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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길이 떠올랐다
정윤천
1
어떤 나이 든 여자는 자신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 젊은 날의 사진을 골라 버젓이 실어놓았다. 그리하여 기인 생머리칼 자락이, 그녀의 한가로운 한담집(閑談集) 안에서 물비린내를 흠씬 풍기며 출렁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 그 나이든 여자의, 과거의 상반신에 대하여(탱탱한 유방 근처와……) 그리고 그녀의 현재의 저의(?)에 대하여, 상당한 의혹과 유감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2
어머니는 한 땀 한 땀 힘들게 바늘귀를 놀렸다. 당신의 그런 집착과 망아의 시간 곁에서, 나는 곧잘 실패라거나 골무 등속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내게 있어 그 시간들은(귀머거리와도 같았던!), 어쩌면 온통 회색의 색감이었다.
어머니는 손바닥 만씩 한 헝겊을 덧대어, 상보라거나 책보 같은 걸 기워놓곤 하였다. 언젠가 내게 힘들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얘야, 나는 내 안팎의 상처를 깁곤 했구나.)
3
마음의 실꾸리에 감긴 좌절을 재료 삼아 그렇게 자신을 기웠노라던 한 여자(어머니), 내게도 문득 흰 길이 하나 떠올랐다(흐릿한 길……), 혹시 그 여자들은(늙은 여류 한담가와 어머니), 제각기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옛날 사진 한 닢과 손바닥씩한 헝겊 조각들 속에서, 푸르름의 길모서리 하나씩을 글썽한 눈매로 떠올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게도 오래전의 먼 길이 하나 떠올랐다. 거기 가뭇한 유년의 강둑(---강변)을 지나, 그 미루나무 숲길 위를 아무렇게나 배회했던, 빛나는 이마를 가진 소년이 하나, 이제 막 맨발의 푸른 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희미한 배경 속에서, 마치도 생시처럼 아프게 어려주었다.
먼 저녁
저쪽에서
소주만병만주소
이쪽에서
소주만병만주소
가지고 놀 것 지지리도 없었던 심심한 한낮 동안, 겁 없이 말[言]소주를 권커니 잣거니 뒹굴다 보면, 참말인 듯 소주에 벌겋게 취해 저녁노을이 한바탕 붉어지기도. 소줏빛 해맑은 눈들을 뜨며 초록별빛이 우수수 사무치기도.
열아홉 연자 누부가
곧잘 밤마실 가던 논두렁 사잇길로
해거름녘 밀잠자리 사냥 나서다 보면
정님이네 밀밭 가생이
연애대장 연자 누부의 치마폭만큼
치마폭만큼
애꿎은 밀대는 뭉개져 있고
쬐깐 것들이, 쪼막만한 것들이, 저희들이 무얼 안다고, 얼라리 꼴라리 어깻짓도 지랄맞게 촐싹이며 오던, 주둥이마다에는 이제 막 솟아오른 반달 한 움큼씩, 희게 베어 물고 돌아들 왔던.
그 꽃밭 속
이른 저녁 푸른 바람 속 그 자리였던가요
우물 앞 평상 위에 동그랗게 피었던가요
단내음 물씬했던 속살 한 입씩 베어 물면
입술들은 다투어서 꽃술로 붉었던가요
때맞추어 지붕 위로 달꽃 덩달아 환해오면
싸리울 담장 가득 별꽃들도 뒤질세라 두세거렸던가요
그 꽃밭 속, 오물고물 이빨 없는 할미꽃 한 송이
희끗해진 울 아부지 주름꽃 또 한 송이
귀밑머리가 서늘해진 울 엄니 그늘꽃의
꽃그늘 아래
누이들 사춘의 분홍물 가슴 위로
연한 수박향의 목덜미 근처 눈길 가닿고 나면
그 꽃밭 속
내 이름도 한 송이 꽃이름이고 싶었던가요
먼 길 휘돌아 날고픈 큼직한 날개의 꽃잎 한 장
가슴엔 듯 품었던가요
그 꽃밭 속, 우물가 평상 위로
한 저녁의 식구들 동그랗게 둘러앉아
영락없는 제 모습만큼씩 오종종 맺혀 있던 거……
꽃잎들은, 바람결에 제 향기로 일렁였던가요
꽃잎들은, 서로에게 동그랗게 벙글어도 주었던가요
구석
시로 삼아 시집에 넣기에 만만한 것이 있다. 외진상가 부근(삼천리표 자전거 대리점 옆)이거나, 물 간 고등어 한 손 같은 것들로, 해찰 많은 걸음에 기대어 남부여대하던 허름한 장바구니의 동구 끝에 퍼질고 앉아 있기도 한다. 대량생산을 위해 벨트를 걸거나 자동 라인을 가동하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수공업과도 같은 이발소여, 그렇게 시집과 이발소는 여겨볼수록 닮아 있다. 하나는 4천 원 하던 제 몸값이 6천 원이 되기까지 꼬박 십 년 넘게 걸린 영구(앞니 두 개 빠지고 칠부바지 걸친) 닮은 것의 이름이며, 다른 하나는 더 말하여 무엇 하리. 찜통에 데운 온수 한 바가지를 물뿌리개에 담아 흘러내리는 비누거품을 잰 손길로 씻겨주고 나면, 그새, 물려놓고 온 장기판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던, 변함없는 버르장머리는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그들에겐 사훈(社訓)이라곤 없다. 강령도 따로 없어서 꼴리는 대로 행간을 내거나 가르마를 타기도 한다.
