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九 章 百歲五魔
옛사람은 황학(黃鶴)을 타고 가버리니,
이곳은 텅 빈 황학루(黃鶴樓)만 남았고나.
한 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만 둥실 예나 다름없네.
맑은 시내는 한양수(漢陽樹)에 흘러오고
녹음방초(綠陰芳草)는 앵무주(鸚鵡州)에 우거지네.
날 저무니 내 고향이 어디메뇨
강상(江上)의 안개는 사람의 애수(哀愁)를 자아내도다.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黃鶴一去不復還(황학일거부부환)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晴川曆曆漢陽樹(청천력력한양수)
芳草處處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최호(崔灝)의 이 명구는 황학루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하였다.
매일 얼마나 많은 시인 묵객이 누각 위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며 시(詩)를 읊으며 노닐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오늘은 이월 열이틀, 속칭 백화생일(百花生日)이라, 이 황학루 위에는 흥에 겨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월 열이틀 하면 농남의 천전교의 본거지가 한 줌의 잿더미로 화한 지도 어언 반년이 흐른 이른 봄이다.
지금 이 누각 위에는――.
강물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상좌(上座)에는 용모가 출중한 두 사나이가 앉아있다.
한 사나이는 나이가 오십 가량, 한 사나이는 삼십세 가량으로 보인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여보, 요보주(姚堡主)! 그날 침사곡(沈砂谷)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사여안의 누이동생과 운학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운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절하여 넘어지던데……』
그 삼십 대의 위풍이 당당한 사나이가 말했다.
『왕형, 사대협의 누이 뿐이겠습니까? 기절할 사람은 원아(畹兒)입니다.』
그 오십 대의 사나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신필(神筆) 왕천(王天)이었다. 그는 술잔 속에 남은 반잔의 술을 마저 들이키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보주! 어째서 원아가 운학 때문에 보(堡)를 빠져나갔다고 단정하시오?』
요백삼은 한 차례 한숨을 짓고 말했다.
『원아의 성격은 나도 아직 모르겠소. 그날 밤 팔대 종파가 복파보에 들어왔을 때 말입니다. 청목도장이 갑자기 운학이 보(堡) 중에 있느냐 없느냐를 물은 적이 있소이다. 당신도 그때 원아의 놀라는 모양을 기억하실 거외다. 즉, 그때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운학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러나 원아는 알고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후에――우리들이 그 죽일 놈의 천전교주에게 희롱을 당하자 운학이 잘못 추측하여 그를 잡으려 쫓아갔을 때 원아는 곧 몰래 도망을 치지 않았소이까? 왕형 잘 생각해 보시오. 이래도 아직 모르겠습니까?』
『보주 너무 다급한 판단을 내리지 마시오. 그 사여안의 누이동생이 말하기를 원아(畹兒)는 장천행(張天行)을 따라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무슨 착오가 될 일이 있겠습니까?』
요백삼은 말했다.
『내가 그 일로 근심하는 게 아니오이다. 나의 근심은 원아가 운학에게 송두리째 마음을 바치지 않았나 하는 점이외다. 그리고 지금 운학은 드디어 침사곡에 몸을 묻혔으니 원아의 성격으로서 그녀가 그 사실을 안다면…… 그건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야!』
요백삼의 목소리에는 자못 근심이 담겨져 있었다. 왕천 역시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응, 원아는 감정이 복잡한 사람이요. 남매이면서도 당신과는 딴판이거든. 옛날 노보주와 능상노파가 원한을 맺은 일은 정말 ‘정(情)’이란 한 자(字) 때문이 아니었소이까. 바로 사랑 때문에 원수를 맺은 것이니 정으로 사람을 망치는 것이 정말 무섭거든……』
요백삼이 말한다.
『그것이 어디 돌아가신 부친을 원망해야 될 일인가요? 부친께선 그 능상노파에게 추호도 애정을 줘 본 적이 없었소이다. 결국은 능상노파 자신이 짝사랑한 것뿐이었으니……』
왕천이 말한다.
『노보주께선 저에게 태산과 같은 은혜를 베푸셨지요. 이 왕모가 생각하는 바로는 노보주께서 그녀에게 지나치게 대해 주신 걸로 아오이다. 그렇지 않으면 능상(凌霜)이 어찌 사랑이 증오로 변하여 그런 좋지 못한 결과를 일으켰겠습니까?』
요백삼이 말한다.
『왕형과 나는 일생을 싸움판에서 보낸 사람들이라, 남녀 간의 까다로운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모르니만치 부친의 그때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외다. 부친께선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당년에도 이렇게 애욕지정(愛慾之情)을 끊지 못했으니 차후 아마도 더욱 어지럽게 얽힐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말씀도 꼭 들어맞을 것이라 믿소이다.』
왕천은 납득이 안 간다는 양 고개를 흔들었다. 천성이 강직한 그는, 요보주를 심히 짝사랑하던 능상노파의 사랑이 증오로 변하여 종내는 분규를 일으킨 것을 시종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노보주가 내린 은혜를 깊이 느껴, 그와 같은 공력과 위망(威望)을 가지고서 몸을 굽혀 복파보를 위하여 평생 헌신했던 것이었다.
