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시각으로 빚어낸 소통의 미학
- 이한재의 수필세계
오경자 (수필가, 문학 평론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통한 세계관
문학은 작가의 체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수필은 그 체험이 바로 글감이 되고 주제의 산실이 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바로 그것이 필수 요소인 것이 다른 장르의 문학과 구별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자연히 신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쓰게 되기에 신변잡사라고 쉽게 홀대받기도 한다. 물론 수필은 신변잡사에서 출발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래야 한다. 그것이 수필의 본령이다. 어떤 사물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말함에 있어서도 그 심오한 뜻을 정면으로 주장하는 것은 학술적인 글이다. 수필은 그런 생각을 펼치더라도 자신의 소소한 체험을 토대로 출발하고 그것들과 함께 버무려 빚어내는 오묘한 작품이다.
이런 전개는 말하기는 쉽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이상할 정도로 힘든 부분이다. 체험은 누구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선택해서 글감을 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깊은 관조를 통해 주제로 우려내서 독자의 가슴에 감동으로 화살을 꽂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수필가 이한재는 이런 수필 쓰기의 귀재라 할 만큼 그의 수필은 담박하면서도 상념을 가지고 작품 한편을 이끌어도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것은 그가 수출입국의 전사로서 평생을 산업 일선에서 일하면서 10여년에 걸친 해외 생활을 통해 접하게 된 넓은 세계와의 만남 덕이다. 잠간 동안의 해외출장으로 얻는 단편적인 섭렵이 아니라 아예 그곳에 정착하면서 원주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생활이 그를 세계인이 되도록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도 전문분야에서 자기의 길을 파고드는 학자나 예술가의 삶이 아니었다. 수출 일선에서 우리의 물건을 팔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경쟁 일선에서 첨병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에게 깊이 있게 현지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하는 숙제를 안겨주었다.
어려서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고진감래(苦盡甘來)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두 가지 교훈이 그에게는 그 숙제를 푸는 훌륭한 열쇠가 되어주었다. 그의 수필 속에는 이 두 가지 교훈이 바탕에 깔려있고 주제를 이룰 때가 많다. 나라 안에서만 생활하는 경우였으면 그 영향의 범위가 좁았을 수도 있겠으나 이미 다양한 문화와 접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게 된 그는 세계인의 시각으로 소통하는 수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세상만사의 다양성을 논함에 있어서도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여러 상황들을 이야기 하는 속에 다양성이 독자에게 이해되어 녹아들어가고 있는 것이 그의 수필이다. 편견 또한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계절도, 삶의 부침도, 성취와 실패 까지도 그저 자연의 순환이고 섭리이다. 거기서 당연히 귀결되는 주제가 받아들여짐으로 형상화 된다. 그런 것을 이한재는 어렵고 힘들게 전개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남의 말 하듯 풀어간다. 그게 바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인의 시각이다. 여기서 그의 소통이 시작되고 그 소통은 유쾌하다.
순리와 긍정이 주제
세상만사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가 왜 이래, 라고 생각하면 실망이지만 나도 이것은 갖고 있잖아,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부자일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 시대가 그랬듯이 가난이 일상이었다. 너나없이 근근이 살아가던 시대에 어른들은 양식이 떨어져 가 뒤주 밑 긁히는 소리를 어쩌면 가장 무서워했는지도 모른다. 쌀독이 긁힌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의 어린 시절에 그 일로 노심초사하던 어른들을 생각하며 이제 풍요로운 세상에서 세월의 지나감을 그에 비유해 주제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다만 욕심을 내지 않고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모든 것에 감사하며 기쁘며 건강하게 그날에 최선을 다하면서 헤프게 생각되는 세월을 보람되게 살아야겠다. 세월의 뒤주 밑이 긁히지 않게. -( 세월이 헤프더라도)
그는 수필 ‘순리’에서 찾아오는 노경의 여러 일들을 서글픔이 아닌 순리로 받아들이면서 긍정으로 맞이한다. 또한 ‘익어가는 길’에서는 노년은 성숙을 의미한다면서 담담하게 말한다.
