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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르의 시신을 싣고 운전을 하던 청부자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더니 곧 상대방이 나왔다.
".............."
"접니다."
"이자르는?"
"죽었습니다."
"수고했다."
상대방의 음성은 냉정했다. 무심하게 들리는 음성이 아니라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워서 목소리의 주인이 어떤 심성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에 반해 이자르를 죽인 청부자의 음성에서는 과감한 손속과는 다르게 인간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필요한 일이다."
"그 아이가 죽을 뻔했습니다."
"그의 무상진기는 육성 정도 회복된 상태다. 한 사람이라면 어떤 방법의 저격으로도 그를 죽일 수 없다. 잘 알지 않느냐? 무상진기로 일깨워진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설사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나친 모험이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청부자의 음성에 미세한 떨림이 섞이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해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그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상대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결코 지나치지 않다."
"그 아이가 저격당하는 것만으로 회가 그들을 끌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우리를 의심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미 끝난 얘기가 아니냐! 네가 그 아이를 아끼는 심정은 잘 알지만 더 이상의 미련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말을 하는구나."
전화 속의 상대방의 말이 잠시 말을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너는 회의 진정한 저력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의 굳어버린 머리도 잘 알지 못하지. 그들은 우리를 의심하지 못한다. 우리를 의심하기엔 지난 시절 우리에 대한 그들의 멸절작업이 너무나 철저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이미 원로원에서 선언한 상태다.
원로원은 그들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존재야. 우리에 대한 언급은 원로원의 능력을 불신한다는 뜻이 된다. 회 내에 그럴 정도로 담이 큰 자는 거의 없다.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그에 대한 저격은 회로 하여금 숨어있는 자들을 의심하는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 회는 결국 그들을 세상으로 끌어낼 것이다. 회는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와 회간의 오랜 싸움을 세상 밖에서 유유자적하며 지켜보던 그자들도 더 이상 그런 여유를 부리며 살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시점이기에 그에 대한 저격을 결정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듣고 있는 청부자의 눈에 한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도 한의 저격 계획을 찬성한 것이 아니던가.
"휴우. 알겠습니다. 그들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다. 그들은 세상에 나와야만 한다. 그들만이 회를 견제할 수 있다. 우리가 예전의 힘을 회복할 때까지 그들이 회를 막아주어야만 한다. 그에 대한 저격은 그들을 끌어낼 최상의 수였다. 그리고 한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회를 견제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간을 벌기에 이 이상의 수는 없다."
"이번 일을 하면서 몇 가지 의문이 더 생겼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시행하긴 했지만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말씀드려도 됩니까?"
"말해 보아라."
"한국지회가 그 아이에 대한 저격을 일본지회의 짓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헛소리. 너는 회의 내부사정을 모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회는 지회들간의 경쟁은 용납하지만 반목은 용납하지 않는다. 일본지회에서 그를 안다면 현재의 한국지회가 처한 상황도 안다는 뜻이다. 한국지회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행동을 일본지회에서 행한다면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일본지회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감히 그럴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존재가 너무 그들을 위협하는 느낌입니다. 그들의 수뇌부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그 아이를 제거하기 위해 고수들이 지원될 수도 있습니다."
"단시일 내에 그런 결정을 할 가능성은 없다. 회에서 한국지회를 지원하기위해서는 다른 곳에서의 활동을 축소시켜야한다. 숨어있는 자들의 능력은 회라해도 수월하게 상대할 수 없다. 그들을 끌어내기 위한 활동만으로도 그들은 고수가 모자란다. 회에도 그만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남아도는 실정은 아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죽지 않을 것을 믿었기에 지시하신 대로 이자르에게 죽여도 좋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아이의 상태가 걱정됩니다."
"네 심정을 안다. 하지만 좀 더 냉정해져라. 이번 일로 그가 죽는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없다는 뜻이다. 그 때는 우리의 계획도 수정되어야하겠지. 그리고 살아난다면 그 아이가 무상진기를 제대로 수련하고 있다는 뜻이고 계속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너나 나나 그를 직접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잊지마라. 그는 혼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더 성장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가 완성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에게는 좀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해."
"휴우. 알겠습니다."
"이자르의 시신은?"
"이준형을 처리한 것처럼 하겠습니다. 흔적은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알겠다."
전화가 끊어졌다. 이자르의 시신을 실은 차량은 인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부자가 가려는 곳은 경기도에서 가장 큰 철강업체가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끓어오르는 쇳물로 그 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녹여버리는 거대한 용광로가 있었다.
우림대학병원 수술실 앞의 복도엔 삼엄한 기운이 가득 했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은 환자복을 입은 사람이든 흰옷을 입은 병원 직원들이든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복도의 양끝 뿐만 아니라 수술실의 앞에도 제복을 입고 M16을 들고 있는 전경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겠다는 태도들이어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도 뉴스를 보아서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수술실 앞에서 창백한 안색으로 서성거리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강력4반의 이정민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가뜩이나 날카로운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덩치가 그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곽원섭이 그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옆에 서 있었다.