요백삼은 한 잔의 쓴 술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는 귀신이 울부짖는 침사곡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리하여 그는 다시 탄식한다.
『운학은 나이도 어리고, 몸에 개세(蓋世)의 절학을 지니고 있는 아까운 인물이 아닌가. 그날 우리들이 그를 잡으려고 쫓아갔을 때 몇 번이나 그의 충후성실(忠厚誠實)한 사람됨을 발견하지 않았느냐. 원아야―― 아, 뜻밖에도 그가 천전교의 그 어린놈의 손에 죽다니!』
요백삼이 침중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왕천이 말을 이었다.
『작년 칠월에 각파 영웅들이 천전교를 궤멸시킨 사건은 정말 무림의 일대 쾌사(快事)가 아닐 수 없소이다. 비록 그들 역시 하나도 살아나지는 못했지만――』
요백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들이 침사곡 가에서 천전교주를 만난 게 칠월 스무날께였고 안복언들이 천전교를 전멸시킨 것이 칠월 그믐께였으니 아마도 천전교주는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을 거외다. 그렇다면 이 도적이 또 고개를 쳐들 가능성이 있다는 뜻도 되지 않겠소.』
왕천의 짙은 눈썹이 찡그러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눈 아래 풍경을 바라보더니 약간 이상한 듯이 중얼거린다.
『왜 아직 안올까?』
『그날 계곡가에서 사대협이 비록 영매를 안고 그의 사부를 따라 갔지만, 오늘 약속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그의 말이 아직 끝나기 전에 왕천은
『아!』
하고 낮게 부르짖고는 난간 밖을 가리키며 역시 나지막하게 외쳤다.
『왔어요, 왔어――』
요백삼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눈 아래 푸른 강물 위에 한 작은 쪽배가 물길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물결을 헤치고 올라오는 그 배의 속도는 화살같이 빠르다.
배위에서 삿대질을 하는 청년 대한은 당금의 무림에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여안(查汝安) 그 사람임이 분명했다.
얼마가 지나지 않아 누각의 계단을 딛는 소리가 나자, 사여안이 큰 걸음으로 걸어 오른다.
그는 요백삼과 신필 왕천을 향하여 가볍게 읍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소제가 늦었사오이다.』
요백삼은 얼른 말한다.
『아니, 아니, 상대방은 아직 오지 않았어.』
반년을 보지 않는 사이에 사여안의 영준한 얼굴 위에는 한 줄기 여린 우수의 빛이 감돌고 있어 그의 그 본래의 씩씩한 얼굴이 약간 음산하게 보인다.
요백삼은 그의 누이동생과 운학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일이 끝이 난 이 마당에 무슨 질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술잔을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강 복판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세 사람은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그들이 왔다!』
낮게 부르짖으며 들었던 술잔을 놓았다.
보니까 꼭 한 사람이 타여 할 작은 배에 다섯 사람이나 타고 있었다. 작은 쪽배는 뱃전에 물이 넘칠 만큼 깊이 잠기고 있었다.
그 사람은 돛대나 삿대를 쓰지 않고 그들의 통이 넓은 옷소매를 뒤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밀린 작은 배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물결을 가르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 다섯 사람은 소맷자락을 연신 흔들면서 크게 웃어 제친다. 강가에 있던 뭇 사람들은 그 광경이 하도 기이해서 입을 딱 벌리고 있다.
누각 위의 세 사람 역시 심중으로 저윽이 놀랬으나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누각의 계단을 밟는 소리가 다시 울리며 옛날의 그 마교오웅(魔教五雄)이 황학루로 올라갔다.
앞장 선 늙은이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바로 백룡수(白龍手) 풍륜(風倫)이었다.
그는 요백삼 쪽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는 고개를 돌이켜 네 노인에게 몇 마디 알지 못할 소리로 지껄인다. 그러자 뒤에 섰던 네 노인은 일제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다.
누각 위의 뭇 주객들은 모두 이 방약무인한 다섯 노인에게 시선을 모았다.
풍륜은 그 넓은 옷소매를 펄럭이며 요백삼의 식탁 옆에 다가왔다.
요백삼, 왕천, 사여안 세 사람은 한꺼번에 몸을 일으켰다.
다섯 노인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들 다섯은 각자 빈자리에 앉았다. 한 마디의 말도 않고 그저 물끄러미 식탁 위의 술과 안주를 바라본다.
요백삼은 그들이 음식이 부족하여 그러는 줄 알고 손뼉을 쳐 주보(酒保)를 불러내어 분부했다.
『손님들이 더 오셨으니 주석을 펴게.』
다섯 노인은 여전 말이 없다. 요백삼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섯 노선배님의 행동은 그야말로 신출귀몰(神出鬼沒)이라 일 년 동안 뵙지 못하였습니다. 다섯 노선배님께선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풍륜은 껄껄 웃으며
『무양(無恙)하지 않을 것도 없지.』
이때 주보는 네 개의 술상을 가지고 왔다. 비록 소반은 네 개이지만 그 소반마다 술과 안주며 가지가지 요리가 고루고루 놓여 있었다.
