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
천사보다 뛰어나심 ․․․․․․․․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 모세보다 뛰어나심 ․․․․․․․․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 ․․․․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 확실한 소망 ․․․․․․․․․․․ 더 좋은 소망 ․․․․․․․․․․․ 더 나은 직분 ․․․․․․․․․․․ 영원한 단번 속죄 ․․․․․․․․․ 담대히 서로 격려함 ․․․․․․․․ 믿음의 선조들 ․․․․․․․․․․ 거룩함을 이룰 것 ․․․․․․․․․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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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인간 저자는 초대교회로부터 명확하게, 확정적이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히브리서가 사도적인 서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정적이었지만, 저작자 문제는 그렇지 못했다. 히브리서는 아마 바울이 썼던지, 아니면 바울이 인정하는 어떤 인물이 썼던 것 같다.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46)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4세기 초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에 의하면,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서를 썼고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다(6. 14). 유세비우스 자신도 히브리서를 바울의 14권의 서신들 가운데 포함시켰다(3. 3). 주후 397년의 칼다고 회의는 신약 성경의 정경성을 선언하면서 히브리서를 바울 서신으로 언급하였다.
히브리서의 특징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 즉 속죄의 사역이나 중보의 사역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이 전체적으로 증거하지만,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신약성경 중에 히브리서뿐이다. 히브리서는 특히 예수님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강조하여 밝히 증거하고 이로써 구약의 율법 제도가 폐지되고 신약의 더 나은 제도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더 나은 신약의 중보자이시다.
1-3절, 최종적, 절정적 계시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옛적에’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 4,000년을 가리킨다. ‘선지자들로’라는 말씀은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 등 하나님과 밀접히 교제했던 특별한 인물들을 비롯하여 사무엘로부터 시작하여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을 거쳐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구약 시대의 공식적 선지자들을 다 포함한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여러 부분들과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간혹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기도 하셨고 그보다 빈번하게는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타나심 속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보다 더욱 빈번하게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서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성령의 이러한 감동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확실하게 선포하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한 나타나심과 말씀과 또 때때로 행하신 기적들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이것들을 통틀어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돌이나 나무 같은 무인격, 비인격이 아니시고, 인간과 같이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 계시들을 성경책 안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에는 때때로 이 책의 내용을 가감치 말라는 말씀이 나온다(신 4:2; 12:32; 계 22:18, 19).
[2, 3]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씀은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 신약 시대를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부른 것은, 신약 시대가 하나님의 계시 역사(歷史)에서 마지막 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계시가 구약 계시와 비교할 때 최종적, 절정적 성격을 가짐을 보인다. 구약과 비교해서 신약은 최종적 계시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없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면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있지만, 신약을 넘어서서는 아무런 내용의 진전이나 보충이 없을 것이다.
또 구약 계시에 비해, 신약 계시는 절정적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다. 구약에는 예표적으로, 모형적으로, 그림자적으로,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계시의 내용들이 신약에서는 실체적으로, 실제적으로 드러났고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 인물이시다. 그는 구약에서는 예표, 모형, 예언으로 감취어져 있었으나 이제 때가 되어 밝히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속죄 사역을 다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한,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원하는 만큼, 곧 우리가 우리의 구원과 온전한 삶을 위하여 알아야 할 만큼 충족하게 다 계시하였다.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그의 교훈하심, 그의 기적 행하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의 독특한 인격과 그의 행위들과 사건들에 대한 의미의 해설 등을 포함한다. 이것은 신약 계시 전체를 가리킨다.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독특성과 신적 권위성이 여기에 있다. 즉 신약성경은 구약의 예표와 예언들의 성취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바로 거기에 그 내용들의 신적 권위성도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신약성경은 더 그러하다.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선, 히브리서 저자는 탁월한 신약 계시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여섯 혹은 일곱 가지 내용으로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둘째로,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 표현들은 물론 성육신 하신 예수께도 적용될 수 있지만(요 14:9; 고후 4:4, 6), 창조와 보존의 사역이라는 문맥으로 볼 때(2, 3절) 그것은 그의 성육신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신비에 속한다. 단지 성경은 몇 구절들에서 이 영원적 관계를 언급하였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엔,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근본 하나님의 형체로 계셨으며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하르파그모스, 획득물, 상급]로 생각지 않으셨으나).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속한 자가 아니시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 16, “만물이 그에게[엔 아우토, 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넷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이것도 창조된 천지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사역이다. 골로새서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다섯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다. 전통 사본에는 ‘죄를 정결케’라는 말이 ‘우리의 죄를 정결케’라고 되어 있다.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죄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었고 죄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께서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고(마 20:28), 또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셨다(마 26:27, 28).
여섯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그의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사도행전 7:55, 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일곱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만유의 후사(상속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인 동시에 목적이시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에이스 아우톤)은 예수께서 창조의 목적이심을 보인다.
하나님은 창조 때로부터 타락을 예상하셨다. 타락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있었다. 타락한 세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새 세계는 누구에게 상속될 것인가? 그것은 신인(神人)이실 예수, 죄 없는 새 인류의 시작이시요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로마서 8:16, 17,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로 하나님은 말씀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둘째로, 구약 계시와 비교할 때 신약 계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구약 시대에 예표적,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계시들은 신약 시대에 아들로 말미암아 실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충족하게 다 계시되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우신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또 그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고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놀라운 예수를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셨다.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히 받고 진실히 믿으며 오직 그에게만 목표와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장차 그와 더불어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생의 삶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소망의 내용이다.
4-14절, 천사보다 뛰어나심
[4, 5]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천사보다 얼마나 뛰어나신 지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 천사보다 뛰어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아름다운 이름, 더 뛰어난 이름을 얻으시기 때문이다. 메시야 예언시인 시편 2편에는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 자손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자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삼하 7:14). 물론, 욥기 끝부분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되어 있고(욥 38:7),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롬 8:14). 그러나 성경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것들과는 달리 독특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맏아들’이라는 원어(톤 프로토토콘)는 ‘첫번째로 나신’이라는 뜻이다. 골로새서 1:15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되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 말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 특별한 관계, 즉 아버지와의 영원적 관계를 가리켰다. 이 말은 또한 예수께서 마리아가 낳은 맏아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고(눅 2:7), 또 예수 믿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롬 8:29). 본절에서는 이 말이 맨처음의 의미 즉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 같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신다’는 구절에서 ‘다시’라는 말이 ‘들어오다’는 말에 관계되는지, 아니면 옛날 영어성경의 번역처럼 ‘또 다시’라는 뜻으로 5절 중반의 ‘또 다시’처럼 단순히 성경 구절의 반복된 인용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다. 후자(後者)라면, 이 구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전자(前者)라면, 그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없으나, 그 밤에 많은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기록은 있는데(눅 2:13, 14), 그 천사들이 그 때 어린 아기에게도 경배했을 것이다. 또 주의 재림 때에는 모든 천사들이 더욱 더 예수님을 찬송할 것이다. 성경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지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을 통해 찬송을 받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한다(빌 2:9, 10; 계 5:11, 12). 여하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는 자이므로 천사와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시다.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는 천사들이 있다. 물론 그들 중 일부가 타락하여 사탄 혹은 마귀와 악령들이 되었지만, 타락치 않은 선한 천사들은 지금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성경은 에덴 동산이나 법궤를 경비하는 ‘그룹’이라는 경비병 천사와(창 3:24; 출 25:20), 하나님을 찬양하는 ‘스랍’이라는 찬양대원 천사와(사 6:2, 3),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가브리엘’이라는 전령 천사와(눅 1:26), 악령들과 싸우는 ‘미가엘’이라는 전투병 천사(단 10:21; 계 12:7) 등에 대해 언급한다.
천사들은 지혜와 능력이 많다. 성경에는 천사들이 소돔성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한 일(창 19:10, 11), 많은 불말과 불병거로 도단성을 둘러싸 엘리사 선지자를 보호한 일(왕하 6:16, 17),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을 하룻밤에 죽게 한 일(사 37:36)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 선한 천사는 죄가 없는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이므로 죄악된 인간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천사들이 본문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바람과 같이, 불꽃과 같이 사용되는 자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8, 9]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시고 모든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친히 ‘하나님’으로 불리우신다. 여기 인용된 시편 45편은 메시야 예언시이며, 인용된 본문에 의하면 메시야는 하나님으로 불리우시며 그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의 홀(笏)은 공의로운 홀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른 구절은 이 외에도 요한복음 1:1과 요한일서 5:20과 디도서 2:13 등이다.
또 본문 9절은 다음과 같이 고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여기에서 ‘주의 동류들’이란 다윗이나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왕들을 가리킬 것이다.
[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본절에 인용된 시편 102편도 메시야 예언시이다. 시편 102:16에는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메시야의 강림을 가리킨다고 본다. 본절에 인용된 구절에서 메시야는 ‘주여’(퀴리에)라고 불리웠고 땅과 하늘을 만든 창조주이시며(2절 참조)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분으로 증거되었다. 이에 비해, 모든 피조 세계는 낡고 시들고 변하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메시야는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으신, 이 피조 세계와 비교할 수 없으신 신적 존재인 것이다.
[13, 14]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 곧 봉사하는 영들로서 하나님의 일들을 받들고 특별히 하나님의 뜻하신 인간 구원의 일을 위해 일한다. 그들은 구원 얻을 영혼들, 즉 장차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존귀한 자로 여기시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이나, 천사는 그렇지 않다. 천사들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지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씀을 들으셨고, 이 말씀과 같이 그는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존귀와 영광을 누리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아무 천사도 가지거나 누리지 못하는 존귀와 영광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시고 존귀하신 분이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며 구원받은 성도들 혹은 구원받을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천사는 사람보다 높임을 받을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떤 천사에 비교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장 높은 천사 혹은 천사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예수님은 천사와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시고 존귀하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주님이라고 불리우시며 영원하시고 불변적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자시요 공의로우시다. 또 그는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모든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신다. 이것들은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점들이다. 천사들은 피조물이지만, 예수, 그는 영원히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신 신적 영광을 깨닫고 그의 존귀한 이름을 진심으로 찬송하자.
1-4절, 모든 들은 것을 간절히 삼가라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가리킨다. 이미 1:2, 3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만유의 후사로서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그의 신적 인격과 사역과 영광에 관한 사실들이다.
본문은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고 말씀한다. ‘삼간다’는 원어(프로세코)는 ‘주의한다. 주목한다, 관심을 가진다, 집착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 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간절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잊어버리고 마침내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 곧 우리가 이미 배운 많은 진리들에 대해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고 집착해야 한다.
[2, 3]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구약 계시들 특히 율법을 가리킨다. ‘공변된 보응’이란 ‘공의로운 보응’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본문에서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표현되었다. 그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될 만하다.
본문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무엇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값없이 받은 은혜의 구원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고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고 집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씀한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어길 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았다면, 우리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소홀히 여길 때 얼마나 더 큰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는 “저[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18, 36절).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영생의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은 영생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라고 말씀했다. 이것은, 믿는 우리가 범죄치 말고 진지하게 순종 생활을 해야 할 것에 대해 밝히 가르친 말씀이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브리서 저자는 이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이다. 예수님을 주(主)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로,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그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1세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었던 그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셋째로, 하나님도 기적들과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성경에서 기적을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가 있음을 나타낸다. 기적은 하나님의 어떤 진리를 확증하는 표이다. 기사(奇事, wonder)는 기적이 사람들에게 주는 놀라움을 나타내고,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냄을 가리킨다. 또 ‘성령의 나눠 주신 것’이라는 원어(프뉴마토스 하기우 메리스모이스)는 ‘성령의 나눠 주신 은사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다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여러 모로 확증된 확실한 것이요, 결코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고, 그의 교훈들과 행한 일들을 직접 듣고 본 제자들이 확증한 바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 등한히 여긴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잘못이겠는가?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의 진리를 증거한다. 첫째로, 본문은 구원의 가치에 대해 증거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큰 구원’(3절)이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인데, 그의 인격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시며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독특하고 뛰어나신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또 그의 사역은 말할 수 없이 높고 고귀하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다. 그는 만유의 후사로서 우리를 장차 천국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본문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증거한다(3, 4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친히 증거하셨고 들은 자들이 확증하였으며 하나님께서도 기적들로 증거하신 매우 확실한 것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어떤 도덕적 교훈이나 신비적 체험을 전한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증거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아야 할 것을 전한 종교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전한 구원은 많은 증거들로 확증된 것이며,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셋째로, 본문은 우리에게 이 귀한 구원을 잘 보존하라고 강조한다(1, 2절).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그 구원을 상실한다면 그 책임이 우리 자신 외에 누구에게 있겠는가? 구원을 상실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은 인간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하고 큰 관심을 가지고 집착해야 한다.
5-18절,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심
[5-7]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복음 진리의 내용인 천국 곧 신천 신지(新天新地)를 가리킨다. 본문에 인용된 말씀은 구약 시편 8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인용된 말씀 중에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에서 ‘천사보다’라는 말의 원어(메엘로힘)는 직역하면 ‘하나님보다’이다. 만일 이 번역이 옳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고대 70인 헬라어역 성경(LXX)은 이 구절을 ‘천사들보다’라고 번역했다. 옛날 영어 성경이나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역을 따랐다. 사람은 하나님보다 결코 조금 못한 존재가 아니다. 무한자(無限者)와 유한자(有限者)의 질적 차이는 무한하다. 또 문맥적으로 만일 시편 저자가 ‘하나님보다’라는 뜻으로 말하려고 했다면, 그는 ‘하나님보다’라는 3인칭의 표현보다는 ‘당신보다(주님보다)’라는 2인칭의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만일 시편 본문의 헬라어역이 옳다면, 그것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잠시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할 것이다. ‘잠간’이라는 원어(브라퀴스)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을 가진다. 개인의 일생인 100년이나 인류의 역사 6000년은 ‘영원(永遠)’에 비추어 볼 때 ‘잠시’이다.
[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려 하셨다. 창세기 1장에 증거된 대로(창 1:26, 28)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만물이 인간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한다. 인간은 타락 후 오히려 피조물인 만물에게 복종하고 있다. 우상 숭배나 돈 사랑 등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세상은 본래의 상태로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본문은 시편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원어(휘페르 판토스)는 ‘각 사람을 위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헬라어 파스는 관사가 없을 경우 보통 ‘각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예수께서 택함 받은 각 사람을 위하여, 즉 각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의 값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는 자신의 죽음이나 구주의 대리적(代理的) 죽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는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인하고’라는 원어(디 혼 타 판타)는 ‘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있는 자’ 즉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이다. 그것은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 부족과 결함이 하나도 없는 상태, 도덕적 완전 상태, 즉 영광의 상태이다. 로마서 8:29, 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는 말씀은 구주의 인성(人性)의 면에서 하신 말씀이다. 인간 예수는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온전한 구주가 되셨다.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인성을 취하시며 친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까?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설명된다. 그것은, 첫째로 사망을 맛보심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기 위함이며(14절), 둘째로 죽음의 공포로 인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시기 위함이며(15절), 셋째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며(17절), 넷째로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었다(18절).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구원받은 성도들 곧 우리들이다.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씀은 거룩한 인성(人性)의 면에서 그리스도도, 우리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자주 부르셨다. 마태복음 28: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2, 13]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메시야 예언시들 중 하나인 시편 22:22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또 ‘내가 그를[즉 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人性)의 면을 보인다. 인성의 면에서, 그리스도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는 표현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14, 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께서 자녀된 성도들과 같이 혈육에 속하신 것 곧 인간 본질을 취하신 것은 그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본문은 그 목적을 증거한다. 첫째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기 위함이었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세계의 왕으로 허용되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 목적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일평생 무엇에게 종노릇하며 사는가? 인간은 죄에 종노릇하고, 세상과 물질에 종노릇하고,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마침내 죽음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여기에서 해방을 받아야 한다.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붙들어 준다’는 원어(에피람바노)는 ‘붙잡다’는 뜻 외에 ‘본질을 취한다, 돕는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날 영어 성경은 본절에서 이 단어를 ‘본질을 취한다’는 뜻으로 번역했다(수리아역, 옛 라틴역, 라틴 벌게이트역도 그러하고 칼빈 등은 그렇게 이해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여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천사들의 본질을 취하려 하심이 아니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의 본질을 취하려 하심이었다는 뜻이다.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라.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말한다. 그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그리고 마침내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다. 이것들은 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였던 것들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참된 인성을 취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 곧 구원의 일에 있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었다. 여기에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말씀이 있다. ‘구속(救贖)한다’는 원어(힐라스코마이)는 본래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속죄한다’는 일반적 용법이 나왔다. 성경적 속죄 개념 속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여기에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또 하나의 이유와 목적이 증거되었다.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네번째 이유 혹은 목적은 친히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택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신 높으신 분이시지만, 친히 낮아지셔서 우리의 연약과 부족을 친히 체험하셨다. 그는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들이 당하는 온갖 시험을 친히 체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완전한 구주가 되셨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8절까지의 긴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에 대해 배운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본문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그가 ‘각 사람을 위하여’ 즉 ‘택한 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을 의미한다. 본문은 택한 백성을 ‘많은 아들’(10절),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11절), ‘자녀들’(13, 14절), ‘아브라함의 자손’(16절), ‘형제들’(17절), ‘백성’(17절) 등으로 표현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원의 일을 위해 혈육에 함께 속하여 죽음을 맛보셨다. 구원받은 성도들과 그는 다 함께 한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는 성도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았다(11절).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17절). 그는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고(18절) 마침내 죽음을 맛보셨다(9, 14절).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치루신 댓가이었다.
