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내리니
이형국
하늘이 몽땅 쏟아졌다. 별들이 땅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지금도 빰을 스치고 어깨를 툭 치며 유성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발밑에는 은하수 밟듯 별들이 발바닥을 받치고 있다. 그들이 다칠까 가만가만 걷는다. 오작교 건너듯 임 만나러 딛는 발걸음인 듯 살포시 살포시 걸음을 뗀다. 가슴 밭에서 키운 핑크빛 장미 하나 능소화 한 송이 해바라기 하나 안개꽃으로 코디하여 품에 안고 임에게 간다.
벚꽃 피는 시기만 되면 지나간 무엇들이 그리워진다. 그리움에 동반해 벚꽃이 흐드러지면, 생뚱맞게도 ‘언제 꽃샘바람이 불까, 비는 또 언제?’ 하며 불현듯 두려워지는 마음이 일어난다. 좀 더 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은데 하늘은 무심하게도 바람과 비를 동원해 쓸어가 버린다. 꼭 도종환의 시를 읽는 듯한 감정이 솟는다.
‘~~ /처음엔 수천 개의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도종환 시인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절대자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을 행간에 깔려있다. 채 맞을 준비도 전에 갑자기 꽃을 피워 올리고는 어느 날 밤새우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철저히 희롱당하는 기분이다. ‘삶의 일부가 이처럼 바람에 날려가고 비에 씻기어 가버리는 거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지나간 사랑이든 무엇이든 과거를 회상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과거의 지갑에서 기억을 하나씩 빼내어 들여다보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닌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보다는 젊었을 적의 머나먼 추억이나 가까운 기억을 들추어 본다. 그들은 어느 날 꿈이란 유에프오를 타고 나에게 찾아오기도 한다. 이따금 그들 때문에 결말도 없이 푹- 바람 꺼지듯 헤어져서는 아쉬움만 안고 생시로 돌아온다.
별을 하나씩 떼어 들여다본다. 별 가슴안에는 기억 하나가 보관되어 있다. 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물을 본 기억도 있고 아버지의 팔을 물어뜯고는 도망친 추억도 있다. 소녀와의 젖비린내나는 사랑과 폐병으로 인한 죽음과의 사투도 간직되어 있다. 제자들과 형·동생으로 지낸 한 초년 교사의 생뚱맞은 시절도 어느 별엔가 들어있을 거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추억의 조각들이다. 누구든 일련의 삶은 하늘에 걸린 별들 하나하나에 숨겨져 있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철이 들면서부터 창가로 찾아온 별들을 반가이 만나 속닥속닥 정담을 나눈다. 때론 그들을 찾아 산과 들로 나간다. 손을 마주 잡거나 품에 포근히 감싸 안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밤하늘을 축복한다.
과거 기억을 일 퍼센트쯤이라도 재생해낼 수 있다면 삶을 충실히 살아온 것 아니겠는가. 순간의 기억, 시간이 쪼개어진 토막 속의 기억에다 비교적 긴 스토리를 갖춘 기억도 있을 거다. 살아온 기나긴 세월을 되돌아보면 아련한 추억만 아른거릴 뿐, 허구가 사실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여 옥석을 가려내지 못할 적도 있다. 아마 심리적 편견으로 야기된 오류를 만들기도 한다. 기억에 얼마간 곡해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과거를 소환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특히 부모님에 관련된 이야기를 재생할 때에는 눈물을 동반하는 경우가 잦다. 부모님 두 분 모두가 몇 년 전에 작고하신 터다. 늘 불효자의 삶이라고 자책해왔다. 젊었을 적엔 말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감을 쌓아나갔다. 그 원망과 증오감을 삭이는데 긴 시간이 걸렸었다.
어머니에게도 마음속으로 왜 나를 낳으셨냐고 수없이 비난을 퍼부어대었다. 당신이 진즉 비난받아야 할 연유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단지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눈으로 행동으로 긴 시간 반항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어머니에게 일부 전가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 당신들의 모습만 떠올려도 가슴이 아려오는데, 지금 이 순간도 눈물이 고이는데, 고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어 고개를 젖혀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벚꽃을 반기다 별을 불러왔고, 별을 떠올리며 아득한 과거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비록 마음속이지만, 수년만의 당신들과의 재회 앞에 용서를 빈다.
이 밤, 남은 별들은 몇몇이 남기고 또 떨어져 내리겠지. 별이 살던 빈 둥지엔 연두색 어린잎들이 차지할 거고.
(2023.04) (10.7매 1534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