다섯 노인들은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눈앞에 놓이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려다본다.
이윽고 운환마(雲幻魔) 구양종(歐陽宗)이 탄식하며 말한다.
『노대, 아무튼 청목소도 그 늙은 소코도사와 파고검객(破褲劍客)이 우리들을 골탕 먹였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풍륜이 물었다. 구양종은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그 두 놈 때문에 우리는 삼십 년 동안이나 울며 겨자 먹기로 중 노릇을 하지 않았나? 그 바람에 입엔 고기 한 점 대지 못한 게 아닌가. 우리가 언제 이런 음식을 구경이나 했느냐 말야.』
다른 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풍륜은 젓가락을 들기가 무섭게 아주 익숙한 솜씨로 식탁 위의 음식을 휘저으며 크게 소리쳤다.
『여러분! 여러분 우리 먼저 먹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다른 네 늙은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그래……』
하더니 다섯 쌍의 젓가락은 가로 세로 어지럽게 왕래하며 식탁 위에서 춤을 춘다.
이 꼴을 본 요백삼은 벌린 입이 닫혀지지 않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몇 젓가락 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음식이 입에 달갑지 않았다.
그가 신필 왕천과 사여안들의 식탁 위를 힐끔 쳐다볼 때는 다섯 늙은이들의 식탁은 밑바닥이 났다.
접시까지 먹어치울 듯한 기세로 음식을 해치우고 난 풍륜은 그제서야 넋을 잃고 있는 요백삼의 눈치를 살피고는 늙은 얼굴에 한 가닥 부끄러운 기색이 감돈다.
그는 마른기침을 한두 번 하고 나서 마지막 남은 고기 덩어리를 입안에 던져 넣었다.
노련한 신필 왕천은 그들이 들으라는 듯 하하하 소리 내어 웃고 짐짓 한숨을 지으며
『아아, 황학루란 이름은 높지만 알고 보니 허명(虛名)뿐이구나. 이 음식들만 하더라도 우리 복파보의 요리사가 만든 것보다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니 말야.』
풍륜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왕천은 능청맞게 대답한다.
『그날 풍 노선배께서 복파보 안에서 주효(酒肴)를 맛보지 않았습니까? 그러시다면 이 후배의 거짓이 아님을 짐작하실 터인데――』
다섯 늙은이는 서로 눈짓을 하고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풍륜이 고개를 끄덕이니 다른 네 늙은이들도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풍륜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한다.
『우리들이 그런 복을 다시 가질 수 있을까?』
이 말은 그들 다섯이 또 복파보를 가서 한 턱 단단히 얻어먹을 수 없느냐는 왕천에 대한 암시였다.
왕천은 솟구치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자못 심각한 얼굴로 요보주를 돌아보며 말한다.
『보주, 그때가 오면 다섯 노선배의 구미에 맞도록 훌륭한 요리를 장만합시다그려.』
『너무 황송해서 원.』
『천만의 말씀을. 오히려 폐보(敝堡)의 무상의 영광이 되겠습니다.』
요백삼이 말하자 왕천도 술을 들이키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섯 선배님, 작년에 다섯 노선배님께서 뺏어 가신 그 양피지(羊皮紙)는 의당 저희들이 찾아야 하는 것이오나 돌이켜 생각건대 그 양피지가 비록 비보(秘寶)라고는 하지만 그 속의 오묘한 비밀을 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한 장의 종이에 지나지 않소이다. 그러니 이 비도(秘圖)를 다섯 분의 몸에 두는 것이 이 보중(堡中)에 두는 것보다 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천하에 다섯 선배님의 호위(虎威)를 건드릴 자가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되겠고……』
풍륜은 득의만면해서 소리쳤다.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왕천이 말한다.
『그래서 저희들은 선배의 말씀을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헌데 여러 선배님께서는 지금도 그 양피지를 가지고 계시온지…… ?』
풍륜은 눈을 껌뻑껌뻑 하더니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엉뚱한 화제를 꺼냈다.
『세상엔 경치가 좋은 곳이 한 둘이 아니더군. 전일 우리들이 파양호(鄱陽湖)에서 노닐 때 보니 그 호수 복판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정말 장관이더군.』
『노선배……』
왕천이 입을 열었으나 풍륜은 여전 딴전을 피운다.
『이봐 노삼(老三), 임자는 그 산봉우리에 올라갔었지? 그래 경치가 어떠하였나?』
『천하의 절경이더군. 기화요초, 기암괴석, 히히히 볼만했지!』
『노선배님, 그 양피지……』
왕천이 말했으나, 풍륜은 또 얼른 입을 열어 왕천의 말을 가로막고 연신 딴전을 피운다.
『이봐 노사(老四), 이 좌석이 약간 불편하지 않은가?』
삼실산 사백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글쎄, 다른 자리로 옮겨 볼까?』
그는 맞은 편 창가에 있는 원탁을 가리켰다.