삐걱임 많은 의자에 걸터앉아 녹슨 바리캉에 틀기름을 치기라도 하듯이, 그래도 어디 쓸 만한 낱말 하나 찾아 나서다 보면, 저절로 쓸쓸해지기도 하던 시의 저녁 무렵이여, 두 구석이 닮았다.
은빛 비늘의 순간
법성포가 가까워지자, 저만치서, 한 쌍의 물고기를 닮아 있던 흔들림이 유영(流泳)처럼 다가왔다. 멀리서 보일 때는 어쩜 조기 머리 같기도 하던 그림자가 자그맣게 글썽였는데, 지나칠 때 보니까 그게 아니다. 둘이서 손잡고 걸어왔는지, 소녀의 볼우물 언저리엔 엷은 분홍 물도 배어 있다.
법성포 바다의 어느 조기 한 쌍들도 저렇게 먼 바다 건너왔을까 생각하면,
종고(綜高)의 하굣길을 나서 흩어지던 법성포의 아이들도 한바탕의 조기떼처럼 풀려 있다. 그때까지도 어깨를 나란히 걷던 한 쌍의 조기 닮은 발걸음이 마을 쪽으로 이내 멀어지고 나면,
이제 막, 비릿하고도 반짝이던 비늘의 시간과도 같은 한순간이 스치고 갔다.
저, 감옥
사랑한다고애써말해버렸다.
밤 포구의 사랑 노래
저런 은밀한 수런거림들은 뭐야
웬일이야
줄줄이 사탕같이 뭍 쪽으로만 턱을 고이고 (배들은)
한결같이 시침 떼는 표정들 웬일이야
통통거리다 온 궁뎅이들 한결같이 바다 쪽에 두르고
후향위로 웬일이야
주책도 없어
웬일이야
달빛도 슬리퍼를 신었네
건달기 서린 느린 걸음으로 고물께 한참을 서성이다 가는데
때맞추어 어디선가 지지리도 욜량대며 오던
어쩌면 저렇게도, 흠씬 푸른 년(女)
말똥 내음이 풍겼으면
깡내 아부지 잔등에서는 담뱃찐 내음이 물큰하였다
그날은 뉘 집에 연탄을 푸고 오는지
깜장이 묻어 있던 말 허리
식은 말똥 몇 닢을 매단 궁둥이 곁에서
깡내 아부지 하얗게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가
비탈 기인 언덕을 넘으면
마을이 가까워 오면
말은 울었다
깡내 집의 말이 하루의 수레바퀴를 내려놓으면
앞산이 그새 적막해지면
밤중에도 말은 선 채로 먼 저녁을 보냈다
말 구루마는 한 번도 제 짐을 싣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쓴 시 한 편 속에서도
말똥 내음이 풍겨 났으면
황진이는 수청 들러 가야 한다네
내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네
누군가 저처럼 수청* 따위를 거래하자 든다면
입술 한번 지그시 깨물어 주고 나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돌아앉고 싶은 마음이었네
세월 사납게 얽혀버린 화면 속의 계집아이도,
궁륭처럼 퀭한 대낮의 객석에 기대앉아
낯선 시간의 저쪽으로 눈을 주고 있는 내 처지도
오지 않을 기다림을 막무가내 그려내야 하는
비일비재한 필름 속 같은 한 장면과 마찬가지였다면
스스로 주연이 되었던 내 안의 내용 한 통이
본 영화보다 빠르게 차르르 풀려 버렸네
막이 내렸으므로
역을 마친 배우들도 이미 어디론가 돌아들 갔을 것인데
한참이나 무질러 앉았다가 무릎 한쪽을 세워 일으키면
이미 대령한 수청 가마가 서슬 푸르게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를
유리문 밖의 세간의 길들이 저만큼 널려 있네
황진이, 쓰개치마가 아니어도
나도 이제 서둘러서 수청 들러 가야 한다네
* 구 제주의 한 늙은 극장에서 「황진이」를 본다. 화면 속의 앳띤 계집은 신임 유수의 공갈사탕을 한사코 도리질하던 장면에 이르렀다.
