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 8기-2학기 13차시 자료 (11월 11일 용)
수필창작의 실제
《참고 작품》
■ 의로운 거위 이야기 /주세붕
경인년 2월에 큰 누님께서 가락리 집에서 돌아가셨다. 누님 댁에는 한 쌍의 흰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누님이 돌아가시자 그 거위들이 안마당으로 들어와서는 안방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 이처럼 애처롭게 울기를 몇 달을 계속하니 온 집안 식구들이 그 때문에 더욱 가슴 아파했다.
나는그 때 감사의 부관이 되어 멀리 있었으므로 그런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듬해 봄에 무릉촌 집이 완성되었기에 그 한 쌍의 거위를 데려다 놓았다. 그런데 두 마리가 다 수컷이었다. 나는 그 당시 쓸쓸하고 심심하게 지내고 있던 참이라 그놈들을 데려오게 한 것이다.
눈처럼 깨끗한 깃털은 티끌 하나 묻지 않았고, 이놈이 울면 저놈이 따라서 우는 것이 마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고, 물을 마셔도 함께 마시고 모이를 쪼아먹어도 함께 먹었다. 또 그놈들이 마당을 빙빙 돌며 춤추듯 뛰어다니는 모양이 마치 서로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나는 정성으로 모이도 주고 물도 떨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날마다 그놈들과 노는 것이 하나의 재미가 되었는데 뜻밖에도 그 해 시월 열나흗날 밤에 그 중 한 마리가 죽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위 우리를 살펴보니 살아 있는 놈이 죽은 놈을 품고서 날개를 치며 슬피 울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울음소리가 하늘까지 사무치니 보는 사람마다 불쌍하고 안타까워 한숨을 지었다. 동네 아이들이 와서 죽은 놈을 가져가자, 산 놈은 바로 일어나 이리저리 배회하기 시작했다. 원망 어린 소리로 울어대며 지난날 저희들이 놀고 모이를 쪼아먹던 곳을 따라 사방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마치 죽은 놈을 찾는 것 같았다. 울음소리는 더욱 간절해지고 고통스러워지더니 열흘쯤 지나자 목이 쉬어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이 거위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 거위는 하찮은 미물인데도 주인을 사모하는 정이 그처럼 충성스럽고,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 이처럼 의로우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팔기도 하고 자신까지도 팔아 넘기는 사람들이 열에 다섯도 더 되는데, 하물며 나라에 충성하는 이는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천지 사이의 많은 무리 가운데 오직 인간이 가장 귀한 존재이다. 그런데 저 꽉 막힌 미물인 거위는 군자의 지조를 지녔고, 신령스럽다는 인간은 도리어 미물만도 못하니, 그렇다면 사람의 옷을 입고도 말이나 소처럼 행동하는 그런 놈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반대로 깃털로 몸을 감쌌지만 어질고 의로운 마음을 가진 짐승을 그냥 미물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거위야. 거위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사람들의 나쁜 마음을 돌려서 너와 같은 마음을 지니도록 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는구나. 그러니 앞으로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답답한 노릇이구나.
이런 까닭으로 의로운 거위의 이야기를 적어서 오래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강생 습작품》
1. 행복한 선택 /김옥수-2
1. 토요일마다 문학 강좌를 들으러 간다. 집에서 문학관까지 자동차로 왕복 2시간,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강좌는 물론 문학관을 오가는 시간까지 자유롭고 행복하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수필을 배우러 다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차피 그들의 이해를 얻어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상관없다.
2. 문학관과 가까운 곳에 세컨 하우스를 둔 친구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거기서 친구들을 만나 허물없는 수다를 떤다. 계절 따라 바뀌는 정원은 내가 수고하지 않아도 그저 누릴 수 있어 감사하다. 각자 음식을 한 가지씩 가져오기도 하고, 근처 또는 경주 맛 집을 탐방하기도 한다. 수필을 배우기 전에는 그 모임이 기다려졌다. 그러나 올해는 빠질 때가 많았다. 가더라도 강좌가 끝난 후라야 합석하게 되니 친구들의 원성이 높다. 신문기자였던 친구는 본인이 가르쳐줄테니 그만두라고까지 한다. 기사와 수필은 작성법이 다르다는 것을 몰라 하는 말은 아니다. 오랜 친구들과의 짧은 만남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나 배우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3. 현실요법의 창시자 윌리암 글라써는 사람을 움직이는 근본 동기가 생존, 사랑과 소속, 힘과 성취, 자유 그리고 즐거움이라는 다섯 가지 욕구를 충족하려는 성향에 있다고 한다.
