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설교 모음 - 은혜로 사는 생활 / 갈1:6-10 외
사도 바울의 위대한 지도력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강력한 지도력을
나타 내었을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 크나큰 업적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바울은 갈라
디아 교인들에게도 은혜로 살아가는 생활을 강조하면서 은혜가 아닌 공로주의를 경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은혜로 사는 생활은 범사에 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은혜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은혜를 받아드리기 보다는 공로를 내세우는 신앙생활을 할 때
가 많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답답하게 생각한 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주의에 빠
져 공로주의 신앙에 사로잡혀 사는 문제가 발생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범사에 은혜로 살아간다는
은혜의식을 받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그리고 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2.은혜로 사는 생활은 진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난 주님에 대하여 분명한 체험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 흔
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까닭에 갈라디아교인들이 쉽게 진리를 떠나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에
흔들리는 것을 보며 빨리 돌아오기를 열망합니다. 바울은 이미 전하였던 복음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것을 강조하며 진리
에 대하여 단호하면서도 심한 말로 책망을 합니다.
3.은혜로 사는 생활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 즉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삽니다.
그러나 그 욕구가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욕구보다 크면 잘못된 길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 "하나
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고 했던 것입니다.
위에 속한 사람들 (골3:1-4)
사람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위를 보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위를 보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빌3:14) 본문은 위에 속한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위에 속한 사람의 삶은?
1.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1절)
우리는 날마다 땅에 있는 것들을 찾기에 너무 분주합니다. 위에 속한 사람은 당연히 위엣 것을 찾아야 하나 현실에 속한 우리는 늘 땅엣 것을 찾습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은 땅엣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위엣 것만 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지만 이 땅에 있는 것은 너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빌2:23-24)
우리는 위엣 것에 관심을 가지고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2.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2절)
우리의 생각은 늘 이 땅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오래 사는 일 이 땅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부요한 삶에 관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위엣 것을 향한 생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것에 대한 걱정 근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우리는 기도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일은 종일 위엣 것만을 생각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위엣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4절)
위엣 것을 기다린다는 말은 위엣 것에만 우리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두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이땅에 것이 원대로 되지 아니하면 실망하고 좌절에 빠지며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영원토록 존재하지 못할 이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를 사모하고 기대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어떻게 하랴 (마27:11-26)
십자가의 사건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빌라도입니다. 그것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면서 주님과 특별한 이해 관계도 없이 한번의 잘 못된 판단이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날까지 죄인으로 인정된 빌라도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우리의 삶에 조명하고자 합니다.
1. 양심의 증거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18절)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8절에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고 기록하고 있어 더욱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직책을 망각하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9절과 33절 19장4절과 9절을 본면 판결을 하지 못하고 계속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양심의 소리에 안절부절하는 비급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아내의 충고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19절)
빌라도의 아내는 이름이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로 역사 속에 기록된 디베료(티베리우스) 황제의 세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딸이며, 아우구스도(아우구스투수)의 손녀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황실 측근이라는 점에서도 빌라도는 그의 아내의 충고를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충고를 무시하고 군중의 뜻을 따랐던 것은 황제숭배로 인한 유대인들의 폭동에다가 과다한 세금 징수로 인한 부담을 최소화하려던 정치적 타협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3. 여론에 끌려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24절)
그는 재판관으로서 직무를 무시하고 한사람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됨에도 불고하고 재판권을 군중들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없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손을 씻기까지 합니다. 손을 씻었다고 죄가 씻기는 것도 아닌데 그는 비급하고 무책임하게도 책임 없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여유를 누리며 삽시다 (갈6:1-5)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통하여 얻은 자유를 강하게 주장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부터 얻은 참된 자유를 통해서 여유있게 사는 삶을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은 스스로 율법에 얽메여 여유없이 두려움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진리를 바로 알고 복음이 주는 여유를 누릴 것을 권면합니다.
1. 범죄자를 온유함으로 바로잡아 주는 여유(1절)
율법에 얽메여 사는 사람은 자기를 살피기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남의 일을 돌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철저히 자신있는 삶을 산다고 하여도 남의 잘못을 정죄하기는 하여도 바로잡아 주는 여유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므로 온유한 심령으로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바로잡아 줄 것을 권면합니다.