전주(全州)
이름만으로 전주(全州)인 도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너는 여기 와서 좀 정갈한 걸음으로 걸어도 된다
막상 길을 잃어도 된다 그래봤쟈 전주(全州)
백 년이 흘러도 이 거리의 저녁 무렵은
어스레한 술 향기에 젖어 저물어 갈 것이니
그때는 좀 비틀거려도 된다
가뭄에도 콩나물을 기르는 마음 같이는
지금도 지붕 낮은 골방 한쪽에 배를 깔고 엎드려
시를 쓰며 지낼 것 같은
몇몇의 키 작은 사내들을 불러내도 된다
오래된 창호지 닮은 옛사랑의 기억 몇 페이지쯤을
함께 펄럭거려 보아도 괜찮을 것이어서
퇴임하고 돌아온 별정직 같은 표정이 되어
가슴에 간직한 뼈아픔 한 대목은 되나쾌나 건네버려도 된다
전주(全州)
무슨 실없는 양아치들의 허망한 허세이거나 삐까번쩍의 내일을 위하여
금칠단장의 은마차에 기대어 오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는 더욱 온전한 말로
전주(全州)
<정윤천 연보>
1960년
전남 화순군 화순읍 만연리 80번지에서 정연승(부)과 박수남(모)의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남.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었던 왁자지껄 곡절이 많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유년기를 보냄. 아버지는 불필요하게 엄하셨고, 어머 니는 나를 형제 중에서 으뜸으로 미워함. (형제 중에 얼굴이 가장 아니라는 이유로? 아님 성질머리 때문이었는지!) 그래서였는지 코흘리개 때부터 나는 집보다 밖에 나가 놀거나 남들과 어울리는 일을 좋아함. 당시 마을에는 꼴통 패들로 대오를 이룬 초군(草軍) 부대가 있어서, 그 형들을 죽어라고 따라다니 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놀이와 행패와 장난짓으로 세상의 저녁을 맞이하 고는 했음. 당시 그들이 경영했던 들판 너머의 국경은 구름과 가난으로 이루 어진 수만 평의 아우성.
1968년
화순국민학교에 입학. 가슴에 손수건을 매달고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유독 나 는 할머니가 건사해주고는 했음) 운동장에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줄을 잘 맞 추지 않는다는 꾸지람을 참지 못하여 선생에게 욕을 뱉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 와 버림. 문교부와의 불화는 아마 그렇게 첫 대면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
4학년 무렵에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는 몇 가지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다른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누나가 생일 선물로 몇 권의 책 을 부쳐준 일. 『80일 간의 세계일주』, 『몬테 그리스도 백작』, 『에밀과 탐 정』. 지금처럼 책이 흔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그 일은 내게 주위의 초군들과 는 다른 미지의 세계 속으로 진입을 맛보게 하여줌. 이후로 나는 닥치는 대로 주워다가 읽는 버릇이 들었음.
다른 한 가지 사건은 그때 너무 일찍부터 ‘술’을 끊게 되었다는 사실. 겨울 에 지붕의 이엉을 엮으러 집에 온 동네 아재들의 꾐에 홀려서 막걸리통 곁으 로 ‘뽀짝’거렸다가,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어서 나중에 는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름. 그때 배 안에 들어 있는 술청이 거덜 나버렸 는지 나이가 들어서도 몸과 마음이 술을 거부하는 ㅈ같은 증상이 생김. 그래 도 술자리에 자주 꼽사리를 끼는 편이어서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두주불사형 으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주공체형이라는 것.
