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난
1부. .김 계, 30세. 김수견, 31세. 지원, 29세. 김도원, 29세.
김동준, 28세. 김천환 29세. 김치장,30세. 박, 31세. 양택, 32세.
김광윤, 31세. 화택, 32세. 김 정, 18세. 화중, 32세. 김상정, 33세.
김하재, 33세. 김광국, 32세. 김광호, 32세. 김 봉, 26세 김복수,29세.
김종태 30세. 김 윤, 32세. 김상익, 33세. 김홍구, 32세.
2부. 김원택, 32세. 김상복, 33세. 김 희, 34세.
김기성, 34세. 김진상, 31세. 김두추, 34세
이인좌가 중심이되어 정권에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파가 일으킨 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소론의 김일경, 목호룡을 죽인데 불만을 품은 소론 잔당들은
이인좌, 김영해(김일경의 아들) 정희량 등이 주동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였다.
소현세자의 현손인 밀풍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일당은 경종의 죽음에 의문이 있고,
영조가 전 왕인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영조 4년(1728) 3월에 이인좌는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상복을 입고서 상여속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성에 잡입하여 공략하였다.
성을 쉽게 점령하고, 계속하여 진천, 죽산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병조판서 오명항이 관군을 보내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안성에서 이인좌의 무리를 격멸하는데 성공했다.
김 게( 게, 30세)
반란군들이 안의를 점령하였다.
합천의 교활한 괴수 조성좌가 밤에 군수 이정필을 찿아와 협박할 때였다
힘이 장사인 김계는 별군을 구성하여 반군 일당를 소탕하였다.
원종공훈에 녹훈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김수견(壽堅, 31세)은
반란이 일어나자 종군하여 적의 괴수를 잡은 공으로
판관에 추증되었다.
김지원(智元, 29세)과
김도원(道元, 29세) 형제로 의병참모로서
예안 의병대장인 이수겸을 보좌 활동하였다.
이들은 임진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근시재 5대손이다.
이집을 가리켜 임진, 정묘, 병자, 무신의 ‘4란 창의 가문’이라 하였다.
김동준(東俊, 28).
경종조 문과 장원급제, 기주관으로 일할 때 상을 당하여 향리에서 거상중,
이인좌의 난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소모사 백화재, 황익재에게 서신으로 적을 섬멸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임금이 칭찬하며 그대로 적용하여 적을 토평하였다.
원종일등훈에 녹훈되고 유고가있다.
이인좌의 난에 창의한 광김으로
김천환(天煥, 29세.)은 예천에서
김치장(致章, 30세)과
김 박 (撲, 31세)은 안동에서,
김경화(慶華, 32세)는 호남에서 창의했다.
32세 영의정 휘 양택(양간공파 ‧의정공파)
1712(숙종39)-1776(정조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서.
호는 건암. 시호는 문간공.
아버지는 문청공 진규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연일 정씨이다.
1741(영조18)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743년 문과에
병과 3인으로 급제하였다.
세자 시강원, 설서, 문학을 거쳐 강동 현감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홍문관 부수찬이 되자 좌의정 정석오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받았다.
곧 사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수찬이 되고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영조 28년에 통정에 승진되어 좌승지가 되었다가 부사로 나갔다.
그 후 대사성, 이조참의, 양관대제학과 병조,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공이다.
정조 5년에 벼슬을 후탈 당하였다가,
1864년(고종2)에 복관 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영의정 시 문간공 양택 묘표
공의 휘는 양택이요, 자는 사서이다.
영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발되어 세자 시강원에 들어가
겸설서가 되었고 문학을 거쳐 강동 현감으로 나갔다.
이듬해 홍문관에 들어와 부수찬이 되자 상소로 좌의정 정석오를 논박하니
임금이 크게 성을 내어 전중에서 불러 접견하고,
산청 현감으로 좌천 시켰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수찬과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공의 가문이 유학으로 알려졌으니
문원공 휘 장생은 문묘에 배향 되었으니 공의 5대조가 된다.