2.범죄자를 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1절)
바울은 자유의 복음을 받은 우리는 남의 잘못이 발견되면 그를 바로잡아 주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물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단점을 보면서 자신의 단점을 보는 눈이 없다면 그 인생은 이미 희망이 없는 인생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서도 자신의 단점이 깨달아야 자신을 발전시키고 개선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된줄로 생각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의 짐을 지는 여유(3절)
진정한 자유는 남의 실수나 허물을 보며 자신이 그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삶입니다. 여유없는 사람은 결코 남의 짐을 지지 못합니다. 겨우 자신의 일처리하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남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삶이야 말로 여유있는 인생입니다. 바울은 이 여유있는 삶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원리가 대속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함과 함께 받은 복(갈3:6-14)
우리는 아브람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중요한 이유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 즉,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9절에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믿음의 의를 강조하였던 이유도 믿음으로 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1.아브라함의 아들이 누리는 복입니다.(7절)
창15장 6절에 아브함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후손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는 것과 같은 원리로 우리가 받은 복은 행위의 대가로 받은 복이 아니라 상속된 높은 가치의 복을 받았습니다.
2.속박되지 않는 자유하는 복입니다.(10절)
바울은 율법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묶여 있으므로 자유함이 없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얻은 복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에서 자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복안에서 누리는 자유함을 체험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다른 복들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은혜로 사는 우리는 처음부터 은혜로 구원받아 복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복은 당연히 받을 수 있지만 조건없이 받을 수 있습니다.
3.은혜로 받은 복은 함께 누리는 복입니다.(14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을 우리는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만 받으면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범사에 부족함이 없이 복을 누리는 풍성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이방인에게 나누어 주는 복입니다. 우리는 받은 복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므로 함께 행복해야 합니다
실패를 극복하는 길 (요21:1-17)
실패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나 자신의 실패가 노출되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분노와 수치를 느끼곤합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실패를 극복하도록 도와 주신 사건입니다. 어떻게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1. 문제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3절)
주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실패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기잡던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물고기 한마리 잡지 못하였습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은 결코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옛 일을 회상 시키며 문제를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게하시며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2. 동기를 깨닫고 회복해야 합니다.(15절)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고 따랐을 때에는 그 동기가 사랑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실패자가 되어 떠나 있으나 그 동기가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동기 회복을 위해 사랑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출발 동기가 좋았다면 과정에서의 실패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출발 동기가 사랑이었다면 지금 다시 시작하십시오.
3.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15-18절)
진정한 회복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확인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주신 사명은 사람 낚는 어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고 기르는 일을 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하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함께 일할 것을 권면하십니다.(눅22:31-34) 또한 이런 배경에서 주님은 물고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고기를 가져 오라고 하여 베드로의 사명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승리를 위한 무기 (삼상24:1-15)
본문 말씀은 악을 선으로 이긴 다윗의 신앙적인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찾아다니던 원수를 해칠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살려 줄수 있었으며 친히 원수 갚지 않고도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다윗의 승리를 위한 무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에서 승리를 위한 다윗의 무기를 찾고자 합니다.
1.맑은 양심이 승리를 위한 무기입니다. (5절-7절)
상대의 태도에 따라 변하는 양심은 영적 승리를 할수 없습니다. 영적승리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청결이 요구할 뿐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처세에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만을 따랐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 부은자로 알아 옷자락을 벤 것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맑은 양심의 다윗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맑은 양심이 승리를 위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2.꾸밈없는 겸손이 승리를 위한 무기입니다.(11, 15절)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울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아래 세웠기 때문에 겸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를 가까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3.참는 것이 승리를 위한 무기입니다.(7절)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했다면 다윗은 사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분노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않으려고 부하들을 억제시켰습니다. 다윗의 부하들 중에는 사울을 죽일 정당성을 주장하며,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도록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흥분된 감정에 휩싸인 부하들의 행동을 자제토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실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겠다는 다윗의 신앙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의 영향력 (딤후3:16-17)
성경은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린책(베스트셀러)입니다. 그 이유는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던 책이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문학 저서는 모두가 성경과 관련된 책입니다. 예컨데 천로역정, 신곡, 고백록, 팡세 등이 그러합니다. 역사상 가장 유영한 미술작품, 조각, 건축물, 그리고 유명한 작곡이 그러합니다. 뿐만 아니라 윤리 의학 철학 사상등에서 성경을 능가할 만한 책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합예술이라고도 일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이 성경이 영향력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찾고자 합니다.