(되도록 빨리 빨리 넘어 가기로 마음먹음. 왜? 주소가 길면 가난하고(요즘은 아니지만) 약력이 길면 사이비이기 때문에…)
1974년
화순중학교에 입학. 숙제도 항상 빼먹고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등수는 그래도 앞에서 세는 게 빨랐던 것 같은 초년의 문교부는 그렇게 저물었으며 다시 시작됨.
중학교 시절에는 동네의 형에게서 얻어온 사냥개와 염소 한 마리와 토끼 백 마리쯤을 손아래 아우와 협동조합 체제로 길러냈음. 일요일엔 주로 인근 야산 에 사냥개와 염소를 앞장세우고 칡넝쿨 사냥을 다님. 그때 딴 면허증으로 지 금도 구루마, 지게 등을 제법 잘 몰 수 있음. 그렇게 가축을 길러본 경험은 세 상의 사람들이 두 부류로 구별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줌. 새 목숨(새끼)을 건사 해본 손과 그런 적이 없는 손으로 나뉜다는 것. 따라서 제 몸으로 다른 목숨 을 생산하고 길러본 여자들은 모두 별처럼 달처럼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상을 가짐.
그때 가장 사랑했던 운동 종목은 축구. 차범근과 김진국이 왕이었던 나라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함. 얼마나 줄기차게 운동장을 뛰어 다니며 무릎의 성장판 을 괴롭혔는지 한 해에 키가 12센티미터나 자라버림. 그 이후론 “쬐깐 새끼 가 야무지네”라는 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인생 최초로 ‘인간에 대한 좌절’을 경험함. 3학년 담임인 이 모 교사는 도 덕선생이었는데, 자신은 도덕이어서 절대로 손에 매를 들지 않겠다는 공약을 지킴. 학우들끼리 서로의 뺨을 치게 했던 선생의 도덕은, 반항심이 많았던 나 에게 두고두고 상처의 기억으로 남아 있음. 지금은 캐나다에 산다는 임혁이란 친구가 가장 절친했던 교우였음.
1977년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 같음. 중 3시절 담임과 교실에게 정내미가 떨어져 억지 로 축구선수가 되었던 나는 몸무게와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특기생 입학을 포 기하고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기로 함. 소위 뺑뺑이를 돌려서 배정된 학교는 광주의 전남고등학교. 일신방직과 공설운동장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 학 교는 화순의 집에서 너무 멀었고, 칠판에 적혀진 별 볼일 없는 내용들은 크게 흥미롭지 않았음. 결국 1학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퇴. 하여간 당시의 문교부는 이모저모로 적성에 맞지 않음.
가출과 독서 등으로 하루를 때우곤 하였는데, 그때 익힌 ‘만홧빵’ 출입이 오래까지 이어짐. 일생에 가장 감동적이었던 만화책은 『목림방의 추국』(하 승남/글. 그림).
1978년
이듬해 5월이 되어서야 화순 능주의 시골 고등학교에 끌려감. 이사장 겸 교장 인 어른이 아버지의 절친이었기에, 월말고사만 빼먹지 않으면 졸업을 시켜준 다는 조건으로 재입학. 자취를 하며 띄엄띄엄 학교에 나감. 이상(시인)과 와룡 생(무협지 작가)과 종류미상의 읽을거리들이 교과서를 대신하여 줌.
2학년 담임이었던 김희수(시인) 선생님의 하숙방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손으로 휘갈겨 쓴 육필시를 마주침. 선생의 첫 시집 『뱀딸기의 노래』는 당시의 하 숙방에서 대부분 써졌는데, 나는 가끔 그 방에 찾아가 구겨진 습작지에서 야 리까리한 삶의 슬픔과 시가 되는 지점의 풍경과 풍상의 아름다움을 훔쳐봄.
3학년 때 부설중학교에 근무하는 여선생님께 연애편지를 부침. 선생은 한참 이 지난 뒤에서야 답장 대신에 ‘돈까스’ 한 접시와 영화 한 편을 가슴에 안 겨줌.