셋째로,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이루신 구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11절),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시며(14절), 죽음의 공포 속에 일평생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시고(15절),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고(17절), 시험 당하는 자들을 도우시고(18절), 그리하며 마침내 그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다(1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셨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해 그에게 감사와 찬송을 드리자!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을 받아 누리자! 무엇보다, 죄씻음과 거룩함을 얻고 이제는 거룩과 의만을 위해 살자! 또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죽음을 초월한 자로 살자! 그리고 우리의 순례의 길의 종착역이 영광의 천국인 것을 깨닫고 항상 소망 중에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1-6절,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하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효력 있게 부르시는 부르심을 가리킨다. 우리는 다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거룩한 형제들’이란 앞장 11절에서도 증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 법적으로 단번에 완전히 거룩함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이들을 ‘성도’(거룩한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사도’(使徒,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입은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여러 번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등).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해 제사드리고 기도하는 백성의 중보자이다. ‘예수를’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이라고 되어 있다.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원문에서 본절은 앞절의 예수님을 수식한다. 이와 같이 1, 2절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시며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예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셨고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요한복음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빌립보서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렀다(계 1:5; 3:14).
[3, 4]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 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안 자요 기적을 행한 자요 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한 자이다. 신명기 끝에는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증거했다(신 34:10).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신 것이다.
본문은 모세와 주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은 이스라엘 곧 구약 교회를 암시하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을 만드신, 아니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암시한다. 예수님을 집 지은 자에 비교한 것은 그가 곧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원문에는 4절에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다는 말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관계를 보인다. 집을 지은 자가 없다면 집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피조 세계의 정교함, 질서 정연함, 어떤 목적성이 있음 등의 사실은 그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우리가 집을 보면 지은 자가 있음을 알듯이 또 정교한 기계를 보면 그것을 만든 자가 있음을 알듯이, 우리가 매우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인 우주 만물을 보며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오히려 이 질서 정연한 우주의 근원을 우연이나 비인격적 물질에 돌리는 것은 심히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다.
[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장래의 말할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사역에 관한 것들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증거한 것이다. 모세는 이 암시적, 상징적 계시의 내용들을 다 증거하고 기록하였다. ‘사환’이라는 원어(데라폰)는 ‘수종자, 사환, 종’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모세와 비교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에피)는 ‘위에서’라는 뜻으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 곧 교회 안에서(엔) 종으로 충성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곧 교회 위에서(에피) 아들로 충성하셨다.
본문은 또한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담대함’이라는 원어(파르레시아)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받는다.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표현되었다. 첫째는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마 구약 시대에 가장 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마다 모세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할 것이다. 모세를 통해 기록된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은 구약 전체의 기초요 핵심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 곧 수종자와 종으로 충성하였을 뿐이었다. 이에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주로서 충성하셨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주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할 두번째 이유는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받은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다면 우리가 바로 그 집이다. 그런데 집을 지은 자는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다. 집을 지은 자란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리킨다. 집 지은 자가 집보다 더 존귀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집을 지으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리가 증거되어 있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사람이나 세상이어서는 안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어서도 안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우리가 과연 그런가? 우리가 돈에 대한 관심보다도, 자녀에 대한 관심보다도, 사업에 대한 관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보다, 심지어 구원보다도, 교회보다도,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인간 지향적이거나 인간 중심적이지 말고 하나님 지향적이며 하나님 중심적,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자!
7-13절, 매일 피차 권면하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편 95:7-11을 인용하면서 ‘성령의 말씀’으로 증거하였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영감성(靈感性)을 증거한다. 즉 구약의 율법서들과 선지서들은 물론 시가서들까지도 영감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한 바울 사도의 디모데후서 3:16의 말씀과 같다.
‘오늘날’은 성도들의 현재의 상황을 말한다. ‘너희’는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그리고 성경적 설교들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던 때를 언급한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이외의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었다.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이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편 저자를 통해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숴져야 한다. 그 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함이 있고 온유한 마음이 생긴다.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시험한다’는 말(페이라조)이나 ‘증험한다’는 말(도키마조)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많은 일들을 목격했다. 그것들 중에는 기적들도 있었고 두려운 징계들도 있었고 긍휼의 구원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먹이심과 인도하심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만나를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10, 11]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이 세대’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저 세대’라고 되어 있다. 광야에서의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또 장차 들어가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중에 불신앙을 품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악심’은 직역하면 ‘불신앙의 악한 마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마땅하고 기본적인 일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것이 곧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밀착하여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의 상황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바로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좋은 과거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며, 오늘 우리가 무엇을 바로 할 때 우리의 내일도 좋아질 것이다. 오늘이 중요하다. 우리는 현재를 바르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써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불붙는 장작을 각각 따로 놓으면 쉽게 꺼지지만, 서로 포개어 놓으면 더 잘 붙듯이,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을 속인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죄는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을 준다. 죄는 사깃꾼이다.
죄의 속임으로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기 때문에 몸 속에 오래 놔둘수록 해롭다. 그것은 즉시 대처되어야 한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하여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는 발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중에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3절까지 내용의 요점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실패를 기억하고 우리 가운데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자가 없도록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시험했고 마음을 강퍅케 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마침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중에는 죄의 속임수로 강퍅케 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깨어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하자! 교회 안에 있는 구역 조직과 주일학교 반 조직은 이런 일을 위한 구체적인 한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안에 권찰들과 교사들은 매우 중요한 직분자들이다. 이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이 교훈을 명심하고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기를 힘쓰자!
14-19절,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잡으라
[14, 15]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텐 아르켄 테스 휘포스타세오스)는 직역하면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모든 성도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 성경의 기본적 사실들을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고 누가복음을 썼다(눅 1:1-4).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쓴 두 번째 서신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했다(고후 13:5). 또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했다(딤후 3:14).
진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10:9,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모든 성도는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곧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불신앙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붙잡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된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을 뜻한다.
15절에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번역한 원어(엔 토 레게스다이)는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굳게 붙잡아야 할 이유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 . . 라고 말씀하셨음이라’는 뜻이다. (8절 해석 참조.)
[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모세를 좇아’라는 원어(디아 모위세오스)는 ‘모세로 말미암아’라는 말로서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 정확히 표현해 여호수아와 갈렙과 20세 이하의 자녀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내산에서 10계명과 율법들을 주셨었다. 그는 시내산 위에서 직접 음성으로 십계명을 말씀하신 후 모세를 산 위로 부르셔서 그를 통해 모든 율법들을 자세하게 주셨었다(출 19:19; 20:21, 22; 24:18).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었다.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원칙이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우상숭배의 죄이었다.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헛된 것들에 가치를 두고 그것들을 섬기는 죄가 죄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열 정탐꾼의 보고는 불신앙적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낙망시켰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들을 하였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노하였고 맹세하며 그들에게 징벌을 선언하셨다.
신명기 1:26-28,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신명기 1:34, 35,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신 1:35). 그 땅은 광야와 비교해 볼 때 안식의 땅이었다. 광야는 여러 가지 위험이 있는 불안정한 곳이었으나 가나안 땅은 비교적 안정된 곳이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안식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만 인간에게 참된 안식이 된다.
저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라는 원어(토이스 아페이데사시)는 옛날 영어 성경처럼 ‘믿지 않던 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헬라어 아페이데오는 ‘믿지 않다’는 뜻이며, 거기에 더하여 ‘순종치 않다’는 뜻도 가진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믿지 아니하므로’라는 원어(디 아피스티안)는 ‘불신앙 때문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으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인 자들에게 진노하셨고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약속의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곧 확신의 시작 혹은 처음 확신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가리킨다. 이러한 확신은 성경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확신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필요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진리들을 확신하게 하기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그 말씀을 믿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고자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들며 그들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즉 성경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안식에 참여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은 영생 복락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불순종은 곧 멸망의 길이다. 우리가 참으로 천국의 영광과 안식을 원할진대, 우리는 믿는 자, 확신하는 자가 되고 또한 성실하게 순종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결코 불신앙과 불순종의 사람이 되지 말자!
1-13절,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 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서 회개한 강도를 향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 중에 혹’이라는 말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인들 중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는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의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 우리 교회 가운데 그런 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는 말씀은 원문을 직역하면 ‘그것이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으로 묶여지지 아니하였음이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믿음으로 화합되지 않으면 혹은 믿음으로 우리 자신과 묶여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유익이 없다.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회개하여 구원받은 강도와 같이, 장차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아니, 이 세상에서도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을 맛보고 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구절은 원어에서는 강한 부정의 뜻으로 되어 있다. 즉 ‘저희가 내 안식에 결코 들어오지 못하리라’이다. 또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는 말씀은 ‘그의[하나님의] 일이 마쳤느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창세기 2:2의 말씀을 가리킨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4-6]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본문은 두 가지 진리를 보인다. 첫째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기쁜 소식이다. 둘째는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라는 원어(디 아페이데이안)는 옛날 영어성경처럼 ‘불신앙 때문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물론 이차적으로 ‘불순종 때문에’라는 뜻도 된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7, 8]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7절 앞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오랜 후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다윗을 통하여 오늘날이라고 말씀하시기를’이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와 같은 말이다.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 정복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모형적 안식을 누렸을 뿐이지, 하나님의 영원한 참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은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안식할 때’라는 원어(삽바티스모스)는 ‘안식의 상태’를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 곧 영원 전에 선택함을 얻고 때가 되어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은 백성들에게는 참된 안식의 상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참 평안의 상태이다. 인생의 수고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다. 창세기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참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영혼들은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눅 16:22, 25; 23:43). 그러므로 성경에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했다(계 14:13). 또 바울 사도는 죽어 주와 함께 있기를 담대히 그리고 간절히 원하였다(고후 5:8; 빌 1:23).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본절이 1절부터 13절까지에서의 요점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 원문에는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되어 있다. ‘저 안식’은 이제까지 언급한 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안식 즉 구원을 통해 정신적으로 이미 받았고 장차 영육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이다. 성도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활과 성화는 우리 자신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노력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한다. 베드로후서 1:10,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 믿음과 순종으로 힘써야 한다. ‘저 순종치 않는 본’이라는 원어(토 아우토 휘포데이그마 테스 아페이데이아스)는 ‘그 동일한 불신앙의 본’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옛날 실패했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한다.
[12, 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경건과 불신앙과 불성실을 남김 없이 다 들추어 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거나 불성실하거나 외식적인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유능하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않을 수 없다. 13절의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라는 원어(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는 ‘우리가 관계할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순종의 의무나 심판 받아야 할 일을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정리해 본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안식이 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제7일에 쉬신 것은 그 안식의 모형이었다. 또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며 또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이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포되었고 정신적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이 안식은 성도가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국에서 누릴 것이며, 주님 재림 때에 신천 신지(新天新地) 곧 천국에서 영육으로 영원토록 충만히 누릴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영원한 안식의 모형인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광야에서 다 멸망을 당했다. 그것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의 형벌이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원리는 똑같다.
셋째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길은 참된 믿음과 순종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우리는 실패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참으로 믿는 자가 되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는 권면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우리는 좌우에 날선 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든 죄악된 요소들을 철저히 깨달아 고침으로 불성실과 태만과 위선의 죄 가운데 머물지 말아야 한다. 암은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되지 않으면 극히 위험한 병이다. 우리의 죄는 암보다 더 무서운 결함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며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죄를 철저히 버리고 참된 믿음과 순종을 항상 소유하자!
14-16절,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자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본질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와 배에 오르신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었다(마 14:33).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또한 ‘승천하신 자’이시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셨다는 사실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 시대에 두 인물,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 예표된 바가 있었다. 또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누가복음 24:50, 51,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신적 영광과 권위를 나타낸다. 그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크신 대제사장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와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절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씀한다.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 사역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가장 간략한 내용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가 매주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도 믿음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 사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21문)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구속자(救贖者)는 누구이십니까? 답)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셨으나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또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25문)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십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십니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하다’는 원어(쉼파데사이)는 ‘동감하다, 동정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의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참 사람이셨으나 또한 참 하나님이셨으므로, 그의 인성은 신성의 도움과 보호 속에 무죄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그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죄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대속의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는 ‘때를 따라 적절한, 혹은 시기 적절한, 도움을 위해’라는 뜻이다. ‘담대히’라는 원어(메타 팔레시아스)는 ‘담대함을 가지고, 혹은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에게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자,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가 계시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그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16절까지에서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 승천하신 자,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구약의 대제사장은 죄인들의 죄를 씻는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다 이루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니, 그의 사역은 얼마나 더욱더 효력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둘째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모든 연약을 아시고 이해하신다. 그는 우리의 많은 부족과 결함들을 동정하신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그러나 죄가 없으신, 구주이시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자! 예수께서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의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올 때 우리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1-10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1-3]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천사가 대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직접 그 역할을 하시는 것도 아니다. 대제사장을 사람들 중에서 택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을 위해 속죄 제물을 드릴 때 무식하고 미혹에 빠진 자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는 사람이시다. 이미 서신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이런 말씀을 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추셨다. 그는 과연 우리를 위해 가장 적절한 구주이시다.
[4-6]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또한, 대제사장은 스스로 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아론처럼 불러 주셔야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스스로 대제사장의 존귀와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높이셨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종으로, 남을 섬기는 자로 묘사하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 관해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들은 각각 시편 2:7과 110:4의 말씀들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에서 ‘반차’라는 원어(탁시스)는 ‘질서, 순서, 반열, 혹은 특질’이라는 뜻이며, 시편 본문에 나오는 원어(디브라)는 ‘이유, 원인, 혹은 모습, 모양’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특질 혹은 모습을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일 것이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본절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신비를 증거한다. ‘육체에 계실 때’라는 말은 ‘세상에 계실 때’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는 부활, 승천하신 지금도 참 사람으로서 영화롭게 된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이것은 아마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일을 가리킬 것이다. 그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 22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1-44).
예수께서는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 ‘경외하심’이라는 원어(율라베이아)는 ‘경건, 경외함’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신비하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것은 신비 중에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다.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도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
[8-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당하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께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특히 그의 인성(人性)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본래 완전하셨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완전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순종과 의는 완전한 순종과 의가 되었고, 그의 속죄 사역은 십자가로 다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 완전한 구주,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이렇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며 온전케 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순종하는 자’라는 말은 믿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복음의 교훈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으며 구원을 받았다(롬 6:17, 18).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 비록 믿는 이들의 순종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믿고 실제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근원’이라는 원어(아이티오스)는 ‘조성자, 원인자, 원천, 근원’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 곧 한번 받으면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의 본문은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해준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참 사람이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참된 인성을 가지신 구주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스스로 대제사장의 존귀를 취하신 것이 아니고,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모습을 좇는,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영원하신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
셋째로, 인성을 가지신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고 완전케 되셨음으로 그를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완전한 구주, 완전한 중보자,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이런 놀라운 대제사장이신 구주가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자! 우리는 확실히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확신하자! 또한 우리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참고 믿음으로 승리하자!
11-14절, 영적 미성숙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구약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시 110:4).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맞으며 축복했던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 19).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창 14:20).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에는 깊은 예표적인 뜻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에 대해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지만(7:1-3), 지금은 할 말이 많으나 듣는 자들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듣는데 둔한 까닭은 그들의 영적인 미성숙 때문이었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점점 더 경건해지고 의로운 인격이 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의 지식이 많아지고 그 뜻의 깨달음이 깊어진다.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본서신의 수신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듣는 이들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데 설교나 성경 강해의 어려움이 있다.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원문에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멜기세덱에 대해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 때문이었다. 본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은 믿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영적으로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들이 되어야 했었다. 신자는 믿은 지 여러 해가 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말해, 성도는 복음 진리의 전도(傳道)를 받아 중생(重生)하여 믿고 회개함으로 새 생활이 시작되고, 성경 말씀으로 양육되어 점점 성화(聖化)되어 의로운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들을 성경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우유나 마시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들이었다.