- 이 친구 말도 맞고 저 친구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하루에도 여러 가지 불편하고 부정적인 일들이 수없이 지나칠 때마다 나에게 스스로 묻기를 반복한다. ‘살아가면서 어찌 좋은 일들만 있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그냥저냥 살다보면 숙성되어 가는 거지.’라고.( 익어가는 길)
수필가 이한재는 순리로 매사를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의 수필 ‘세상만사 새옹지마’에서 옛 고사를 인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매사는 지나고 보면 다 섭리가 있음을 암시한다.‘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의 작가로서의 심경을 밝히고 있는 부분은 해학적이고 은유적이다.
-반 컵의 물을 보고 반 컵 밖에 안 남았네, 라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아직 반 컵이나 남았네, 라고 긍정적으로 말 할 수도 있듯이 ‘내 나이가 벌써’ 가 아닌 ‘내 나이가 어때서’ 라고 내 자신에게 묻고 난 후 ‘글쓰기 딱 좋은 나이인데’라고 흥얼거리며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글을 쓴다. -(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바탕에 깔고 은유와 비유를 잘 구사하며 해학적인 표현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곁들인다. 이한재 수필가는 일찍이 시를 쓰는 것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하여 수필의 결말을 자작시로 마무리하며 주제 형상화의 밀도를 높이기도 한다. 매사에 이런 태도로 대하니 그의 글은 모든 것을 포용으로 승화시킴으로서 독자에게 유익을 주는 문학 본령의 임무에도 매우 충실한 편이다.
역지사지와 고진감래의 주제를 비유와 은유로 표현
사람들의 다름과 생각의 다름, 문화의 다름, 등을 폭넓게 수용하는 그의 수필은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주제로 하면서 포용하고 인정하며 하나로 아우르는 게 이한재의 수필이다. 그는 ‘편견에 대하여’ 라는 수필에서 실례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덤덤하게 설파해 나간다. 상념을 상념으로만 풀어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을 무난히 마무리 짓는데 성공했다.
수박이라는 수필에서는 동네 마트 한 편에 마련된 시골 원두막의 수박코너를 보면서 어릴 적 시골 원두막이 생각난다. 회상에 천착하지 않고 어린 시절 수박 서리하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역지사지 교육이 생각나 그들의 장난어린 수박서리에 동참할 수 없었던 심정을 진솔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따뜻한 품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감사와 수분(守分)으로 사회적 책임을 무리 없이 주제로 실어 나른다.
‘암송연습’, ‘낮은 곳 이웃들’을 비롯한 여러 편의 수필에서 이한재는 감사와 사회적 책임을 토로한다. ‘고급 승용차,’ ‘생활 속의 감사’, ‘욕망’, ‘한세상’, ‘이미지’, ‘카네이션을 받으며’, 등에서 그는 마음껏 감사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며 배려로 세상을 맑히는 글을 쓰고 있다. ‘생각의 추’에서는 자칫 자랑으로 오해 받기 쉬운 글감을 잘 소화해서 수분의 재미와 감사, 배려로 일관되게 주제형상화에 성공한다. 그 표현은 역시 은유로 승화되고 있다.
- 여느 때는 3등 칸 사람들에게 외람스럽게도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불편을 모르고 오히려 만족하고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기야 3등석은 일반석이다. 우리 일반서민의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2등석에 앉아서 1등석을 바라보면 불편하게 느끼다가도 뒤쪽 3등석을 생각하면 편하다. 내 마음이 간사해서 그런지 모른다. 아니면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여행도 이것저것 저울질 하지 말고 그냥저냥 그러려니 하며 가다 보면 종점에 도착할 것이고 모두 떠나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생각의 추) 비행기를 타고 앉아 우리의 인생길도 그와 같음을 진솔하게 쓰고 있다.
자연 친화적이며 회고에서 우리 것의 자긍심 살려
수필에서 회고를 뺄 수 없듯이 이한재의 수필도 회고를 많이 담고 있다. 그는 세계인의 시각으로 이 회고를 승화시켜 우리 것의 진면목을 살려내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독특함을 전하고 있다. 역시 여러 나라에서 살아 본 경험이 그런 표현을 주도하고 있다고 본다. 어릴 때 소를 먹이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소가 팔려가는 날 눈을 끔뻑이며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 같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어 머리만 쓰다듬었다는 구절은 사경적(寫景的) 표현의 으뜸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친화적인 수필을 많이 썼는데 미사여구의 도움 없이 담백한 표현으로 그 전체를 통해 자연사랑 캠페인까지 벌일 정도로 가슴에 와 닿는 글을 쓰고 있다. : 복층아파트에서의 느낌을 진솔하게 썼을 뿐인데 사경적 표현을 얼마나 잘 했는지 독자가 그 복층 아파트에 앉아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복층 아파트의 진면목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천정이 높으므로 밤하늘에 둥글게 떠오르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감상하거나 추운 겨울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며 보여주는 경이로운 겨울정취를 거실 소파에 앉아서 만끽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층에 사는 최고의 낭만이다. 나에겐 아내와 함께 했던 여러 나라의 이국생활이 커다란 화폭으로 오버랩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 복층 아파트가 좋다)
그는 이 책의 표제작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자연을 노래하며 결국 나라사랑으로 이어진다.