1980년
광주시내 모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조기축구 클럽 대항전을 나갔다가 5․18을 맞이함. 축구화를 신은 상태로 운동장에서 쫓겨났는데 시내는 벌써 아수라장 이 되어 있었음. 영문도 모른 채 도보로 화순에 돌아옴. 며칠 뒤에 광주에서는 총성이 울렸고 학생들이, 여자들이, 소녀가, 아이가 죽어나감. 아버지는 급히 나를 화순 남면의 산골짜기에 있는 지인의 동물농장에 연금시킴. 한 번은 아 우와 탈출을 기도해서, 나주의 남평까지 앞 유리창이 깨진 ‘광주 수비대’의 트럭에 올라타고 “물러가라 전또깡”을 외치면서 다녀오기도 함. 현장 체험 자인 '본인의 입장'으로는 아직까지도 5․18은 알아먹기 힘든 초서로 휘갈겨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
1982년
대학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체력장을 봄.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교부 출판사 에서 나온 참고서 몇 권을 독파함. 모 대학의 체육교수였던 매형의 권유로 체 육과 응시(사실은 점수가 그 정도밖에 안 나옴), 매형네 학교 체육관에서 실기 과목 중의 하나인 뜀틀에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해야 하는 체조 연습을 하다 가 착지불안으로 부상. 시험 날을 목전에 두고 오른쪽 발목의 인대가 손상되어 버림. 절름발이 상태로 여섯 종목이나 되었던 실기시험을 치르고 나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짐. 턱걸이 합격점이 나왔으나 이후로는 심한 운동을 할 수 없다 는 판정을 받고 ‘운동과’를 포기함. 항상 운대가 맞지 않던 문교부.
그 시절 한 괴상한 영혼과 조우하게 됨. 일 년쯤 선배 사이였던 김용두(나중에 「인간시대」 PD가 되었음)와 어울려 조악한 문청의 흉내짓을 내보기도 했음. 그와 더불어 무지막지하도록 종이에 새겨진 글자들을 주워다가 읽기도 했는데,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음. 러시아 권의 문학작품들이 제법 기억에 남았음. 머리에 남아 있는 오래된 단편소설의 하나로 『안개 시정거리』(한수산 지음) 가 있었는데, 그 후로 ‘안개’라는 단어를 꽤나 좋아했음.
년도가 확실치 않으나,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충격에 휩싸임. 열아홉의 손위 누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기억. 들판에 나가 그녀 의 유품을 태우는 일을 맡았는데, 표지가 빨간 제목 미상의 시집 한 권을 남겨 돌아옴.
읍내에서 서점을 하면서 부잣집 아이들의 영어를 가르치던 장영이란 형(그는 여 호와를 자꾸 증인하려고 하여서 그 점은 나와 맞지 않았음)이 나에게 시를 써보 라는 권유를 함. 가끔 쓸데없는 짓을 저질러도 될 만한 용돈과 무협지와는 사 뭇 장정이 다른 골치 아픈 책들을 건네주고는 하였음.
나에겐 군대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음. 국군 광주통합병원 ‘영 양과’에서 한동안 짬밥을 지어 주다가 왔는데, 훈련소에서 잡아본 뒤로는 한 번도 총을 쏴보지 않아서, 나중에 예비군 훈련 때도 사격을 하는 날이면 중대장 몰래 옆 친구에게 '대리 쏴'를 시키곤 했음.
1984년
집에서 스스로 영원히 방출될 작정을 함. 펜팔 비슷한 짓을 하였던 그녀를 만 나 동거를 시작함. 선배에게 돈을 빌려서 사글세방을 마련했는데, 처음부터 고 생이 극심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인생은 수학여행”이라는 믿음으로 얼렁뚱땅 견뎌버리기로 하였음. 말년의 아버지가 잠시 경영하였던 한약방에서 틈틈이 익 혔던 약봉지 싸매는 기술로 광주 유동에 있는 모 한의원에 약제사로 취직함. 첫 월급으로 20만원을 받은 날 저녁에 아마 그녀와 나는 동네 식당으로 삼겹살 을 구우러 갔을 것.
1990년
그 사이에, 딸 희재가 이 세상에 왔고, 늦게나마 양가의 부모님들을 모시고 결 혼식을 올렸고,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직장을 얻었을 것. 명색상 시험을 치고 들어간 직장은 보사부 산하단체에 속하는 공무원 같은 것이었는데, 일선 보건 소에 파견근무를 나감. 전남 영암군 보건소에서 맞았던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 유난하게 외롭고 슬프고 쓸쓸한 마음이 찾아들어 눈에 보이는 백지 위에다 무 언가를 자꾸 끄적거리기 시작함. 지방의 한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신춘문예에 ‘정희재’의 이름으로 투고하였는데 당선 통보를 받음.