여기에 두 부류의 신자들과 두 종류의 음식이 있다. 하나는 영적 어린 아이들과 그들이 먹는 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과 그들이 먹는 음식이다. 전자를 엄마의 젖 혹은 우유에 비유했고 후자를 단단한 식물에 비유했다. 영적으로 말해,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 즉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에 해당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즉 모든 성경의 지식과 실천에 해당한다. 세례 대상자들을 위한 학습반 공부의 내용들은 전자에 해당할 것이지만, 성경 본문의 자세한 강해나 조직신학 강의나 현대교회문제 강의 등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대저’라고 번역된 원어(가르)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젖을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이유를 보인다. 그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다. ‘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성경 말씀의 내용과 목적은 의(義)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것은, 의가 없었던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의 복음과 또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할 교훈들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실제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미성숙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모든 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부족했다.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어린아이들이 먹는 우유나 젖과 달리, 단단한 식물은 다 자란 아이들의 음식이다. 본절에 ‘지각을 사용하므로’라는 원어(디아 텐 헥신)는 ‘실천 때문에, 계속적 실천 혹은 습관 때문에’라는 뜻이다. 본절의 후반부를 다시 번역하면, ‘저희는 계속적 실천 혹은 습관 때문에 지각이 훈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이다. 여기에 영적 성장의 방법이 암시되어 있다. 영적 성장은 단지 이론적 지식으로 되지 않고 계속적 실천을 통해 우리의 지각이 훈련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영적 성장은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자람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성도들 가운데는 영적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만을 감당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려운 말씀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치 밥을 먹지 못하고 우유나 젖만을 찾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그들에게는 아직 남을 가르치거나 돌볼 힘이 없다.
둘째로, 성도들 가운데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모든 말씀을 감당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믿음에 굳게 서서 의를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계속적 실천을 통해 지각이 훈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가진 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 여러 해가 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에 머물지 말고 성경의 모든 의의 말씀들을 섭취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에서 쉬운 말씀들 뿐만 아니라 어려운 말씀들도 읽고 연구하며 배워야 한다. 또 그 모든 의의 말씀들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초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주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성장의 방법은 몸의 성장의 이치와 비슷하다. 아이들이 튼튼히 잘 자라려면 잘 먹고 잘 뛰어 놀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도가 영적으로 잘 성장하려면,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하며 또 의의 말씀을 계속 실천함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갖게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성도는 영적으로 점점 성장하며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자들, 선악을 잘 분별하는 자들이 되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굳게 세울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인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는가?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힘써야 할 것이다.
1-8절, 신앙의 전진과 타락
[1, 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장 끝부분에서 말씀한 대로 성도가 믿은 지 오래되면 당연히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는 원어(톤 테스 알케스 투 크리스투 로곤)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뜻한다. 원문의 어순(語順)대로 다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떠나서 완전한 데 나아가며 . . .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지니라’이다.
이어서 언급한 여섯 가지의 진리들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의 내용을 보인다. 그것들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내용들이다.
첫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죽은 행실이란 죄악된 행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불경건, 우상 숭배, 불의, 미움, 음란, 거짓, 사악 등이다. 이러한 죄악된 행실들,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행했던 행실들을 회개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적 진리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회개하는 자는 죄악된 행실들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리고 그를 전심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기본적 요소이다.
셋째는, 세례들의 교리이다. ‘세례들’이라는 복수 명사(밥티스모이)는 ‘씻음들’이라는 뜻으로, 신앙에 기본이 되는 여러 가지 씻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그것은 최초의 씻음이요 근본적인 사죄(赦罪)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일이므로 ‘성령의 세례’라 불리운다(딛 3:5). 또한 성령의 씻음을 외적으로 확증하는 물 세례가 있다. 또 유아 세례는 믿는 가정에 출생한 아이가 언약의 특권을 누린다는 뜻이 있다. 또 우리는 세례 받은 후에도 살아가면서 실수와 부족이 있을 때마다 주의 보혈의 샘에 나아가 씻음을 받는다. 그 씻음은 반복적이며 일평생 계속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씻음들이 있다.
넷째는, 안수의 교리이다. 안수는 몇 가지 경우에 한다. 세례식의 안수는 구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상징하는 물로 씻는다는 의미가 있다. 임직식의 안수는 회중으로부터 구별하여 직분에 합당한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뜻이 있다. 병자를 위한 안수는 성령의 능력의 특별한 역사를 구하는 뜻이 있다. 교회 법은 안수는 복음 사역자로 임직된 목사만 하도록 규정하는데, 그것도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다. 이것은 복음 안에 있는 궁극적 소망이다. 구원은 영생이며 그것은 곧 죽은 자의 부활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다(요 5:29).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이다. 복음의 기본적 진리들 가운데 가장 두렵고 엄숙한 것은 영원한 심판의 사실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지옥은 악인들을 위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그는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고 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3, 48).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버리고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가자’고 말한다. ‘버린다’는 말(아피에미)은 ‘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떠난다’는 뜻이다. 즉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에만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는 뜻이다. ‘터를 다시 닦는다’는 것은 기본적 신앙이 없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 성도가 믿은 지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기본적 진리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없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성도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떠나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텔레이오테스)은 앞장에서 말씀한 영적 성숙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요, 습관 때문에 지각이 훈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다. 완전한 데 나아가는 자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 곧 교리적, 사상적 내용이든지 혹은 윤리적, 생활 교훈적 내용이든지 다 읽고 묵상하고 배우기를 힘쓰는 가운데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를 힘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성숙하고 완전한 데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본절은 성도의 신앙 성장이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가능함을 말씀한다. 성도의 구원적 신앙의 시작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고 신앙의 성장도 그의 은혜로 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의 허락하심 없이 되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주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0:29). 사람의 구원과 믿음도 그러하고, 믿음의 성장도 그러하다. 바울 사도는 증거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했다(고전 3:6, 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신앙의 초보적 단계에서 벗어나서 영적 성숙의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4, 5]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원문에는 4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1, 2절의 교훈의 이유를 나타낸다. ‘한 번 비췸을 얻고’라는 말씀은 복음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얻게 된 것을 뜻한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고 그 은사들을 체험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말씀은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한 내용들, 예를 들어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와 양자(養子)됨 등을 깨닫고 믿게 된 것을 뜻하고, 또 내세에 있을 부활과 천국의 기쁜 일들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운 일들에 대해 깨닫고 믿게 된 것을 뜻할 것이다.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타락한 자들’이란 기본적 신앙에서 떨어져 그 신앙을 배반한 자들을 가리킨다. 즉 배교자들이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혹은 공공연하게 욕을 보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중생(重生)한 성도가 타락하여 배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적으로 성도의 견인(堅忍)에 대해 밝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다(요 10:28). 바울 사도도 증거하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하였다(빌 1: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과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중보 사역의 완전성, 그리고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는 성도의 견인 진리를 확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시고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자들은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가상적 경고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결코 타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경고의 말씀은 필요하다. 성도는 늘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을 가지고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믿는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주의 비유의 말씀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기쁨으로 받으나 시험과 환난에서 넘어진다. 그러한 일시적 믿음은 구원적 믿음이 아니다.
[7, 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원문에는 7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그것은 타락한 자가 회개할 수 없는 이유를 보인다. 그것은, 비유컨대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한 땅이 밭 가는 자들이 먹을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불사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그렇지 못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도리어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불사르어질 것이다. 성도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타락과 배교의 위험한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 성장은 선택 과목이 아니고, 필수 과목이다. 성도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을 확신하고 그 터를 다시 닦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 속에는 회개, 믿음, 세례, 부활, 심판 등의 내용이 포함된다. 이런 것들은 기본적 진리이다. 이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이단적이다. 그런 불신앙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기본 진리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신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에 머물지 말고 그것들에서 떠나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씀은 영적 성숙함을 뜻한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의 일부분의 지식과 믿음으로 만족하지 말고 모든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고 묵상하기를 힘써야 한다. 또 모든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따라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참된 믿음에서 떨어져 믿음을 배반하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불신앙과 불순종의 완악함에 떨어지고 마침내 믿음을 배반하는 배교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이다. 참으로 중생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런 상태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경고를 받고 늘 깨어 근신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영적 미성숙은 매우 위험한 지점이다. 영적으로 성숙하라는 주의 명령에 성실하지 않고 안일과 나태를 고집하는 자는 배교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영적 성숙을 향해, 신앙 성장을 향해, 완전을 향해 힘써 전진하자!
9-12절, 우리의 간절한 소원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라는 말씀은 ‘우리가 배교에 대해 앞에서 경고했지만’이라는 뜻이다.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을 확신한다’는 말씀은 ‘너희에게는 배교를 염려하는 것보다 나은 것들이 있음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또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에코메나 소테리아스)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서신의 수신자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그것은 앞절에서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치 아니하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의로운 행위,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지금도 섬기고 있다. 전통 사본에는 ‘사랑으로’라는 말이 ‘사랑의 수고로’라고 되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요한일서 4:20, 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의 선행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42). 또 그는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양과 영소의 비유에서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주이신 영광의 왕께서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4-36).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데)이 있다. 9, 10절은 히브리서 저자의 확신을, 11, 12절은 그의 간절한 소원을 증거한다. 즉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이렇게 확신하지만, 또한 우리는 너희에 대해 이것을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씀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씀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일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모든 성도들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 생활이다.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소망의 풍성함에’라는 원어(프로스 텐 플레로포리안 테스 엘피도스)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라는 뜻이다. 성도의 소망은 내세의 일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이런 소망의 내용들에 대해 확신하고 끝까지 그러해야 한다.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이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게으르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앞절의 ‘부지런’이라는 말씀과 상통한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란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세상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살았고 마침내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았다. 그들이 받은 약속들이란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들어간 천국과 거기에서의 안식이다.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결론적으로, 9절부터 12절까지는 히브리서 저자의 확신과 간절한 소원이다. 그는 본장 앞부분에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영적 성장의 중요성과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썼지만, 그들이 이보다 나은 것들과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들과 성도들을 섬긴 일들을 기억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성도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통해서이다. 행위는 믿음과 구원의 열매요 증거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의 증거를 위해 어떤 행위들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의 구원을 증거할 수 있는 선한 행위들은 무엇인가?
또한, 본문에 기록된 히브리서 저자의 소원은 그대로 오늘 우리의 소원이 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동일한 부지런’ 즉 다같이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열심 있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되기를 원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두 다 끝까지 소망의 내용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에 대한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천국 안식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 즉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3-20절,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심
[13, 14]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원문에는 본문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고 이것은 15절까지 이어진다. 이 말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의 예로 아브라함을 들어 확증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며 약속하신 것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자 했을 때에 있었던 일이었다(창 22장). 창세기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4절 끝과 15절을 다시 번역하면, “. . . 하셨으며, 저가 이같이 오래 참은 후에 그 약속을 받았음이니라”이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은 후에 그 약속을 받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이 언제부터 오래 참았다는 말인가? 또 그가 받은 ‘그 약속’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브라함은 언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오래 참았는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은 창세기 12장에서의 일이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세기 12:4에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그가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75세이었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는 것은 바로 이 75세 때부터 그가 이삭을 아들로 받았던 100세 때까지 약 25년 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얼마나 길고 지루한 기간이었겠는가? 25년 간의 세월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대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믿음과 인내의 일이었는가?
아브라함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중에 100세 때에 마침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 아들은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그 약속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이었다. 그것은 성격상 메시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미칠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이삭은 메시야의 표상이요 모형이었다. 그 이삭을 통해 천하 만민이 장차 놀라운 구원의 복을 받게 될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런데 이삭이 아마 20살 내지 25살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느닷 없이 그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던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죽여야 했다. 그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조건적으로 믿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죽게 하신다면 다른 아들을 주시든가 아니면 죽은 그를 다시 살리시든가 하실 것이라고 믿었음에 틀림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리아 산으로 갔고 거기서 단을 쌓았고 외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거의 죽이려 하였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막으셨고 그 대신 한 수양을 번제물로 드리게 하셨고, 오늘 인용된 말씀대로, 맹세로 그 약속을 주셨던 것이다. 이삭은 이 점에서도 메시야의 표상이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산 자와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과 같았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은 후에 그 약속을 받았다’는 말씀은 이와 같이 25년 간의 세월을 참았을 뿐만 아니라, 이삭이 장성하기까지 20년 내지 25년을 더 참은 후에도 이삭을 드릴 정도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참고 기다린 후에 그 약속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오래 참은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 곧 복의 약속을 주셨다. 창세기 22장의 본문에는 그 복의 약속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내용임이 증거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야 약속이요 메시야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16, 17]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어떤 것의 참됨을 엄숙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논쟁에서 진실에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만일 누가 맹세에서 거짓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약속하신 그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시고 그 약속을 보증하신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의 확실함을 증거하셨다.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들이 있다. 첫째는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는 그의 맹세하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므로 약속만 하셔도 그 약속은 진실하고 확실할 것이지만, 맹세까지 하셨으니 그 약속이 얼마나 더 진실하고 확실할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내용들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는 그의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시고 확실하시며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하나님의 주신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상에서의 신앙의 여정(旅程)에서 하나님의 그 약속과 소망의 확실함 때문에 큰 힘과 위로를 받는 것이다.
[19, 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휘장’이라는 말(카타페타스마)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히 9: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다. 그것도, 튼튼하고 견고한 닻과 같다. 배의 크고 견고한 닻을 내리면 배는 한 곳에 정착한다. 바람과 파도가 몰아쳐도 배는 표류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 수 있다. 성도의 소망은 이와 같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휘장 안으로 하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회복케 되었다. 이제 성도는 영혼의 닻을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굳게 내렸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였고 내세의 영광의 소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튼튼하고 견고한 닻과 같은 소망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 안에서 참된 안정과 평안과 기쁨을 얻었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은 두 가지의 귀한 진리들을 증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 그것은 맹세로 보증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도 동일하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 부활과 영생의 약속, 그리고 영광스런 천국의 약속은 모두다 진실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들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들은 우리에게 견고한 소망과 큰 안위를 준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과 소망은 우리의 영혼의 튼튼하고 견고한 닻과 같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참된 안정과 평안, 또 큰 힘과 위로를 얻는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우리의 내세의 소망과 영광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존한다. 그의 약속의 말씀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큰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
1-10절, 신비한 인물 멜기세덱
[1, 2]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창세기 14:18-20에 나오는 인물이다. 거기에 보면, 그는 몇 가지로 증거되어 있다. 첫째로, 그는 살렘 왕이었다. 둘째로, 그의 이름은 멜기세덱이었다. 셋째로, 그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넷째로,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다섯째로,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여섯째로, 그는 아브라함의 손에 그 대적을 붙이시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일곱째로,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받았다.
이상의 사실들은 멜기세덱이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눈 자이었음에 틀림 없다. 멜기세덱의 존재는 아브라함 당시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아브라함 외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서나 자기의 사람을 남겨두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인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에 근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멜기세덱은 참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豫表)이었다. 우선, 그의 이름이 그러하다. ‘멜기세덱’이라는 히브리어는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 살렘 왕이라는 말은 ‘평강의 왕’이라는 뜻이다. 의의 왕과 평강의 왕은 메시야에 대한 명칭이 아닌가? 이사야 9:6, 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역사적 인간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멜기세덱은 실제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말인가? 본절은 멜기세덱이 실제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대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정도의 하나님의 귀한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족보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없다는 뜻이라고 이해된다. 하나님께서 이 멜기세덱을 이렇게 신비한 베일에 감추신 까닭은, 바로 그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마치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비슷한 자로 역사상 잠시 언급된 것이었다.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는 말씀은 시편 110:4의 말씀에 근거한 것 같다. 거기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이신 메시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멜기세덱의 높은 점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그가 아브라함에게서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받았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호 파트리아르케스), 즉 족장이었다. 이스라엘의 족장인 그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을 보면,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 자인지 알 수 있다.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다. 그들은, 비록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 곧 다른 지파 사람들과 동등한 자들이지만,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형제인 백성 즉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다. 민수기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들에게 주어야 했고(21절), 레위 지파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것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했다(26-29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규정하신 십일조의 규례이었다.
[6, 7]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蔽一言)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그런데 레위 족보에 들지도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취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않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특별한 인물임을 암시한다. 이 점에서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멜기세덱이 높은 두번째 점은,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점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은 후 그를 축복하였다. ‘페일언하고’ 즉 ‘변론할 것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임이 나타났다.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레위 지파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해 볼 때,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다 죽을 자들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지만, 저 멜기세덱은 앞에서 인용한 시편 110:4의 말씀대로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자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다. 이 점에서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났다.
[9, 10]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아직 그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점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뛰어난 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레위 지파 사람들이나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난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점들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멜기세덱을 택하여 사용하셨던 것처럼 자유로이, 주권적으로 자기의 사람을 택하시고 사용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를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豫表)로 사용되었다. 그 이름의 뜻이 의(義)의 왕이요 살렘의 왕 곧 평강의 왕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왕과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또한 그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신비한 인물로 언급되었듯이, 예수님은 영원하신 신성(神性)을 가지신 메시야이시다. 그의 근본은 태초에, 영원 전부터이시다.