4. 그 다섯 가지 욕구는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 사랑 받고 소속되기 원하는 욕구, 경쟁하고 이루고, 인정받기 원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 자유롭게 선택하고 마음대로 다니고 싶은 욕구, 즐겁게 지내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욕구로 설명된다. ‘새로운 것 배우기’는 즐거움의 욕구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성취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한다.
5. 욕구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한 두 개만 충족되어도 삶의 만족도는 어느 정도 높게 나타난다. 그러나 강도가 높은 욕구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나 욕구 충족을 위한 바람(want)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바람을 얻기 위한 행동은 항상 긍정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바람을 이루기 위한 긍정적인 선택을 하고 욕구 충족이 되면 행복해진다.
6. 나는 5가지 욕구 강도가 모두 높은 편인데 그중, 힘과 성취의 욕구가 좀 더 높게 나타난다. 주로 가르칠 때나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자기 효능감이 생겨 행복하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수필을 배우는 시간이 행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7. 강사님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디테일도 유쾌하고 재미있게 묘사한다. ‘모든 일상이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매주 본인의 일상을 예화로 들어 쉽게 가르쳐 주신다. 짜증나거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장면도 배우는 이로 하여금 웃음이 나도록 전달한다. 가끔 반복되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래도 재미있다. 문우들의 습작을 일일이 첨삭하고 이론을 접목시켜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교수법도 유익하다.
8. 회를 거듭할수록 글의 구성이 달라지고 문장이 다듬어져가는 문우들의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끔 쓰고 싶은 소재가 떠오르면 몰입할 수 있어 좋다. 과제로 올린 습작들이 난도질당할 때는 부끄럽지만, 어쩌다 칭찬 듣는 날도 있으니 주눅 들지 않는다.
9. 수필집을 읽다가 의도적인 편집순서가 보이면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강사님이 알려준 대로 독자가 완독할 수 있도록, 완성도 높은 글과 조금 못한 글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서이다. 최근에 나눠주신 수필집은 고무적이었다. 작가의 단상을 모은 포켓용 수필집인데 가방에 넣고 다니며 짬날 때마다 꺼내볼 수 있어 좋다. 언젠가 나도 그런 책을 만드는 꿈을 꾼다.
10. 매주 토요일 수필문학 강좌를 통해, 나는 배움에 대한 사랑과 소속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하나씩 새롭게 배워가며 힘과 성취의 욕구가 채워진다. 문학관 계단을 오를 때부터, 솔직한 고백들에 대한 공감과 웃음이 있는 수업까지 재미있으니 즐거움의 욕구가 충족된다. 집 밖을 나설 때부터 4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도 좋다. 소확행을 실천하며 얻는 기쁨으로 인해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니 더 좋다. 그러므로 5가지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토요 문학 강좌 듣기’는 올해 내가 선택한 것들 중 첫 번째로 ‘행복한 선택’이다.
2. 지극한 사랑 /권은희3
1 종갓집에 시집와서 1남 1녀를 낳았다. 시 어르신들은 그저 손주들만 보면 만면에 웃음을 띄셨다. 셋째로 아들을 바라셨지만 남편과 나는 둘만 낳고 단산을 했다.
2 멀리 분가해서 살면서 무늬만 종갓집 외며느리지만 그래도 명절에는 세상없어도 시댁에 갔다. 한 해는 차가 밀려 도저히 빨리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좀 늦었다고 대문 안에 들어서는데 왜 이제 오냐 일은 늙은 시에미 보고 하라는 거냐며 큰소리로 꾸중을 하셨다. 그러다가도 애들이 "할머니"하면 "그래, 그래 내 강아지들" 하며 금방 입이 귀에 걸렸다. 속상하고 섭섭해서 꽁하고 있다가도 애들을 귀하게 여기시는 어머님을 뵈면 금방 녹아 내렸다.