1991년
계간 『실천문학』 여름호에 신인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그동안 써 모 았던 시편들을 모아 “제1회 실천문학상”(대상은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였 음)에 응모하였는데, 그 작품들이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서 신인 등단의 제 의를 받게 됨.
고향인 화순군 보건소로 발령이 남. 약간의 저축과 아버지의 도움으로 태생지인 만연리에 아담한 양옥 한 채를 마련함. 훗날 배가 고파서 가차 없이 팔아먹음. 근무가 없는 날엔 주로 광주에 나가서 놀았는데, 주위에 몇몇의 문우들이 생기 기 시작함. 곽재구, 박혜강, 고재종 형을 비롯 이철송, 윤석진, 조성국, 김호균 등 과 교유함. 나중에 김준태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가입하 여 활동함.
누군가의 권유로 『창작과 비평』에 작품을 보내게 되면서 이시영(시인) 선생님 과 약간의 친교를 맺게 됨. 선생님 앞으로 작품을 보내면(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이) 빨강이거나 녹색 볼펜으로 휘갈겨 쓴 첨삭시를 돌려보내 주거나 장문의 답신을 보내주시고는 하였음. 그런 일이 계기가 되어 『농무』 아래로의 창비시 선들이 머리맡에 와서 쌓이기 시작함.
가장 기억에 남는 시 한 편을 꼽으라면 「메이비」(장영수), 가장 부러운 시인은 이성복이거나 김사인.
1993년
첫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이 등단지인 실천문학사에서 간 행됨. 신춘문예 당선 신문사의 송 모 문화부장의 지원으로 방송출연도 하고 매 체들에게 인터뷰도 했다는 기억. 나중에는 그 신문사에서 걸판진 출판기념회까 지 치러 주었음.
지금처럼 시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 때문이었는지 그런데로 서울의 유수 문예지 들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음. 아내의 권고로 야간대학에 입학(맨날 집 밖에서 막무가내로 놀아나는 꼬락서니가 지겨웠던지…하지만 5년이 걸렸던 4년 동안 제 대로 배웠거나 익힌 것이 하나도 없음. 친구들 몇몇을 사귄 정도와 ‘무들’이 라는 문예반에 가끔 찾아가서 폼을 잡기도 했다는 기억. 지금도 문교부는 어 쨌건 간에 내 체질엔 비시적이라는 생각. 시인이 되려면 한사코 문교부와 불 화하거나 외면해야 한다는 생각.(그렇다고 “내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던, 장경동 식의 발언) 문교부에 충실해도 얼마든지 품위 있는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됨.
서울에서 활동하는 김형수, 양문규, 오봉옥 시인 등과 교유함.
강경호(현 계간 『시와사람』 주간) 시인과 만남. 얼마 후에는 출판사를 하고 있 었던 그와 모의하여 시 잡지(현재의 『시와사람』)를 창간할 계획을 세움. 맨 처 음 고재종 형을 주간으로 삼고, 그 위의 어른들을 자문으로 영입한 뒤에 지방에 서의 시 잡지 간행을 시작함(처음에 편집장을 맡았다가,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 부주간을 맡음). 몇 사람의 주간과 편집위원들이 거쳐 갔지만 아직까지 『시와 사람』은 결호 없이 잘 발행되고 있는 중.
목포에서 가끔 광주에 들락거리던 유종화 형과 김선태, 김성호, 이수행, 박관서 등과 교유함.
1997년
두 번째 시집 『흰 길이 떠올랐다』를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 그러나 흰 길은 뜨지도 떠오르지도 않았음.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지나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은행의 보증을 너무 자주 섰거나 돈을 모으는 일 따위엔 관심이 없었던 사정으로 빚이 불어나 서 급하게 사표를 내게됨. 그 뒤로 한동안 하는 일마다 실패를 감았(?)고, 그러 면서 자꾸만 가난해져가기 시작했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질머리가 자꾸만 더러워져서 가족들과 가정과 주위와 불화함. 집에서 나와 거리를 떠돌고는 하였 음(어느 시에선가 “개의 발바닥으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더라는 표현처럼).