굳은 안색으로 복도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수원지검 특수부 부부장 검사실의 수석계장 최원영과 파견경찰관 박훈 경사의 모습도 보였다. 기대서 있는 복도의 맞은 편 벽을 보며 최원영은 무엇인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아아, 경찰 시험을 보겠다고 했을 때 절대 못 보게 말렸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안절부절하며 수술실 문을 구멍이라도 내겠다는 듯 쳐다보며 중얼거리고 있는 청년도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잘 생긴 외모의 청년이었지만 그의 안색은 지금 너무 창백해서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한의 죽마고우 이청운이었다.
"오빠,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그 옆에서 청운에 뒤지지 않는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는 이십대 중반의 미인은 청운의 여동생 이여경이었다. 그녀도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해 있기는 청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에게 한이 저격당한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한은 자신의 주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을 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직원들이 없었으므로 알려 줄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한이 저격당한 사실을 알려준 것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뉴스로 나온 속보였다. 그들은 그 즉시 하고 있던 일들을 중지하고 병원으로 달려 온 것이다.
"진정들 해라. 한아가 얼마나 튼튼한 녀석인지 잊었느냐? 그 녀석은 무사할 거야.절대 이대로 갈 녀석이 아니다."
그들의 옆에 서 있던 50대 중반의 사내가 청운과 여경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청운과 여경을 위로하고 있었지만 실상 그 자신도 위로 받아야 할 처지였다. 그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고, 음성은 무거웠다. 젊었을 적엔 아가씨들 마음을 꽤나 흔들어 놓았을 외모의 이 초로의 사내가 청운과 여경의 아버지이자 한의 아버지 임정훈이 살아 있을 때 형제와 같은 정을 나누었던 사람, 이진석이었다.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아암. 내가 정훈이와 제수씨를 어떻게 보냈는데 다시 한아를 이렇게 보낼 수 있단 말이냐. 한아는 절대 죽지 않는다. 염려하지 말아라."
"아버지. 저도 믿어요. 저 녀석은 이렇게 갈 녀석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하지만.... 총에 맞다니.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경찰이 총에 맞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제가 저 녀석이 경찰이 되겠다고 했을 때 어떻게든 말렸어야 했는데. 무엇이든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 녀석 성격을 알면서도 말리지 못한 게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아버지."
"임형사는 털고 일어날 겁니다. 총알 한 방에 쓰러지기엔 너무 강한 친굽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이정민이 말문을 열었다.
그 음성이 확신에 차 있어서 이진석의 시선이 자석에 끌리듯이 이정민을 향했다. 이정민을 바라보는 이진석의 얼굴은 별 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 시선에 간절함이 가득해서 이정민은 결국 시선을 비꼈다. 그는 한이 무사할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그것이 바람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총알은 한의 가슴을 관통했던 것이다.
초조한 시간이 계속해서 흘렀다. 대수술이었다. 서성거리던 그들이 지쳐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주저앉아 있을 때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푸른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나왔다.
청운이 벌떡 일어나 의사에게 달려가며 외치듯 물었다.
"무사하지요?"
자신을 덮치듯이 다가오며 소리치는 젊은 사내의 기세에 눈을 치켜뜨는 의사의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12 시간이 넘는 수술이었던 것이다. 이번 수술의 집도의였던 김진기 박사는 마치 기도라도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수술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나았다. 그의 시선이 말을 한 잘 생긴 청년을 향했다. 그도 자신이 수술을 집도했던 대상자가 어떻게 해서 수술 받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술은 저도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회복에 걸리는 시간이 어느 정도 일지는 그 젊은이의 체력에 달렸습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청운이 김진기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김진기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 안도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는 이 순간의 즐거움 때문에 그는 외과의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총알이 깨끗하게 가슴을 지나갔더군요. 그것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덕분에 수술 결과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김진기의 말에 끼여든 것은 이정민이었다. 김진기가 이정민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본디 총알이란 것이 맞은 부위는 구멍이 작더라도 통과하며 나중에 튀어나오는 부위는 커지게 마련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수술을 해본 적도 있지요. 그런데 저 친구는 총알을 맞은 등쪽의 구멍과 튀어나온 가슴의 구멍 크기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말입니다. 폐도 크게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천만다행한 일이지요."
말을 마친 김진기는 자신의 입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함께 수술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따라 걷기 시작했다.
김진기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여경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 년 전 그녀가 취직했을 때 친오빠인 청운보다도 더 좋아하며 축하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오늘 그녀는 남자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임한 이라는 사내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갖는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남이 아니었다. 이미 가족의 일원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동안 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