셋째로,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높은 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그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이 때 레위는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레위 지파 제사장들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점이었다.
멜기세덱의 높은 점들은 그가 예표한 메시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뛰어남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에서 나셨으나,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난 크신 대제사장 곧 멜기세덱 같은 특별한 제사장이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대속 사역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명령된 구약 율법의 제사 제도보다 더 뛰어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전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나님을 섬기자!
11-19절, 더 나은 제사장 직분의 필요성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 제도가 폐지되었음을 해설해 주는 성경이다. 본절은 구약의 제사장 직분의 부족함을 증거한다. 본절은, 만일 구약의 제사장 직분이 부족하지 않았다면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절은 구약의 제사장 직분의 부족함을 ‘그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다’는 말로 표현한다. 여기의 온전함 혹은 완전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완전한 사죄, 완전한 화목, 완전한 헌신, 완전한 교제’를 가리키며, 또한 궁극적으로 이것들을 통해 가져올 도덕적 완전을 가리킬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흠과 점이 많았고 종종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되었고 또 육신적으로도 죽을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제물들도 죄인들에게 참으로 사죄(赦罪)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실상 모형과 그림자요 예표(豫表)에 불과하였다.
구약의 제사장 직분을 통해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을 세울 필요성이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 제도는 폐지되고 복음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물론 구약의 율법과 무관하시지 않았다. 구약의 율법은 그와 그의 대속 사역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와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분이시다(롬 3:21). 그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오시지 않았고 이루러 오셨다(마 5:17). 그는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셨고 그 요구를 완성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완전한 사죄, 완전한 화목, 완전한 헌신, 완전한 교제가 주어졌고 도덕적 완전 곧 완전한 의(義)가 이루어졌다(롬 3:21, 22; 10:4).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앞절에서 제사장 직분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제사장 직분의 변화가 아니고 결국 율법 제도의 변화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론 자손의 제사장이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으로 대치되듯이, 구약의 율법 제도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고 복음의 새 형식으로 대치되어야 할 것이었다.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이것은, 11절에서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움에 대해 말한 이유를 나타낸다. 본절을 원문대로 다시 번역해 보면, “이는 이것들이 말해진 자는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함이니라”이다. ‘이것들이 말해진 자’란 멜기세덱을 가리킨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제단 일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 즉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 맡겨진 일이었고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멜기세덱은 전혀 다른 족속에 속한 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한 제사장을 메시야로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여기에 신약 시대에 도입될 새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암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14, 15]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원문에는 본절에 초두에도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이것은 앞절의 말씀을 보충하여 말씀한 것이다. 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주 예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나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해 말한 것이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을 볼 때 더욱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구약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가 영원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메시야를 유다 지파에서 나게 하시지 않았을 것이며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일어나게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메시야가 유다 지파에서 나셨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을 보면, 구약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가 폐지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16, 17]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이란 구약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이어야만 한다는 율법의 규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그런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구주가 되신 것이 아니었다. 주 예수께서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구주가 되셨다. ‘무궁한 생명’이란 100년에 제한된 육신의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과 달리 영원한 제사장이신 것이다.
원문에는 17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께서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제사장이 되셨다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근거는 앞에서 인용된 시편 110편에서 메시야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증거된 것이다.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에 상관된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보내신 이유를 제시한다. ‘전엣 계명’은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구약의 제사장 제도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여지기 때문이었다. 구약의 제사장 제도는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제사장의 연약과 제물의 부족과 또한 제사드리는 사람들의 부족 때문에 실상 연약하고 무익하였다. 구약의 제사장 제도나 율법 제도는 그 자체로는 연약하고 무익하였다. 그것은 단지 앞으로 오실 완전하신 메시야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요 예표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메시야가 오셨으므로 그림자와 모형과 예표인 제사 제도와 율법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왜냐하면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했으나 더 좋은 소망의 첨가는 했음이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느니라”이다. 율법이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한다는 말씀은 11절 내용의 반복이다. 즉 율법을 통해서는 사람이 도덕적 완전을 얻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씀했다(롬 3:20).
그러나 더 좋은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의(義)가 되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우리는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우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의 요지는 구약의 제사장 직분은 사람에게 도덕적 완전함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엇에 대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새 제사장 직분에 대해 말씀하였고 그 말씀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새 제사장 직분의 필요성은 곧 구약의 제사 제도와 율법 제도의 폐지를 보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새 형식의 도입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구약의 제사 제도와 율법 제도의 예표적, 모형적, 그림자적 성격을 배워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속죄의 복음의 실체적, 완성적 성격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구약에 비추어 더 좋은 소망의 내용이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구약 제도의 폐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오늘날 왜 우리가 더 이상 구약의 성전 예배의 의식을 지키지 않고 제사들과 절기들을 지키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의미와 성격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신약의 큰 복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힘 있게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28절, 더 나은 제사장
본문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과 비교하여 새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20, 21]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첫째로, 새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써 제사장이 되셨다는 점에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율법 아래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심으로 영원한 새 제사장에 대해 예언하셨던 것이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이’라는 원어(카타 토수톤)는 ‘이렇게 큰 것에 의해’라는 뜻이다. 여기에 ‘큰 것’이란 하나님의 맹세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렇게 큰 것 곧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는 말씀이다. ‘더 좋은 언약’이란, 구약이 예표적, 예언적 성격의 언약이었으나 신약은 실체적, 성취적 성격의 언약임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새 언약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23, 24]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둘째로, 새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계시다는 점에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죽는 인생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효가 많았다. 그러나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신 분이시며 따라서 그 제사 직분도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다. ‘갈리지 않는다’는 원어(아파라바토스)는 ‘임시적이지 않다, 변하지 않다, 영속적이다’는 뜻이다.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기를 힘입어’라는 원어(디 아우투)는 ‘그를 통하여’라는 뜻이고, ‘온전히’라는 원어(에이스 토 판텔레스)는 ‘끝까지, 영원히, 완전히’라는 뜻이 있다. 새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끝까지, 영원히,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까닭은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간구한다’는 원어(엔튕카노)는 ‘중재한다, 중보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26, 27]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새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과 달리 죄가 없는 분이시다.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먼저 날마다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새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그는 단번에 자신을 드려 속죄를 이루셨고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 제사장이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나은 세번째 점이다. ‘단번에’라는 말(에파팍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제사가 필요 없음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다.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완전한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율법은 연약성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새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되신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신 신적 구주이시다.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은 앞에서도 두 번 증거되었다.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5:8, 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구주로서의 그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뜻이다. 즉 그는 완전한 구주,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는 말씀이다. 본절에서 그가 ‘영원히 온전케 되셨다’는 말씀은 앞에 증거된 내용을 강조하여 확증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속죄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20절부터 28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새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나은 점들은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맹세로 제사장이 되셨다는 점이며, 둘째로 그가 영원히 살아계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끝까지, 영원히,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점이며, 셋째로 그가 단번에 자신을 드려 대속을 이루셨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심으로 그의 제사 직분은 영원하고 불변적이며, 그는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그의 제물은 완전하고 그의 대속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완전함을 깨닫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代贖)을 받았고 완전한 의를 받았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 밖에 없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일을 하심을 깨닫자.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된다. 우리는 만가지로 부족하지만, 구주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고 지금도 그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흠과 점이 없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마침내 영화로운 몸을 입게 하시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께 큰 감사와 헌신과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구약의 경건한 백성들은 예표적, 예언적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진실히 섬겼고 그를 위해 살았다. 우리는 실체적, 성취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았으니 얼마나 더 크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밝히 계시되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헌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1-13절, 더 나은 직분
[1, 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본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해 해설하면서 이러한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앞장에서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단번에 드려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자이시며 성소와 참 장막에서 ‘부리는 자’가 되셨다고 첨가하여 말한다. ‘부리는 자’라는 원어(레이투르고스)는 ‘사역자, 봉사자’라는 뜻이다. 하늘에 있는 참 장막 혹은 성막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다.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있는 참 장막 혹은 성막에서 봉사자가 되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저가 제사장이시라면 저도 땅 위에 있는 제사장들처럼 성막에서 무슨 예물을 드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물’이라는 원어(도라)는 구약 성경 레위기 1장에 나오는 ‘예물’이라는 히브리어(코르반)에 상응하는 헬라어이다.
[4, 5]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원문에는 4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하늘 장막의 봉사자가 되셨는지를 말씀한다. 그 이유는, 땅에서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땅에서 섬겼던 장막 혹은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 보이셨던 본을 따라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제 바로 그 하늘의 원형의 성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신 것이다.
[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다. ‘더 아름다운’이라는 원어(디아포로테라)는 ‘더 뛰어난, 더 나은’이라는 뜻이며, ‘직분’이라는 원어(레이투르기아)는 ‘봉사, 사역, 직무’라는 뜻이다. ‘더 아름다운 직분’ 혹은 ‘더 나은 사역’이라는 말은 구약 율법 아래서의 레위 자손 제사장들의 사역과 비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들의 사역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도는 예수께서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이란 다음에 말씀하고자 하는 새 언약을 가리킨다.
[7-9]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과 맺으셨던 옛 언약과 비교된다. 새 언약과 비교할 때, 옛 언약은 첫번째 언약이며 새 언약은 두번째 언약이다. 이 두 언약은 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속한다. 그러나 첫번째 언약은 흠이 없는 완전한 언약이 아니었다. 만일 첫번째 언약이 흠이 없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두번째 언약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새 언약 곧 두번째 언약에 대해 예언하신 것을 보면 첫번째 언약은 흠이 있는 불완전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 예언된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언약이었다.
[10-12]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언된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내면성이다. 옛 언약은 두 돌판에 새겨진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의 속에, 즉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할 것이었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확립이다. 옛 언약은 상당히 조건적 형식을 취하였다. 옛 언약에서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행위 언약의 형식이 여전히 강조되었다. 우리는 물론 그 언약 아래서, 즉 구약의 율법 아래서 사람들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하라’는 강조는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다(롬 3:20). 그러나 새 언약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확고하게 세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밝히 썼다(요 1:12).
새 언약의 세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메시아 시대를 예언하기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고 하였다(사 1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되었다. 신약 아래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지식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충만하게 되었다.
네번째 특징은 사죄(赦罪)의 완전하고 영원함이다. 옛 언약 아래서의 예표적 사죄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대속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마지막으로,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 즉 첫 언약의 일시성과 폐지를 암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필요가 없었고 또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새 언약을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은 옛 언약 곧 첫 언약이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새 언약의 도입으로, 즉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예언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대치되고 옛 언약 자체는 폐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옛 언약의 폐지를 말할 때 우리가 주의할 점은 구약의 율법의 세 가지 요소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 가운데 의식법들과 재판법들은 다 폐지되었고 우리는 그것들이 주는 상징적 의미들이나 그것들 속에 포함된 영속적 원리들에서만 교훈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 가운데 도덕법들은 그 성격상 영속적이다. 도덕법들은 주로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시대에도 도덕법들을 다 지켜야 한다. 우리는 물론 구원받기 위해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당연한 의무로서 지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장은 몇 가지의 진리들을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서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제사장 사역을 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단번에 드려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가셨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새 언약의 중보를 의미한다. 예언된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인데, 첫째는 내면성이며, 둘째는 하나님과의 확실한 관계 확립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며, 넷째는 사죄(赦罪)의 완전하고 영원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신 것을 보면, 옛 언약은 일시적이며 폐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새 언약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옛 언약이 이제 폐지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대제사장, 곧 율법 아래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대제사장,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를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을 굳게 믿고 담대히, 겸손히 그리고 충성되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10절, 구약 성전 제사의 부족함
[1, 2]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첫 언약, 곧 구약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그것을 위한 성막을 주셨었다. 성막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성막 입구의 휘장(첫째 휘장)으로 들어가는 첫째 부분은 성소(聖所, 하기아)라고 불리운다. 성소 안에는 등대가 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힘입어야 함을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또 성소 안에는 떡상이 있고 그 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쌓아놓은 떡(진설병 陳設餠)들이 있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위한 생명의 떡이 되심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말씀--그것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3, 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둘째 휘장을 통해 들어가는 두번째 부분은 지성소(至聖所)라고 불리운다. 본문은 거기에 금향로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말한 ‘금향로’(크뤼순 뒤미아테리온)은 무엇인가? 출애굽기 후반부에 나오는 모세의 성막에는 금으로 싼 분향단(출 30:1; 헬라어로 뒤시아스테리온 뒤미아마토스)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소에 있었다. 본문의 금향로가 그 금향단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왜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에 있다고 언급되어 있는가? 이것은 성경에서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러나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어 보인다. 첫째로, 본문의 ‘금향로’가 성소에 두었던 금으로 싼 분향단을 가리키지 않고, 아마 지성소에 두었을 금향로(대하 26:19, 뒤미아테리온)를 가리켰을지도 모른다.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이 1년 1차씩 사용했던 금향로는 지성소에 보관되었다고 언급하였다(Josephus, Antiquities, 3. 7). 둘째로 모세 시대의 성막에서와는 달리,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금향단이 지성소에 속했을지도 모른다. 열왕기상 6:22에 ‘내소(內所=지성소)에 속한 단’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분향단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셋째로, 금향로가 성소에 속한 금향단을 가리키지만, 그것이 1년 1차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성소에 연관시켜 언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금향로 혹은 금향단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사역을 하시고 중보의 기도를 올리심을 나타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감을 상징한다고 본다.
또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거기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첫째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셨듯이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실 것을 증거한다. 둘째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세우신 직분자의 권위에 도전과 저항함을 허락지 않으시고 진노하셨음을 증거한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세우신 일꾼들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원하신다(살전 5:12, 13; 히 13:17).
셋째는 언약의 비석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의지를 나타내며 모든 인생의 마땅한 도덕적 의무를 보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그 요구에 심히 미달되는 부족한 죄인들이며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인다.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고 모두 다 죄인이다.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그 천사들은 하니님의 영광을 옹위하고 또 그 영광의 광채를 감추며 가리운다. 특히, 속죄소의 규례는 성막 제도에서 가장 중심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이루실 속죄 사역을 상징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구원의 은혜를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법으로는 죄인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6, 7]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구약의 성막 제도의 의하면, 제사장들은 보통 성소에 들어가 제물의 피를 뿌렸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유대의 달력으로 7월 10일 속죄일에 1년 1차씩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 날 대제사장은 아마도 3번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 같다(레 16:12-15). 첫번째는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 지성소에 향연이 가득하게 했고, 두번째는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고, 세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다. 대제사장의 이러한 행위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상징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이 예표된 일을 이루셨던 것이다.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본문은 구약 제도와 제사 의식의 부족함을 세 가지 면에서 증거한다. 첫째로, 구약 제도 아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본절의 표현은 영어 성경과 같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마태복음 27:50, 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히브리서 10:19, 20,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9, 10]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둘째로, 구약의 성전 예배 의식은 비유적, 예표적이었다. ‘현재까지의’라는 원어(에이스 톤 카이론 톤 에네스테코타)는 ‘현재의 때를 위한’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가리킨다. 또 구약 제도와 제사 의식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더불어 육체의 예법만 되었고 개혁할 때까지 부과된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그 개혁의 때가 신약 시대이다. 예언된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예언과 예표는 성취되었고 구약 제도와 의식은 폐지되었다.
셋째로, 구약 제도와 제사 의식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었다(7:11, 19). 사실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며 예표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실 것이었다. 이제 그가 오셨고 그가 그 일을 이루셨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함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의를 얻었다(히 7:27).
결론적으로, 구약의 성막 예배, 성전 예배는 부족했다. 그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형적으로, 예표적으로, 상징적으로 보이는 뜻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이었다. 이제 그가 오심으로써 그리고 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속량하심으로써 구약의 의식들은 다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폐지되고 신약의 규례로 대치되는 것이다.
11-22절,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장래 좋은 일’은 구약에 비추어 말씀한 것으로서 신약 시대에 이루어질 일을 가리킨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과 달리 신약 시대에 주실 일, 즉 구약의 모형적인 것을 성취할 참된 속죄 사역의 일을 위해 세상에 대제사장으로 오셨고 그의 하실 일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영원한 속죄 사역을 이루시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가 이루신 속죄 사역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서 이루어졌다. 그 장막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구약 성막이나 성전과 비교되는 하늘 장막과 하늘 성소 곧 천국을 가리킨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이 일을 이루셨다. 레위기 16:6, 7에 보면,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수염소 두 마리를 준비해야 했었다. 수송아지는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이었고, 수염소 두 마리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 제물이며 다른 하나는 ‘내어 놓아주는 염소’인데 완전한 죄사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피로 제물을 삼으셨다. 그 피는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이었다. 베드로전서 1:18, 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일이 되었다. ‘속죄’라는 원어(뤼트로시스)는 ‘구속’(救贖)이라는 말로서 값을 주고 사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의 값 즉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의 값을 지불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값은 너무 크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라고 불리운다. 그 속죄는 영원하기 때문에 매년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가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표현되었다. 그의 죽으심은 한 번으로 충족하였다. 그것은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는 속죄의 죽음이었다.