무엇으로도 울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헤매다가 난장 같은 화투판에 어울림. ‘판 떼기’를 따라 한동안 떠돌던 나를 후배인 이수행 시인이 설득하여 목포로 데리 고 감. 나중엔 처자까지 목포에 내려옴. 수행의 노력으로 어렵사리 호구지책이 마련되었는데, 어쩐지 그때는 이미 시를 쓰는 일에서는 멀어져 버림. 안팎으로 나를 둘러싼 소문마저 흉흉하기 그지없었던 세월.
할머니가 세상을 뜨심.
1999년
광주에 돌아옴. 소설을 쓰던 박호재 형의 제의로 이수행과 함께 광주의 신생 신문사에 입사. 한동안 본사 근무를 하다가 고향 화순의 지역기자로 발령을 받음(저간의 사정이 있었을 것임). 그때까지도 얌전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거 나 누구의 지시를 받는 일에 서툴렀던 나는 놈팽이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는 사무실 한 칸을 얻어 놓고 한 시절을 탕진함.
2002년
세 번째 시집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를 새로운 눈 출판사에서 간행. 그 동안에도 시는 거의 쓰지 못했는데, 왕년의 <눈> 출판사 이춘호 형이 감옥에 서 나와 <새로운 눈>을 재건하며 기획한 시집 시리즈 원고를 청탁 받음. 문제 는 여기에 실린 시들이 1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땡”처리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 이후로 나는 아예 시를 쓰지 않기로 했음.
2004년
다시 거리로 나서버림. 세간에서 칭하는 ‘주재기자’시절을 보내면서, 생의 참 담한 희망들이 하나둘씩 나를 떠나가고 있음을 절감함. 머릿속이 어지러운 상 태에서 요가 도사 안지용 선생을 찾아감. 단식으로 몸과 마음을 게워낸 뒤에 한동안 열심히 요가수련에 매달림.
작은형이 서둘러서 아버지 곁으로 떠나버림.
희재가 서울로 내빼버림. 재수 끝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과에 입학. 휴 학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장학생을 놓치지 않음. 취업보다는 전문 디자이 너를 꿈꾸는 아이 등쌀에, 애비인 나는 요즈음 들어 세간에 제법 알려진 「어 디 숨었냐 사십마넌」(안도현의 시 배달 때문에 널리 퍼짐) 같은 시를 쓰는 신세로 곤궁한 세월을 견디는 중.
2005년
첫 만남에서 의기투합한 문우 이재석(전북작가 회원)에게 이끌려 전라북도 고 창에 발을 들여 놓게 됨. 복분자 술 공장을 시작했던 그의 제안으로 선운사 인근 “다정민박”집에 거처를 두고 전라북도 생활을 시작함.
그 시절에 인터넷 카페에서 <시의지평>이란 동인이 이루어져 공광규, 복효근, 정세기, 이봉환, 오인태 등과 어울려 다시금 시를 쓰기 시작함.
<시인회의>란 문학 카페를 통해 강정숙, 김강식, 토란잎 등의 시인이며 문청 들과도 교유함.
정양 선생님. 이병천, 신귀백 형. 김유석, 안도현, 박성우 등의 전북작가 회원 들과 교유함.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복분자 술 공장으로 옮겨 관리직 생활을 하기도 했음.
2007년
네 번째 시집 『구석』을 실천문학사에서 간행함.
유람선 사업을 시작했던 친구 박광용의 요청으로 제주도로 자리를 옮김. 이종 형, 김수열 시인 등과 교유함. 나중에 이대흠이 그곳으로 건너와 가끔 어울림. 노래를 부르는 허설이도 제주에 와 있었음.
그해에 시집 『구석』이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기도 했고, 백석문학상 후보에 도 올라 그런데로의 몰골을 갖추어 시 마을에 복귀함.
그동안 문예지들이 풍성해져서 제법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글 동네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함. 전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문학행사장에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 가뭄에 콩 나듯이 강연 요청도 받으며 문단의 자잘한 일에 발목을 끼워 넣기도 함.
시인탐방을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주변인과시> 동인(진란, 노창재, 배정희 시인 등)들과는 지금까지도 정을 챙기며 지냄.
문우인 양문규가 주관하는 『시에』와 <시에문학회> 나문석, 김경호, 황구하 시 인 등과는 식구처럼 가깝게 지냄.