3 어머님은 외아들인 남편과 손위 시누이 한분 손아래 시누이 네명을 두셨다. 셋째 시누이까지 결혼을 해서 외손주가 여러 명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우리 애들만 예뻐해서 시누이들은 엄마는 친 손주들 밖에 모른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4. 아이들은 방학이면 꼭 어머님 댁으로 갔다. 거기 가면 고종사촌인 한두 살 많은 형들과 누나, 서너 살 많은 언니, 오빠들이 있으니 아이들은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게다가 큰시누이, 둘째 시누이가 가까이에 살고 있어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며 신나게들 놀았다. 아이들끼리 놀다 다투는 일이 있어도 친 손주 편 만 드니 조카들은 외할머니는 울산 동생들만 좋아한다고 울고 불고 했다.
5 어머님 댁에는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가 3학년까지 갔다. 그 다음 해부터는 막내 조카까지 중학교 입학 하면서 공부 및 여러 가지 이유로 같이 놀아줄 수 가 없었고 우리 애들도 비슷한 이유로 특별할 때 만 어머님 아버님을 뵈러 갔다.
6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식 및 졸업식에 꼭 두 분이 오셔서 우리 손자가 제일 멋지고 잘생겼다고 하셨고, 또 우리 손녀가 제일 예쁘고 똑똑하게 생겼다며 좋아 하셨다. 교복을 똑같이 입고 있어도 금방 손자, 손녀를 찾으시며 싱글벙글 하셨다. 대학교 졸업식에 오셨을 때도 학사모를 씌어드렸더니 거절하는 듯 하더니 웃으시며 아버님 어머님 번갈아가며 쓰고 사진을 찍고 즐거워 하셨다.
7 아들이 결혼을 하고 뒤이어 딸도 결혼을 했다. 아버님은 애들 결혼 전에 돌아 가셨다. 어머님은 아들 결혼식에 꼭 참석해야 한다며 휠체어를 타고 오셨다. 아들이 결혼을 하자 어머님은 증손주를 보고 싶어 했다. 당연한 일인데 아들놈과 며느리는 아이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님은 전화를 할 때나 우리를 만날 때마다 친 손주 애기를 했다. 며느리한테 한약은 지어줬느냐, 흑염소가 좋다고 하더라, 병원에는 가봤느냐 했다. 짜증이 났지만 그저"네 네" 했다. 그러다가 결혼 3년차인 딸아이가 임신을 했다.
8 어머님께 제일 먼저 소식을 알렸다.
"장한 일 했네 장한 일 했어" 하며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지금은 임신 초기라 어렵고 안정기에 들면 찾아 뵙겠다고 했다.
9 얼마 후 어머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를 데리고 병문안을 갔다. 손을 잡아드리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은 못 해도 다 알아 보셨다. 어머님은 그렇게 계시다 돌아 가셨다.
10 49제는 금방 돌아왔다. 정성스레 불경을 외시는 스님과 우리 모두 한마음이니 어머님은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다. 눈물을 훔치며 나오는 시누이들을 다 불러놓고 남편은 엄마는 멀리 좋은 곳으로 여행가셨으니 마음속에서 엄마를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탔는데 어머님하고 함께 살던 시누이가 오더니 봉투를 줬다. 뭐냐고 웬 봉투냐고 했더니 "이거 엄마가 조카 주라고 한 거야 다른 조카들한테는 봉투 준 일 없어" 다른 시누이들이 들을까 봐 속삭이듯 얘기하고 갔다. 조카들도 결혼을 해서 외 증손주들도 여러 명 있었다.
11 뭉클한 게 감동으로 울컥하더니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 어머님과 한 말이 생각났다. 어머님은 "니 며느리는 시집온 지 5년이나 되었는데 애기를 낳아야지 밥값도 못하냐" 역정을 내며 말씀하셨다. 참고 참다 폭발한 나는 "어머님은 어머님 며느리인 제 잘못만 말씀하세요 내 며느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하고 받아 쳤다. 어머님 방식대로 친 손주를 애타게 기다린 건데 죄송한 마음에 눈물은 끝 없이 나왔다.