[13, 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구약 제도와 비교할 때 더욱 많은 효력이 있다. 구약의 제사 제도도 효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 사람의 육체의 부정을 깨끗케 하고 거룩케 하셨다. 그렇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흠 없는 자신을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효력이 있겠는가? 여기에 ‘영원하신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킨 듯하다. ‘흠 없는 자기’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을 말한다. 구주께서는 자신이 무죄하셔야 다른 이들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두 가지로 증거된다. 첫째는, 사죄(赦罪)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은 행실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한다. 둘째는, 새 생활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대히 섬기게 만든다. 구약 시대에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를 통해 사죄와 새 생활의 은혜를 경험했었다. 그러나 구약에 비해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더 크고 더 확실하다.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리고’라는 말(카이)이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피의 세번째 효력을 보인다. 그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 즉 회개하고 구원얻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 곧 천국의 약속을 얻게 하는 것이다. 영원한 나라, 영생의 나라인 천국은 구원의 목표이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았다.
[16, 17]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이루셨는지를 말씀한다. 본절의 ‘유언’이라는 원어(디아데케)는 앞절의 ‘언약’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언적 성격이 있었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자기 기업을 아들에게 상속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의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여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게 된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력을 발휘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효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18-21]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첫 언약 곧 구약도 피 없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피를 취하여 그 책에 뿌리고 또 모든 백성에게 뿌렸다. 그 책은 ‘언약서’라고 불리웠고 그 피는 ‘언약의 피’라고 불리웠다(7, 8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와 같이, 그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 . . [새] 언약의 피”이었다(마 26:28). 이제 언약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으로 그 언약은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가리키며 피 흘림은 속죄 혹은 죄사함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레위기 17:11에 다음과 같이 증거되어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혹은 ‘영혼’]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혹은 ‘이는 피가 영혼을 위해 속죄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다 받으셨고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보혈을 다 흘리셨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22절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의 사역은 구약의 제사와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한 사역이다. 그는 구약이 예표적으로 보여주었던 바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성취하셨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력은 확실한 사죄와 하나님을 섬기는 새 생활과 영원한 천국 기업의 상속이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아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로 말미암아 확실히 죄사함을 얻었고 새 삶을 살고 있으며 영원한 천국 소망을 소유하였는가?
23-28절,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제사장 사역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구약 제도 아래의 기구들은 짐승의 피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지만, 하늘에 있는 그것들 즉 구약 제도의 원형은 더 좋은 제물로 해야 할 것이다. 그 더 좋은 제물이란 그리스도 자신의 피를 가리킨다. 구약 제도는 하늘의 원형에 대한 모형에 불과하였고 짐승의 피뿌림도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제사에 대한 그림자와 상징에 불과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실제로 속죄 사역을 이루셨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앞에 나타나시고.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더 좋은 제물로 깨끗케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의 이유 혹은 근거를 제시한다.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는 구약 성막 혹은 성전의 성소를 가리킨다. ‘참 하늘’이라는 말은 ‘하늘 자체’라고 번역할 수 있고 그것은 천국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21:22의 말씀과 같이, 천국에는 성전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완전한 속죄 사역을 이루시고 그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신 곳은 하늘 자체 곧 천국, 즉 하나님의 보좌 앞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 즉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속죄의 효력 혹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 사역을 말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의 부족과 실수와 흠과 결함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흘리신 속죄의 피 공로를 끊임 없이 적용하시는 것이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25, 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다른 것의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닌 다른 것의 피, 곧 짐승의 피를 가리킨다. 또 ‘자주’라는 말(플라키스, 25, 26절)은 ‘단번에’라는 말(하팍스)과 대조된다.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라는 말은 ‘드리지 아니하였나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26절 초두의 ‘그리하면’은 ‘왜냐하면 만일 그러하였다면’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세상 끝에’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류 역사 4천년의 끝이 왔다는 뜻이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참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제사장들처럼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고 하늘 자체 곧 천국에 들어가셨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며, 더욱이 구약 제사장들처럼 ‘다른 것의 피’ 곧 짐승의 피를 가지고서가 아니고 자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천국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를 없게 하시는 참되고 완전한 속죄의 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은 완전하였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과 같이’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며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기본적 진리인 동시에 심각한 진리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며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인간에게 기본적인 진리인 위의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발자취에 비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처럼 한번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일반 사람의 죽음과 의미가 달랐다. 일반 사람은 근원적으로 다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자로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셨다. 그리고 일반 사람은 죽음 후에 심판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자로서(요 5:22) 오실 것이며(딤후 4:1), 자신이 피흘려 속죄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이렇게 구원받을 자들을 본문은 ‘두번째 나타나실 자 곧 재림의 주를 바라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죄와 상관 없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이미 죄를 없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23절부터 28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제사장 사역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단번에 속죄를 이루시고 천국에 들어가셨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는 내용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 교훈들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 사역, 현재적 중보 사역을 든든히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항상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대망하자. 셋째로, 또한 부수적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죽음과 심판을 준비했는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1-18절,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사역
[1-4]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본문은 율법 제도의 부족함을 증거한다. 율법 제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그림자 즉 예표이었고 참 형상이 아니었다. 참 형상은 예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 증거는 제사의 반복성에 있었다. 만일 제사가 사람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것은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이것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사람의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여기에 율법 제도, 구약 제도의 부족이 있다. 즉 상징적인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없이 하거나 사람을 온전케 하지 못했던 것이다.
[5-7]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5절 초두에 ‘그가’라는 말을 넣어서 읽는 것이 정확하다. 본문은 구약의 시편 40:6-8의 70인 헬라역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히브리어 구약 성경 본문과 조금 다르다. 70인 헬라역 구약 성경은 사도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던 것 같다. 신약 성경에는 이 헬라역 구약 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인용된 시편 본문의 내용은 메시야께서 번제와 속죄제가 아니고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과 이것이 두루마리책 곧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39에서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 메시야 사역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8, 9]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번제와 속죄제는 구약의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된 말씀에 의하면 메시야는 오셔서 그 첫 것 곧 율법 아래서의 제사 제도를 폐하시고 둘째 것 곧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루실 사역을 이루실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율법 제도, 제사 제도의 폐지와 그 대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 사역의 완성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절 이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여기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원어(헤기아스메토이)는 완료시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시작에 불과하거나 혹은 진행중이거나 평생토록 노력해도 불완전한 무엇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완전케 된 것임을 밝히 증거한다. 같은 표현이 고린도전서 1:2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고 표현하였는데, 원문에는 역시 완료시제이므로 ‘거룩하여졌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이 법적 구원, 법적인 거룩과 의인 것이다.
[11-13]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구약 제사장들이 드렸던 제사들은 언제든지 혹은 정확히 번역하면 ‘결코’(우데포테) 죄를 없게 하지 못했다(4절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 곧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 제사의 행위이었다. 그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하는 행위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완전하였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그의 원수들 곧 사탄과 악령들과 그 종들이 다 굴복하게 되기까지 거기서 기다리시다가 그 때가 되면 심판자로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다시 한번 위의 사실을 확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단번 속죄로 거룩케 하신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테텔레오켄)도 완료시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심과 의롭다 하심이 완전한 거룩이요 완전한 의임을 증거한다. 물론 그것은 법적인 개념이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우리 속에 불결과 죄성이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의를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 1:30에서는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했다.
[15-18]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이제 외적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살고, 우리 마음과 생각에 심으신 법으로 산다. 그것은 얽매이는 종의 법이 아니고 자유의 법이다. 성도는 즐거움으로,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완전하다. 이 구원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천국의 영광을 확신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8절까지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완전함을 다시 한번 밝히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완전함을 깨닫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의를 법적으로 단번에 얻는 놀라운 구원인 것을 바로 깨닫자! 거기에 성도의 참된 평안과 자유와 확신과 기쁨이 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구원이다.
또한 우리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행하자. 감사도 찬양도, 기도도, 봉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자!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외적 율법 조문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니고 성령의 법으로, 또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마음과 생각의 법으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자임을 깨닫자.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거룩 안에서 자원함으로 의롭게 거룩하게 선하게 살아가자!
19-25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권면함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형제’라는 말은 천국 백성에게 합당한 명칭이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자들은 남녀 노소, 빈부 귀천, 유 무식(有無識)을 막론하고 주 안에서 다 형제들이다. 우리는 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다(히 3:1).
본절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 권면하기에 앞서 그 권면의 근거를 말씀하고 있다. 그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피는 9장에 말씀한 대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피’이다(12절). 그 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그래서 9:14에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나 예수님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지성소 휘장 같은 자신의 육체를 찢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다. 그 길이 새로운 길인 것은 구약 제도 아래서는 생각지 못했던 길이기 때문이다. 또 구약의 제사 제도가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무력했던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길은 효력이 있고 생명력이 넘친 길이다. 누구든지 이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다.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의 두번째 근거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 혹은 천국을 가리킨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며 영적 천국이다. 주께서는 천국이 이미 성도들 가운데서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17:20, 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큰 제사장이시며 우리의 크신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섬긴다. 그는 우리가 연약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고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 힘과 용기를 주신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의 또 하나의 근거는 죄사함의 사실이다. ‘양심의 악을 깨닫고’라는 원어(아포 쉬네이데세오스 포네라스)는 ‘악한 양심이 깨끗케 되고’라고 더 잘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악하고 더러웠던 양심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은 바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 내포하는 중요한 내용인 죄사함이다.
권면의 근거는 이와 같이 세 가지 사실들, 즉 첫째로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사실, 둘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사실, 셋째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죄사함이며 다른 말로 우리의 속죄 신앙이다.
우리의 죄사함에 근거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서너 가지의 내용을 우리에게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한다.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원어(엔 플레로포리아 피스테오스)는 ‘믿음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뜻이다. 그는 먼저 온전한 믿음 혹은 충만한 확신을 권면한 것이다. 믿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참된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믿음은 성도의 필수적 요소이며, 참되고 충만한 믿음은 진실한 성도의 목표이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소망의 고백을 굳게 잡자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는 원어(텐 호몰로기안 테스 엘피도스)는 ‘소망의 고백’이라는 뜻이다. 두번째 권면은 소망에 대한 권면이다. 성도는 믿고 고백하는 소망의 내용이 있다. 성도의 소망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는 이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기 때문이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신실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믿을 만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약속하신 것들이 다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우리의 소망의 내용들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한다. 만일 성도에게 소망이 없으면 그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성도는 세상 사람보다 더 불쌍한 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 때문에 놀 것 다 못 놀고 즐길 것 다 못 즐기고 또 심지어 고난과 핍박까지 당하기 때문이다.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고 권면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또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에베소서 2:10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했다. 디도서 2:14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다. 사랑과 선행의 이 의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의 필요성이 있다.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넷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고 권면한다. 사람에게는 게으름의 연약성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이기를 폐하고 그것이 점점 습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본받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 곧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하겠다.
모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영적으로 힘을 얻고 자라가는 기회가 된다. 덧붙여, 성도들의 모임들은 서로 교제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좋은 기회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주 자주 모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권면하고 격려하자.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한 권면이다. 먼저 권면의 근거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몸과 마음이 깨끗함을 받았다.
이러한 죄사함의 사실에 근거하여, 저자는 네 가지를 권면한다. 첫째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둘째로, 우리의 소망의 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 셋째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 넷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권면하시는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굳세게, 풍성케 해야 할 것이다.
26-31절, 배교에 대한 경고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성도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 굳세게, 더 풍성히 가져야 할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배교와 변절이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라는 뜻이다. 진리는 복음 진리이며 진리의 지식은 구원 지식이다. 이 지식은 믿음의 필수적 내용이다.
‘짐짓 죄를 범한즉’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짐짓’이라는 원어(헤쿠시오스)는 ‘자발적으로, 의지적으로, 고의적으로’라는 뜻이다. 짐짓 범하는 죄는 자발적으로, 의지적으로,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를 가리킨다. 죄 중에는 자발적으로, 의지적으로,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가 있고, 연약하여, 무지하여, 실수로 범하는 죄가 있다. 전자는 죄책의 정도가 크고, 후자는 죄책의 정도가 작다. 모든 죄가 다 지옥갈 만한 죄이지만, 죄에는 죄책의 경중(輕重)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위기 4:2, 22의 ‘그릇’ 또는 ‘부지 중에’라는 원어(비쉐가가)는 ‘실수로, 무지하여, 연약하여’라는 뜻이며 그렇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수기 15:30의 ‘짐짓’이라는 원어(베야드 라마)는 ‘고의적으로, 도전적으로, 건방지게’라는 뜻이며 그렇게 범하는 죄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수기 35:16에는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故殺)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라고 규정되어 있고, 시편 19:13에도 ‘고범죄’라는 말이 나온다.
또 히브리서 본문의 ‘죄를 범한즉’이라는 원어(하마르타논톤)도 설명이 필요하다. 이 단어는 현재분사이며 ‘계속적 행위’를 가리킨다. 다시 번역하면, ‘만일 계속 범죄한다면’이다. 즉 ‘만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 자발적으로, 의지적으로, 고의적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고 그와 정반대로 행하여 계속 범죄한다면’이라는 뜻인 것이다.
[26, 27] . . .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만일 구원받은 성도가 위와 같은 죄 가운데 빠진다면, 그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저버리고 불신앙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기다리는 심판은 마지막 불의 심판이다. ‘맹렬한 불’이라는 원어(퓌로스 젤로스)는 ‘불의 진노’ 혹은 ‘진노의 불’이라는 뜻이며 주께서 마가복음 9장에서 강하게 증거하신 지옥의 불을 가리킨다.
이러한 심판의 선언은 구원받은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선언은, 외형적으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구원받은 성도들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에 종종 나타나는 이런 경고의 말씀은 유익하다. 예를 들어, 로마서 11:20-22에는 이런 경고의 말씀이 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 외에도, 마태복음 7:21; 로마서 8:13 등도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에 비추어 그의 경고의 말씀을 강화시킨다. 구약 시대에 모세의 율법 아래서도 그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한 자들이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사형에 처하였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민수기 35장에 보면, 사람이 고의적이지 않고 원한 없이 우연히 밀치거나 무엇을 던져 사람을 죽게 하였다면 그는 도피성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고의적, 계획적 살인자는 두 세 증인에 의해 확인한 후 반드시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실수의 죄와 고의적 죄는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구약 시대에 모세의 법을 어긴 죄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을 부정하고 짓밟고, 자신들을 거룩케 한 언약의 피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는 자들이 받을 형벌은 당연한 것이며 얼마나 엄중한 것이겠는가? 인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도 엄중하였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로 오셔서 주신 복음 진리를 저버린 죄의 벌은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으며, 예언과 예표와 모형의 말씀을 어긴 죄의 벌이 컸다면, 성취와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죄의 벌은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는가?
[30, 3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원문에는 3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앞절에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 근거는 친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고 또 친히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저 복음 진리를 저버린 배교자들은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 성경에 증거된 대로, 인류 역사 초기에 지극히 강포했던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한 사실을 기억해보자(창 8-10장). 또 심히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로 심판하신 사실을 기억해보자(창 19장). 또 광야에서 모세를 거역하다가 산 채로 땅 속에 떨어진 고라와 그를 지지하던 250명의 족장들의 죽음을 기억해보자(민 16장). 하나님은 참으로 두려운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결론적으로, 26절부터 31절까지의 내용은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중생한 자는 실제로 배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경고는 필요하다. 사실 구원얻을 자만이 경고를 듣고 순종한다. 중생한 자는 경고를 듣고 순종한다. 경고를 듣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고를 듣는 자들이 되고, 그래서 자발적으로, 의지적으로,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지 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 굳세게, 더 풍성히 소유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자!
32-39절, 믿음의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함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빛을 받은 후’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뜻이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 믿은 후에 고난들의 큰 싸움을 경험하였고 그 싸움에서 잘 참았었다. 믿음의 길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암시된 바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1, 12).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했고(행 14:22),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고(빌 1:29)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했다(딤후 3:12).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 믿는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환난을 받았으며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었다. 고난의 삶을 말한다면 바울 사도는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전통 사본의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왜냐하면 너희가 하늘에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므로 나의 갇힘들을 동정하였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기 때문이라.” 우리는 하늘에 곧 천국에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고 있다. 베드로전서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본절에 ‘나의 갇힘들’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보이는 듯하다.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담대함’이라는 원어(파르레시아)는 ‘담대함, 확신’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믿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잡으라고 권면하고 격려한다. ‘큰 상’이란 믿음의 결과로 얻게 되는 구원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왜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 성도의 믿음의 걸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내를 통해 온전케 된다. 특히 환난의 시대에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인내가 함께 필요하다(계 13:10; 14:12).