1. 성경은 믿음의 책이기 때문입니다.(15절)
이 세상의 모든 책중에서 믿음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책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허망한 믿음을 말하는 미신적인 책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뿐만아니라 믿음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정의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2. 성경은 영감의 책이기 때문입니다.(16절)
성경은 약 일천육백년간 무려 사십여명의 사람이 각기 각층의 다른 환경에서 기록하였으나 그 통일성에 있어서 그 보존성과 일치성에서 있어서 결코 오류가 없다는 것은 무려 이천년 이상 입증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감을 주어 기록하게한 영감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보다 인류에게 더 큰 영향력을 준 책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3. 성경은 온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17절)
성경은 사람에게 지혜를 제공하는 책 중에서 가장 으뜸인 책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랍비들의 글을 모은 책이 탈무드인데 이 책을 교과서로 사용하는 유대인의 교육을 능가하는 교육 방법이 없으며, 첨단의 교육을 말하는 미국과 독일 대학교육의 시작은 성경을 가르치던 신학교였다면 성경이 온전한 지식을 제공하였다는 입증하고 있습니다.
빌어 온 것이니이다 (왕하6:1-7)
본문 말씀은 엘리사가 가르치던 신학교에 교실겸 기숙사인 숙소가 협소하게 되자, 신학생들이 자진하여 기숙사 신축을 결의하고 학생 대표가 엘리사에게 허락을 구하러온 아름다운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생도중 한 사람이 빌어 온 도끼로 작업을 하다가 도끼를 요단강에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엘리사가의 기적으로 도끼를 찾게된 것입니다.
1.우리는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3:10절 이하에 보면 우리는 집을 하나씩 짓게 되는데 그 공력이 불타지 아니할 것으로 지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성전을 건축해야 숙제를 안고 있으며 우리의 대부분은 내집 마련을 위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성전을 짓도록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집짓는 각양의 은사인 도끼를 주셨습니다.
2.빌어 온 도끼는 물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집 지을 도끼인 각양의 은사를 이미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받은 도끼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남의 도끼를 빌리러 다니거나, 빌려서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빌어 온 도끼로 일을 한다는것은 이미 사고의 원인을 안고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도끼의 성능도 특성도 모르는것입니다. 그래서 자루만 남기고 날은 물에 빠지는 불행을 맛보게 되는것입니다.
3.잃은 도끼는 찾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는 잃은 도끼를 어떻게 찾았겠습니까? 첫째는 외쳤습니다. 우리도 받은 능력을 잃고 받은 은사를 쏟을때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선배나 주의 종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상담을 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도끼를 떠 오르게하고 취하라고 명령할 때에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생활 (갈2:16-21)
본문의 앞부분(2:11-14)에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을 책망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향력이 큰 지도자가 진리를 왜곡하는 행동을 하면 진리를 바로 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참된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말하면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육체의 의를 나타내지 말아야 합니다.(16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은혜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기의 의를 내세우거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조금도 유익하지 못합니다. 더우기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자기의 의를 내세우게 되면 하나님의 의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한가를 깨달아 그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행위를 자랑하는 것은 은혜를 무시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2.옛 습관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18절)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체험 이후로 완전히 돌아 서는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며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나는 옛생활의 습관이 이를 방해하고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롬7:18-24) 그리고 그는 과거의 자랑 대하여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고후15:31)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 의를 죽이고 철저히 성령께서 나를 이끌도록 맡겨야 할 것입니다.
3.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19절)
중심이 잡히지 못한 물체는 넘어져도 무게 중심이 물체 중심보다 아래에 있는 물건은 오뚜기 처럼 넘어 졌다가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앙의 중심을 바로 잡아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믿음이 온전해지며 삶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나의 연약함과 욕심을 그분께 묶어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나의 참 인도자이십니다
목적지에 이르려면 (요6:16-21)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은 직후에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기적의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
나 주님은 왕이 되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무리와 제자들을 보낸 후에 산에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배
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괴로이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위하여 주
님은 바다 위로 걸어 오셨고,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 후에 배는 곧 가려던 땅에 이르렀습니다.
1.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가려던 이유는 사업이나 세속적인 욕망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 때문에 저물었음에도 불구하
고 떠났습니다. 물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난 길일 지라도 풍랑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는
길은 결코 주님이 외면하지 않습니다. 물위를 걸어서라도 찾아오시고 풍랑이 이는 밤중이라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주
님의 뜻대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주님의 도움이 있습니다.
2. 믿음으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물위를 걸어 오시는 주님이 유령일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보이지는 않
을찌라도 주님은 어느 곳이나 어떤 장소일찌라도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가 어려울 때에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주님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도우러 오신 주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 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음성을 아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양이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줄 알아
야 합니다. 비록 풍랑 이는 바다라 할찌라도 귀 기울이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니 두려워 말
라"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다행히도 분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영접하였기에 목적지까지 쉽게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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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로운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Gid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