충정공의 휘는 익겸이요,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대의에 죽었으니
공에는 증조가 된다.
문충공 휘 만기는 국구(임금의 장인)로서 공이 사직에 있고,
직위가 영돈령부사(왕실의 인척관리)에 이르렀으니
공에게는 할아버지가 된다.
문청공 고 대제학 휘 진규는 숙종을 섬겨
정신의 절개가 있었고 직위가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니,
공에게는 아버지가 되며 영묘(英廟)가
세한송백(歲寒松柏)이라는 글자를 써주어 그의 직절을 장려했다.
공은 부조의 업적을 이어받아 대제학이 되니 세상에선
삼대 전문형(대제학)이라 칭한다.
청렴하고 검소하여 몸이 자주 쇠약하듯 하나 마음이 단정하고
개결하고 굳어서 사람을 사귐에 변태가 없었다.
벼슬을 할 때 간략해서 일찍이 봉급의 남은 재물이 있어도
논과 밭은 사지 않았다.
대제학으로 있을 때 시험을 엄격히 하고 글 읽기를 좋아해서
늙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원릉의 묘지문을 지었고(영조릉) 건암이라 자호 하였다.
문집 약간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경원이 소년 때에 문간공 천보, 남문천공 유용와 같이 놀고
서로 같이 생활하면서 심히 즐거워했다.
이 공(천보, 유용)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교유하던 분이 없는데
공마저 별세하니 슬프도다.
제학 황경원 찬
김광윤(光胤, 31세)는
영조조 무과급제, 성도호부사, 병조참판.
김화택(和澤, 32세)은
영조조 문과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곡산부사의
외직을 나갔으나 양친을 가까이 모시기를 상소하였다.
임금이 감동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후에 부제학에 제수하였다.
춘천부사로 재직시,
실전했던 선조 김 정( 鼎,18세)의 묘소를 되찼아 수호하였다.
김화중(和中, 32세)은 문과에급제, 병조참판.
김상정(相定, 33세)은 승지를거쳐 사간원 대사관.
김하재(夏材, 33세)는
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의 아들로 강원도관찰사와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을 엮임했다.
이재학의 무고로 화를 입었으나 융희 1년에 신원되었다.
김광국(光國, 32세)은
새원진사시 합격, 학식이 해박하고 문장이 좋아
이광정, 권만과 더불어 교류했다. 유고가있다.
김광호(光虎, 32세))는
경종조 문과급제, 여러 관직을 엮임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분열되어 권간의 농간에 대해
김진상, 홍보석, 송환기 제현과 함께 소장을 올리니,
4대신과 같이 무고하였다는 죄로 삭직되었다.
삼례찰방으로 나갔을 때 사창을 털어 구제하니 군민이 거사비를 세웠다.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사직하였다.
김 봉( 鳳, 26세)은
병자호란 때 창의한 안동 신성의 입향조로 그의증손,
김복수(復壽,29세. 호:석포)는
어려서부터 탁이한 자질과 총명이 있어 큰 기대를 했다.
‘나주캐서의 변 ’ ‘사도세자 참사’ 등 시국의 혼란을 한탄하고,
산 언덕에 ‘석포정’이라는 정자를지었다.
경서와 사기를 탐독하며 수직으로 가선이되었다.
김종태(宗台 30세)는
영조조 문과급제, 사간원 정언, 지평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을 겸했다.
서장관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김 윤( 鈗, 32세)은
영조조 진사시 합격, 문장과 학행으로 이를 높이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유고가있다.
김상익(相翊, 33세)은
문과 급제,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지도에 유배되어 졸하였다. 정좆에 신원되고,
순조 때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홍구(鴻九, 32세)는
눌은 이광정의 문인이다.
스승이 공을 평하여 이르되 “침착하고 단정한 참다운 군자”라 극찬하였다.
임하에 묻혀 후학을 장려하고, 학문을 강론해 유고가있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