[37, 38]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원문에는 37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잠시 잠간 후’라는 표현은 인간편에서의 표현이 아니고 하나님편에서, 주님편에서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속히 오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께서는 3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세번째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2:7, 12, 20).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자.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경의 원리이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이었다(롬 3장).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가는 것은 불신앙이다. 불신앙은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가져온다. 마가복음 16:15, 16,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믿음의 삶들을 기억하자. 우리 자신의 믿음의 삶 뿐만 아니라, 또한 바른 믿음을 지켰던 선조들의 삶의 역사를 기억하자. 우리는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의 피의 역사를 기억하자. 우리 나라에서도 일제 시대에 신사 참배를 반대하여 옥중에서 고난을 당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자. 우리 교회는 옥중 성도들의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고 있음을 기억하자.
또한 우리는 믿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지키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신하고 담대히 나아가며 끝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자.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 있다. 본장은 인류 역사의 초기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실례들을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 본장에는 ‘믿음’(피스티스, 2회), ‘믿음으로’(피스테이, 18회; 디아 피스테오스, 2회), ‘믿음을 좇는’ 혹은 ‘믿음을 따라’(카타 피스틴, 2회) 등 믿음에 대해 24회나 언급되어 있다.
1-4절, 창조와 속죄의 믿음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본절은 믿음의 성격 혹은 특질을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을 믿는 것인데,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현재 우리의 믿음을 통해 실상과 같이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믿지만, 장차 우리의 믿는 믿음대로 우리의 바라는 것들이 실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증거’라는 원어(엘렝코스)는 ‘증명, 확증, 증거’ 등의 뜻이다. 믿음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뵙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현재 보지 못하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믿음을 통해 사실과 같이 확증되고 증거되는 것이다.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절에 말한 믿음의 성격 혹은 특질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혹은 확증이 되는 것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한 믿음의 ‘선진들’(프레스뷔테로이, 장로들)은 본장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을 가리킨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본절은 선진들의 창조의 신앙을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인간 중에 아무도 목격한 자가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천지 창조의 사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전히 믿음에 의존한다.
이 믿음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계시해 주셨고 지금은 그 진리를 성경 제일 첫 구절에 기록해 주셨다. 또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맨처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아마르)이 11번이나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창조를 믿지 않는 자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사실을 믿는다.
천지 창조를 믿는 것은 물질 세계가 영원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 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육체와 또 물질들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만 중시하지 말고 영의 존재를 인식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절은 아벨의 믿음을 증거한다. 아벨의 믿음은 속죄의 믿음이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으나,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은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럼으로써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1절의 말씀과 비교하고, 또 사람이 어떻게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성경 전체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아벨은 메시야의 속죄의 죽음을 미리 바라보고 믿는 믿음으로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한마디로 속죄의 신앙이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장차 메시야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것과 사탄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예언하셨다(창 3:15).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에덴 동산에서 짐승을 죽이셨고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본 사건이었다. 거기에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짐승을 죽이셨는가? 또 그는 왜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통해 죄의 값은 죽음이라는 사실과 장차 메시야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와 수치가 가리워질 것을 암시하셨다. 여기에서 짐승 제사가 계시되었다.
짐승 제사는 이와 같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이런 제사를 통해 의인으로 간주될 것이었다. 이것이 속죄의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는 것은 동일한 속죄의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믿는 자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자. 눈에 뵈올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사실을 믿고 그가 약속하신 영광의 내세를 믿자.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단번 속죄의 은혜를 믿자.
5-7절, 에녹과 노아
[5, 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에 대한 기록은 구약 창세기 5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창 5:21-24). 에녹은 가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낳는 복잡한 세상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300년이나 동행하며 생활하였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았다는 뜻이다. 역사상 경건한 신앙의 선조들이 다 그러하였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 어디에서 어디로 옮기웠다는 뜻인가? 그것은 세상에서 천국 즉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옮기웠다는 뜻이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의 실재성에 대한 생생한 증거이었다. 에녹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에녹의 믿음이 나타나 있었다.
6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임이니라”이다. 이것은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그 속에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에녹의 믿음은 두 가지로 증거되어 있다. 첫째로,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기본적으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요 그런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무슨 상을 뜻하는가? 그 상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새 세계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상이다. 즉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믿음이다(1절).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계신 그 곳으로 옮기워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상급에 대한 믿음이며, 그 상급은 천국과 영생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에 대한 기록은 구약 창세기 6장 이하에 나온다.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에녹과 비슷하게 노아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고 흠이 없는 신앙 인격자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두시곤 하셨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 일들을 믿었다. 그 일들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이 경고를 받았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의 믿음은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심판과 그 심판 중에서 얻을 구원을 믿은 것이다. 다시 말해,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7절 중간에 ‘이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인 것 같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즉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함으로 구원을 받은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아마도 노아의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한 일을 정죄한다는 뜻이다. 또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노아가 지은 방주는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그가 믿음이 없었다면 그 방주를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주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은 에녹과 노아의 믿음을 증거한다. 첫째로, 에녹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을 믿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상급은 천국과 영생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에녹은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와 동행하는 경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세상의 육신적, 물질적 상급보다 하나님이 장차 주실 천국과 영생을 믿고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살았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에녹의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즉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과 영생을 믿는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과 그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살게 되기를 원한다.
둘째로,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와 구원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다.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의 말씀을 믿었고 구원의 방주에 대한 말씀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인내하며 방주를 만드는 그 힘든 일을 완수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노아의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말씀을 믿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의 말씀대로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8-12절, 아브라함과 사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청년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하여 복무해야 한다. 부모에게 불순종하거나 국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가 지시할 땅으로 가고자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이것이 믿음의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큰 목적지는 지시하셨으나 구체적 여정을 알려주시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순전히 믿음의 걸음이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와 비슷하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단순하게 즉시 주를 따랐었다(마 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동일하다. 우리는 도마처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하나님께 질문할지 모른다(요 14:5).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신다(요 14:6).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명령을 하신다.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나보다 자기 가족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그것은 이 세상을 버리라, 떠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 절대주의로 살라는 말씀이다.
실상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천국이다. 천국!! 그러나 지금 천국 길의 구체적 여정은 분명치 않다. 우리는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간다. 이것이 믿음의 순종의 걸음이다.
[9, 10]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약속의 내용은 아직 미래의 것이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땅이 아직 낯선 외국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믿고 거기에 우거하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다!’
아브라함의 거처는 이리 저리 이동이 용이한 장막이었다. 그는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들에 거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에서 아직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못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그들이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설명한다. 10절을 직역하면, ‘이는 하나님이 건축자요 만드신 이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만든 성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친히 만드실 성을 기대하고 바랐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는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시고 감리하시고 시공하시는 도시를 기다리고 바랐던 것이다. 그 도시는 참으로 완전한 도시일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실력 있고 성실한 설계자이신지, 하나님은 얼마나 철저하고 양심적인 감리이신지, 하나님은 얼마나 뛰어난 시공 기술자이신지!! 그의 실력과 성실함, 그의 철저함, 그의 기술력을 누가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구원받은 우리의 신앙 생활, 교회 생활도 아브라함과 입장이 비슷하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아직 우리는 장막을 펼치고 접는 생활을 반복한다. 이동, 또 이동--이것이 우리 인생의 여정이다. 이렇듯 인생은 길 가는 나그네와 같이 이곳 저곳에 잠시 머물듯이 머문다. 그러나 그 날에는 우리가 더 이상 이동이 없는 영구적인 안정, 영원한 집을 얻을 것이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 전통 사본대로 다시 번역하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은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가 신실하심을 알았음이라’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아브라함에게 보내어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었다. 사라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자는 하나님의 사자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전하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했다(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여자는 약속하신 하나님이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방불한’이라는 원어(네네크로메누, 완료 수동태 분사, 남성 소유격)는 분명히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능력이 있고 그대로 틀림 없이 성취된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8절부터 12절까지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증거한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의 땅이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을 향해 갔고 그 땅에서 장막 생활을 하여 이리 저리 이동하며 우거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친히 만드실 한 성을 기대하며 바라보며 기다렸다. 사라도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 곧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그의 약속의 말씀들을 믿자!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그대로 다 믿자! 믿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우리의 목표를 이 땅에 두지 말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같이 살면서 우리의 삶의 목표를 저 세상, 오는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자! 믿음으로 순종하며 한 걸음씩 천국을 바라보며 나아가자!
13-16절,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함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아벨, 에녹, 노아는 제외하고 8, 9절과 11절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그들은 다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들에 거하였고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사람은 다 죽는다. 단지,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다가 죽으면 소망이 있다. 잠언 14:32에는 말씀하기를,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했다. 그러나 불신자와 악인의 죽음은 곧 절망이요 멸망이다.
저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들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원문에는 ‘약속’이 ‘약속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 약속들은 그 자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케 하시겠다는 약속,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 그들의 자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들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것들 곧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백년 내지 5백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었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2천년 이상이 지난 후의 일일 것이었다. 또 하나님의 예비하신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훗날의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환영하다’는 원어(아스파조마이)는 ‘기쁘게 받아들이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쁘게 믿고 소망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였다. ‘증거한다’는 원어(호몰로게오)는 ‘고백하다, 공언하다’는 뜻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고백하자. 우리의 참 고향, 참 고국은 천국이다.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들이 이 땅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한 이유를 나타낸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이란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파트리스)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 ‘나타낸다’는 원어(엠파니조)는 ‘명백히 나타낸다’는 뜻이 있다.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즉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 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 고향은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었다. 거기에는 우리 나라와 같은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지 않았다. 자유로운 통행을 막고 있는 남북 분단의 현실은 옛시대보다도 못한 일이다. 옛날에는 그런 인위적 장벽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았던 곳은 그런 고향이 아니었다.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 히브리서에는 ‘더 나은’ 혹은 ‘더 좋은’이라는 말(크레이톤)이 많이 나온다. 이 말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19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13번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히브리서에 사용된 예들을 보면, 복음은 ‘더 좋은 소망’(7:19)이며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이시다. 우리의 속죄는 ‘더 좋은 제물’(9:23)로 이루어졌고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고 재산도 빼앗겼던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즉 천국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본절)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이 건축자요 만드신 이인, 터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이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고 이 땅의 것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주 예수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요한 사도는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계 21:2, 11). 또 그는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다시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는 음성이었다(계 21:4).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6절까지는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비록 그것들을 그들 생애 가운데서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것들을 바라며 하늘에 예비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음을 증거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굳게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복락을 약속하셨다. 저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경험치 못했으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환영하며 믿고 확신하면서 죽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들을 우리의 생애 중에서 혹 경험치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굳게 믿고 믿음 안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되지 않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정하신 때가 있는 것뿐이다.
둘째로, 우리는 저 믿음의 사람들처럼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천국 약속을 믿는 자들의 바른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마치 천년 만년이나 살 세상처럼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언젠가는 떠나야 할 외국인과 나그네의 심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바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저 믿음의 선진들처럼 오직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성,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성, 영원히 요동치 않을 성이다. 천국은 우리의 ‘더 나은 본향’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구원얻고 그를 진실히 믿고 섬기는 자들은 다 그 곳에 들어갈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이다. 우리가 그 곳에 들어갈 때, 인류의 비극적 역사는 끝나고 기쁨과 평화의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옛 선진들처럼 저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자!
17-22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
본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등 이스라엘 선조들의 믿음에 대해 간략히 증거한다. 이들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난 데서도 드러났지만, 특히 그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 한 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날 그에게 그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였고 그 경외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것은 심지어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는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다.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그는 부활의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수양을 번제로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셨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도 믿음 있는 선조이었다. 그는 부친 아브라함이 자기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저항하지 않고 잠잠히 순종했던 것 같고(창 22장),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우물들을 여러 번 빼앗을 때에도 싸우지 않고 피하는 온유한 모습을 보였다(창 26장). 이삭의 믿음은 특히 그가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한 말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들 야곱에게 마지막 유언적 축복을 하면서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라고 말했는데(창 27:29),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을 그가 그대로 믿고 선포한 것이었다. 또 그는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다 그의 믿음의 말들이었다.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란에서 2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많은 단련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인간적, 육신적, 세상적 욕심들과 애착들을 하나씩 제거하셨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죽게 하셨고, 몇 년 후 그의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 알았으며 또 수 년 후 라헬의 남은 아들 베냐민까지 애굽에 담보물로 감금되었으니 야곱의 심적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통의 현실 속에서 세상줄을 끊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바라보면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 죽을 때에 침상 끝에서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특별히 그가 자기를 찾아온 요셉을 맞으며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팔을 어긋맞겨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이끌리는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또 그는 자기 후손들이 장차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을 믿음으로 예언하였다.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객지에서의 종살이 중에서도 범죄치 않았다. 특히, 그는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터득하였고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형들에게 증거하기를,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했고(창 45:8), 형들은 그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했다(창 50:20).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다. 또 그는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였고 또 그 때 자기 해골도 그 곳으로 옮겨줄 것을 맹세시키며 부탁하였다(창 50:24, 25).
결론적으로, 17절부터 22절까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믿음을 간단히 증거한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한 자들이었다. 특히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하는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의 순종의 아름다운 예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처럼 순종할 수 있는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에 대해 절대적, 무조건적, 즉각적 순종을 할 수 있는가? 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하자.
또한 이스라엘의 저 선조들은 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신뢰하였다. 이삭을 통해 자손이 번성케 될 것이라는 약속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이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을 그들은 그대로 다 믿고 의지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축복의 말이나 유언이나 유언적 축복의 말에 드러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소망하였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진실하게, 굳세게 믿고 소망하고 있는가? 오, 우리도 저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진실히 믿고 소망하자!
23-26절, 모세의 믿음의 선택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본절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증거한다. 우선,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모든 아이들이 다 아름답겠지만 여기의 이 말은 그들의 첫눈에 어떤 느낌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이를 3달 동안이나 숨겼다. 그들은 ‘남자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비록 그 기간이 3개월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더 이상 그 아이를 집에서 숨기며 키울 수 없었지만(출 2:3), 그들은 그 3개월 동안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왕의 명령대로 그 아이를 죽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믿음은 비록 작았을지라도 최선의 믿음이었고 귀한 믿음이었다.
모세의 부모가 3개월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기쁘게 사용하셨다. 그들이 그 아이를 그대로 키웠다 할지라도 그는 결국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을 것이며 혹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부족했을 듯하다. 하나님께서는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를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최고의 궁중 교육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그것은 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언어적, 지식적 훈련도 포함했을 것이다. 애굽의 노예의 신분이었던 부모의 집에서 그대로 자랐더라면 그는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왕자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리움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 영광을 다 포기한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의 모친은 모세의 유모가 되어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되었었다(출 2:8, 9). 모세는 아마 젖을 먹던 그 어릴 때부터 자신의 신분에 대해 들었을 것이며 커서도 기회 있는 대로 아마 그 유모인 어머니를 통해 그러했을 것이다.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다’--어머니는 모세에게 그 사실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는 단지 한국인이 아니고 또한 천국 백성이다’는 생각이 깊이 심겨져야 한다.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이 세상의 즐거움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었다. 육신적 즐거움은 지나가는 즐거움이다. 또 많은 경우 그것들은 죄악된 것들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이 허무한 것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의미와 가치를 둘 것인가! 아, 그것은 어리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모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였다. ‘더 좋아하다’는 원어(헬로메노스 < 하이레오의 중간태분사)는 ‘선택하다’는 뜻이다.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 모세의 귀한 점이었다. 모세는 단순히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야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창 12:3; 22:18). 그것은 메시야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온 세상이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세상에는 그런 의미와 가치가 없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그런 의미와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렸고 또 계속 누릴 수 있었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장차 모두 다 불타 없어질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야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죄를 대속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세상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야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강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만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영생과 천국의 상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생과 천국의 상까지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결론적으로, 23절부터 2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의 처한 형편에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말고 선한 일을 위해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믿음이지만 믿음으로 행하는 우리의 최선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영광과 쾌락을 구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자.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일시적이며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도무지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들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이 되자.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선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썼다(빌 1:29). 또 그는 믿음의 아들이요 젊은 교역자인 디모데에게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교훈했다(딤후 1:8). 우리는 모세와 같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들이 되자!
27-29절, 믿음의 사람 모세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익숙했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 즉 위로부터 부가된 새 원리를 따라 새 삶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바로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당시의 대제국 애굽의 막강한 세력을 한 손에 지닌 바로왕의 노함이 어찌 두려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모세는 바로보다 더 크시고 두려우시고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명령만을 두려워하며 모든 인간적 두려움의 요소들을 물리쳤던 것이다.