다섯 노인은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은 왕천들이 말리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그 원탁으로 자리를 옮기고 둥글게 앉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주보(酒保)가 나와서 공손하게 읍을 하고 말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는 벼슬이 높으신 어느 어른께서 예약해 놓은 곳인데요.』
다섯 노인은 왈칵 성을 내었으나 즉시 신색을 가다듬고는 십분 사리(事理)를 차린다는 양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풍륜이 자못 점잖게 말한다.
『다른 사람이 예약한 자리라면 어쩔 수가 없지.』
그는 네 노인을 이끌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약간 쑥스러워진 풍륜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살리려는지 한층 언성을 높였다.
『옳지! 음식이 온다!』
과연 주보 하나가 커다란 접시에 벌겋게 익은 생선을 담아 가지고 왔다. 풍륜은 접시가 놓이기가 바쁘게 제일 먼저 먹기 시작한다.
그들 다섯이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고 있는데, 누각의 계단이 쿵쿵 울리더니 한 사나이가 누각 위에 나타났다.
그 사나이는 그 원탁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주보에게 묻는 것이었다.
『관인(官人)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느냐?』
『예,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십훈십소(十葷十素, 일류요리)를 다 준비해 놓았느냐?』
『다 됐습니다, 다 됐어요. 객관(客官)이 분부하신 대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주보의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주보를 보내고 혼자 탁자가에 앉았다. 홀로 창문 밖을 내다보며 홀로 한 잔 술을 들이킨다.
신필 왕천은 요백삼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이른다.
『장문(掌門)!』
요백삼은 소스라치며 역시 낮은 음성으로
『백청산(白靑山)?』
『그렇소이다.』
『그가 어째 여기에 왔을까?』
『모르지오. 두고 봅시다.』
이리하여 이쪽 탁자는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사여안은 다섯 늙은이들이 갑자기 아무 소리를 내지 않자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접시 위의 그 많던 생선은 온데간데없고 다섯 늙은이는 목상(木像)처럼 시치미를 딱 떼고 앉아 있었다.
『엄청나게도 먹어대는군!』
사여안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이때 쿵쿵 누각 계단이 울리고 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앞장 선 한 사람은 얼굴이 무르익은 대춧빛 같고 체구가 웅장한 사나이다. 후면의 한 사나이는 나이가 약 서른쯤 되었을까, 모습이 희멀겋게 준수하다.
사여안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요백삼에게 말했다.
『보주, 곤륜장교(崑崙掌敎)와 한남(漢南)의 금사장문인(金沙掌門人)이 왔소이다.』
요백삼은 깜짝 놀랐다. 그는 이 하루 동안에 갑자기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황학루에 모여 올 줄은 천만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는 흉중(胸中)의 목적한 일을 잠시 보류하고, 앞으로의 사세(事勢)를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가에 안장 있던 공동파의 장문 백청산이 몸을 일으키더니
『하하하, 두 분께서 이렇게 늦게 오실 줄이야!』
살천조(薩天鵰)가 호쾌하게 웃고 말한다.
『백형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외다.』
그는 곤륜 장문의 손을 끌어당기며 소개를 했다.
『이 분은 백형, 이 분은 남형(南兄).』
그러자 공동 장문인 백청산이 명랑하게 웃으며
『남형의 영명(英名)을 들은 지 오래요. 오늘 다행히 남형의 신풍(神風)을 우러러 뵈오니 백모의 영광이 이만저만이 아니오이다!』
곤륜 장교 남곤(南崑)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역시 몇 마디 답례를 했다.
백청산은 객들을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도 앉았다. 그러나 이쪽 식탁의 사나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사여안은 잠시 그들과 접촉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곧 몸을 돌려 그들과 등지고 앉았다.
살천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 소제가 몸소 침사곡을 두루 둘러보았소이다. 그 결과 별다른 발견은 없었소이다만 남형의 말씀대로 새북대전(塞北大戰)이야말로 침사곡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아닌가 아오이다.』
남곤은 말 한마디 없이 허리춤으로부터 헝겊 두루마리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납작한 나무껍질을 꺼냈다.
그 나무껍질 표면에는 네 개의 글자로
『팔보간선(八步赶蟬).』
이라 쓰여져 있었다.
남곤은 아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 네 글자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가형(家兄)의 친필이라 생각합니다. 소제 침사곡 가의 한 그루 오래된 나무(古樹) 위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말이 없다. 얼마 후에 살천조가 말했다.
『살모(薩某)가 침사곡에서 만났던 복면의 괴한은 복파보의 신필(神筆) 왕천(王天)의 말을 듣자하니 왕년의 북요파(北遼派)의 장문인 김인달(金寅達)이라 합디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북요파 역시 석년(昔年)의 대회에 참가했던 문파 중의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당시의 추세를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침사곡을 건너가자고 제안한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 김인달이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도 쉽사리 짐작이 가시리라 믿습니다. 당년의 모임에 참가했던 호걸로서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김인달 한 사람 뿐임을……』
여러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공동장교 백청산이 말했다.
『살형(薩兄)의 말씀이 극히 이치에 맞소만, 단지…… .』
하자 남곤이 말을 받았다.