12 그러다 봉투 안을 들여다 보니 예상대로 돈이 들어있었고 봉투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삐뚤삐뚤한 글씨로 딸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 밑에는 '이시추하 마시는거 사' 라고 쓰여 있었다. 임신 축하한다 입덧 때문에 힘들테니 맛있는 거 사먹으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님 은 하루에도 몇 번씩 봉투를 만지며 손녀딸을 기다리셨을까, 얼마나 만졌으면 손 때가 묻어 꼬질꼬질하게 구겨져 있을까, 폭풍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급기야는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소리 내서 울었다. 오죽하면 옆에서 운전만하던 남편이 "엄마가 다 알고 있어 그만 울어" 했다
13 집으로 오는 길에 딸네 집에 들려 봉투를 주니 딸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딸을 안아주며 "아기 순산해서 건강하고 훌륭하게 그리고 사랑도 많은 아이로 잘 키워 뱃속에서 아기도 할머니 사랑을 느꼈을 거야 하며 어줍잖은 위로를 하고 나왔다.
14 '어머님, 어머님의 끝이 없는 지극한 사랑 고맙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딸한테서 메세지가 왔다. 내용인즉 할머니가 주신 돈은 쓸 수가 없어 간직할려고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찰떡이(태명)가 오랫동안 쓸 수 있는 물건을 생각해 구입해서 쓸때마다 할머니 생각하고 찰떡이한테도 얘기 해줘야겠다. 편찮으시기 전에 찾아 뵙지 못 한것이 가슴 아프고 죄스럽다는 내용이었다.
15 어머님 며칠전 손녀딸이 건강한 사내아이를 순산 했습니다. 어머님이 계셨으면 '아이쿠 잘했구나. 신통 하기도하지 내 강아지' 하시며 함박꽃처럼 환하게 웃으셨을 모습이 선 합니다. 어머님의 지극한 사랑 감사합니다. 오래 기억하고 오래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3. 셋째 오빠와 엄마/남경수 4
작년 9월, 흰남노가 몰아치던 날 셋째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쏟아지는 비와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보다 내 마음이 더 많이 아팠던 날이다.
오빠는 장애인이다. 태어날 땐 정상으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사고로 장애를 입었다. 엄마가 잠시 일을 보러 가는 동안 큰오빠가 돌쟁이 셋째 오빠를 업고 있었는데 큰오빠가 그만 돌에 미끄러지면서 셋째 오빠를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돌에 혀를 다쳐서 피를 엄청 흘렸다고 한다.
부산에 남부민동 언덕배기에 살던 시절이라 엄마는 큰 병원에 갈 정신도 없이 동네 병원으로 오빠를 데리고 갔다. 혀가 반쯤 끊어진 상태에서 아이를 양쪽에서 붙잡고 혀를 꿰맸다고 한다. 오빠는 그때 충격이 너무 심했던지 언어장애와 발달장애가 생겼다. 발음이 분명치 않아 알아듣기가 어렵고 신체 발달은 정상이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사고를 했다.
오빠는 동급생들이 놀리고 괴롭히는 사고가 많아 초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이들은 ‘바보다’ 하면서 때리기까지 했다. 그때만 해도 장애 학생에 대한 교육이나 제도가 전무 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장애가 있는 오빠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지 못했다. 가족이 밖에 외출할 때도 오빠는 집에 남아 있었고 사람들 앞에 보이는 걸 싫어했다. 나도 어린 마음에 ‘바보 오빠’를 부끄러워했다. 오빠는 집에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엉뚱한 행동을 하면 아버지께 혼이 났다. 오빠 편은 엄마가 유일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무심하게 자랐다.