27절 하반절의 내용을 원문대로 다시 번역해보면, ‘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참았음이니라’이다. 모세의 담대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인내를 낳고 담력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불신앙은 조급과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다 줄 뿐이다.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믿음으로 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을 지켰으니 . . . .’이다. ‘정하다’는 원어(포이에오)는 ‘만들다, 하다, 지키다, 준수하다’는 뜻이다.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자신의 권위로 제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킨 것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게 하였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절의 ‘유월’(逾越)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건너간다, 넘어간다’는 뜻이며, 이것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간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그래서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 . . .’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첫번째 큰 위기를 만났었다. 그것은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놓여 있었고 뒤에는 애굽 군대들이 다시 뒤쫓아오는 위기이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으며 백성들은 홍해 바다 속으로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이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어떤 불신앙적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22절)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은혜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뒤쫓아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추가적 징벌이었다.
결론적으로, 27절로 29절은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온 순종의 행위를 잘 증거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애굽을 떠났다. 그는 두려운 바로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 초청을 받아들여 이 두려운 세상 세력을 정죄하고 불경건하고 죄악된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절기 때 불신 가족을 두려워하여 제사나 차례를 드리는 것을 죄인줄 알고 거부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뜻만을 믿고 따라가는 진실한 성도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모세는 또한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지켰는데, 그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것과 같다. 모세의 믿음은 속죄 신앙인 것이다. 성도는 이 속죄 신앙을 가지고 세례를 받고 이 속죄 신앙를 가지고 성찬 예식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는데, 이것은 출애굽 후 만난 첫번째 큰 장애물과 위기를 잘 극복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출애굽하였으나 홍해와 같은 장애물을 만난 것처럼 성도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종종 큰 장애물과 위기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큰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서 성도가 만나는 이런 저런 장애물과 위기를 넉넉히 극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는 모세처럼 믿음으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고 속죄의 믿음으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해야 하며 믿음으로 큰 장애물과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30, 31절,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정복함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성의 정복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여호수아 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여리고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조용히 돌라. 6일 동안 그렇게 하라. 제7일에는 그 성을 7번 돌며 7번째는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의 말씀을 믿었고 그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그 명령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다. 그것도 6일 동안 매일 성을 한 번씩 돌며 제7일에는 7번이나 성을 돌도록 인내하며 믿고 순종하였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 놀라운 순종이었다. 참된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며 인내하면서 순종하는 믿음이다.
마침내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졌다. 그 성벽은 이스라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벽이었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렸었고 성문을 굳게 닫고 결사적 각오로 성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문이 굳게 잠긴 여리고성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첫번째 큰 어려운 문제이었다. 그런데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성 안에 있는 남녀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그들은 여리고성 정복에서 너무 쉽게 승리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통해 얻은 승리요 정복이었다.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성의 멸망 가운데서도 한 가정이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라합의 가정이었다. 이 사실은 여호수아 2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다. 본문에 ‘기생’이라는 원어(포르네)는 ‘매춘녀, 창녀’라는 뜻이다. 그는 자기 몸을 팔아서 생활해야 했던 비천하고 불쌍한 여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명백히 어기고 죄를 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죄인이었다.
그러나 라합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벌써 40년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것을 듣고 알았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이 아모리왕 시혼과 옥을 멸한 것을 듣고 알았었다. 그는 이러한 소문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늘 위에서와 땅 아래에서 참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확실히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군이 여리고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그들을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고 신고를 받고 달려와 그들을 찾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에 나갔다고 속여 말하였다. 그가 거짓말 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하나님의 일에 협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을 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죄악된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작정된 대로 몇 일 후면 멸망을 당할 것이었다. 그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는 길은 한가지뿐이었다. 그것은 그 정탐군들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그 여자는 그 정탐군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케 함으로써 확약을 받아 내었다. 비록 그 여자가 성 전체를 구원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해, 즉 자기 형제들을 위해 간청할 수 있었다.
라합과 그의 아버지 집은 여리고성의 멸망 중에서 이와 같이 구원을 얻었다. 오늘 본문에는 라합이 순종치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치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종치 않다’는 원어(아페이데오)는 ‘믿지 않다, 순종치 않다’는 뜻이다. 여리고성 사람들에게는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소식을 들은 것은 40년 전이었다. 그 40년 동안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확인하고 그들의 음란한 죄악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우상숭배적이었고 음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여리고성 사람들을 멸망시키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오직 라합 한 사람의 가정은 구원을 얻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30절과 31절의 말씀은 두 가지 귀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또 주의 일을 수행하면서 여리고성 같은 큰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여리고성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실하게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가가 문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기만 하다면 우리 앞에 있는 여리고성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그 큰 문제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될 것이다.
둘째로, 사람의 구원은 그의 세상 신분 여하에 달려 있지 않고 그가 회개하고 믿는 여부에 달려 있다. 사회에서 가장 비천하고 죄악된 과거가 있는 라합과 같은 자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죄악된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가장 존귀하고 그럴 듯한 삶을 사는 자라 할지라도 그가 자기의 죄악된 삶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구원은 사람의 사회적, 외적 신분 여하에 달려 있지 않고 그의 내면적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주를 믿고 죄를 미워하고 주를 사랑하고 있는가?
32-40절, 세상을 초월한 신앙인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예들이 더 많이 있지만 그것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는 단지 몇 사람들의 이름을 추가로 열거한다. 그리고는 그가 언급한 혹은 언급하지 않은 많은 믿음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체험에 대해 열거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앞에서 언급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경험들을 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 같은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삼상 12:4; 삼하 8:15). 또 다윗 같은 이는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유다 왕이 되었다(삼상 16, 17장; 삼하 5: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다(단 6장).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단 3장). 다윗이나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앞에서 언급한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쳤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왕상 17장; 왕하 4장).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예를 들어 므낫세 때에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었는데(왕하 21:16)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크레이톤 아나스타시스)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아나스타시스)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유다의 경건한 아사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대하 16:7-10). 이스라엘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하였다(왕상 22:24-27). 선지자 예레미야는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렘 20:2) 또 토굴 옥 음실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렘 37:16; 38:6).
[37, 38]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다(대하 24:21). 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삼상 22:18).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다.
38절 초두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는 원어(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는 직역하면 ‘세상은 그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도다’이다. 이 말씀은, 세상이 그들을 몰라보고 즉 그들이 하나님의 귀한 종들이라는 그들의 가치를, 그리고 그들을 소유함이 자신들에게 큰 복이라는 사실을, 몰라보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였기 때문에 합당치 않다는 뜻이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다: “세상은 그러한 복을 받을 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가치를 평가할 줄도 그들을 사랑할 줄도 몰랐다. 악한 사람들! 그 의로운 자들은 세상에 살기에 합당치 않으며, 하나님은 세상이 그들에게 합당치 않다고 선언하신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에서 취하셔서 그들에게 적합한, 그러나 그들의 모든 봉사와 고난의 공로보다 훨씬 뛰어난 세계로 영접하신다”(Matthew Henry, A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4권, 953쪽).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 무슨 증거를 말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 그들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말할 것이다. 그들은 증거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던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요 19:30; 롬 3:24; 10:4).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로마서 8:29, 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앞의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체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32절부터 40절까지의 내용은 믿음으로 어떤 이들은 세상의 복, 육신의 복을 받기도 하였고 또 다른 이들은 더 나은 복을 바라며 그것을 포기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믿음으로 세상의 복, 육신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병약한 자가 건강의 회복을 얻고 빈곤한 자가 경제의 회복을 얻고 세상 생활에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는 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복이 있다. 그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복이다.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이다. 세상의 복, 육신의 복은 영속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젠가는 버리고 떠나야 할 복이다. 많은 신앙의 용사들은 한 차원 더 높은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초월하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은 더 나은 생명, 곧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광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소망하면서 담대하게 살았다. 우리는 전자에 머물지 말고 후자의 복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은 다 진실한 성도라는 증거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지 못했다. 그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망하며 참고 인내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한 대로(히 11:1),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내용들을 소망하며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을 열어 그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과 소망과 인내가 필요하다.
1-4절, 믿음의 경주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원문에서 문법적으로 1, 2절에서 주동사는 ‘경주하자’이며 ‘벗어버리고’나 ‘바라보자’는 ‘벗어버리면서’와 ‘바라보면서’라는 뜻을 가지는 분사 형태이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앞장에서 언급한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걸쳐 수없이 많은 증인들이 있는 일이다.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는 이 길은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수많은 동료들이 있는 길이다.
믿음의 경주를 권면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말한다. 달리기 경주자는 가벼운 복장을 하고 경기에 임한다. 신앙의 경주도 이와 비슷하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 중에는 돈에 대한 염려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라고 가르쳤다. 건강에 대한 염려도 주께 맡겨야 한다. 가정에 대한 염려도 그렇다. 가정에 너무 무관심한 것도 죄이지만, 가정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죄이다. 성도는 이 세상을 초월하며 살아야 한다. 신앙의 경주를 잘 하려면 모든 세상 염려들을 다 벗어버려야 한다. 또 얽매이기 쉬운 죄들,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거짓과 탐욕, 음란 등의 죄악들을 벗어버려야 신앙의 진보를 이룰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 다음, 본절은 신앙의 경주에 인내가 필요함을 말한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훈련을 지옥 훈련이니 수도 생활이니 하고 표현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지나친 금욕과 극기의 수도 생활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즐거움들을 주셨다. 전도서에는 ‘사람이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했고 ‘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고도 했다(전 5:18; 9:9). 그러나 신앙 생활에는 절제와 극기와 인내가 상당히 요구된다. 그래서 본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미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었다(히 10:36).
신앙 생활은 달리기 경주와 같다. 우리는 경주자와 같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신앙 경주를 격려하고 계신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빌 3:13, 14). 열심히 달려가는 자들은 좋은 상을 얻을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나의 달려갈 길’이 있다. 우리는 이 길을 힘써 경주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길을 달려가다가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중간에 피곤해지거나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경주를 완수해야 한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 경주에 큰 힘이 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경주해야 한다. 실상,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주’라는 원어(아르케고스)는 ‘인도자, 시작자, 효력 있는 원인자’라는 뜻이다.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원어(텔레이오테스)는 ‘완성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주님으로서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분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친히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무시하시고 멸시하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킨다. 인간적으로 말해, 그것이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이었다. 주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또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받으신 부끄러움은 얼마나 많았는가! 그는 악인들에게 비난의 말들을 들으셨고 침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으며 벌거벗기워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다.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친히 이런 수치와 고난을 당하셨고 그것들을 끝까지 참으셨던 것이다. 이 일에서 예수님은 친히 신앙 경주의 모범이 되셨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즉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한 까닭은 우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해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함이다. 성도들은 세상의 악 때문에 또는 심지어 때로는 교회 안의 형제들의 흠과 결함 때문에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자기를 거역하는 죄인들의 악한 행위들을 참으셨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치 않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더욱이 예수님은 당시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악하다고 증거하고(요 7:7) 그들을 정죄하셨으므로 그들의 미움을 받고 정죄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려 죽으셨다. 예로부터 간혹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한 신실한 종들이 없지 않았다. 한국의 초대 교회에도 순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도들의 신앙 생활은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따르며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고 항상 순교의 피를 흘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발걸음을 생각한다면, 아니 우리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 경주와 고난과 봉사와 인내라는 것은 보잘 것 없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신앙에 성실치 못하다면 환난의 날에 어떻게 할 것인가? 예레미야 12: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많은 증인들 앞에서 신앙의 경주를 성실히 경주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이 권면에 덧붙여서, 저자는 하나님의 감동 속에 신앙 경주를 위한 몇 가지 도움의 말씀을 준다.
그 첫째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모든 무거운 것’은 세상의 온갖 염려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잘하기 위해 재물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가정에 대한 염려 등 세상적 염려들, 육신적 염려들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세상의 욕심들과 죄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신앙 경주를 잘할 수 있다.
둘째는, 인내하라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몇 일 혹은 몇 년이 아니고 일생을 달려야 할 과정이다. 그런데 세상은 악하고 우리는 약하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는 우리를 시험하고 낙심시키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우리는 때때로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다. 우리에게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셋째는,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시다. 그는 또 친히 십자가를 참으시며 부끄러움을 무시하신 모범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이런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같이 부족하고 미천한 자들이 어찌 이 땅 위에서 기쁨과 평안과 영광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신앙 생활의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을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5-13절, 하나님의 징계하심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징계하심’이라는 원어(파이데이아)는 ‘교육, 훈련, 징계’의 뜻을 가진다. 에베소서 6:4에는 ‘교양’이라고 번역되었고 디모데후서 3:16에는 ‘교육’이라고 번역되었다. 본절에는 ‘꾸지람’ 혹은 ‘책망함’이라는 말이 징계와 동의어로 사용되었고 다음 절에는 ‘채찍질하심’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책망함과 채찍질함을 포함하여 사람에 대한 전인격적 교육과 훈련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하여 성도가 가지지 말아야 할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그것을 경히 여기는 것 즉 무시하는 것이며, 둘째는 낙심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하심과 징계하심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라고 말씀하셨었다(사 1:5).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완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하실지 심히 두려울 뿐이다.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실 것이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을 받을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증거이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들에 대해 성실히 징계할 것이다. 성도가 환난과 고난 중에 참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과 징계를 받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대우하신다면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징계는 진실한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이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기의 친 자녀들을 바른 교훈과 책망과 징계로 교육한다. 그러나 친 자녀가 아닌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 자녀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는 자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아니고 사생자와 같은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참 자녀된 증거이다.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또’라는 원어(에이타)는 ‘더욱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본절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복종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는 육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공경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를 성실히 징계하시는 하나님, 곧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본절은 징계의 목적을 보인다. ‘자기들의 뜻대로’라는 원문(카타 토 도쿤 아우토이스)은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라는 뜻이다. 육신의 아버지들은 잠시 자기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하여금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해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를 성화(聖化)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생각하고 받아야 한다.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다른 말로 의(義)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를 얻었다(롬 3:24). 그러나 이제 실제적 교육과 훈련과 징계를 통하여 성도들은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평강한’ 혹은 ‘평안한’ 열매이다. 이와 같이, 성도는 징계를 통하여 의롭고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디모데후서 3:16에 우리가 성경을 통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을 받고 마침내 의로 교육함을 얻는다는 말씀과 같다. 모든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후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단련을 받은 자들에게는 의의 평안한 열매를 맺게 한다. 이와 같이, 성도의 생애는 거룩과 의의 훈련 과정과 같다.
[12, 13]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피곤한’이라는 원어(파레이메나스)는 ‘축 늘어진’이라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심신으로 연약해져서 손도 축 늘어지고 무릎도 연약해지고 다리도 절뚝인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축 늘어진 손을 들어 올리고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저는 다리를 세워 고침을 받아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성도는 징계가 참 성도의 표요 자신에게 유익한 것임을 깨닫고 힘을 잃지 말고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한 진리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받으신다는 표시요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증거이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자녀 곧 중생한 성도가 아니고 사생자일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징계하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룩함과 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그것을 잘 받고나면 우리의 인격과 삶은 좀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 주신 완전한 의가 실제의 삶 속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 인해 낙심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잘 참고 일어나 힘을 내어 더욱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인내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자.
14-17절,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히브리서 저자는 앞부분에서 믿음의 경주를 잘하고 하나님의 훈련시키심과 징계하심을 잘 받으라고 권면한 후에 본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는 교훈을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의 제자된 표시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35).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4장에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엡 4:2, 3).
또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말씀했다(살전 5:12, 13). 지교회는 목사와 당회를 중심으로 화목하고 단합해야 한다. 물론 목사가 비성경적인 이단을 가르치거나 세속주의를 받아들일 때는 당회나 교인들이 그대로 묵인하지 말고 그를 제재해야 할 것이지만, 목사가 성경대로 가르치고 인도하며 모범을 보이는 한 온 교회는 그의 교훈을 중심으로 일치 단합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 간에 원수를 맺는 일은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이다.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대로 육체의 일, 곧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들 가운데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살인(전통 사본) 등이 있다. 또한 요한일서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의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였다(요일 3:15). 그러므로 그런 일이 교회 안에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부족과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함을 가르쳐 주셨다(요 13:14, 15). 그렇다 화평과 일치를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잠언의 말씀대로,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잠 10:12).
본절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과 비슷하게, 로마서 12:18에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화평하라]”고 말씀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우리의 힘으로 화평하기 어려울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원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오해하고 우리를 미워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해하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적어도 우리 편에서는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서로 화평하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과는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너희 교훈’이라는 원문은 ‘너희가 배운 교리’라는 뜻으로서 그들이 사도들을 통해 배운 소위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리킨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데살로니가후서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규모 없이’라는 원어는 ‘무질서하게’라는 뜻으로 성경의 교훈을 저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참된 사랑은 악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5, 6). 잠언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마 5:44)은 원수의 악을 인정하고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라는 것뿐이다(롬 12:20).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범죄한 자에 대해서 세 단계를 거쳐 처리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첫째는 단 둘이 만나 권면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는 것이고, 셋째는 교회에 말해 교회적으로 가서 즉 교회의 대표인 목사나 장로가 가서 권면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마 18:15-17).