- 내가 단풍의 물결을 감동적으로 느낀 곳은 미국 동북부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이다. 캐나다와 국경이 마주치고 있는 폭포 주변과 그 하류의 가을 단풍은 대단했다. 그곳을 3번 방문했는데 그 때마다 콘도에 머물면서 아내와 같이 느낀 것은 한 세상을 반짝 풍미하고 급히 떠난 벚꽃 보다 단풍은 어디에 있든지 삶의 지혜와 여운을 더 깊이 느끼게 했다. 울긋불긋한 단풍잎들은 어쩌면 또 다른 새 생명들을 예약하는 예약 표와 같았다. (중략)
- 내 나라가 좋은 것이 어디 계절 뿐이랴만 사계절은 축복이다.-(봄, 여름, 가을, 겨울)
아내 사랑, 가족애를 바탕으로 희망을 노래하다
이한재의 수필에는 아내의 사랑과 부부애가 공기처럼 스며있다. 와이키키 해변에도, 세계 곳곳에도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고 그를 사랑하는 지극한 남편의 마음이 있다. 국수와 파스타에서 동서양의 면류에 대한 고찰과 우리 옛 식생활 까지도 아름답게 추억하지만 그 주제는 역시 아내사랑이다. 아내가 만들어 주는 파스타를 즐겨 먹으면서 칼국수를 생각하고 결혼들을 많이 해서 국수잔치가 자주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가족애는 자녀들에 대한 뿌듯함을 조용히 엮어가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담담하게 가족들을 그리고 있다. 자녀들의 성취에 대한 뿌듯한 심경을 회고에 곁들여 잘 담아내고 있다.
이제는 살만 하다고 하니 카네이션을 받아도 흐뭇하다. 그들의 주거나 삶의 여건들이 좋아진 것 같아 그저 고마울 뿐이다. 다음 카네이션을 받을 때는 며느리들에게 어머니의 금비녀에 버금가는 것을 준비하여 선물해야겠다. -( 카네이션을 받을 때)
자녀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어머니가 자신의 아내에게 내려 준 금비녀를 금모으기 때 쾌척한 이야기를 써서 애국심을 전하고 이제 며느리들에게 그에 버금가는 선물을 내리겠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자연 사랑과 가족애와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고 있는 그의 수필 쑥떡을 눈여겨보면 주제와 구성 서두와 결말을 얼마나 야무지게 처리하고 있는지 교본을 삼을 만하다. 먹을거리가 많아진 요즘 예전의 구황식품들이 하나같이 건강식품, 장수식품으로 귀한 몸이 된지 오래다. 역시 쑥떡이 그 중 으뜸이 아닌가 한다. 처형이 시골에서 무공해 쑥을 골라서 정성껏 쪄 보내온 쑥떡을 앞에 놓고 이한재의 가족 사랑이 빛을 발한다. 거기서도 비유는 크게 한 몫을 하고 있음을 눈여겨보면 좋겠다.
- 쑥떡이나 쑥국을 먹을 때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속담,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떠오르기도 한다. 누군가에 의해서 푸대접만 받다가 늦게라도 인정받은 음식은 쑥떡 외에도 더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쑥떡)
이제 이한재의 수필 세계를 그의 수필 ‘플레이 어게인’ 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 이기가 아닌 이선을 위해 더 좋은 글도 써야겠다. 보다 새로워지기 위해 ‘플레이 어게인, play again 다시 시작해야겠다.-(play again)
지난날을 돌아보며 많은 것에 대한 감사를 쓰고 나서 작가는 다짐한다.다시 시작하겠다고, 모두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선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