『백형은 바로 천일대사를 말씀하시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만약에 소림의 천일대사와 같은 공력의 고수도 아직 살아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찌 김인달이 살아남을 수 있냐 그 말입니다. 이 점이 미심쩍다 이 말씀이외다.』
살천조가 역간 눈썹을 찡그리고 말한다.
『이 문제는 소제 역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하(現下)의 사실로 보아서는 이렇게 추단(推斷)을 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제는 그 대전(大戰) 중엔 반드시 커다란 음모(陰謀)가 숨어 있지 않나 여기고 있습니다.』
『음모라니?』
『음모?』
십 수 년 전의 그날 밤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그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그 음모로 하여 희생이 되고만 것일까? 가련한 사람들 같으니 지금에야 겨우 그것이 음모라고 의심을 내기 시작하다니……
‘음모’ 이 두 글자는 각 사람의 심중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그 한바탕의 새북대전의 승리자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가히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그것은 청목도장이나 천일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청목(靑木)은 종래에 얼굴을 내놓고 그의 승리를 선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 두 사람의 불세출(不世出)의 기인은 모두 세인이 인정하는 높은 인격의 소유자인지라, 승리를 거두었기로소니 어찌 남은 고수들을 사지에 버려둘 수 있었겠는가?
『틀림없어! 그것은 음모다!』
남곤(南琨)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쳤다. 쾅! 소리를 내며 탁자가 진동을 한다. 그러나 식탁의 음식이나 그릇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닌가. 이 자그마한 동작은 살천조(薩天雕)와 백청산(白靑山)을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그들은 이 나이 어린 곤륜 장교의 내공이 벌써 이런 경지에 이르렀던 줄을 몰랐던 것이다.
남곤은 믿는바 자기의 생각을 강조하는 의미로 말한다.
『그 대전에서 누가 승리를 했던 간에 아직까지도 ‘내가 천하제일 고수’라고 나서서 선포하는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는 가히 최후의 승리자의 목적이 명예를 다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백청산이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그렇소! 이 점이 바로 그 사나이가 음모를 품고 있다는 증거지요!』
살천조가 나섰다.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복면의 괴인 김인달을 찾는 것입니다.』
백청산과 남곤을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자기 딴에는 작은 목소리로 지껄이고 있는 셈이었으나 이쪽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귀에도 아주 똑똑히 들리었다.
운환마 구양종은 마지막으로 남은 닭다리를 뜯어 먹고는 풍륜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노대, 저 세 사람의 판단이 어때?』
풍륜은 심중으로 올바른 판단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삐죽거리며 비웃듯이 내뱉았다.
『세 바보들이 반나절 입을 나불거려서야 간신히 결론을 얻은 모양이군. 흥, 이 어르신네께선 벌써부터 알고 있었단 말야……』
그의 음성은 꽤 컸다. 저쪽의 사나이들은 즉시에 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살천조가 먼저 몸을 일으키고 얼핏 소리쳤다.
『어? 사대협께서도 여기 계시군……』
그는 비록 너절한 자세로 앉아 있는 늙은이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지만, 그들의 무림에서의 차서(次序)를 보아서 자기는 적어도 삼대(三代)쯤의 후배로 여겨졌다. 그래서 감히 어떻게 칭호를 해야 할지 몰랐다.
풍륜은 풍륜대로 늙은이 행세를 않고 스스로 몸을 일으켜 요백삼과 왕천을 끌어당기며 저쪽의 사나이에게 소개한다.
『오시오, 와. 족보를 캐면 여러분 역시 수백 년 전에는 한 집안이었는지 몰라. 이 분은 요백삼(姚百森)이라 하구 에에 이분은 말이여, 왕천(王天)이라 부르지. 하하, 당신들과 늦게 만난 게 한이야!』
그는 소란스럽게 상대방을 소개한다. 어디까지나 주인이 종을 대하듯 거드럭거리고는 그들의 식탁 위에 놓인 크고 작은 산해진미가 모두 풍가(風哥)의 것인 양 자못 기고만장이었다.
온 누각에 있는 시선이 풍륜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는 얼굴에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으며 희희덕거린다.
그는 말이 끝난 후에 또 주보를 손짓해 불러 분부를 내렸다.
『빨리 술과 안주를 가져와!』
하고는 또 살천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여보, 거기 계신 분들, 당신들도 이쪽으로 와 앉으시지.』
살천조는 어떻게 행하야 할지를 모르는 모양으로 어지러이 손을 흔들 뿐이다.
곤륜파, 공동파의 양대 장문은 서로 바라보다가 일제히 이쪽으로 걸어온다.
주보는 또 진한 술과 멋진 안주를 가져왔다.
풍륜은 입이 헤벌어지며 말한다.
『자, 음식이 왔으니 건배합시다!』
그는 한 입에 쭈욱 들이키고 수염에 묻은 술방울을 닦아내며 말한다.
