도청을 거쳐 금남로로 향하는 우리들의 여정은 흡사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점에서 순례를 진행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스무 살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정을 함께 한 우리 모두는 80년 5월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 군인들의 총칼에 스러져 간 이들을 생각하며 아파했고, 지난해 광주 영령들 앞에 사과 한 마디 없이 사망한 전두환, 노태우 두 학살자들의 행동에 분노했다.
평생을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며 기록을 남겼던 임종국 선생이 남긴 말을 빌자면 “친일파들의 일제하 행위가 문제가 아니다.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 현실이 문제였다”라는 말에서처럼 전두환과 노태우의 권력 찬탈과 학살행위도 문제였지만 두 사람의 구속 이후 실형을 선고받은 후 곧바로 사면을 단행한 것과 죽는 순간까지 두 사람에게서는 단 한 마디의 사죄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2022년 광주 5.18민족민주열사묘역 참배와 사적지 순례를 겸한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나름 최선을 다한 기획과 진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참가했던 이들의 평가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아쉬운 점 하나는 매년 5월, 광주 망월동을 찾으면 늘 선한 웃음과 넉넉한 품으로 참배객들을 맞이해주었던 배은심 어머니를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현실이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먼 길 고생해서 왔구마. 밥은 챙겨 묵고 댕기는 거여?”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만 맴도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던 순례길이었다.
아마도 내년 5월, 또 광주를 찾을 테지만 어머니의 부재는 올해도, 또 내년도 내게는 아쉬움과 회한으로 남을 것 같다.
재작년 광주 순례시 반갑게 맞아주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이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셨던 고 배은심 어머니. [사진 제공-김종욱]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