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여러 고민을 가지고 살아왔고,
지금도 그 관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창조성이 있으리란 생각을 가지고
이번 이야기 마당에 참여한 용헌입니다.
함께 나누면 좋을 이야기를 스스로 공부하는 차원에서 나누어보려 합니다.
이번 첫번째 이야기 마당의 주제는 "창조세계 안의 인간의 위상과 역할"이었습니다.
'창조세계', '인간', '위상과 역할'이라는 단어는 이미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는데
과학은 어떻게 이 단어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관점과 접근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과학은 이 단어들을 '자연', '생명', '의식' 같은 단어로도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과학 이야기 손님으로 오신 장회익 교수님, 종교 이야기 손님으로 오신 양권석 교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과학과 종교가 이 단어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와 공통점이 '생명'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는 것이 뜻 깊었습니다.
#과학을 통해 본 관점
장회익 교수님께서는 과학은 자연을 읽는 책이라 이야기 하시며
온전한 앎과 일상의 앎 사이에서 과학은 일상의 앎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과학적 방법은 자연에 대한 사고를 바탕으로 기본 원리를 세우고 그것을 우주, 생명 인간에게 적용한 후
다시 인간 주체가 그 지식을 바탕으로 문명을 세우고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지식 순환의 원리를 아주 잘 설명하는 과학 이해가 "온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에 따르면 우주 초기 빅뱅에 의해 우주의 온도가 아주 높다가
점차 온도가 내려가며 복합입자가 출현하고 그 입자들이 서로 반응하여 지금의 지구까지 이어집니다.
(온도가 낮아지며 복합입자가 생성되는 원리는 자유에너지와 엔트로피 또는 대칭 붕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입자가 뭉쳐서 지구 정도 차원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하지만 지구 안에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이뤄지지 않습니다.
생명이라는 고차원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을 낱개 입자들의 특성으로만 설명한다면
지금의 우주 수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질서가 질서를 낳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를 통해 현실적인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의 예시는 바로 DNA인데요,
DNA는 그 자체로 생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DNA와 물질을 주고받는 바탕질서가 있어야만 DNA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로 작동합니다.
즉, 생명의 탄생을 설명할 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필요하지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단일 물질에 내재된 무언가가 아닙니다.
바탕질서와 함께 묶어,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있을 때에라야 생명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장회익 교수님은 바로 이 유기적인 관계에 놓인 것을 온생명이고, 생명의 참모습이라 하셨지요.
과학의 관점에서 창조세계, 인간,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바로 이러한 온생명의 모습이겠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출현 또한 바탕질서와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했던 사건이며
인간 지성은 온생명이라는 질서가 낳은 온생명의 두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개체적이기보다는 온생명에 속한 하나의 낱생명이며
세계 창조 과정에 주체적으로 동참하는 존재입니다
#종교를 통해 본 관점
양권석 교수님은 인간을 예외로만 여겨왔던 역사를 돌아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돌아보며 등장한 것이 '인류세'라는 시대 구분인데요,
인류세라는 단어는 인류가 지질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런 단어를 통해 인류의 위기에만 초점을 둔다면 해결책을 잘못 제시하게 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위상과 역할에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지요.
인간 중심적 사고는 바깥과의 교류를 막습니다. 그러한 고립은 전쟁같은 삶을 낳습니다.
인류에게 이롭다 여겨지는 여러 도구들이 사실은 전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은 것이 우연이 아니겠지요.
이제는 인간의 경제체제가 지구 행성체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최근에 교황이 통합 생태론을 이야기 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들에 대한 구분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다른 생명들의 지성이 다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근대적 물질 이해, 이원론적 이해를 벗어나 물질의 변화, 운동, 힘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떼이야르 드 샤르댕과 같은 신학자가 '물질의 심장'이란 책에서 제시하듯
인간과 물질을 구분하지 않고도 종교와 신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는 직접 자신이 물질화 되어 위계를 거부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창조세계로부터 예외가 될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물 속에서 수평적 화해를 추구하며 물질적, 관계적 피조세계에 얽혀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질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호흡하는 존재이자, 지구 공동체에 위치한 존재입니다.
또한 물질이 자기조직화를 해나가는 준안정상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물질을 상호 존중과 보살핌으로 대해야 합니다.
생태계를 돌보고 화해하는 일은 인간이라는 존재 이해를 새롭게 할 때 당연한 것이 됩니다.
#이야기를 정리하며
과학은 물질의 이해에서부터 통합적 이해를 추구했을 때 생명의 참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학자에게 영성이 필요한 이유는 이미 무수히 많이 알려진 개별 지식을 꿰어 이해할 통찰을
영성으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꿰어진 통찰 없이 개별적 지식을 마치 온전한 앎이라 주장해왔던 과학은 전쟁과 생태계 파괴로 이어져왔습니다.
일터에서 과학 연구를 하고있는 저 스스로에게 울림이자 경각심으로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쪼개고 나누고 환원시키는 과학지식은 결국 온생명으로 꿰어져 온생명을 살리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반면 신학적인 관점은 종교적, 관념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 땅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물질과 사건에 하나님의 뜻을 펼쳐갈 때
진정한 인간 이해, 생명의 이해에 도달합니다.
종교는 오랫동안 생명을 이야기 해왔지만 관념적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영성이 구현될 구체적인 삶의 터와 관계를 일궈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와 과학은 생명이라는 지점에서 만납니다.
종교와 과학이 손을 잡고 생명을 살리고 창조세계를 주체적으로 일궈가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