큰형님도 아버지 곁으로 돌아감. 어정쩡한 자세로 집안의 장자가 되었는데, 속수 무책. 어쩌다 쓸쓸해진 날이면 나는 혈연이라거나 가족, 가정 같은 단어로 인하 여 극심한 우울에 빠져들기도 함.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을 쓰기 시작함. 평생의 애정결핍 환자였던 나로서는, 이 시집의 작업 기간 동안이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의미심장한 일이기도 했을 것. ‘사랑’이 주된 테마이기도 한 이 시집의 시들을 100여 편 제작(?)해 보았음. 그 중에서 골라진 것들로 시화집 한 권을 스스로 편집한 뒤에 출판사에 출간을 제의함.
화가들 모임의 송년회에 시낭송 제의를 받은 일을 계기로 화가인 한희원 형 등 과 교유함. 그의 바람 내음 묻은 그림 몇 장이 『십만 년의 사랑』 속에서 빛을 발휘하여 주었음.
여수의 김진수 시인(<시의지평> 동인)의 제의로 한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여수 의 시인 지망생들과 교유함. 주로 주막 강단에서 내면의 문학적 고민을 들어주 거나 합평의 자리를 가짐.
『시와사람』 초대시인 인터뷰를 하기위해 고형렬 시인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시인의 머리 위에서도 둥글고 오진 빛의 테두리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 견함. 그것은 인간이 물질이거나 육체적인 것 말고 정신의 에너지와 푼수만으 로도 얼마든지 드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침.
2010년
연초부터 한동안 목포문화방송에서 제작한 <신 남도 발견>이라는 프로에 리포 터로 매주 출연함.
전숙 시인(『시와사람』 신인)의 부군인 전유석 형님이 늘 가까이서 형제의 정 을 나누어 줌.
내가 써놓고, 나 스스로가 눈물이 나는 시 한 편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심을 남은 생의 목표로 삼기로 다짐함.
비공개 카페인 <흰 길이 떠올랐다>에서 몇 사람의 지인들과 ‘시로 가는 길’ 을 모색하기도 함.
한편으로 문학 카페 “시 마을”의 초대시인이 되었던 것을 계기로 김재준, 최 승화, 박일 등의 젊은 문제아(文弟兒)들이 곁에 옴.
2011년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이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간행됨.
오래전의 지인이었던 임의진 목사와 정끝별 시인이 각각 발문과 표지글을 부조 하여 줌. 정찬애 형수(강경호 형의 부인)가 자작 시화집을 만드는 동안 가편집 과 탈고한 시들을 교체하는 변덕스런 작업을 항상 웃는 얼굴로 도와주고는 하였 음(베스트셀러가 되면 백화점에서 옷 한 벌을 사드리기로 약속함). 그 외에도 작 가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열기도 한 이강산 시인이 프로필 사진을 촬영해 줌. 현재는 전라북도 정읍에 머물면서 호구지책을 도모하는 중. 이상.
* 철저하게 시와 관계된 일 쪽에서만 주마간산 식으로 일별해 본 연보는 사실상의 내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 나는 어쩌면 이보다 훨씬 ‘소나기’같은 물건이었거나 ‘무지개’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새겨진 내용들엔 크게 하자가 없을 것이나 표기된 년대는 어쩌면 불확실하거나 어긋날 것으로 추정됨.
ㅡ『시에티카』 2011년 상반기 제4호
정윤천
전남 화순 출생. 1991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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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달 밝은 밤, 흰 길을 따라 시인은 어디에 있는가요. 알싸한 봄밤입니다.
웃음 속에 삶의 진정성이 묻어나는 성찰을 배웁니다.
호반의 도시에서 오신 정누이가 정성껏 땋아준 디스코머릿결을 좋아하며 웃던 그대는 천상 시인입니다! 정선생님!
저, 감옥
저, 감옥
"사랑한다고애써말해버렸다." 정윤천 시인의 시, 저 감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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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애써말해버렸다."
2007년의 기록중
시인탐방을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주변인과시> 동인(진란, 노창재, 배정희 시인 등)들과는 지금까지도 정을 챙기며 지냄
이 행간에서 지난날의 따스한 만남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2002년쯤에 초대시청탁하면서 알게 되어서 2005년 겨울호에 시인탐방특집 싣는다고 가을날 경상도와 서울에서 정읍으로 달려갔던 그 기억들이 새록새록 그립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는 것은 그리움들 뿐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