오빠의 간암이 발견된 것은 7년 전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B형 간염이 간암으로 발전한 케이스였다. 이미 간 전체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을 할 수 없어 색전술을 받았다. 큰오빠와 둘째 오빠가 돌아가면서 병원 치료를 도왔다. 몇 년 뒤 또 한 번의 색전술을 받았고 그 이후로는 약물치료만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하고 오빠, 둘이 남게 되었다. 오빠는 다리가 불편한 엄마의 손발이 되어 엄마를 챙겼고 엄마는 오빠를 어린아이처럼 돌보았다. 아마도 그 시절이 오빠에겐 무척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혼내는 사람 없이 온전하게 엄마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2022년 봄부터 병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항암치료를 하기 위해 방사선치료를 받아서 머리카락이 빠졌다. 오빠는 자기가 무슨 병인지 몰랐다. 엄마도 모르고 계셨다. 그저 소화가 안 되는 병인 줄 알고 있었다. 구십이 다 된 엄마에게 오빠의 병명을 굳이 알려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름쯤.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서 백병원에 입원했다. 암은 이제 여러 장기로 다 퍼져서 손을 댈 수 없었다. 오빠는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찾았고 집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병원에 더 입원해 있어야 하는데 엄마랑 떨어져 있는 것을 너무 힘들어해서 집으로 왔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들이 보고 싶어 애를 태웠다. 집 집마다 전화해서 오빠가 잘 지내는지 묻는 바람에 모두 밤잠을 설쳤다. 또 한참을 버티다 결국 8월 말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엄마 옆에 있고 싶어서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 것 같다.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진통제만 먹고 집에 있었다.
아침에 결국 일어나지 못한 오빠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결국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엄마를 본다고 집에 들렀다 간다고 했는데 병원 규칙상 코로나 때문에 안 된다고 해서 바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은 우리들만 요양병원으로 오빠를 보러 갔다.
우리는 생명연장 시술을 받지 않겠다는데 동의하고 고통만 없게 해달라고 했다. 너무 냉정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참 아팠다.
코로나 때문에 유리 칸막이 밖에서 마이크로 겨우 대화를 나누었다. 오빠는 집에서 가까운 아는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오빠, 여기도 괜찮은 곳이야. 좀 있으면 좋아질거야. 나중에 나으면 집 근처 병원으로 가자”라며 거짓말로 위로했다. 그런데 오빠가 엄마를 찾지 않았다. 조금 단념하는 눈빛 같은 게 느껴졌다. 아니면 엄마가 걱정할까 봐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다음 날은 남편과 오빠들이 면회를 가고 나는 혼자 남은 엄마를 챙겨야 했다. 엄마는 연신
“말은 하더냐?”, “밥은 먹더냐?”, “알아보더냐?”고 물었다. 발톱을 안 깎고 갔는데 누가 발톱을 깎아주나 하며 어린아이를 떼어낸 엄마처럼 안절부절했다.
우리는 거짓말로 엄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집에 오기는 힘들겠다고 이야기했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를 못 간다고 했다. 엄마는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자기 몸도 불편한데 온통 오빠 걱정뿐이었다. 태풍 힌남노가 온다고 하고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어 내 집으로 모셔 오게 되었다.
엄마는 오빠 걱정에 불안해하며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했다. 몸이 아파서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을 되풀이했다. 창문 밖은 올라온다던 태풍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날은 어두컴컴했다. 남편은 태풍 준비한다고 회사에 가서 밤을 새웠고 엄마랑 둘이 남아 있었다.
엄마는 잠자는 오빠를 괜히 깨어서 병원에 보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엄마를 억지로 자게 하고 불을 껐다. 새벽에 흐느끼는 소리에 잠을 깼다. 엄마였다. 엄마는 가져온 옷 보따리를 다시 주섬주섬 챙기면서 울고 있었다.
“잊어야지, 이젠 잊어야지 ”
“안 울어야지. 이젠 안울거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둘째 오빠한테서 연락이 왔다. 오빠가 떠났다고. 아 그래서 어젯밤에 엄마가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 오빠가 떠나면서 엄마를 찾았던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았다. 둘째 오빠가 제일 먼저 도착해서 임종을 보았다. 아직 몸이 따뜻했다고 한다.
엄마를 모시고 남편과 다시 친정으로 갔다. 엄마 앞에서 울 수도 없었다. 남편과 오빠들이 장례식장을 지키고 나는 친정에서 엄마를 챙겼다. 엄마의 오빠 걱정을 또 듣고 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저녁에 잠시 오빠한테 갔다 온다며 장례식장을 찾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오빠들과 올케뿐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고 내일 바로 화장한다고 했다. 오빠가 가고 싶어했던 동네 병원에서 장례식을 한 것이다.