『듣건대 여러분께서는 그 새북대전의 수수께끼 때문에 골치를 앓는 모양인데 따지고 보면 그게 모두 헛수고란 말이요. 왜냐구? 이 일은 모두 끝난 일이 아닌가. 그들이 만약 죽었다면 벌써 한 줌의 흙이 되었을 것인데 아직도 그 때문에 속을 썩인단 말인가? 여러분이 무료해서 견딜 수가 없다면 당대의 각파 고수를 모아서 다시 그곳으로 가 보기로 함이 어때? 아하하하……』
그는 스스로의 말이 자못 묘하다고 생각했던지 흥겨워 못 견디는 양 웃어제치는 것이었다.
그가 계속 그 위대한 발언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갑자기 자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는 힐끗 뒤돌아보았다. 노이(老二) 구정(丘正)이었다.
구정은 풍륜의 허풍이 지나칠 뿐 아니라 너무 장황스레 계속되자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긴 것이었다.
풍륜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싶지 않았으나 형제 노이가 제지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주저앉았다.
그가 겨우 주저앉자 구정이 즉시에 일어서며 풍륜에 이어서 소신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이 노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여러분들이 합력하여 먼저 그 뭔가 김인달이란 작자를 잡아 추궁하면 곧 모든 진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스스로 이 계교가 매우 고명(高明)하다 느끼고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설명을 덧붙인다.
『만약에 그가 불지 않는다면 이 노부가 각위(各位)에게 하나의 계교를 드리지요. 그것은 곧 분근착골법(分筋錯骨法)이라는 것으로 부골독침(附骨毒針) 곧 뼈에까지 들어가는 독침으로서 그의 뼈마디를 쑤셔서 위협하는 고문법(拷問法)이지. 그때는 그 자가 불지 않을 수 있을까? 흥!』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스스로의 말에 힘을 주었다.
남곤과 백청산은 은근히 눈썹을 찌푸렸다. 백청산은 이 다섯 명의 주책바가지 늙은이가 누군 줄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 다섯 늙은이가 분수도 모르고 쉬지 않고 마구 지껄여대자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수양이 비록 높기는 하지만 분근착골이니, 부골독침이니 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오자 더 참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백청산은 벌떡 일어서며 젓가락으로 닭다리를 집어 또 뭐라고 지껄일 양 마악 입을 벌리는 구정의 입에 처박고 소리쳤다.
『노선생, 음식이 식어요. 먼저 이거나 드시고 말씀하슈!』
『으……』
구정은 입안 가득히 닭다리를 물고 눈만 멀뚱거릴 뿐 말을 하지 못한다.
남곤은 체증이 뚫린 듯이 속이 후련하여 속으로
『참 좋은 수법이로다!』
하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구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혓바닥을 기묘하게 말더니 닭다리는 게 눈 감추듯 씹어 돌리고는
『퉤!』
하고 뱉아 버린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것은 매끈하게 살이 발려진 닭다리 뼈가 아닌가.
구정이 히쭉 웃으며
『어흠! 참 맛이 있었어!』
백청산은 어이가 없어졌다. 자신은 손가락에 공력을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 힘을 받은 닭다리가 입에 박히면 나무판자라도 뚫어버릴 것인데 이 노인의 아가리는 무쇠로 만들어진 입인지 끄떡도 않는 게 아닌가!
그가 놀라는 사이에 구정은 손가락 하나를 뻗쳐 식탁 바닥을 한 번 쳤다. 딱! 소리가 나자 식탁은 무슨 기이한 힘을 받았는지 식탁 위에 남은 닭다리 세 개가 껑충 날아오르며 마치 세 개의 화살인양 남곤, 백청산, 살천조 세 사람을 향하여 보기 좋게 날아갔다.
세 사람은 모두 무림에 위엄을 떨치는 일파의 장문이다.
그들은 이 돌발적인 찰나엔 피할 겨를도 없었는지 그 닭다리는 일직선으로 세 사람의 입에 날아가 콱 박혔다.
세 사람은 한꺼번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구정이 크게 웃으며 소리친다.
『하하하, 닭다리가 맛이 어때?』
백청산은 이 늙은이의 손가락 힘이 이렇게 신묘할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그는 불현듯 구정의 손가락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정이 그를 보더니
『당신 뭘 보지? 이 손가락 말인가? 하하하…… 온 천하가 나의 이 손가락만 보면 벌벌 떨지!』
남곤은 백청산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금은지(金銀指)외다!』
순간 백청산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마교오웅’ 이 네 글자가 그의 심전(心田)에 즉시 떠올랐다. 그는 경악에 가득 찬 눈초리로 다시 한 번 이 다섯 노인을 훑어본다.
살천조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경험이 많은 늙은 구렁이답게, 여기 오래 있다간 재미적다고 느꼈음인지 짐짓 한 잔을 쭈욱 들이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백형, 남형, 구(丘) 노선배의 말씀이 옳소이다. 우선 김인달을 찾는 것이 옳은 이치인가 하오이다.』
그는 말과 함께 껌뻑 눈짓을 해 보였다. 남, 백 두 사람은 곧 그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약속이나 한 듯 몸을 일으킨다.
『각위께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저희들 삼인(三人)이 한 걸음 먼저 가겠습니다.』
풍륜이 만류를 하려 하는데 신필 왕천이 벌써 입을 연다.