이 모든 말씀들이 다 성경에 밝히 계시된 바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성도를 사랑하고 그들의 부족을 덮어주고 그들이 자기 잘못을 인정할 때 언제든지 용서하고 그들과 더불어 화평하고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삶이다.
[14-계속]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8). 거룩함 혹은 마음의 청결함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 만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 5).
이 구원의 목표인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법적으로는 이미 달성되었다.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제 법적으로 완성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에서 드러나야 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실제적 거룩함은 하나님의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7,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그 과정은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것’은 거룩함을 가리킨다(원문에서 ‘이것’이라는 관계대명사[후]와 ‘거룩함’이라는 명사[톤 하기아스몬]은 다 남성이며, ‘화평함’이라는 명사[에이레넨]는 여성이다). 거룩한 자만이 주를 볼 것이다. 언제 볼 것인가? 천국에서 볼 것이다. 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좇으라’는 말씀은 우리의 성화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요구됨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는 화평과 거룩을 위해 성실히 힘써야 한다.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화평과 거룩을 권면한 후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셨지만, 그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르지 못한다’는 원어(휘스테론 아포)는 ‘후퇴하다, 미달하다, 떨어지다, 이르지 못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표는 참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다. 우리 가운데는 참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없는 자가 없어야 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번째 종류의 사람은 ‘쓴 뿌리’이다. 이것은 신명기 29:18, 19의 표현이다. 거기 보면,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 안에 나타나서 다른 사람에게 심적 고통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더러움과 나쁜 영향을 줄 ‘쓴 뿌리’는 성경 교훈에서 탈선된 교리와 사상을 가지고 도덕적인 악을 지닌 자이다. 그는 교회 안에 난 가라지이다. 교회는 그런 자를 주의해야 한다. 그런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부패시킨다.
[16, 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주의해야 할 세번째 종류의 사람은 음행하는 자이다. 음행 곧 성적 부도덕은 인간의 불결과 더러움의 대표적 죄악이다. 죄악된 세상은 한마디로 음란한 세상이다. 반대로, 거룩함의 대표적 증거는 부부 관계, 이성 관계에서의 성결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 거룩하고 사랑이 넘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미혼 청년들이나 혼자 사는 이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간직하기를 원하신다. 성적 타락은 현대 사회를 멸망시키는 사탄의 첫번째 활동 지침이다. 교회는 음행의 악을 배격해야 하고, 이런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네번째 종류의 사람은 망령된 자이다. ‘망령된 자’라는 원어(베벨로스)는 ‘속된 자, 불경건한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자를 에서에 비교하였다. 에서는 장자의 특권을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았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복을 세상 것처럼 여기는 속되고 불경건한 자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 오늘도 하나님의 주신 고귀한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세상 것처럼, 아니 세상의 것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자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런 자는 망녕된 자, 속된 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회(會)가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곧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표를 가지지 않은 자가 없어야 하고, 교리적, 사상적, 도덕적 악을 품은 ‘쓴 뿌리’가 없어야 하고, 음행하는 자가 없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복 즉 천국과 영생의 복을 세상 것처럼 여기는 에서 같은 망령된 자가 없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교제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특히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힘써야 할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가 없이 원수를 맺어서는 안된다. 주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해야 한다. 둘째는 거룩함을 좇으라는 것이다. 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했다. 사랑 혹은 화평과 거룩--이 두 가지를 우리는 굳게 붙잡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18-29절, 말씀하시는 분을 거절하지 말라
[18-21절]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원문에는 18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속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너희가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18절은 22절에 이어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와 같이 본문에서 시내산과 천국을 대조한다. 출애굽기 19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의 광경을 증거해준다. 거기에 보면, “제3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16절). 이스라엘 백성은 불 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었다.
[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하여, 신약의 성도들은 시내산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으로 나아간다. 시내산과 천국은 현저하게 대조된다. 시내산은 불과 구름과 어두움과 폭풍이 있는 두려운 곳이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율법을 선포하셨는데, 그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천국은 다음에 묘사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의와 영생과 평강이 있는 곳이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표현은 신약 성도들이 육신적으로 천국에 이미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영적으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에베소서 2: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본문에서 천국은 여러 가지로 묘사된다.
첫째로, 천국은 ‘시온산’이라고 묘사된다. 이것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지 않고,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의미한다.
둘째로,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묘사된다. 히브리서 11:10은 이미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하나님이 건축자이시요 만드신 이인 터가 있는 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 히브리서 11:16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말했다.
셋째로, 천국은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라고 묘사된다. ‘천만’이라는 원어(뮈리아스)는 ‘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천국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넷째로, 천국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로 묘사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그 이름이 하늘에 등록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들이며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을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모임을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라고 부른 것 같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섯째로, 천국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묘사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내시는 곳이다.
여섯째로, 천국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은 지금 다 천국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들이다. 천국에 있는 의인들의 영들은 완전케 되어 흠과 점이 없고 죄성이나 연약성이 조금도 없다.
일곱째로, 천국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약속을 받았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와 비교할 수 없이 더 나은 피이다. 아벨의 피는 단순히 무죄한 의인의 피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이상이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피이었다. 구원받은 자들은 다 그의 속죄의 피 뿌림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25-27]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더 놀랍고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더 진지하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문맥이 보이는 바이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는 말씀은 다시 번역하면 ‘너희는 계속 말씀하시는 분을 거절치 말라’이다. ‘말씀하신 자’라는 원어(톤 랄룬타)는 ‘계속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었고, 그는 신약 시대에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로, 목사와 전도자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들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성실하게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게도 엄한 벌이 내려졌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 음성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엄한 벌이 내려지겠는가? 이전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마침내 진동치 않을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해 진동할 것들을 다 제거하시기 위함이시다. 과연 신약 성경은 하늘과 땅이 다 불타 없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한다(벧후 3:10-13). 천국은 진동치 못할 나라이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지금 하늘에 간직된 기업’이다(벧전 1:4).
[28, 29]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동치 못할 나라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은혜를 받자고 권면한다. ‘은혜를 받자’는 것은 25절에서 ‘말씀하시는 분을 거절하지 말라’는 것과 대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말고 그 말씀을 믿고 그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곧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시는 구원의 은혜요 천국과 영생의 소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청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깊이 환영하고 그 앞에 절대적인 순종을 드려야 한다.
본문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증거로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할 것을 말씀한다. ‘이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통 사본에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라는 말이 ‘경외함과 경건함으로’(메타 아이두스 카이 율라베이아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섬겨야 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진지함, 진실함, 성실함, 긴장감은 은혜를 받은 표시일 것이다. 그러나 해이함, 무관심, 뻔뻔스러움, 이중적임, 위선적임, 냉냉함, 무감격함, 무감각함 등은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은 그 이유로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거스리고 그를 만홀히 여기는 자들에 대해 심판의 불로 소멸시키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9절까지의 내용은 구약과 대조하여 신약 아래서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말씀하시는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할 것을 권면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정죄의 율법과 대조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복음 곧 의와 영생의 천국 복음을 감사히 받고 신약 아래서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자. 또 말씀하시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지 말고 전심으로 환영하고 그 앞에 복종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자들이 되자.
1-6절, 형제 사랑을 계속하라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필라델피아)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 주 안에서 형제 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도 자신의 첫번째 편지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교훈하였다(벧전 1:22).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바울 사도의 고린도전서 13장이 잘 증거하고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6).
이러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되, 식어지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한두 번의 사랑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해야 한다.
형제 사랑은 단순히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요한일서 3: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다음에 나오는 몇 가지의 교훈들은 이런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구체적으로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했다. 창세기 18장에 ‘달려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절), ‘급히 장막에 들어가’(6절), ‘속히 . . . 떡을 만들라’(6절), ‘짐승 떼에 달려가서’(7절), ‘급히 요리한지라’(7절) 등의 표현을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영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손님 대접이나 선행은 참된 경건과 신앙이 증거이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장로의 자격으로 신앙 성숙의 한 증거로서 ‘나그네를 대접하며’라고 말씀했다(2절). 돈은 자기를 위해 사치하며 낭비하며 쓰고 남은 것은 또 쌓아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교훈하기를,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다(딤전 6:17, 18). 잠언에는 이런 지혜의 말씀이 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 25).
[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또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 받는 자를 돌아보는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의 종들 중에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한 성도의 선한 행위가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35-40절).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감옥에 갇힌 바울 사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로마에 있을 때에 그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 그의 방문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형제 사랑는 또한 가정에서 부부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가족들을 사랑해야 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사랑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부부관계는 더러운 것이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결혼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이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위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잠언에는,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에 비유하였고 남편은 그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씀했다(잠 5:18, 19).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에 외도(外道)는 부부 간의 사랑에 지극히 반대되는 일이다. 그러한 실수는 성도의 가정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려면 성도는 술이나 춤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또 오늘날 유행하는 인터넷 채팅 등을 삼가야 한다. 특히 결혼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며 처신해야 한다.
[5, 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본문은 또한 돈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한다. 돈 사랑은 형제 간의 또는 성도 간의 싸움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욕심이 없으면 형제 간이나 성도 간에 마음이 상하는 일도, 등을 돌리는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형제 간의 혹은 성도 간의 분쟁이 생기곤 한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는 돈 사랑을 버리고 이익 문제에 초연하며 양보심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예를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에게 딸린 가축들이 많아서 그들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가겠다.’ 즉 그는 자기의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경건한 아브라함이 가졌던 양보심이었다. 롯은 물질적 환경을 중시하며 자기의 진로를 선택한 것 같지만(10-13절),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보배로 삼았다. 참으로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성도는 세상의 것을 양보할 수 있다. 그것이 잠언 3장에 말씀한 참 지혜이기도 하다. 거기에 보면, 지혜를 얻은 것은 은금보화를 얻은 것보다 더 낫고 거기에 부귀와 장수도 있다고 하였다(13-18절).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는 형제 사랑과 선행에 대해 교훈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그리고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몇 가지를 말씀했다. 첫째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요 둘째는 갇힌 자나 학대 받는 자를 돌아보는 것이요 셋째는 부부의 사랑을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돈을 사랑치 말라는 교훈도 주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형제 사랑과 그 구체적 표현들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7-13절, 인도자들을 본받으라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설교자들, 목사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파악하여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과 적용을 통해 말씀하신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인도하던 자들’이라는 원어(헤구메노이)는 ‘인도하는 자들,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목사와 장로들을 다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목사와 장로들을 주셔서 교회를 돌아보며 인도하며 다스리게 하셨다. 물론 그들은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5:2-4,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러나, 다른 한편,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의 인도와 지도에 잘 따라야 할 것이다.
본절은 교인들이 인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교훈한다. ‘생각하다’는 원어(므네모뉴오)는 ‘기억하다’는 뜻이다. 좋은 모범을 보인 인도자들은 바른 설교와 바른 행위를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 종말도 좋았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의 생애가 그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끝까지 충성하다가 마침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아야 한다. 물론 바르지 못한 설교와 나쁜 행위로 나쁜 모범을 보이다가 불쌍한 종말을 가진 자들도 있을 것이다. 주를 배신했던 가룟 유다 같은 제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던 데마 같은 제자가 그러하며 또한 돈과 명예와 육신적 쾌락에 빠진 자들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와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종말을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불변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2천년 전에도, 2천년 후에도, 세상 종말까지, 아니 영원한 천국에서도 그는 동일하시다.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의 교훈과 그에 관한 교훈의 불변성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진리와 교리는 불변적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의 교훈은 2천년 전에나 2천년 후에나 동일하다. 바른 기독교 신앙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여기에 참된 기독교의 불변성이 있다. 기독교는 불변적이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고정된,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갈라디아서 1:8, 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디모데후서 1:13, 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렇게 ‘지키는 것’이 바로 보수 신앙이 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단순하고 명확하고 불변적인 진리를 버려두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여러 가지’라는 원어(포이킬로스)는 ‘다양한’이라는 뜻이고, ‘다른’이라는 원어(크세노스)는 ‘이상한’이라는 뜻이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교훈들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그런 경향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또 그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증거했다(고후 4:3). 또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들에서, 그는 장차 교인들이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 참 믿음에서 이탈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딤전 4:1) 또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딤후 4:3, 4).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리와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 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 신앙이 지향하는 바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식탁 교제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성도의 교제는 성경 말씀과 기도가 있는 교제이다.
[10, 11]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1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사름이니라”이다. 이것은, 구약 레위기 4장과 6장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는 것을 말한다(레 4:5-11; 6:26, 30).
[12, 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가 받아야 했던 죄의 형벌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과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능욕’이라는 원어(오네이디스모스)는 ‘비난, 불명예, 모욕’을 뜻한다. ‘그 능욕’은 ‘그의 능욕’ 즉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그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악한 자들에게서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영문 밖으로’는 ‘진영 밖으로’라는 말이다. 진영(陣營)은 사람들이 사는 공동 사회를 가리킨다. 신자들이 불신자들의 핍박을 받을 때 사회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그러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그러나 성도는 그 능욕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주님의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성도들은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된 이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 생활의 바른 본을 보여야 할 것이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말세를 당한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 난무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옛 길, 건전한 길, 곧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진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제 우리도 주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감수하며 주를 따라가는 자들이 되자.
14-25절, 찬송과 선행의 제사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절과 연결된다. 앞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욕 즉 그의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본절은 그 이유를 말한다. 즉 우리가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는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이러므로’라는 말은 본절과 앞절을 연결시킨다. 즉 현실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고난의 생활이지만,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는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신약 성도인 우리는 구약 백성처럼 성전에서 짐승을 죽여 드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의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사’이며(롬 12:1) 우리의 부르는 찬송의 소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우리는 이 제사를 쉬지 말고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영적 이스라엘 된 구원받은 우리 모두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힘써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또한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씀했다. ‘증거한다’는 원어(호몰로게오)는 영어 성경들처럼 ‘감사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찬송은 가장 좋은 입술의 열매이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열매이다. 우리의 입술은 얼마나 더럽고 악한 일을 위해 많이 사용되었던가! 그것은 진리의 싸움이 아니고, 사사로이 남의 인격을 허물고 공격하고, 남을 거짓되이 악하게 비난하는 일에 사용되지 않았던가! 또 그것은 종종 더러운 욕설이나 음란한 말의 도구가 되지는 않았는가? 이제 이런 더러운 입술이 정결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성경의 전체적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을 행함 곧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뒤시아이)이라고 표현했다. 찬송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선행도 구제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기뻐하신다.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자기가 회계[결산]할 자인 것같이 경성하기 때문이며, 또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인도자들, 즉 목사와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決算)할 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또한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근심으로 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이 또한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에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18, 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교인들의 기도를 요청하였다.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들에서 자주 이런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본문에서 저자는 기도 요청의 이유 혹은 내용으로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로, 그는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기 때문에 기도해달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기도하라’는 말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이란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음에 틀림 없다. 둘째로, 그는 그가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말한다. ‘돌아간다’는 원어(아포카디스테미)는 ‘원상복구하다, 회복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저자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 곳에 있음을 나타낸다. 여하튼,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반면, 교인들은 설교자의 설교와 그의 삶 전체를 위해 기도로 도와야 할 것이다.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본절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다. 요한복음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인간 목사들은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유일한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은 신약이 구약의 일시적인 제도와 다르다는 것을 증거한다. 구약의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나 실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거된 신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셋째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하심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족히 확증하였다. 그래서 사도행전 17:31, “. . .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본절은 또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세상에서 평강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 이사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강이 임하였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절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이루시기를 소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과 역사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다른 특별한 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특히, 본절은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증거한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에게 돌려지는 찬송과 영광을 통해 밝히 증거된다.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교인들에게 그가 이 서신에서 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명령의 태도가 아니고 겸손한 권면의 태도이다. 그는 자신의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바울 사도도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하였다.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 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하는 하는 것 같다.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24, 25]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라는 말은 원문에는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를 받는 교인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로부터 교회에 성도들을 인도하는 자들 곧 목사와 장로들을 세우셨다.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그가 자기 피로 사신 주 하나님의’--전통사본]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또한 디모데전서 3장은 장로[목사와 장로]의 자격 요건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가르쳤다. 교회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해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잘 진행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에 복음이 증거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면 이 서신은, 만일 바울 사도가 그것을 썼다면 그의 말기에 썼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가 죽은 후에 사도적 권위를 가진 어떤 이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볼 때 바울 사도는 이런 류의 서신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다른 서신들과 달리 이 서신 초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비록 우리가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14절로 25절까지의 내용은 세 가지의 주요한 교훈으로 되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가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찬송은 우리의 입술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열매이다.
둘째로, 우리는 선행과 구제를 힘써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세상에서 선한 일들을 많이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선행과 구제는 구원받은 자들이 맺어야 할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또한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물론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마치 자신이 결산할 자인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며 성실히 그 직무를 다해야 하지만, 교인들은 그 인도자들이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