오빠의 죽음을 엄마한테 알려야 하는 힘든 선택의 시간이 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구순의 노모에게 아들을 죽음을 알리는 게 맞는지. 모르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오빠들은 알리면 엄마가 충격받아 돌아가신다고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아들의 죽음을 모른다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라면 힘들어도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심지어 인터넷 검색까지 해 보았다. 거기서도 찬반 양론이 팽팽했다. 이것은 정답이 없는 일이구나. 각자 상황 따라 해야 하는 일인가 보다 싶었다. 오빠들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
다시 엄마를 모시고 언양으로 왔다. 남편과 오빠들은 장례식장을 지켰다. 마음은 지옥인데 엄마는 위로해야 하고,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싶었다. 태풍이 가까이 왔는지 비바람은 거세게 몰아치고 비구름이 우중충한 하늘은 잔뜩 지푸려 있었다. 또 밤이 지나갔다. 엄마가 자꾸 오빠의 상태를 물어보니 미칠 지경이었다. 슬픔을 견딜 수 없어 친구 전화를 받는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 안에서 울었다. 오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엄마를 챙겨야 했다. 화장터에서 오빠들로부터 끝났다고 연락이 왔다.
오빠가 떠나던 날은 하늘이 대신 울어주듯이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렇게 셋째 오빠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환갑을 넘긴 그다음 해에 62년간 붙어있던 엄마 곁을 떠났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보낼까 봐, 엄마랑 떨어질까 봐 아프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참고 견디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까지 간 것이다. 엄마 옆에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있다가 갔다.
‘다음 생에는 건강한 몸으로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아’ 오빠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비바람 속에 눈물을 감추었다.
오빠가 떠나고 나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오빠와의 추억이 없었다. 나이 차이도 있고 말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다 보니 긴 대화를 잘하지 않았다. 대학 진학부터는 집을 떠나 살았기에 더욱 오빠의 삶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참 슬픈 일이었다.
늘 친청에 오고 갈 때 오빠에게 용돈을 드렸다. “오빠 엄마 말 잘 듣고 엄마 잘 챙겨”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큰 덩치에 순한 성격, 아무거나 잘 먹고 있는 둥 없는 둥 있었던 오빠. 오빠의 빈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갑자기 혼자 된 엄마가 자꾸 정신을 놓는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 못 간다, 이제 오빠는 거기서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힘이 없고 우울해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해서 혼절하기도 했다. 이 거짓말을 언제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거짓말하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였다.
학교에 돌아와서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리니까 “그래도 마지막 입관 때는 아들 얼굴을 보는 게 맞지 않나?” 하셨다. 자식은 자식 입장에서만 생각한다고.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오빠의 49제를 지내면서 마지막 제 전에는 엄마한테 말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결국 그 전에 엄마가 알게 되었다. 오빠 앞으로 온 우편물에서 ‘사망’이라는 단어를 읽은 것이다.
“내가 글을 못 읽는 줄 아나? ”
“화장해서 어디다 뿌렸나? ”
다시 오빠들이랑 입을 맞추었다. 요양병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빠가 죽어서 엄마가 충격받을까 봐 나중에 말하려고 했고, 지금 절에 잘 모셔두었다고. 마지막 제는 엄마를 모시고 갔다.
엄마는 삶에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쾡해졌다.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고 눈빛은 초점을 잃었다. 이제부터는 엄마를 챙겨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요양보호사를 부르고 일주일에 두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엄마를 챙겼다. 오빠들도 있었지만 내가 챙겨야 할 몫이 더 컸다. 오빠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내 눈에는 보였다. 같은 여자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녀오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증을 앓았다.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전달이 됐기 때문이다.
오빠 집도 우리 집도 길어봐야 이틀 이상 계시지 못했다. 엄마가 안정되어야 나도 안정될 것 같았다. 내 삶도 같이 흔들렸다.
“살아서도 효자, 죽어서도 효자 아들, 내 오른팔”
엄마는 셋째 오빠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몇 번을 쓰러지고 치매가 생기고 갑자기 늙어버렸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무렵부터 엄마는 경로당에도 나가고 다시 일상을 살아내기 시작했다. 오빠에 대해선 가끔 한 번씩 묻는다. 왜 그렇게 빨리 떠났냐고.