『좋소, 좋아! 우리 전송하지 않겠소이다!』
세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 각인(各人)에게 깍듯이 예를 드리고 누각 아래로 물러갔다.
풍륜은 심히 재미적게 느끼자 당장 오줌이 마려워 못 견디는 양 앉았다 섰다 한다.
이때 요백삼이 아까부터 벼르고 벼르던 말을 했다.
『다섯 선배님께서는 작년에 여기서 결단을 내자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양피지(羊皮紙)는 폐보와 심히 관계가 큰 물건입니다.』
풍륜이 더는 딴전을 피울 재료는 없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그 양피지는 지금 우리들 몸에 없어.』
요백삼은 두 눈이 갑자기 사나와지더니 언성을 높였다.
『그럼 어디 있습니까?』
『운학 녀석이 가지고 있지…… 운학은 자네도 알지?』
풍륜의 대답을 들은 요백삼은 풀썩 자리에 주저앉고 힘없이 길게 탄식한다.
『다아 끝났어!』
풍륜은 눈치도 모르고 캐묻는다.
『어째서?』
요백삼은 절망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운학…… 그 사람은 천전교주의 암수에 빠져 침사곡에 떨어져…… 죽었으니깐!』
이 때 누각 바깥의 관도 위에는 또 두 사람이 나는 듯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아름다운 낭자요, 한 사람은 글깨나 읽은 듯한 선비인데 그의 얼굴로 봐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낭자가 말했다.
『장대가(張大哥), 빨리 온 셈이죠……』
허가 그 선비차림의 사나이는
『원아야, 네가 황산에서 떨어져 죽은 줄로만 알고 이 늙은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었는지 알기나 아느냐?…… 다행이도……』
하자 요원은
『그날 저 역시 꼭 죽는 줄만 알았어요. 그러나 천 길 깊이의 구덩이 아래에 칡으로 얽은 그물이 있어 경공술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어요.』
『글쎄 말이다. 아마 원아의 오빠도 벌써 왔을 걸.』
『장대가가 저를 서둘러 끌고 오는 바람에 사씨 언니가 저를 찾지 못해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요.』
장대가가 말한다.
『넌 넌, 그녀에게 몇 글자 남기고 오지 않았냐?』
이럭저럭 누각 가까이 이르렀다. 요백삼의 웅장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오빠의 음성을 들은 요원은 반가운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장대가를 끌고 마구 뛰어간다. 장대가 역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 뒤를 따른다.
요백삼의 말이 끝났다――.
마교오웅은 일제히 휙 일어섰다. 그들의, 세상을 조롱하는 그 비양스러운 얼굴이 이 찰나 싸악 가셨다.
주름진 얼굴 위에 한결같이 난처한 빛이 감돈다. 그러자 인도(人屠) 임여(任厲)가 풍륜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노대, 우린 어떡하면 좋지?』
풍륜은 대꾸도 않는다. 운학의 그 씻은 듯이 허여멀건한 얼굴이 그 뇌리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다만 힘주어 주먹을 쥐었을 뿐이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임여 역시 마음에 격동이 이는지 한쪽 주먹으로 한쪽 손바닥을 딱 때리며 이를 부드득 갈고 소리쳤다.
『천전교주, 이 애새끼, 네가 감히……』
운환마(雲幻魔) 구양종(歐陽宗)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제길헐! 우리 낯짝이 아주 개똥이 됐군!』
삼살신(三殺神) 사백(查伯)도 한몫 끼었다.
『그래그래. 우린 들고 다닐 얼굴이 없게 됐어. 노대, 당신 그 어린 아가씨에게 대해 어찌 할 작정이야? 우린…… 억!』
화가 치민 풍륜은 욕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 처음으로 욕을 하려니 말문이 막혔다. 이리하여 그는 입을 쩍 벌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금은지가 말했다.
『노대, 말해 봐! 우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풍륜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어지러운 탓인지 아니면 머리의 회전이 중지해 버린 것인지 일시에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아니했다.
그는 반각이 지나서야 겨우 부르짖었다.
『천전교주 그 애새끼가 감히 운학을 죽이다니, 그놈이 운학을 침사곡에 떨어뜨렸으니 우리들도 그놈을 잡아다가 침사곡에 처박아 넣으면 되지!』
이렇게 쏘아 붙인 그는 고개를 돌려 요백삼을 바라보고
『만일 운학이 아직도 세상에 생존해 있다면 우린 조만간 그 양피지를 당신에게 돌려주지. 만약 정말 죽었다면…… 그건…… 흥!』
하자 임여가 뒤를 일었다.
『만약 운학이 죽었다면 우리 마교오웅의 이름을 걸고 무시무시한 피의 복수전을 벌일 것이다!』
임여(任厲)가 말할 때 그의 얼굴엔 오십 년 전의 인마(人魔)의 면목이 다시 나타났다. 마치 일 장으로 온 땅덩어리를 휘둘러 부술 듯한 형상이었다.
풍륜이 이 짤막한 회의의 종지부를 찍었다.
『가세!』
다섯 사람들은 누각의 창문 밖으로 몸으로 날려 삽시에 종적을 감추었다. 오직 중얼거리던 임여의 목소리만이 황학루의 언저리에 감돌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 망할 자식.』
반가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요원은 누각의 계단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때 바로 풍륜의 말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천전교주 그 애새끼가 감히 운학을 죽이다니, 그놈이 운학을 침사곡에 떨어뜨렸으니 우린 그놈을 잡아다가 역시 침사곡에 처박아 넣세!』
그 찰나!
요원은 자기의 혼에서 둥실 떠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간 눈앞의 모든 사람이 가물가물하니 흐려지고 그녀의 몸은 마치 바닷물이 까마득한 하늘로 내뿜듯 싸늘하게 식은 피가 머리로 몰려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죽었다……』
그 무서운 한 마디가 그녀의 핏기 잃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계단의 난간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만 난간 밑의 푸른 물로 풍덩 떨어지고 말았다.
장대가는 마치 일진의 선풍처럼 날아갔다. 난간을 잡고 물속을 들여다본다. 푸른 물만 감돌 뿐 요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목청껏 외쳤다.
『원아야!』
요백삼도 나는 듯 달려왔다. 그는 난간을 잡고 있는 장대가에게 크게 소리친다.
『장대가 왜 그러시오?』
장대가는 요백삼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양 목이 터져라 외친다.
『원아야, 원아야!』
요백삼은 모든 것을 명백히 깨달았다. 그는 요원이 운학의 죽은 소식을 듣고서 강물에 몸을 던진 것이라 생각했다.
요백삼은 장대가의 손을 잡고 흔들며 다급하게 묻는다.
『원아가…… 운학이 죽은 것을…… 들었어요?』
장대가는 대답도 않고 강물만 들여다본다. 그들 두 사람은 강심(江心)에 삐죽 솟아 있는 큰 바위를 보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몸은 물을 차는 제비인양 강물 위를 날아 그 바위 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바위에 내려서자 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대붕(大鵬)처럼 내려왔다. 정신이 번쩍 나서 바라보니 바로 사여안과 왕천이었다.
『앗 저기!』
누군가가 급히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보니까 약 십 장 저쪽의 바위에 기어오르고 있는 요원이 보이는 게 아닌가.
요백삼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원아야,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요원은 물에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힘없이 몸을 돌이킨다――
요백삼은 몸이 달아 두 눈에 불똥이 일어났다.
그가 몸을 날리려고 하자 장천행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안 돼요. 내가 대신 가리다……』
바로 그때 요원은 갑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소검(小劍)을 쑥 빼어 들었다. 그녀는 그 작은 칼로 스스로의 가슴을 겨누며 울부짖는다.
『오빠,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 오빠들이 나를 쫓아오면 난 먼저 오빠들에게 죽음을 보이겠어요!』
요백삼은 섬칫하니 섰다. 온 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요원이 또 소리쳤다.
『오빠들은 빨리 누각으로 돌아가요!』
『원아야, 그럼 넌?』
요원은 피식 힘없이 웃고 말했다.
『난 운학 오빠를 찾아 가겠어요……』
요백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운학은 벌써 죽었어, 원아야…… 넌……』
요원은 울며 말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운학 오빠는 죽지 않았어요. 그이는 죽진 않아요. 우리 누구도 그이가 죽는 것도 못 보지 않았어요? 어느 날이고 그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거예요!』
『원아야!』
『오빠! 오빠들은 빨리 누각 위로 돌아가요. 나를 괴롭히지 말아 줘요!』
그녀는 손에 잡은 작은 칼을 번쩍거리며 위협한다. 요백삼은 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장대가가 나직한 소리로 타이른다.
『우선 원아의 말대로 합시다. 아니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잖소.』
요백삼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누각으로 몸을 날렸다. 누각 밑에 내려섰을 때 요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또 들린다.
『오빠, 보(堡)로 돌아가세요. 제 일은 잊어버려요.』
말을 마친 그녀는 선뜻 몸을 날려 다시 저쪽에 솟아 있는 바위로 건너뛰고는, 또 몸을 날렸을 때는 마침 그 바위 옆을 지나가던 작은 돛배 위에 올라서고 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날려 건너편 언덕에 사뿐히 내려서더니 삽시간에 까마득한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시종 묵묵히 바라보던 장대가는 요백삼을 붙들고 엄숙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원아를 보니 죽는 것 같지는 않구려. 절대로 추격해선 안 됩니다. 아니면――』
요백삼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하였다.
이때야 비로소 남매지정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자기는 무쇠와 같은 일개 무인(武人)이지만――
사여안과 왕천들은 위로할 말이 없었다. 이런 일은 그들이 지닌 뛰어난 무공으로라도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
『원아, 원아――』
요백삼은 소리없이 부르짖고 있었다. 이때 그는 하늘에 신이 계시다면 신의 힘을 빌어서라도 사랑하는 누이동생을 보호하고 싶었다.
하늘에 뜬 저 한가로운 흰 구름. 난간 밖의 도도한 장강(長江)―― 이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오늘에야 비로소 무엇이 애정이며 무엇이 애정의 힘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