“부모한테 잘해라, 최선을 다해라”라는 말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를 돌보는 것은 각자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처럼 하지 않느냐고 원망해서도 안 된다. 누구처럼 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형제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내 맘처럼 되지 않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부모도 자식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참으로 긴 겨울이었다. 오빠의 죽음. 홀로 남은 엄마. 엄마를 돌보면서 느꼈던 오빠들과 소통되지 않았던 아픔. 여자 형제가 없어 홀로 삼켜야 했던 이해 받지 못한 마음들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이 녹록치 않음을 배웠던 힘든 시간이었다.
그 무거운 짐을 다 견뎌내고 나니 단단하게 단련된 마음이 보였다.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혼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고통은 사람을 아프게 하지만 한 뼘 더 성장하게 해준다는 것을 배웠다.
4. 초승달이 된 햄버거/조정숙
1. 도윤이 가방에서 먹던 햄버거가 나왔습니다. 내가 무슨 햄버거냐고 묻자 눈물을 글썽이며 할머니 드리려고 만들어 왔는데 오면서 먹었다고 합니다.
도윤이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손자인데 딸이 직장에 다녀 아침, 저녁으로 돌봐줍니다.
2.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봄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옵니다. 돌봄 교실에서는 글짓기, 만들기, 그리기, 음악, 요리등 다양한 수업을 합니다. 무슨 수업을 하든 결과물을 들고 오는데 오늘은 햄버거를 만들었나 봅니다.
3. 도윤이는 집에 오는데 가방을 만져 보니 따뜻했고 솔솔 풍겨오는 햄버거 냄새가 났습니다. 할머니는 햄버거를 안 먹어 봤는 거 같아 갖다주고 싶어 빨리 오는데 자꾸 햄버거가 먹고 싶어졌대요. 그래서 가방을 열고 빵 봉지를 뜯었습니다.
4. 빵보다 침이 먼저 넘어갑니다. 한입 베어 무니 달콤했습니다. 자주 먹는데도 꿀맛이었습니다. 속에 들어 있는 야채가 흩트러져 조금만 더 먹고 갖다 드려야지 하면서 먹다 보니 반달이 되었습니다. 도윤이는 햄버거의 고소한 냄새가 좋기도 했지만 밉기도 했습니다.
5. 할머니한테 내가 만들었다고 자랑을 하고 맛도 보여 주려고 했는데 빵은 어느새 반달에서 초승달이 되었습니다. 다 먹지 왜 남겨 왔냐고 했더니 울먹거리며 할머니 조금 남은 거라도 먹어 보라고 합니다.
6.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꼭 안아 줬더니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음에 더 맛있는 거 만들면 먹지 말고 가져 오랬더니 그제야 얼굴이 환해집니다. 딸은 무엇이든 학교에 갔다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하고 그날 배운거나 만든 것을 보여 주라 했거든요.
7.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서울 게 없는 아이인데 엄마, 아빠는 무서워 합니다. 폰을 보다가도 퇴근해 오는 차 소리만 나면 안 본척 합니다. 아직은 엄마의 말이 법입니다.
8. 키워줬다고, 커서 돈 벌면 나한테 백 만 원을 주겠다고 오래 살아라고 하는 아이, 축구를 좋아해서 유명한 축구 선수를 꿰고 있고, 결손가정이나 다문화 가정 아이를 데려와서 노는 도윤이를 보면 아이한테도 배울점이 있습니다.
9. 자라면서 언젠가는 내 보살핌에서 벗어나겠지요. 고소한 햄버거 냄새의 유혹에는 이기지 못하고 초승달을 만들어 왔지만 도윤이가 지금처럼 따듯한 마음으로 배려하면서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자랐으면 하는 바랍입니다.
5. 총각김치/ 이숙희3
1. 매년 양력 1월 1일에 우리 친정 집안에는 시집간 딸과 사위들과 본집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계를 한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다. 김서방· 박서방· 오서방· 최서방· 염서방··· 등 장인 장모님과 집안 어르신들은 사위들을 귀하게 여기고 살갑게 챙기신다.
2. 우리집안은 흥이 많다. 내가 어릴 때 고모님 형부 집안어른들이 모여서 3~4일씩 장구치고 노래하며 춤추면서 놀았다. 중국 고대문헌에도 동이족에 대한 언급이 있다. “며칠을 노래하고 춤추는 민족이라고” 100Km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 우리민족은 흥의 DNA가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것 같다.
3. 모이는 집마다 음식의 특징이 있다. 몇 해 전에 거창 큰 언니 집은 묵 채와 손 두부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작년에 창평 오빠 집에는 총각김치가 대인기였다. 가장 보편적인 맛이 모두 좋아하는 맛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모님으로부터 먹어오던 그 맛을 그 총각김치 속에서 느낀 것 같다. 가마솥에 불 때서 갓 지은 밥에 양푼이로 살얼음이 언 장독대에서 꺼낸 맛이 갓 든 김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미각을 불러 일으키는 맛·정·그리움이 배여 있었다.
4. 수육, 양념 가득 묻힌 배추김치, 두부, 오징어무침, 떡, 홍시보다도 총각김치에 진심이 담겨졌다. 양념도 묻지 못한 희끄무레한 그 색깔 무엇이 모든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무도 큰 무는 잘 대접받고 다치지 않게 바람 들지 못하고 춥지 않게 좋은 집이 제공된다. 제일 작고 못난 무는 한 귀퉁이로 밀쳐져 귀찮은 존재가 된다.
5. 작은 무로 화장도 곱게 하지 못하고 찍어 바른 듯 바르지 않은 듯 속살을 다 드러내 보이면서 중얼거린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고 작다고 줄 것이 없다고 그러면서 모두 다 주는 그 맛이다.
6. 사람도 꼭 잘난 사람 성공한 사람이 인기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원의 소설 똥 퍼는 사람(예덕선생님)처럼 곳곳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 잘 곰 삭은 총각김치처럼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작은 무도 큰 무의 받침대가 되듯이 큰 바위도 무수한 모래, 자갈, 흙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큰 바위로 존재하지 못한다.
7. 나도 집에 와서 작은 무로 총각김치를 담갔다. 항아리에 주문을 외면서 “ 맛있어라.” 양념도 많이 넣지 않았다. 위에는 넓은 배추 잎을 덮개로 눌러 놓았다. 보름이 지난 후 항아리 뚜껑을 열어 맛을 보았다. 조금 비슷한 맛은 났지만 시골 오빠 집에서 먹었던 맛은 아니다. 나는 손맛이 없는 것 같다. 똑 같은 방법으로 담갔는데 맛은 따라 갈 수 없다.
8. 김치의 맛은 고종 올케언니의 내공의 힘인 듯하다. 고종오빠는 볼 일이 있어 외출해도 밖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영 입맛에 안 맞아 못 먹는다고 늦은 시간에 와도 굶고 있다가 집에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요즈음 많이 사용하는 맛내기 MSG가 들어간 음식은 회피하는 것 같다. 입맛은 길들이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그렇게 오빠의 입맛에 맞추어 음식을 하다 보니 솜씨가 더 좋아진 것 같다.
9. 어느 듯 낙엽이 지는 계절이 온 것을 보면 김장철이 가까워 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주부들의 걱정은 김장을 해야 올 한 해 할 일을 다 했다고 한시름 놓는다. 주위에 사람들은 김장을 갖다 먹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나는 부모님 시어른 모두 연로하셔서 젊을 때부터 아무렇게나 만들어 먹었다. 지금은 모두 좋은 세상으로 가셨다. 아무것도 못하고 남편과 내가 두 춤피 라면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도 하셨다. 그래도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다.
10. 잘은 못 해도 MSG에 의존하지 않고 내 입맛에 따라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있다. 이순도 지나 고희를 바라보는 중간 지점에도 모르는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어떨 때는 자식들에게 민망한 일도 많다. 똑 소리 나지 않은 성격도 한 몫을 하고 내가 관심 갖기 싫은 부분에는 무관심 하는 것도 일조를 한다.
11. 이제는 좀 더 어른스러워지고 싶다. 음식도 잘 하고 집안 정리도 잘 하면서 예법에 맞춰 행동하는 우아한 다섯 시이고 싶다. 올 해도 총각김치에 도전해 보고 싶다. 고종언니 만큼은 못해도 나름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에 도전장을 던져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